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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1 12:58:09

목만치

木滿致
생몰년도 미상

1. 개요2. 생애3. 의문점
3.1. 목협만치(木劦滿致)와의 관련성3.2. 키노 오이와노스쿠네(紀生磐宿禰)와의 관련성3.3. 이카카노 키미(위가가군, 爲哥可君)와의 관련성3.4. 소가노 마치(소아 만지, 蘇我 満智)와의 관련성

1. 개요

백제기》는 "목만치라는 사람은 목라근자가 신라를 정벌할 때 그 나라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 태어난 사람이다. 그 아버지의 공으로써 임나에서 전횡하였다. 우리 나라로 들어와 귀국과 왕래하였다. 천조의 명령을 받아 우리 나라의 정사를 맡았고 권세가 세상에 떨쳤다. 그리하여 천조가 그 포악함을 듣고 그를 불렀다."라고 하였다.
百濟記云, "木滿致者, 是木羅斤資, 討新羅時, 娶其國婦, 而所生也. 以其父功, 專於任那. 來入我國, 往還貴國. 承制天朝, 執我國政, 權重當世. 然天朝聞其暴, 召之."
일본서기》 권10 <오진 덴노> 25년 조 주석

5세기 19대 구이신왕 시기의 백제권신.

문자 그대로의 목만치만을 말하는 경우, 아버지인 목라근자처럼 국내나 중국사서에는 언급되지 않고, 《일본서기》의 기록에만 등장한다. 이 때문에 실존 여부가 의심되기도 하지만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백제기》 인용이 나름대로 신뢰성이 있기에 실존인물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유독 동일인물로 여겨지는 인물들이 많다. 일단 《삼국사기》에만 등장하는 21대 개로왕 시기의 충신 목협만치와 동일인물로 보는 설이 있고, 5세기 가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왜국으로 건너간 장수인 키노 오이와노스쿠네(紀 生磐宿禰)와 동일인물로 보는 설, 또 가야에서 학정을 자행하다 왜국으로 추방된 인물인 이카카노 키미(爲哥可君)와 동일인물로 보는 설, 이름의 유사성 때문에 소가노 마치(蘇我 満智)와 동일인물로 보는 설이 있다.

즉 정리하면 동일인물로 의심을 받는 사람들은 '목만치(木滿致)=목협만치(木協滿致)=키노 오이와노 스쿠네(紀 生磐宿禰)=이카카노 키미(爲哥可君)=소가노 마치(蘇我 満智)'인데 무려 5명이나 된다. 가히 천의 얼굴이라 할 만하다.

만일 목만치가 키노 오이와노 스쿠네(紀 生磐宿禰)나 이카카노 키미(爲哥可君)와 동일인물이라면 가야 혹은 왜국 출신일 수도 있다는 설이 있으나 위의 기록과도 같이 《일본서기》에 따르면[1] 목만치는 분명한 한반도 출신이다.

2. 생애

일본서기》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사서인 '《백제기(百濟記)》'를 인용하면서 목만치에 대해 설명했다.

목만치는 13대 근초고왕 대에 임나[2]신라를 평정하여[3] 백제가 한반도 남부를 장악하는데 큰 공을 세웠던 백제의 장수 목라근자의 아들인데, 어머니는 신라의 여인이었다고 한다. 아버지인 목라근자의 공로가 큰 덕분에 임나에서 일을 도맡아 보다가 백제로 들어갔다고 한다. 목라근자부터 적어도 2대에 걸쳐 목씨(목라씨) 집안이 가야에 영향력을 행사할만한 기반을 만들어 둔 것은 맞는 듯하다.

18대 전지왕이 죽고, 나이가 어린 구이신왕이 즉위하자 목만치가 국정을 잡게 되었는데 그는 구이신왕의 어머니와 정을 통하며 왕에게 무례하게 굴었다. 이에 그 권세의 높기가 하늘을 덮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고려시대 김치양의 대선배

결국 목만치의 횡포를 보다 못한 오진 덴노가 목만치를 왜국으로 다시 불렀다고 하는데 그 이후로는 기록이 끊어져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목례만치와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맞다면, 475년까지는 백제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백제의 멸망이 닥친 상황에서 백제를 구한 충신으로 거듭난 것이 된다.

사실 전지왕의 죽음과 목만치의 기록은 오진 덴노 25년의 기사인데, 오진 덴노의 재위기간은 270 ~ 310년이기 때문에 오진 덴노의 기록에 구이신왕이 나온다는 것부터가 《일본서기》의 시간대가 개판이란 증거다. 구이신왕의 재위기는 420 ~ 427년이므로 기록대로면 오진 덴노보다 100년 후의 사람이다. 딱 120년 차이는 아니긴 하지만 자주 나타나는 이주갑인상 문제가 여기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즉 오진 덴노는 원래 구이신왕과 비슷한 시간대의 인물이었는데 재위기가 앞당겨진 것으로 볼 수 있다.

