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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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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군주의 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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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진왕3. 신지
3.1. 신지의 우호(優呼)
4. 천군5. ·작위 수여

1. 개요

원삼국시대 시절 한반도 남부 지방에 존재한 한(韓)은 여러 소국으로 구성된 연맹체였다. 《삼국지》 동이전에 의하면, 이 연맹체를 이끄는 수장은 마한의 진왕(辰王)이었으며, 진왕에 신속(臣屬)된 나라의 거수(渠帥)[1]들은 그 크기에 따라 신지(臣智)-험측(險側)-번예(樊濊)-살해(殺奚)-읍차(邑借) 순으로 불렸다고 전한다. 마한은 이 중 신지와 읍차 두 칭호만 사용했다.

진한변진 24개국 가운데 왕은 12명이 있었으며 진왕에 신속된 나라는 12곳이라고 한 것을 보면, 목지국이 주도하는 연맹체에 소속되지 않은 나라는 그냥 '왕'으로 통칭된 것으로 보인다.

2. 진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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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품리 추모 비류 온조
마한
<rowcolor=#fbe673> 초대 제2대 제3대 제?대
준왕 마한왕 2세 마한왕 3세 마한왕
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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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일왕 금효왕 아음부 타추간
진한 변한 탐라
<rowcolor=#fbe673> 사로국 금관국 반파국 탐라국
거서간 김수로 이진아시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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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왕()은 한(韓) 연맹체를 이끄는 수장에게 주어진 칭호로, 삼한 성립 이전의 진(辰)과 연관성이 있는 칭호로 여겨진다.

3세기 중엽의 기록인 《삼국지》에는 당시 마한목지국에서 진왕을 맡은 것으로 나온다.
馬韓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目支國, 盡王三韓之地.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辰王)으로 삼았고, 목지국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 지역의 왕으로 군림하였다.
《후한서》 동이전 한조
(변한·진한 24국 가운데) 12국은 진왕에게 신속(臣屬)되어 있다. 진왕은 마한 사람으로 대대로 세습하며, 자립하여 임금이 되지는 못했다.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爲王
《삼국지》 권30 동이전 한조

《후한서》만 본다면 목지국이 대대로 진왕을 세습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으나, 위의 《삼국지》 기록을 통해서 진왕은 마한에서만 독점할뿐 어느 한 나라에서 세습하던 지위는 아닌 것으로 파악된다.[2]

이와 관련해서 준왕고조선에서 축출된 이후 남하하여 세운 나라는 건마국이며, 연맹체의 수장직인 '한왕(韓王)'을 건마국에서 세습해오다가 이후 목지국에서 세습하는 '진왕'으로 교체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3. 신지

신지()는 진왕이 주도하는 연맹체에서 가장 유력한 군장들이 사용한 칭호였다.

3세기 당시 신(臣)의 음가는 /*gin/이라[3] 6세기 백제의 왕호인 '건길지' 및 신라의 왕성 호칭 '건모라'의 '건(健)'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추측된다. 삼한의 여러 나라 중에는 국호에 '신(臣)'이 접두어처럼 쓰이는 경우가 여럿 있는데, 신지와 마찬가지로 당시 /*gin/이 대상을 높여주는 일종의 접두사 기능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일례로 신소도국의 국명은 '신(/*gin/)+소도'로 분석된다.

3.1. 신지의 우호(優呼)

진왕은 월지국을 다스리며, 신지는 간혹 '신운견지보안야축지분신리아불례구야진지렴'이라는 우대하는 칭호를 덧붙인다.
辰王治月支國, 臣智或加優呼, 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
《삼국지》 권30 동이전 한조

특별히 우대하는 칭호라는 의미인 '우호(優呼)'에 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다. 크게 위의 문장에서 '加'를 일반적 용법인 타동사로 해석하여 진왕을 겸하는 목지국의 신지에게 붙은 20자의 칭호로 해석하는 견해와, 진왕에 신속된 신지들 가운데 세력이 강성한 유력자에게 주어진 칭호로 해석하는 견해로 나뉘고 있다.

