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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bordercolor=#fff><tablebgcolor=#fff> 파일:문화부 심볼.svg이달의 문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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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문화인물(1998-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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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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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의 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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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일연 표준영정.jpg
<colbgcolor=#d6d6d6,#2D2F34> 본명 전견명(全見明) [1]
회연(晦然), 일연(一然)
목암(睦庵)[2]
법명 일연(一然)
시호 보각(普覺)
출생 1206년 7월 18일[3]
고려 경상도 장산군
(現 경상북도 경산시)
사망 1289년 7월 26일[4] (향년 83세)
고려 경상도 군위군 인각사
(現 대구광역시 군위군 삼국유사면 화북리 612 인각사)

1. 개요2. 생애3. 여담

[clearfix]

1. 개요

고려승려. 속명은 전견명(全見明). 자(字)는 회연(晦然), 일연(一然)인데, 일연을 법명으로 사용했다. 호는 목암(睦庵). 삼국시대 역사서인 삼국유사(三國遺事)를 편찬했다.

오늘날의 경상북도 경산시인 압량군 출생으로 원효 대사와 동향이다. 일연 본인도 삼국유사에서 원효에 대해 '원효의 살아온 내력과 학문이며 업적은 모두 당나라 승전과 행장에 실렸으니 여기서 언급할 필요는 없다.'고 썼을 정도. 대신 '이 나라에서 전하는 한두 가지 특이한 일을 적어 둔다.'고 하였다.[5]

2. 생애

1206년에 경산에서 태어났다. 1214년(9세)에 전라도 해양(海陽)[6] 무량사(無量寺)에서 대웅 밑에서 학문을 닦았다. 1219년(14세) 설악산 진전사[7]에서 출가해 승려가 되었다. 계속 공부하다가 1227년(22세) 승과 시험에 급제해서 22년 동안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에 있는 비슬산 대견사에서 초임 주지를 지냈다. 1237년(32세) 삼중대사, 1246년(41세) 선사가 되었는데 이 시기는 몽골 제국이 본격적으로 고려침략하기 시작하던 시절이었다.

1259년(54세) 대선사가 되었고 1261년(56세) 원종의 부름을 받고 강화군 선원사의 주지가 되어 보조국사 지눌의 가르침을 이어받았다. 1264년(59세)에 경상북도 포항시에 있는 오어사로 옮겨 후학을 가르쳤다.

1268년(63세) 운해사에서 대덕 1백여 명을 모아 대장경 낙성회를 조직해 맹주가 되었다. 1277년(72세) 운문사 주지가 되었으며 당시 경주에 와 있던 충렬왕의 부름을 받아 충렬왕을 1년 가까이 모시면서 충렬왕에게 법을 강론했다.

1283년(78세) 충렬왕을 따라 개성으로 돌아가 국존으로 추대되고 원경충조의 호를 받았다. 그러나 노모를 모신다는 이유로 고향에 가기를 청해 반 년 동안 살았지만 그해에 어머니는 아흔여섯 살로 숨을 거두었다.

1284년(79세)에 경상도 군위군[8]의 인각사를 중건하고 궁궐에서 구산문도회를 열었다. 1289년 군위군 인각사에서 세수 84세로 사망했다. 이후 나라에서 보각국존(普覺國尊)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생전에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군위 인각사에서 삼국유사를 집필하여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삼국유사는 고대 한국 신화, 설화, 향가를 집대성한 책으로 현대에서도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삼국사기와 더불어 귀중한 자료이다. 대표작인 삼국유사 이외에도 조파도 2권, 대장수지록 3권, 제승법수 7권, 조정사원 30권, 선문염송사원 30권, 어록 2권, 게송잡저 3권 등 많은 불교 저서를 남겼다.

3. 여담


[1] 보각국사비 내용에 속성(俗姓)이 김씨로 기록되어 알려졌지만, 비문의 글씨체가 왕희치 서체로 쓰여져 있어서 전씨로 판독되었다.#[2] 무극(無極)이 호라고 알려졌으나, 일연의 제자의 이름이다.[3] 음력 6월 11일.[4] 음력 7월 8일.[5] 사실 삼국유사는 '이러이러한 책에 자세히 쓰여 있으니 여기서는 생략하는데 더 알고 싶으면 책을 읽어보라.'는 식으로 넘어가는 서술이 종종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가락국기를 인용해 수로왕에 대해선 자세히 적었는데 그 다음 왕들에 대해선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를 시전하셨다. 문제는 앞에 쓴 원효의 행적이야 다행히 지금까지 다른 기록에 남았지만, 어떤 경우는 자세하게 쓰여 있다고 추천한 책이 지금은 소실되어 결국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게 문제. 물론 일연이라고 자기가 보고 참조한 책들이 하나도 후대에 전해지지 못할 줄은 예상도 못 했을 테니 일연의 책임은 아니다.[6] 현재 광주광역시 인근[7] 도의선사가 당나라에서 선불교를 배우고 돌아와 구산선문 중 가지산파를 개창한 곳.[8] 현재 대구광역시 군위군[9] 물론 논란이 있는 표현.[10] 다만 삼국유사가 실제로 삼국사기보다 민족주의적이라 보기는 힘들다. 삼국사기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