3. 의문점

일본서기》의 기록에 의하면 나름 태후와 정을 통하고 제멋대로 권세를 휘둘렀다고 하니 분명 한 가닥은 하는 사람이었을텐데, 정작 《삼국사기》를 비롯한 국내 기록에서는 그 이름을 찾아 볼 수 없다는 의문이 있다. 다만 《삼국사기》는 수백년이 흐른 고려시대에 쓴 사서라 누락된 것이 한둘이 아닌지라 지못미. [4] 또한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또다른 목씨인 목협만치의 경우, 이름 부분인 만치는 그 목만치와 한자가 완전히 일치한다. 목만치 = 목협만치 설이 맞다면 아예 등장을 안한 것은 아닌 셈이다.

목만치가 오진 덴노의 부름을 받고 왜국으로 건너갔다는 대목은 당연히 《일본서기》의 윤색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의 기록은 그 시대의 상황상 자국중심주의적 윤색이 상당히 많이 가미되었기 때문이다.[5]

목만치 = 키도 오이와노 스쿠네 설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 목만치가 가야 지방에 거점을 뒀다는 점 2. 《일본서기》의 등장인물인 키노 오이와노스쿠네(紀生磐宿禰)가 가야 일대에 거점을 두고, 고구려와 연계해서 백제-가야-왜 동맹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해 왜국으로 건너갔다는 점을 합쳐볼 때 목만치가 오이와노스쿠네(生磐宿禰)와 동일인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반란에 긴밀하게 얽혀있을 것이다.[6]

3.1. 목협만치(木劦滿致)와의 관련성

목협만치는 《삼국사기》에만 등장하는 인물이다. 목만치가 19대 구이신왕(420 ~ 427) 시기의 인물이기 때문에 21대 개로왕(455 ~ 475) 시기에 등장한 목협만치는 후대에 등장한 인물이다. 목협만치는 개로왕이 문주를 남쪽으로 피신시킬 때에 조미걸취와 함께 동행시킨 인물로 나와 있지만, 이후로는 관련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이름만 놓고 분석해 보면 백제 대성팔족 중 하나인 목(木)씨는 목라(木羅), 목례(木刕), 목협(木劦)으로 나타나는 복성의 축약형에 해당한다. 언어의 표준화가 이루어져 정확한 표기를 하는 현재와 달리 옛날에는 기록자 마음대로 축약하는 것이 굉장히 흔한 일이었다. 그리고 목라(木羅)와 목례(木刕)는 《일본서기》에서 똑같이 '모쿠라'라고 읽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그냥 목라씨였다는 게 거의 확증되며, 목협(木劦)의 경우 그냥 오자(...)인 것으로 보인다. 판본을 찍어내며 한자를 실수로 틀리거나 당사자가 한자를 틀려 잘못 기재한 경우는 꽤 흔했다. 게다가 이름인 '만치'(滿致)의 경우, 목만치와 목협만치 양자가 한자도 포함해서 정확히 일치한다. 이를 종합하면 목협만치는 실수 때문에 원래는 '목례만치(木刕滿致)'였던 것으로 보이며 목(木)은 목례(木刕)의 축약형에 해당하기 때문에 적어도 두 인물의 이름은 완전히 같다.

이름의 유사성뿐 아니라 백제 조정의 중요한 인물인 동시에 시기적으로도 유사성이 있어 목만치를 목례만치와 동일인물로 보는 설이 존재해 왔지만, 노중국 등의 한국의 백제사 연구자들은 목협만치와 목만치를 동일인물로 보지 않았다. 목만치가 등장하는 《일본서기》 오진 덴노 25년은 120년을 뒤로 땡겨봤을 때[7] 414년이고, 《삼국사기》에 「목협만치」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개로왕 21년(475년)으로 양자간에 시대가 61년이나 차이가 난다는 것이 이유였다. 더욱이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목만치의 아버지 목라근자가 사료에 등장하는 것은 백제가 왜군과 함께 가야 지역을 공략할 때로써 《일본서기》에서는 백제가 왜군과 함께 가야 지역을 공략하기 전에 「(백제와 왜국의 군사들이) 함께 탁순에 모여, 신라를 쳐부수었다.」고 했는데 이때가 369년이고, 목만치는 《일본서기》에서 목라근자가 「신라를 칠 때」 무렵 얻은 신라 여자에게서 태어났다는데 그럼 369년 언저리에 태어난 게 되므로, 목만치가 475년의 목협만치와 동일인물이라고 하면 양자 간의 시차가 100여 년이나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반론이 제기되어 있다. 우선 《일본서기》에서 목만치의 탄생 시점이라고 밝히고 있는 「신라를 칠 때」라는 시점을 굳이 369년으로만 고정시켜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서는 목라근자가 활약한 369년 당시 백제와 신라가 전쟁을 벌인 기록은 없으며[8] 오히려 369년의 3년 전과 1년 전에 해당하는 366년과 368년에 백제와 신라 사이에 두 차례에 걸쳐 화친이 성립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 이사금 18년(373년)에 백제 독산성(禿山城)의 성주가 300명을 거느리고 신라로 투항하자 근초고왕이 그들을 송환해줄 것을 신라에 요청하면서 '두 나라가 원래 화친을 맺어 형제가 되기를 약속했었는데 도망친 백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화친한 뜻에 어긋난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즉 366년과 368년에 맺어졌다고 한 양국의 화친조약이 373년까지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화친이 깨지고 백제와 신라가 다시 무력으로 맞붙게 되는 건 《삼국사기》 기록만 한정하면 17대 아신왕 12년(403년)의 일이다.

