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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2-24 20:56:44

혼원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의 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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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송광사 16국사
제 4세 진명국사(眞明國師)
혼원
混元
파일:혼원.jpg
출생 1191년
(명종 21년)
고려 서해도 수안
(現 황해북도 수안군)
사망 1271년
(원종 12년)
고려 와룡사
법명 혼원(混元)
종교 불교
시호 진명국사(眞明國師)
봉호 충경(沖鏡)
탑호 보광(寶光)
부모 부 이사덕(李師德)
모 김열보(金閱甫)의 딸
성씨 이(李)

1. 개요2. 생애3. 사후

1. 개요

고려 후기의 선승. 수선사 4세 국사이며 왕사에 책봉된 고승이다.
2세 국사 혜심 이후 수선사 계통 법맥을 유지한 대표 승려 중 하나로 꼽히며 최씨 무신정권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불교계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2. 생애

황해도 수안현의 토성(土姓)[1]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정8품 경시서승(京市署丞)을 지낸 향리 출신 관리였던 부친과 중앙 관료 가문 출신 모친[2] 사이에서 성장한 덕분에 일찍부터 학문과 교양을 두루 접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함이 두드러졌고, 불교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13세때 외삼촌 종헌(宗軒) 선사를 따라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승려의 길에 들어섰다.

승과 상상과(上上科)에 급제할 정도로 학문적 재능이 뛰어났던 그는 쌍봉사(雙峰寺) 청우(靑牛)의 문하에서 수행하며 선 수행의 기초를 다졌고, 이후 수선사 2세 국사였던 혜심에게 나아가 법맥을 이었으며, 3세 국사 몽여의 가르침도 틈틈히 받아 선종 교학과 수행 양면에서 깊이를 더했는데, 이 시기의 수학 과정은 훗날 그가 수선사 법통을 계승하는 결정적 토대가 되었다.

그의 명성은 무신정권 실권자였던 최우에게까지 알려졌고, 최우는 그를 삼중대사(三重大師)에 천거하고 정혜사 주지로 임명하려 했으나 혼원은 이를 사양하였다. 그러나 1245년 선원사가 창건되자 이번엔 주맹으로 초청받아 결국 이듬해 입사했고, 곧 대선사에 오르며 교단 내에서 확고한 위상을 확보하게 된다.

이후 1252년 스승 몽여가 입적하자 법맥의 정통 계승자로 인정받아 정식으로 수선사 4세 국사가 되었으나, 4년뒤인 1256년 자신의 제자였던 천영(天英)에게 국사 자리를 내주고 돌연 은거, 이후 왕명으로 다시 복귀하여 단속사에 머물렀다가 자운사로 옮겼으며, 1259년에는 왕사로 책봉되면서 명실상부한 국가적 고승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왕사 책봉은 단순한 종교적 명예가 아니라 왕권과 불교 교단을 연결하는 상징적 지위였기에, 이는 곧 그의 사상적 권위와 정치적 영향력을 동시에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속세에는 관심이 없었는지 원종 즉위 이후 그는 와룡사를 하산소로 삼아 세속 권력과 거리를 둔 채 물러나 수선사로 돌아와 12년 동안 설법을 하며 후학들을 지도, 양생하는게 힘썼고 전각을 수리하며 남은 세월을 보내다 1271년(원종 12년) 10일 새벽, 왕에게 올리는 글을 쓴 후 가사를 걸치고 선상(禪床)에 걸터앉아 세수 80세, 법랍 68세로 입적하였다.

3. 사후

'진명’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국사로 추증했으며, 탑호를 보광이라 하여 공덕을 기렸다.
[1] 대대로 지방에 뿌리를 내려온 씨족 성씨[2] 시각문지후(試閣門祗候), 전주목판관, 합문기후(閤門祗候) 등을 지낸 수주김씨 문신 김열보(金閱甫)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