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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15 12:10:55

편두

1. 개요2. 설명
2.1. 만드는 방법
3. 한국에서
3.1. 삼한 & 신라3.2. 고려
4. 관련문서

파일:T4QwXu7.jpg
파일:YRT1t3Y.jpg
김해 예안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변형 두개골 치누크 족의 편두 풍습[1]
영어 Elongated head[2] / Artificial cranial deformation[3]

1. 개요

褊頭
원시사회에서 널리 행하여졌던 두개변형(頭蓋變形)의 일종.

2. 설명

어린이머리를 천이나 노끈으로 감든지, 또는 작은 목판 같은 것으로 압축하여 두개골을 변형시키는 풍습을 말한다. 이러한 풍습은 아메리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넓은 지역에서 행하여졌던 것인데, 한국에서도 고대까지 행해졌으며 프랑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북아프리카 등 일부 지역에서는 20세기 초까지 행하여졌다. 이 풍습으로 가장 잘 알려진 곳은 마야 문명과 고대 이집트이며 한반도에서는 가야, 신라가 유명하다.

사실 오늘날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미용이나 권위, 민족적 동질감 등을 나타내기 위해 발치나 신체 일부의 절단, 문신 같은 온갖 신체 변형 풍습이 남아 있는데, 편두는 이런 풍습 중에서 가장 극단적인 변형의 하나로 볼 수 있다. 현대인들이 귀를 뚫거나 코를 뚫거나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런 신체 변형의 일종인 셈.

또한 편두까진 아니더라도 현대 한국인들도 아기를 낳으면 '두상을 예쁘게 만든다'며 반듯이 눕혀 재운다거나, 엎혀 재운다거나 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편두는 이런 것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형태라 볼 수 있다.

그 밖의 가설로는,

2.1. 만드는 방법

아직 뼈가 무른 갓난아기 때 납작한 돌이나 판자 등을 이마에 대고 끈으로 묶어 키우면 된다. 다만, 이 형태를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걸리는지, 신생아 건강이나 두뇌 발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고대인들이 그렇게 해도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아 인골을 남긴 걸 보면, 그렇게 한다고 무조건 장애가 생기거나 잘못되진 않는다고 추측까진 할 수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떤 부작용이 발생할지 모르는데 현대에 와서 실험을 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출산할때 아기의 머리가 눌려서 편두처럼 나오기도 한다. 서양에서는 콘 헤드(Cone Head)라고 부른다. 원인은 사람의 두개골은 여러개의 뼈로 구성됐고, 아기일때는 이 뼈가 무르기까지 해서 변형이 매우 잘 된다. 아마도 출산할때 유리하게 진화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걱정할 필요가 없는게 한달에서 두달정도 지나면 다시 동그란 모습으로 돌아간다.

3. 한국에서

3.1. 삼한 & 신라


고대 한국의 진한 지방에서 행해졌다고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되어 있다.
兒生, 便以石厭 其頭, 欲其褊. 今辰韓人皆褊頭
어린 아이가 출생하면 곧 돌로 그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만들려 하기 때문에, 지금 진한 사람의 머리는 모두 납작하다.[9]
실제로 김해시 예안리 85호 고분에서 편두 인골이 출토되었기 때문에 편두의 존재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단, 이곳은 진한이 아닌 변한 지역이고,[10] 편두가 확인된 유골들은 모두 여성들이라 한다. 반면 옆동네 금관가야 왕릉급 고분군인 대성동 고분군의 유골들을 조사해 본 결과[11] 편두의 흔적은 하나도 없어서 일단 변한지방의 보편적 풍습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후 경상북도 경산시임당동 고분군에서 편두한 두개골이 발견되어, 삼국지 기록대로 진한에서 편두를 실제로 한 증거가 확인되었다. 현재 임당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인골은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대부분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경주에서 출토되어 대한민국의 국보 91호로 지정된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의 주인공이 편두를 한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 쓰고 있는 관모 바닥이 보통 머리 모양을 가진 사람은 쓸 수 없을 정도로 폭이 좁고, 두개골의 폭이 너무 좁고 이마가 뒤로 넘어가 있다는 것. 다만 이 토기가 편두를 묘사한 것인지 확실한 것은 아니다.