또한 한문 특성상 「목라근자가 신라를 칠 때 그 나라 여자를 얻어서 (목만치를) 낳았다」는 《일본서기》의 기술이 실제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상당한 시차를 두고 벌어진 일들을 마치 한꺼번에 일어난 일처럼 압축시켜 적은 기록일 가능성도 제기되는데[9] 우선 목만치가 태어났다고 주장되는 369년이 한창 가야 지역에 대한 군사행동이 이루어지던 와중이었다는 점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굳이 전쟁하느라 한창 바쁜 시기에 만사 제쳐두고 부인부터 맞아들였다는 것도 그렇고 결혼하자마자 그렇게 빨리 임신하는 것도 아니고 속도 위반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에 대한 보장도 없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할 때 목라근자가 가야 평정이 끝나고도 한참 동안을 가야 지역에서 머무르다가 현지에서 부인을 맞아들였을 것이고, 이러한 혼인관계 상 부인은 「현지처」로서 젊은 여자가 되기 십상이며, 거기서 태어난 아들인 목만치가 아버지 목라근자와 나이 차이가 거의 할아버지-손자 수준으로 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전혀 없다. [10]

목만치가 태어난 것을 꼭 369년으로 못박을 필요가 없고 그 이후의 어느 시점이라고 하더라도, 그럼 정확하게 언제 목만치가 태어났는지는 확실하게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일본서기》 오진 덴노기의 414년, 《삼국사기》의 구이신왕의 즉위(420년) 이후로 넘어가지 않는 것은 분명하며, 목만치가 목례만치와 동일인물이려면 《삼국사기》 개로왕기에 등장하는 475년까지는 살아 있을 수 있어야 한다. 목만치의 활동 시기나 그의 나이를 논할 때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구이신왕(재위 420~427)의 존재인데, 목만치가 백제에서 권세를 휘두르고, 왜국으로 건너가기에 이르는 계기가 구이신왕의 나이 어린 즉위에 있기 때문이다.[11] 《일본서기》에 (목만치가 국정을 쥐게 된 계기인) 구이신왕이 즉위한 해로 되어 있는 오진 덴노 25년(294)은 실제 역사에서 이주갑인상(-120년)한 해로 실제 기년으로는 414년에 해당하지만, 《삼국사기》에는 구이신왕이 즉위한 것이 420년의 일이라고 되어 있어서 6년 정도 차이가 난다. 전지왕의 사후에 구이신왕이 즉위했다고 한 것은 양쪽이 모두 같지만, 어떤 사건에 대한 기년이 차이가 날 경우 《일본서기》보다는 《삼국사기》에 보다 무게를 두는 경우가 많다.[12] 이 경우 백제 조정에서 구이신왕의 즉위와 함께 이루어져야 할 목만치의 등장은 《삼국사기》에 구이신왕의 즉위가 이루어졌던 420년의 일이고, 《일본서기》보다 6년 정도 늦춰져 475년이라는 하한선에 더 가깝게 된다.

앞에서 말한 대로 373년까지 백제와 신라 사이의 화친은 유지되고 있었고, 백제-신라 사이에 직접적인 군사 충돌이 있었던 403년 직전까지 목만치의 출생 시점은 내려가게 된다. 이것도 《삼국사기》의 기록만 가지고 말하면 403년이라는 거고, 이미 《일본서기》에서 언급된 '목라근자가 신라를 칠 때'라고 부를 만한 군사적 사건은 실제 역사에서 서기 400년한 번 거하게 있었다.[13]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기》가 언급한 '목라근자가 신라를 칠 때'라는 사건이 실제로는 369년이 아니라 400년의 유명한 고구려 광개토대왕임나가라 원정을 야기한 그 전투에서의 일이라면 임나 방면 업무를 주관하던 백제측 무장인 목라근자가 개입할 여지도 충분히 있다.[14]