하지만 이 문장에서 "안아(安邪)"와 "구야(拘邪)"가 가리키는 것이 국호라는 점이 명백하기에, 근대 이후의 한국과 일본 역사학자들은 후자의 견해를 채택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따르면 칭호 대목은 자연스럽게 "국호 2자+칭호 3자" 형식의 문장인 "臣雲遣支報, 安邪踧支濆, 臣離兒不例, 拘邪秦支廉"으로 파악된다.
이렇게 해석할 경우, '신운국'은 '신운신국'의 약칭으로 쉽게 이해되지만 '신리국'을 특정할 수 없게 된다. 때문에 '신리국'에 관해서는 뚜렷하게 밝히지 못하여 염사국의 잔여 세력이라거나 《진서》에 보이는 '신미국(新彌國)'으로 추정하는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 문제에 관해 이병도는 해당 문장에서 '濆臣'은 '臣濆'의 도치이므로 신분활국의 신지에게 우호가 주어졌다고 주장하면서, "臣雲遣支報, 安邪踧支, 臣濆離兒不例, 拘邪秦支廉"으로 교정해 "안야국의 축지 신지, 신분활국의 이아불례 신지"로 해석했다.[4] 이러한 해석은 한국 역사학자들에게 널리 수용되었으나, 해당 문장에 도치가 이뤄진 객관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5] 최근에는 새로운 해석이 제시되거나 해당 논란이 언급되지 않는 추세다.[6]

우호(優呼)를 신지 중에서도 특별한 세력에 주어진 것으로 해석한다면 신운신국(전라남도 해안 일대), 안야국(아라가야의 전신), 신분활국(경기 북부 또는 강원도 서북부), 구야국(금관가야의 전신) 등은 2~3세기 당시 목지국 진왕과 함께 일부 지역을 담당하는 지역 맹주로서 한(韓) 연맹체를 주도한 나라들로 여겨진다. 때문에 이 점을 두고, 백제국(백제의 전신)이나 사로국(신라의 전신)이 《삼국지》 상에는 특별히 언급되지 않는 나라라고 하여 《삼국사기》 초기기록 부정론의 근거로 활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진·변한 24개국 가운데 12개국만 진왕에 신속되어 있다고 한 점에서 알 수 있듯, 당시 진왕이 주도하는 연맹체에 모든 나라가 소속된 것은 아니었다. 만일 백제국이나 사로국이 그 연맹체에 소속되지 않은 나라였다면 우호를 받은 신지로 언급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7]

4. 천군

천군()은 한(韓) 연맹체에서 제사장이 사용하는 칭호였다.

소도(蘇塗)에 거주했으며, 이 소도는 외부의 권력이 침범할 수 없는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이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조금 다르다. 아래의 기록을 살펴보면, 천군과 소도는 별개의 존재로 보인다.
국읍에는 각기 한 사람을 세워 천신에 제사지내는 것을 주관하게 하고 이를 이름하여 천군이라 한다. 또 여러 나라가 각기 별읍을 두어 그를 소도라 이름한다. 큰 나무를 세워 방울과 북을 매달고 귀신을 섬겼다.
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名之天君又諸國各有別邑名之爲蘇塗立大木縣鈴鼓事鬼神
《삼국지》 권30 동이전 한조

즉, 천군은 국읍 안에서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는 존재이고, 소도는 국읍과는 별도로 세워진 읍에서 귀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는 곳이다. 즉, 천군이 소도의 주재자가 아니며 소도에는 따로 무당이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의 귀신은 대략 잡신을 이르는 듯하다.

5. ·작위 수여

공손씨의 동연이 멸망한 이후, 위나라서진에서는 한(韓)의 군장들에게 대대적으로 작위와 관직을 수여했다.

