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22 03:54:08

행궁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word-break: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한성부
경모궁 계동궁 남별궁 누동궁 도정궁
명례궁 사동궁 선희궁 수진궁 순화궁
안동별궁 어의궁 연희궁 영수궁 영희전
용동궁 운현궁 이현궁 인경궁 인덕궁
자수궁 죽동궁 창성궁 창의궁 칠궁
태화궁
경기도
강화행궁 개성행궁 경덕궁 남한산성 행궁 낙생행궁
낙천이궁 노량행궁 목청전 수원행궁 수창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안양행궁 양주행궁 용흥궁
월미행궁 이천행궁 이태조 행궁 진위행궁 통진행궁
파주행궁 풍덕행궁 풍양궁 포천이궁 화성행궁
충청도
노은리 행궁 목천행궁 보은행궁 신도안 대궐 온양행궁
전의행궁 직산행궁 초정행궁 천안행궁
전라도
격포행궁 경기전 무풍 명례궁 전주행궁 보길도 행궁
경상도
집경전
평안도
영변행궁 영숭전 영유행궁 의주행궁 평양행궁
풍경궁
황해도
배천행궁 평산행궁 해주행궁
강원도
고성행궁 분수령 행궁 상원사 행궁 춘천이궁
함경도
영흥본궁 함흥본궁
행정구역은 조선시대 당시 기준}}}}}}}}}

1. 개요2. 고려 이전의 행궁
2.1. 신라의 행궁2.2. 후고구려의 행궁2.3. 후백제의 행궁
3. 고려시대의 행궁
3.1. 개성지역의 행궁3.2. 개성지역 이외의 행궁
4. 조선시대 행궁
4.1. 경기지역의 행궁4.2. 경기지역 밖의 행궁

1. 개요

행궁() 혹은 이궁()은 군주왕족이 본궁 밖에서 임시로 숙박 혹은 경숙(經宿)하는 건축물을 말한다. 왕이 도성 내외를 막론하고 숙소로 한번 결정하면 행궁이라고 불렸다. 임금이 어떤 곳에 행(行)하면 자연히 그곳이 행궁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한번 행궁이 되면 이후에도 계속해서 궁궐과 같이 대우하였다.

행궁의 목적은 크게 전란대비용휴양용(초수행궁), 능행용으로 나뉘지만, 이외에도 유사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보호, 봉안하기 위해 만든 전주행궁 같은 특수한 행궁이나 이태조 행궁 같은 저택형 행궁도 있다.

왕이 지방에 행차하는 순수는 고대부터 있었고[1] 왕이 아무 데서나 아무렇게 숙박할 리는 없으니 행궁 제도도 삼국시대부터 있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지만, 자세한 기록이 부족해 구체적인 목록이나 관리 실태를 알기는 힘들다. 그러다 강력한 중앙집권화가 이뤄졌던 고려 시대조선 시대에 더욱 제도화되어 수많은 행궁이 건립되었다. 특히 고려는 대규모 행궁을 건립하여 사용하였는데, 북쪽에 위치한 서경(평양)의 대화궁과 남쪽 동경(경주)의 조유궁[2]까지 전국 곳곳에 행궁을 건립하였다.

대부분 도성을 벗어나 원거리를 행행하는 능행(陵幸, 왕 또는 왕비의 묘인 에 가는 것), 원행(園幸, 세자나 세자빈의 묘인 원에 가는 것), 강무(講武, 군사훈련 성격의 사냥에 가는 것), 온행(溫幸) 시에 임시로 숙소를 만들거나 관사를 이용하면서 행궁이라고 호칭하였다. 왕이 행궁을 사용하지 않을 때는 고위 관원이나 지역 관장도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따라서 행궁은 왕의 임시 처소로서 영구적인 궁의 역할은 하지 않았다. 실제로 왕이 행행한 지역의 행정 명칭을 붙여 지칭하는 곳이 많았다. 그러나 왕이 임시로 머문 이후 정식으로 행궁이 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영변행궁영유행궁, 의주행궁이다.

조선 후기에는 외침을 당해 왕이 임시로 피신하면서 이용한 곳이나 미리 왕실의 보장처에 행궁을 마련하면서 이름을 붙인 경우도 있다. 그러한 목적에서 만들어진것이 강화행궁남한산성 행궁, 북한산성 행궁으로 이들 행궁은 산성 내부에 위치하여 외부의 적으로부터 을 보호하고자 세운 임금 전용 행궁이었다.

왕이 별 이유 없이 지방으로 이동하는 데는 막대한 예산이 소모되었으므로 조선 시대부터는 예산 낭비를 막는다는 의미로 지방 순수가 줄어들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임금이 경기도 안쪽이나 온양온천한양에서 가까운 지방까지만 주로 돌아다니면서 자주 쓰이지도 않는 행궁의 규모도 점차 줄어들었고, 임진왜란 당시 지방에 위치한 별궁과 행궁들도 대부분 불타면서 사실상 대규모 행궁과 이궁시대는 끝을 맺는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부터는 남한산성 행궁강화행궁, 화성행궁과 같이 중대규모 행궁이 다시 중건되거나 건립되기도 하였다. 행궁제도의 전성기인 고려 시대 이후 쇠퇴하던 행궁제도는 광무 6년(1902)에 지어진 대한제국의 풍경궁을 끝으로 그 찬란했던 막을 내렸다. 일제강점기에는 전국에 지어진 행궁들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소실되고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있던 안동별궁과 사동궁등도 이승만 정권과 군사정권에서 개발을 명목으로 강탈 후 철거했다. 현재 원형을 유지하는 행궁은 함흥본궁, 화성행궁, 남한산성 행궁인데 화성행궁과 남한산성 행궁은 완전히 소실된 것을 복원한 것이고 함흥본궁은 한국전쟁으로 일부 파괴된 것을 복원하였지만 모래가 아닌 잔디를 까는 등 잘못된 부분이 있다. 운현궁, 춘천이궁등 소수의 전각만 보존된 경우도 있다.

2. 고려 이전의 행궁

고대에도 행궁은 많이 지어졌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고려-조선시대 각종 전란으로 인한 소실 때문에 실물이나 운영에 대한 기록은 거의 사라졌다. 현재는 고대의 행궁은 대부분 찾아보기 힘들다.

2.1. 신라의 행궁

2.2. 후고구려의 행궁

2.3. 후백제의 행궁

3. 고려시대의 행궁

고려의 경우는 행궁이지만, 이궁과 동일한 지위를 누리었고, 일단 행궁의 규모 자체가 기본 중대규모이다. 거기다가 고려의 궁궐을 쌓는 방식인, 계단식 건축을 하였으니, 실제로 느끼는 규모는 조선시대 행궁과는 확연히 달랐을 것이다.

3.1. 개성지역의 행궁

3.2. 개성지역 이외의 행궁

4. 조선시대 행궁

4.1. 경기지역의 행궁

4.2. 경기지역 밖의 행궁



[1] 고대는 친정의 의무가 강했고 삼국시대엔 전쟁이 꾸준히 잦았으며, 행정 시스템이 더 부실했기 때문에 왕이 전국 여기저기 직접 시찰한 일은 고려, 조선 때보다 오히려 고대에 훨씬 더 많은 편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서울 북한산 등에 있던 신라 진흥왕 순수비.[2] 다만 조유궁은 현종 때 경주에 있는 걸 헐었다는 기록에 나오기 때문에 고려왕조가 지은 행궁이 아니라 고려 초기까지 남아있던 신라 궁궐의 일부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