또한 《일본서기》에는 구이신왕의 즉위 기사에 맞춰서 목만치가 왕모와 간통하고 국정 전반에서 권세를 휘두르다 덴노에게 소환되어 왜국으로 건너가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이 오진 덴노 14년(294년, 실제로는 414년)에 한꺼번에 벌어진 것마냥 몰려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도 목만치의 탄생 기사와 마찬가지로 오랜 시간에 걸쳐 상당한 시차를 두고 벌어진 일들을 마치 한꺼번에 일어난 일처럼 압축시켜 적어 놓은 기록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목만치가 백제 조정에 권력자로 대두하고 왜국으로 건너간 것은 결코 짧은 기간 동안에 한꺼번에 벌어진 일이 아니란 얘기다.

사실 목만치의 권세도 단순히 왕모 팔수부인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데에만 의지한 건 아니고 목만치 본인부터가 선대 근초고왕의 남방 원정을 도와서 임나 지역에 백제 세력을 부식시키는데 공적이 많은 공신(公臣)의 아들이라는 혈연과 그 공신이었던 아버지 목라근자가 임나에서 백제의 무장으로써 활약하며 마련하고 쌓아올린 인맥과 명성에[15][16] 토대하고 있는 것인데, 이런 정도의 권신(權臣)을 구이신왕이 자신의 재위 기간 중에 한 번이라도 함부로 내칠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17] 하는 문제를 생각한다면, 목만치가 백제를 떠나서 왜국으로 간 것은[18] 실제 《일본서기》의 기록과 달리 구이신왕의 만년, 늦으면 사망(427년) 이후의 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나아가 팔수부인과의 간통 스캔들도 (구이신왕의 재위기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기록된 시점보다 후대의 일일 가능성은 물론, 목만치가 어린 구이신왕을 대신해 국정을 휘두른 것과 목만치가 왕모 팔수부인과 내연관계였다는 것 사이에 어떤 인과성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도[19] 배제할 수 없다.

구이신왕의 재위기(420~427)에는 '어린 왕을 대신해 백제의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왕모(대후)와 간통하며 권세를 휘둘렀다'는 스캔들이 나올 만큼 어느 정도 사리분별을 할 만큼 목만치의 나이가 차 있었을 테고[20] 목만치가 475년의 목례만치와 동일인물이라고 한다면 구이신왕 재위기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475년 시점에서 목만치는 거의 노년으로, 아무리 낮게 잡아도 예순을 넘긴 나이가 된다. 예순, 일흔 나이에 활동한 사람이 이 시대에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21] 시대상을 생각하면 목만치는 (《삼국사기》의 목례만치와 동일인물이라는 가정하에서)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는 상당히 고령의 나이에도 고구려의 침공 앞에서 왕자를 남쪽으로 도피시키는 막중한 업무를 수행한 것이 된다. 즉 목만치는 목협만치일 수도 있는 것이다.

현대 학계에서는 전지왕이 왜에 있다가 해씨의 도움을 받아 귀국해 부여설례를 죽이고 왕위에 올라 맞아들인 진씨 또는 해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게 서자 비유왕이고, 팔수부인은 전지왕이 왜 시절 맞아들인 왜의 귀족 내지는 대왕가 출신으로 유력시된다고 한다. 사서에서 비유왕의 어머니가 기록에 남지 않고 팔수부인만 유일한 부인으로 남은 걸 보아 팔수부인은 당대 왜에서 굉장히 지위 높은 출신으로 보이지만, 반대로 구이신왕 재위기 팔수부인은 왜 출신이기 때문에 백제에 마땅한 뒷배가 없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진씨와 해씨 세력은 비유왕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팔수부인은 목지국 왕가 후예로 유력시되는 목만치를 비롯한 신진 마한계 세력들을 끌어들여 국정을 운영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반발한 진씨와 해씨 같은 초기부터 내려오는 오래된 귀족 세력이 구이신왕을 배제하고 비유왕을 즉위시킨 것으로 본다. 목만치가 왜로 도망쳤다는 일본서기의 기사는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본다.[22]

