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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 | <colbgcolor=#fff,#1f2023>질지왕(銍知王) |
별호 | 김질왕(金銍王) |
시호(?) | 장왕(莊王)(?)[1] |
성씨 | 김(金) |
휘 | 질(銍) / 질지(銍知) |
왕후 | 방원(邦媛) |
왕자 | 김겸지(金鉗知) |
부왕 | 취희왕(吹希王) |
모후 | 인덕(仁德) |
생몰연도 | ? ~ 491년 10월 4일 |
재위기간 | 451년 2월 3일 ~ 491년 10월 4일 (40년) |
1. 개요
금관가야의 제8대 군주. 김질(金銍)이라고도 불리운다. 김해 김씨 족보에는 장왕(莊王)으로 표기되어 있다.2. 행적
재위 2년째인 452년 수로왕과 허황옥을 기리기 위해 김수로와 허황옥이 처음 만난 자리에 절을 세우고 왕후사(王后寺)라고 지었으며 밭 10결을 바쳐 건설 비용에 사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수로왕(首露王)의 8대손 김질왕(金銍王)은 정치에 부지런하고 또 참된 일을 매우 숭상하여 시조모(始祖母) 허황후(許皇后)를 위해서 그의 명복(冥福)을 빌고자 했다. 이에 원가(元嘉) 29년 임진(壬辰)[2]에 수로왕과 허황후가 혼인하던 곳에 절을 세워 절 이름을 왕후사(王后寺)라 하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절 근처에 있는 평전(平田) 10결(結)을 측량해서 삼보(三寶)를 공양하는 비용으로 쓰게 했다.
이 절이 생긴 지 500년 후에 장유사(長遊寺)를 세웠는데, 이 절에 바친 밭이 도합 300결(結)이나 되었다. 이에 장유사의 삼강(三綱)이, 왕후사(王后寺)가 장유사의 밭 동남쪽 지역 안에 있다고 해서 왕후사를 폐해서 장사(莊舍)를 만들어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 겨울에 저장하는 장소와 말을 기르고 소를 치는 마구간으로 만들었으니 슬픈 일이다.
ㅡ 《삼국유사》 가락국기
이 절이 생긴 지 500년 후에 장유사(長遊寺)를 세웠는데, 이 절에 바친 밭이 도합 300결(結)이나 되었다. 이에 장유사의 삼강(三綱)이, 왕후사(王后寺)가 장유사의 밭 동남쪽 지역 안에 있다고 해서 왕후사를 폐해서 장사(莊舍)를 만들어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 겨울에 저장하는 장소와 말을 기르고 소를 치는 마구간으로 만들었으니 슬픈 일이다.
ㅡ 《삼국유사》 가락국기
사실 인도에서 왔다는 허황옥은 후대에 어느 정도 신격화 작업이 가미된 것으로 보는 시각도 많은데 불교가 가야에 들어오고 이를 수용했던 시기가 바로 이 시기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전까지는 불교에 관한 기록이 없었는데 이때 절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처음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는 《삼국유사》 권3 제4 탑상 - 금관성의 파사석탑 편을 봐도 알 수 있다.
(중략) 수로왕이 공주를 맞아들여 함께 나라를 다스린 것은 150여년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해동에는 아직 절을 창건하고 불법을 받아들이는 일이 없었다. 불교가 아직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지방 사람들이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기》[3]에도 절을 창건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다가 제 8대 질지왕 2년 임진에 이르러 그 땅에 절을 세웠고 왕후사를 창건해 지금까지 복을 빌고 있으며(후략)
나라를 안정화하기 위해 허씨 일가와 손을 잡고 불교를 수용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마 취희왕 때 혼란기가 있었고 이겨내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한듯 보인다.
왕후는 사간 김상의 딸인 김방원이며 자식은 겸지왕 하나만 알려져 있다.
3. 기록
3.1. 《삼국유사》 가락국기
김질왕(金銍王)이라고도 한다. 원가 28년 즉위했는데 원가 29년 세조와 허황옥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왕후가 처음 세조와 만나 혼인한 곳에 절을 짓고 왕후사라 했으며 밭 10결을 바쳐 비용에 충당하게 했다. 42년 동안 다스리다가 영명 10년 임신에 붕했다. 왕비는 김상(金相) 사간의 딸 김방원(金邦媛)이었는데 왕자 겸지를 낳았다.
3.2. 《삼국유사》 왕력
제8대 질지왕(銍知王)
김질(金銍)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취희왕이다. 어머니는 인덕(仁德)이다. 신묘년(451년)에 즉위하여 36년 동안 다스렸다.
第八 銍知王
一云金銍 父吹希 母仁德 辛卯立 治三十六年
김질(金銍)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취희왕이다. 어머니는 인덕(仁德)이다. 신묘년(451년)에 즉위하여 36년 동안 다스렸다.
第八 銍知王
一云金銍 父吹希 母仁德 辛卯立 治三十六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