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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4-18 04:29:14

장당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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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장당경(藏唐京)
이칭,별칭 당장경(唐藏京),장장평(庄庄坪)
시대 고조선
유형 도읍지
위치 황해도 신천군(信川郡)(?)
중국 선양시(?)
1. 개요2. 역사

1. 개요

장당경(藏唐京)은 고조선의 도읍지로 알려진 곳이다. '당장경'(唐藏京)이라고도 한다.

2. 역사

삼국유사》 <기이>(紀異) -고조선조-에서는 《고기》(古記)를 인용해
단군이 요임금 즉위 50년이 된 해인 경인년에 평양성을 도읍으로 정하고 조선이라 일컬었다. 그후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겨서 1,500년을 다스리다가, 주무왕(周武王)이 즉위하고 기자(箕子)를 조선후에 봉하자 도읍을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
고 했다.[1] 《삼국유사》에는 '장당경'이라고 했으나 《고려사》, 《세종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에는 '당장경'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대로라면 고조선의 도읍지는 평양성→아사달→장당경 순으로 옮겨졌으므로 장당경은 세 번째 도읍지가 된다.

그 위치에 대해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에서는 《고려사》의 '장장평'이 단군이 도읍했던 '당장경'의 잘못 전해진 지명이라 하여 문화현[2]의 동쪽에 있다고 했으며, 중국의 대릉하 유역이나 유주[3] 일대라고 하는 견해도 있다.

고고학계의 통설을 보면 고조선의 초기 발원지는 요서의 차오양시 일대고(십이대영자 문화), 이곳에서 발원한 집단이 점차적으로 요동 반도와 한반도 북부 일대로 지속적으로 세력을 확대하며 영역을 넓히고, 그 중 정주민적 성격이 강한 집단은 중심지를 선양 일대로 옮기고(정가와자 문화) 발원지인 요서는 유목민적 성격이 강한 집단(남동구 유형)이 차지하며 남았지만 요동 고조선 집단과 요서 고조선 집단이 여전히 관계를 지속하여서 이중 통치 체계를 형성한것으로 보인다. 즉, 단군신화 후반부에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이 공존하는 묘사가 나오는것은 실제로는 이중 통치체계를 반영한것으로 이것이 기자동래설과 섞이면서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으로 전승이 되었다는 가설을 세워볼수있다. 이후 기원전 3세기경 연나라의 침공으로 갑자기 이 문화들은 평양 일대로 옮겨가는데, 이것은 사서에 기록된 고조선-연 전쟁에 대한 언급과 매우 일치한다. 고조선의 원래 수도였을 선양 일대는 연나라의 요동군 후성현(候城縣)으로 지정된다. 후가 일반적인 군주의 칭호였으니 후성현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선양 일대가 고조선의 수도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기록된 고조선의 도읍 이름 중 어떤 것이 원래 후성현의 이름일지는 짐작할만한 근거가 없다.
[1] 기자조선이 실재했다고 가정할 경우, 기존에는 기자가 오면서 단군조선이 끝나는 것으로 이해됐지만, 이 기사를 보면 기자가 온 후에도 단군이 따로 도읍을 옮겨간 것이 되므로 기자와 단군이 양립했을 수도 있다. 남동구 유형과 정가와자 유형이 서로 한나라를 이루면서 관계를 유지했다는 설에 의하면 이는 이중통치체계를 반영한것이 된다.[2]황해도 신천군. 구 문화현에 속했던 산천면 대덕리에 장당경의 후보지로 꼽히는 '장재이벌터'라는 유적이 있다.[3] 허베이성 북부 및 랴오닝성 서부 일대를 가리키던 고대 중국의 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