문제는 비유왕도 즉위한 이후 진씨, 해씨 세력에 반발해 선대 구이신왕 대처럼 목씨를 비롯한 마한계 세력을 중용하며 기존 세력을 억제하려다 이에 반발한 진씨, 해씨 등에게 살해당한 걸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비유왕은 사후 21년이 지난 뒤에야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를 수 있었고, 개로왕은 이 때문에 기존 세력을 불신하며 문주왕, 부여곤지를 비롯한 친족과 마한, 외래 출신을 중용하는 정치를 펼치며 여전히 기존 세력과 갈등을 빚다 475년 한성백제의 멸망이라는 결과로 돌아오게 된다. 곤지가 비유왕의 봉사손이 되었고 문주가 도왜한 왕족 주군의 봉사손이 되었다는 신찬성씨록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개로왕은 즉위 초기 백부인 구이신왕의 봉사손이었을 가능성이 있고, 비유왕과 개로왕 모두 진씨, 해씨 등을 불신해 마한계 중용 기조를 이어갔기 때문에 목만치가 비유왕 또는 개로왕 대에 백제로 귀국해 정계로 복귀하는데 성공하고, 개로왕의 신임을 받는데 성공해 노년에 문주왕을 대피시키는 일을 맡았다고 하면 개연성이 맞다.

3.2. 키노 오이와노스쿠네(紀生磐宿禰)와의 관련성

5세기의 인물인 키노 오이와노스쿠네(紀生磐宿禰)와 동일인물로 보는 설이 있다. 일본어로 나무가 '키'이므로 목(木)씨와 성의 의미가 통하고[23] 기록상 목만치의 아버지 목라근자와 오이와노스쿠네(生磐宿禰)의 아버지 키노 오유미노스쿠네(紀 小弓宿禰)가 둘 다 신라를 정벌, 임나를 평정했다고 했으며 아버지의 공으로 자식인 목만치와 오이와노스쿠네(生磐宿禰)가 임나와 백제에서 전횡하다가 왜국으로 소환됨/임나를 거점으로 백제에 대항하다 왜국으로 건너갔다는 유사성이 있기 때문이다.[24] 재밌는 점이 하나 있는데 기록상으로 오이와노스쿠네(生磐宿禰)는 목만치와 동일인물로 추정되는 다른 인물인 소가노 마치(蘇我 満智)의 아들인 소가노 카라코(蘇我 韓子)[25] 를 화살로 쏴 죽였다. 영조? 다만 소가노 카라코(蘇我 韓子)의 경우

시간대를 조정해서 5세기의 사건들과 비교해보면 21대 개로왕 대에 장수왕의 고구려군에게 한성백제가 대대적으로 털린 뒤 22대 문주왕과 23대 삼근왕은 암살로 죽었고, 24대 동성왕은 금강 유역을 기반으로 한 사씨, 연씨, 백씨 등을 기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모습이 보이는데 쫓기듯이 웅진성으로 천도한 뒤 백제의 왕권이 어마어마하게 흔들렸음이 관측된다. 이 무렵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키노 오이와노스쿠네(紀 生磐宿禰)라는 인물은 동성왕/겐조 덴노 재위기에 가야 지방에서 고구려와 연계해 백제-가야-왜 동맹에 대항한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 설이 맞다면 아버지 대부터 정복활동을 주도하며, 가야 지방에 세력 거점을 두었던 목만치는 여기서 반란군과 관련된 유력한 인물 중 하나였으며 여기서 무언가 문제가 생겨 왜국으로 건너간 것 같다는 모양새가 나온다.

한편 이 인물은 부여기/구이신왕과 동일인이거나 그에서 파생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일단 부여기의 이름이 이 사람의 성과 똑같은 '紀'로 표기되었고, 구이신왕은 목씨 외척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칠지도에 나오는 "百濟王世子奇生聖音"(백제왕세자 기생성음)과 키노 오이와노스쿠네(紀生磐宿禰)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볼수 있다. 구이신왕은 전지왕의 왕자로써, 칠지도 문면에 적힌 "丙午正陽"을 토대로 추적하면 전지왕 4년인 408년으로 추정할수 있는 점에서 일견 설득력 있는 추론이다.

3.3. 이카카노 키미(위가가군, 爲哥可君)와의 관련성

이카카노 키미(爲哥可君)는 성씨 혹은 칭호에 해당한다. 《백제본기》에서는 '위가기미'(爲哥岐彌, 이카키미)로 표기되어 있고, 이름은 유비기(有非岐, 우히키)라고 했다. 가야인인 나기타 갑배(那奇他甲背), 가랍직기 갑배(加臘直岐甲背) 등의 말을 듣고 가야 지역에서 학정을 자행하다 왜국으로 추방당했다고 한다. 키노 오이와노스쿠네(生磐宿禰)와 행적이 비슷하기 때문에 반란에 동참했거나 혹은 그와 동일인물인 것으로 추정된다.

3.4. 소가노 마치(소아 만지, 蘇我 満智)와의 관련성

소가(蘇我)씨는 일본 아스카 시대에 활약한 권신 가문으로 친백제파였으며, 불교를 백제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소가노 마치(蘇我 満智)는 소가씨의 선조로 불리는 인물이다. 소가씨에서 유명한 인물로는 마치의 고손자이자 권신인 소가노 우마코(蘇我 馬子)와 그 손자이자 을사의 변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인 소가노 이루카(蘇我 入鹿)가 있다.