한편 권오영 교수는 고구려 고분 벽화 중 개마총이란 고분 벽화에 금동관을 쓴 사람이 편두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만약 편두가 맞다면 고구려에서도 편두 풍습이 있었을 수도 있다.#

초기 삼국시대에서 수백년이 지난 한참 후대의 일인 통일신라기 인물인 최치원이 지은 지증대사비 비문에서도 偏頭居寐錦至尊(편두거매금지존)이라는 문장이 있다. '매금'이란 신라 왕의 호칭인 마립간의 다른 한자표기이므로 이 문장의 뜻은 편두이신 신라왕지존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게다가 지금까지 출토된 신라 금관들은 하나 같이 지름이 작아 성인 남성이 실제로 썼다고 보기 어려운데, 신라 왕들이 편두를 했다고 가정하면 이치가 맞아 떨어지게 된다.

다만, 이 문장은 단순히 우리편 대빵 신라임금님 킹왕짱 정도로도 해석할 수 있다. 사실, 삼국지 기사의 '편'자는 (좁을 편)이고 지증대사비의 '편'자는 (치우칠 편)이다. 또, 삼국지의 기사는 편두에 대해서 빼도 박도 못하게 그 구체적인 내용을 적고 있지만, 지증대사비의 기사는 아무 설명없이 여기서만 '편두'라는 낱말을 쓸 뿐, 이게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선 아무 설명이 없다.

그리고 신라 왕관에 대해선, 지름이고 뭐고 간에 그 쓰는 법을 정확히 모르고 있다. 그러니까 다른 두건이나 상투 같은 것을 하고 그 위에 왕관을 썼다면, 왕관 지름이 머리 지름보다 작은 것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결정적으로 최치원 시기의 신라는 당나라와 교류가 활발했는데, 당나라의 기록에선 편두에 대해서 찾아볼 수가 없다. 당장 태종 무열왕부터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그 기사가 전해지는데 편두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결국, 원삼국시대와 달리, 통일 이후 하대 신라, 특히 왕족에게 편두 풍속이 행해졌는지에 대해선 아직까지 확실하게 입증할 수 없다.

어쨌든 이와 같은 사실에 근거해서 삼한의 편두가 고대 신라의 샤머니즘이나 천손 강림 신화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긴 하다. 삼국유사에서 박혁거세의 왕비 알영이 입 부분이 닭처럼 생겼다[12]거나 김알지가 닭이 우는 숲에 있던 알에서 태어났거나 하는 것들이 바로 그것. 왜냐면, 편두를 하면 사람의 얼굴 형태가 주둥이 구강부가 튀어나오고 이마가 들어가기 때문에 의 두상과 흡사한데, 초기 신라의 각종 과 관련된 설화와 그 형태성이 유사하지 않냐는 것. 하지만 역시 명확한 증거가 없어 추론에 그칠 뿐이다.

3.2. 고려

한편, 송사[13]에선 고려의 특이한 풍습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首無枕骨, 背扁側.
(고려)사람들의 머리는 침골枕骨이 없고 등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사람이 침골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 그 때문에 이 기사가 편두의 일종을 묘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다만, 이 경우에는 앞통수를 누르는 형태의 편두가 아니라 뒤통수를 평평하게 하는 형태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헤어스타일이나 패션 같은 것을 과장되게 표현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사실 "침골이 없다"는 표현은 고개를 갸우뚱하는 태도를 비유적으로 나타낼 때 흔하게 쓰이는 한문 숙어이기 때문. 영화 관상(영화)에서도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 다니는 한명회를 침골이 없다고 표현하고 있다.

