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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은 조선시대 당시 기준 | }}}}}}}}} |
조선의 별궁 창의궁 彰義宮 | ||
<colbgcolor=#c00d45> 위성사진으로 본 창의궁 터 현재 자리 | ||
위치 | 한성부 북부 순화방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19 일대[1]) | |
설립시기 | 1712년 | |
해체시기 | 190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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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 창의궁 배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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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시대의 별궁으로, 영조가 연잉군 시절 머물렀던 잠저(潛邸)였다. 이곳에서 정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화억옹주, 효장세자, 화순옹주가 태어났으며, 말년의 숙빈 최씨가 궁에서 나와 거처했던 곳이기도 하다.본래 이곳은 효종의 4녀 숙휘공주의 남편 인평위 정제현의 옛 집이었으나, 숙종이 매입해 4남인 연잉군(훗날의 영조)에게 하사했다. 숙종은 건물 한 채를 '양성헌(養性軒)'이라 이름 짓고, 아들을 향한 애정을 담아 시를 지어 현판으로 걸었다.[2]
1721년(경종 1년), 연잉군이 왕세제가 되면서 궁궐로 거처를 옮기자, 그의 사저는 동궁 소속의 궁가가 되었으며, 근처의 '창의문(彰義門)'[3]에서 따와 '창의궁(彰義宮)'으로 개칭되었다.
영조는 즉위 후, 창의궁의 정당(正堂)에 '건구고궁(乾九古宮)'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건구공궁 소지(小識)》에 따르면, '건구(乾九)'는 《주역》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승천하지 않고 숨어 있는 용, 즉 잠룡을 의미한다. 이는 왕이 되기 전 자신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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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 '건구고궁(乾九古宮)' 현판[4] |
영조는 어머니와 옛 집을 쉽게 잊지 못했다. 육상궁을 참배한 후, 신하들의 만류에도 종종 창의궁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1754년(영조 30년), 일찍 세상을 떠난 아들 효장세자와 손자 의소세손의 사당을 이곳에 두기도 했다.
정조 또한 사도세자의 초상화를 창의궁에 봉안하고, 정기적으로 참배하며 때때로 머물면서 전교를 내렸다. 이후, 순조 때는 요절한 효명세자의 사당도 추가로 세워졌다.
창의궁은 고종 때까지 유지되었으나, 1908년(융희 2년),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 이후, 그 자리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사택이 들어섰으며, 8.15 광복 이후 적산(敵産)으로 분류된 뒤 재분할되어 현재는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다.
2. 기타
- 창의궁 터 부근 통의동에는 백송이 있었다. 높이 16m에 달했으며, 한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백송으로 여겨졌다. 나이를 600여 년으로 추정하는 주장도 있었으나, 1994년 분석 결과 1690년경에 심어진 것으로 밝혀졌다.설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동안 거의 자라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1990년 7월 17일, 집중호우와 강한 바람으로 쓰러졌다. 당시 청와대와 가까운 곳에서 나무가 죽은 것을 두고 불길한 징조라는 소문이 돌자, 대한민국 대통령 노태우는 백송을 살릴 것을 지시했다. 이에 서울특별시는 ‘백송회생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나무를 쓰러진 상태에서라도 보호하기로 했다. 경찰관을 3교대로 배치해 감시했으며, 이듬해 봄, 새싹이 돋는 등 회생의 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누군가 나무에 제초제를 뿌리는 등 훼손하면서 더는 회생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결국,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취임 후, 백송은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되었고, 같은 해 5월 13일, 잘려나갔다. 현재는 밑동만 남아 있다.
<colbgcolor=#c00d45> 창의궁 터 근처의 백송 |
- 창의궁 남쪽, 적선방에는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그의 남편 월성위 김한신이 거주했던 월성위궁이 있었다. 월성위궁이 창의궁과 동일한 곳이라는 설이 있으나, 창의궁이 왕실 사당으로 계속 기능했다는 관련 기록을 볼 때, 잘못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김한신 일가는 창의궁이 곧 월성위궁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다를 가능성이 높다. 창의궁은 순화방, 월성위궁은 적선방에 위치해 서로 행정구역이 달랐다. 김한신은 추사 김정희의 증조할아버지이기도 하다.[6] 이로 인해, 책이나 답사 등에서 통의동과 창의궁을 설명할 때 김정희가 거의 항상 언급된다. 현재, 적선방에 있었던 월성위궁의 정확한 위치는 광화문역 공사로 인해 유구가 완전히 교란되어 확인이 불가능하다.
<colbgcolor=#c00d45> 창의궁 터 알림표지석 |
- 더 많은 다른 자료는 이 곳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