이 소가노 마치(蘇我 満智)에서 이름 부분인 '마치(満智)'가 목만치의 이름인 '만치(滿致)'와 음운상 유사하기 때문에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존재한다. 일단 '만(満)'과 '만(滿)'은 이체자 관계이고, 뒤에 붙는 '치(致)'는 삼한 공통으로 나타나는 존칭접사 '지(智)'와 음이 비슷하다. 또한 소가노 마치(蘇我 満智)의 아들과 손자의 이름이 각각 소가노 카라코(蘇我 子)와 소가노 코마(蘇我 高麗)이기 때문에 도래인이라는 의혹도 짙다. 확실한 근거는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소가씨의 성향부터 이름까지 도래인이라는 냄새가 워낙 짙게 나기 때문에 목만치와 관계 없이 도래인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도래인 계통이란 수준을 넘어 아예 소가노 마치와 목만치가 동일인물이라고 보기엔 문제도 많이 있다. 소가노 마치(蘇我 満智)는 《일본서기》의 시간상 리추 덴노 재위 2년에 집정관이 되는데, 이 때가 401년이기 때문에 목만치와는 시간대가 맞지 않게 된다. 반면 《일본서기》는 이주갑인상 문제가 나타날 정도로 시간대가 개판인 만큼, 소가노 마치(蘇我 満智)의 기록 시간대를 옮기면 된다는 의견도 있다.

또는 목만치가 왜국에 가서 벼슬을 한 후 개로왕 때 다시 돌아왔다는 의견도 있다. 돌아온 탕아?

다만 시간대를 후대로 한다고 해도 반박되는 근거가 4가지가 있는데,

1. 백제 명문귀족 출신인 목(라)만치가 굳이 자신의 성씨를 버리고 소가씨를 자청한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점.
2. 일본에서 도래계 태생의 호족들이 자신의 태생을 날조하는건 8세기 이후에 나타난다는 점.
3. 《삼국사기》에 쓰여진 목협만치와 목만치를 동일인물로 볼 때, '목협만치가 남행하였다'라는 부분을 왜국으로 향한 것으로 한정지어 해석할 수 없다는 점.[26]
4. 백제 귀족 손자의 이름에 고구려를 의미하는 '코마(高麗)'가 쓰인 건 부자연스럽다는 점. 당시 백제와 고구려는 철천지 원수로 서로 왕을 죽이는 등 사이가 무지하게 나빴다.

이 때문에 현재 일본에선 목만치=소가노 마치(蘇我 満智) 설을 지지하는 학자가 많지 않으나,[27] 《상궁성덕법왕제설》에선 소가씨가 원래 임(林)씨라고 표기한 기록이 있으며, 또 다른 서적인 《신찬성씨록》의 경우 임(林)씨는 본래 백제 사람 목(木)씨였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위의 막연한 근거들 보다는 좀 더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목만치는 단순한 백제 출신이 아닌 마한계 출신으로 비정되는데, 마한백제와 달리 태조대왕 시기 예맥-위말갈 등과 연합적인 군사행동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 후삼국시대 때도 후백제를 지원한 기존의 백제와는 다르게 고려에 친화적인 행보를 보이는 등 세부적으로 백제와 다른 행보가 사서에 나타난다. 따라서 이름에 고구려를 넣어 짓는다고 해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게 된다.