혹자는 좌식 문화로 인한 척추측만증으로 인해 등이 한쪽으로 휘고, 고개가 삐딱해진 것일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문제는 온돌이 보편화된 조선과 달리 고려 때는 집 안의 일부분만 온돌마루를 두고 평소에는 의자침대를 사용하는 입식 생활을 했으며, 서긍이 1달간 고려에 체류하면서 만난 고려인들 대다수는 수도인 개경에 거주하는 귀족층 중심이었다. 좌식생활로 인한 것이라면 입식생활을 주로 하는 귀족층과 좌식생활을 주로 하는 평민층이 차이가 나야 할 텐데 그런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4. 관련문서



[1] 치누크족은 그림처럼 머리를 누르는 방식으로 편두를 만들었다. 치누크족 사회에서 편두를 하지 않는 것은 노예밖에 없었다.[2] 직역하면 '길쭉한 머리'라는 의미이며, 두개골을 지칭할 때는 'Elongated skull'이라 칭한다.[3] 좀 더 넓은 의미로, 정확히는 '인공적인 두개 변형'을 의미하며, 학술적인 명칭으로는 이 표현이 많이 쓰이는 것으로 확인된다.[4] 편두는 기본적으로 두개골이 완전히 붙지 않은 영유아 시기에만 가능하며, 성인은 편두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날 때부터 세습되는 계급을 표현하기 위해 어릴 때 편두를 함으로써 외형 자체만으로도 신분을 구분할 수 있게 했다고 추정하고 있다.[5] 대표적인 예가 치누크족이다. 치누크족은 외부인과 노예에게만 편두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편두를 안 한 외부인은 백인이건 인디언이건 전부 하층 계급 보듯이 했다. 루이스와 클라크 탐험대가 치누칸 마을에 왔을 때 치누크족 사람들이 그들을 경멸의 눈으로 바라봤다고 한다.[6] 반면 중앙아시아에서는 노예에게 편두를 시켰다. 김해 예안리의 토광묘 유골에는 편두가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고된 노동으로 척추가 눌려있는 것으로 보아 노예로 추정된다. 일본 구마모토에는 6구의 유골중 한 구의 여성이 편두여서 김해에 살던 여성을 데려와 노예로 삼았는지 아니면 무당이였는지 확실치 않다.[7] 한편 로마 제국 말기 무렵 유럽을 침공한 유목민족인 훈족도 편두를 했는데, 독일의 ZTV에서는 이를 가지고 훈족이 신라에서 왔다는 가설을 주장하기도 했다.[8] 농담같지만 초고대문명설이 유명한 서양 쪽에선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이 꽤 많다. 인디아나 존스 4편이 괜히 그러는게 아니다.[9] 이 기록에 대해 청나라 건륭제는 <어제삼한정류(御製三韓訂謬)>라는 글을 직접 집필하여 "그 말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으로 궤변을 늘어놓아 세상을 미혹하게 한 것으로 의심이 된다. 무릇 돌로 머리를 누르면 어른도 감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이 땅에 갓 태어난 아기를 돌로 눌러놓는다는 것은 실로 인정상 마땅치 않은 것이다."고 반박하며 "우리나라의 옛 풍속에서는 아기가 태어나서 수일이 되면 요람에 두는데 반듯하게 오래 눕혀두면 뇌골이 저절로 평평하게 되어 머리 형태가 편두(扁頭)처럼 되었다."고 하며 만주족의 옛 풍속을 들어 반박했다. 위의 치누크 족이 편두를 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돌이나 널빤지로 아기의 머리를 누른다기보다는 아이를 반듯하게 눕혀서 고정시키는 형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진한 사람들도 아이 머리를 돌로 누른 게 아니라 딱딱한 요람에다 반듯이 눕혀서 재웠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실제로 삼국지에는 상당히 비현실적인 서술이 적지 않은 편이다. 삼한 문서 참조.[10] 다만 변한과 진한은 제천 행사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을 제외하고 모든 풍속이 같았다.[11] 메인 덧널은 도굴피해가 심해 알기 힘들고 순장된 사람들의 유골로 조사.[12] 다만 잊지말자. 알영 설화에서는 그 입의 부리 부분이 애를 씻기니까 떨어졌다.[13] 조광윤이 세운 송나라 역사를 다룬 원나라의 역사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