[1] 《일본서기》는 이를 《백제기(百済記)》로부터 인용했다. 《일본서기》의 특성 상, 인용하면서 나름의 견해가 섞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러한 형태의 기록이다. 한편 목만치 = 키노 오이와노 스쿠네 설 또한 《일본서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정작 《일본서기》에 그 둘이 같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서기》는 목만치의 국정 장악을 기술하면서 “대왜(大倭)의 목만치”라고 하여 그가 왜인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기도 하지만, 《일본서기》의 다른 사본인 다나카본(田中本)에는 “대왜”라는 글자가 없을 뿐 아니라 《백제기》를 인용한 세주에서 목만치의 아버지를 목라근자로 기술한 점을 볼 때 목만치를 백제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노중국, 《백제사회사상사》 2010년, 지식산업사, p.166).[2] 여기서 말하는 임나는 가야 지방 전체 혹은 대가야를 말한다.[3] 단 무력으로 한 제압이 아닌 외교적으로 회유했다는 주장도 있다.[4] 목만치가 태후와 정을 통하고 행패를 부렸다고 하는 부분은 구이신왕에 대한 기록인데, 《삼국사기》에 쓰여진 구이신왕의 기록은 주변인물은 커녕 '즉위했고, 죽었다' 라는 아주 짧막한 두줄이 전부이다.[5] 물론 《일본서기》에는 《삼국사기》 등을 비롯한 국내 사서에 없는 기록들이 많아 삼국의 역사에 대해 연구할 때 좋은 자료가 되기도 하기 때문에 윤색된 부분은 적당히 들어내며 쓰이고 있다.[6] 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의문을 낳는다. 목만치 = 소가노 마치 설을 부정하는 주장 중 하나가 그 시절 고구려와 백제의 사이가 철천지원수라 소가씨의 후대에 고구려와 관련된 이름이 들어갈 경우, 말이 안된다는 점인데 키노 오이와노스쿠네는 아예 고구려와 손을 잡고 백제-가야-왜의 동맹에 대항해버린 것이다. 혹은 고구려와 대놓고 내통한 목만치 = 소가노 마치 = 키노 오이와노스쿠네라서 후대에 고구려와 관련된 이름을 넣어도 괜찮았거나 [7] 일본서기 기록은 그 사건의 연대를 기록된 것보다 2주갑 즉 120년 더해서 끌어내려야 실제 역사와 일치한다는 분석이 있다.[8] 《일본서기》에는 369년 백제의 임나 원정을 ‘신라를 쳐부수었다’고 표현하지만, 원래 《일본서기》에서 한반도에 대한 군사행동은 대개 ‘신라를 쳤다’라고 표현되는 경우가 많아서 별 의미도 없다. 후대의 일이지만 663년 백강 전투에 파병하는 것도 ‘신라를 치게 했다’로 쓰고 있는데 정작 이들이 백강에서 맞붙은 주력은 신라군이 아니라 당나라군이었다.[9] 당장 《일본서기》에 실린 《백제기》 인용문이 원문을 그대로 실은 것인지 작성자가 임의로 축약해서 적은 것인지 무엇으로 보장하겠는가.[10] 출처: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2010년, 창작과 비평사[11] 목만치가 백제 조정에서 국정을 쥔 계기가 나이 어린 구이신왕의 즉위와 그의 정치를 보좌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만큼 구이신왕의 즉위와 목만치의 대두는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고 인과관계가 성립되는 사건이다. '목만치가 왕모와 간통하며 무례를 행하였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상식적으로 왕모(대후)와 간통해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그 왕모의 권위가 건재할 때에 가능한 것이고, 그 왕모의 권위는 선왕의 아내이자 현왕의 어머니라는 데에서 나오느니만큼, 그 왕모의 아들이 살아서 왕으로 재위해 있다는 전제가 선행되어야 한다.[12] 《일본서기》 초기 기록들이 웬만하면 다 이런 식이다. 고구려가 백제를 쳐서 한성을 함락시킨 475년 이전의 기록들은 대체로 《일본서기》에 기록된 기년에서 2주갑(120년)을 낮춰야 《삼국사기》 기년과 교차검증이 가능해지며, 그마저도 덴노의 권위를 높이려고 뭐든 덴노의 명령으로 그렇게 되었다 식으로 왜곡하는 경우가 《일본서기》에서는 일상다반사다.[13] 해당 사건을 전하는 광개토대왕릉비에는 백제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학계에서는 이때의 왜병의 신라 공격을 백제가 배후에서 사주한 것이라는 데에 의견이 거의 공통되고 있다. 그리고 이 전쟁에는 임나 즉 가야 연맹도 백제의 편에서 참전했다.[14] 369년에서 400년까지면 시간대도 30년 정도밖에 나지 않으며, 369년 시점에서 청년이었을 목라근자가 예순을 넘긴 노년이 된 400년을 전후해 만난 신라 여자에게서 목만치라는 아들을 얻었다 해도 충분히 아귀가 들어맞는다.[15] 심지어 이걸 부자 세습까지 해낼 정도면 보통 견고한 것은 아니다.[16] 현대 학계에서는 목씨의 정체가 백제에 협력한 대가로 생존해 중앙 귀족으로 편입된 목지국 분가인 천안 용원리 세력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목지국 본가인 천안 청당동 세력은 끝까지 백제와 맞서다 4세기 초 완전히 소멸당했기 때문에 목지국 멸망 이후 목지국 왕가의 이름값을 분가인 목씨가 그대로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목씨가 처음 사서에 등장할 때부터 대귀족 포스를 철철 풍기며 마한과 가야 정복에 그렇게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17] 별 능력도 없으면서 단지 왕모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권세를 휘두른다면 조용히 반대파를 모아서 숙청각이라도 잡아 볼 수 있겠지만 목라근자 때부터 백제 조정을 섬기며 임나 관련 업무를 맡아 수행했고 그걸 세습까지 했을 정도면 마냥 목만치를 개인의 능력은 쥐뿔도 없이 운 좋게 좋은 집에 태어난 혈연이나 왕모와의 내연관계만 가지고 권세를 잡은 인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구이신왕 입장에서도 목만치 정도로 강력한 자체 기반을 가진 인물을 굳이 적으로 돌리기보다 자신의 편으로 잡아두는 것이 (왕으로써의 자존심이나 왕권에 저촉되는 문제를 감안하더라도) 충분히 더 이익이 된다는 판단을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18] 《일본서기》는 목만치가 왜국으로 간 것을 '덴노가 소환해서'라고 했지만 《일본서기》 기록이 원래 덴노에게 몰아주기식으로 덴노가 사방의 여러 국가에 명령을 내리는 위치에 있었던 것처럼 왜곡된 서술이 많기 때문에 '목만치의 전횡을 듣고 덴노가 목만치를 왜국으로 송환했다'라는 기록 자체에 큰 의미를 둘 필요도 그럴 이유도 없다.[19] 쉽게 말해서 목만치가 어린 구이신왕을 대신해 백제의 국정을 쥐게 된 사실이 왕모 팔수부인과 내연관계였다는 사실과는 아무 상관없는 별개의 사건일 수 있다는 얘기다. 기록은 말 그대로 기록이지 실제 사실을 모두 반영하지 않으며, 기록에 나온다고 모두 사실 그대로인 것도 아니다. "목만치가 어린 구이신왕을 대신해 국정을 쥐고 휘두르며 왕모 팔수부인과 간통해 권세가 강했다"는 기록도 정말 왕모 팔수부인과 내연관계에 있어서 어린 왕을 대신해 국정을 휘두르게 된 것인지, 아니면 1) 목만치 본인이 국정을 휘두르다 보니 왕모와 간통했다는 소문이 나게 된 것인지(헛소문 내지 가짜 뉴스), 2) 구이신왕을 보좌해 국정을 맡던 목만치가 차츰 자신의 권력에 취해서 왕모와 간통하는 짓까지 벌일 정도로 타락해 버린 것인지(인과 관계 전복)도 기록 그 자체만으로는 단언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당장 《일본서기》 본문에서는 목만치가 왕모와 간통했다고 언급하면서도 그 《일본서기》가 주석에서 인용한 《백제기》 기사에는 "권세가 당대에 강하였다. 천조가 그 포악함을 듣고 불러들였다"고만 언급하지, 왕모와 간통했다는 언급은 빠져 있다(물론 이것도 축약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20] 앞에서 추론한 대로 400년에서 403년 사이에 목만치가 태어났다고 하면 구이신왕 재위기에 목만치의 나이는 스물에서 스물세 살 정도인데, 한 나라의 국정을 맡기에는 (그 시대 기준에서) 너무 젊다고 할 나이도 아니고, 왕모(대후)의 내연남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나이이긴 하다.[21] 기록으로 확실하게 생몰년이 확인되는 백제의 국왕이 무령왕과 그 손자인 위덕왕으로 각각 향년 61세와 향년 73세로 사망했다. 목만치 이전을 찾아보면 온조왕의 어머니라 전하는 소서노(왕모)가 온조왕 13년(기원전 6년)에 61세(향년 60세)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백제본기에 있다. 백제 이외를 찾아보면 고구려의 장수왕도 시호 그대로 97세까지 살았고, 신라의 김유신78세로 사망했다. 고구려 고국천왕산상왕 형제의 왕후였던 왕후 우씨180년에 고국천왕과 혼인해서 234년에 사망할 때까지 54년을 왕비로 지냈는데 혼인 가능 연령을 생각하면 예순에서 일흔은 거뜬히 넘긴다.[22] 이 경우 목만치가 왜로 도망친 시점은 비유왕이 즉위한 해인 427년이 된다.[23] 키씨의 선조인 키노 츠노노스쿠네(紀角宿禰)는 다른 이름이 목각숙녜(木角宿禰)로 적혀있는 기록도 있다. 허나, 이러한 경우 목씨는 목각씨로 읽혔어야 하는데, 기록상의 역대 목씨들은 '목각'이 아닌 '목'씨, '목례' 혹은 '목라'씨로 읽혔다. 그 《일본서기》조차 '모쿠라'로 읽었다.[24] 백승충(2015), "《『일본서기』 木氏, 紀氏 기사의 기초적 검토 : 신공~현종기를 중심으로"》, '한국민족문화' 54, 57-101.[25] 《일본서기》에서는 소아 한자숙녜 (蘇我韓子宿禰)라고 기록하고 있다[26] 이 부분은 한성이 함락되어 개로왕이 죽고 백제가 난리가 나자 문주왕을 호위해 웅진성으로 향했다는 걸 의미한다.[27] 애초에 이 설을 처음 주장한 것은 국내가 아닌 일본의 사학자인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