진(秦)나라 시절부터 이민족 수장을 대상으로 솔중왕(率眾王)–귀의후(歸義侯)–읍군(邑君)–읍장(邑長) 등의 특수 작위를 수여했는데, 이 작위는 군(郡)·현(縣)의 지배에 편입된 이민족 세력에게 조세와 징병의 의무를 부과하고자 내린 특전이었다. 《삼국지》에는 한의 군장들에게 귀의후와 읍군 작위를 수여했다고 전한다. 또한 중랑장(中郞將)–도위(都尉)–백장(伯長) 등의 관직도 제수했다고 하는데, 이는 이민족 부대를 편성했을 때 그 부대의 각급 지휘관 직책에 해당된다.[8]

이에 따라 한의 군장들을 대상으로 조세 및 징병의 의무를 부과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9] 실제로 한인(韓人)으로 구성된 부대를 편성했거나 조세를 징수한 사실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작위나 관직을 받으면 인수(印綬)와 의책(衣幘)이 함께 수여되었는데,[10] 실제로 인수 유물은 한반도 중·남부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특이하게 '천장(仟長)'이나 '백장(佰長)' 작위를 수여한 경우도 다수 보이고 있다. 《삼국지》에는 '하호(下戶)'들도 군(郡)에 조알(朝謁)하면서 인수와 의책을 받아가서, 이를 받은 사람이 천 명에 달한다고 전하는데,[11] 읍장으로 책봉하기 곤란한 군소 유력자인 '하호'를 대상으로 읍장보다 격이 낮은 작위를 수여한 것으로 짐작된다.

고고학계에서는 해당 기록을 기리영 전투와 연관지어, 삼한 사회 내부에서는 위나라의 군사적 우위에 근거한 영향력이 널리 확산되었고, 군장이나 그 예하의 유력자들이 토산품을 공물로 제공하면서 그 대가로 받은 인수와 의책을 위나라와의 우호적 관계를 과시하는 위세품(威勢品)으로 활용하는 현상이 확산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양상을 단순한 명분론적 관계로 여겨 서진 이전의 조공책봉관계로 보는 역사학자의 견해도 있다.


[1] '우두머리'라는 뜻의 한자어로, '거수(渠首)'로도 쓰인다. 간혹 한민족 고유의 어휘로 여기는 경우가 보이는데, 실제로는 고전 한문에서 이민족의 수장이나 종교 지도자를 대상으로 보편적으로 쓰인 어휘다. 1세기 초의 염사국의 수장이었던 염사치가 진한의 우거수(右渠帥)로 지칭되기도 했다.[2] 참고로 《삼국지》는 서진 당시에 진수가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하는 기록이고, 《후한서》는 남북조시대에 쓰인 문헌으로 보다 나중에 등장했다. 때문에 《후한서》에서 《삼국지》와 다르게 서술한 부분은 대체로 《삼국지》를 잘못 이해하여 발생한 것으로 여겨진다.[3] Schuessler의 후한 시기 재구음(2007)에 의거한 것이다.[4] 이후 일본에서도 이병도와 같은 의견이 제출되면서, 일본 학계에서도 신분활국에 우호가 주어졌다는 견해가 통설이 되었다. 다만 해당 대목을 대체로 "臣雲遣支報, 安邪踧支, 臣兒不例, 拘邪秦支廉"으로 교정하여 "안야국의 축지리 신지, 신분활국의 아불례 신지"로 해석하는 차이가 있다.[5] 尹龍九, 1999, 「三韓의 對中交涉과 그 性格」, 『國史館論叢』 第85輯.[6] 현재 통용되는 《삼국지》 판본에서 '점리비국(占離卑國)'으로 표기된 것이 《한원(翰苑)》에선 '고비리국(古卑離國)'으로 표기된 사례가 있다. '비리(卑離)'는 백제어 '부리(夫里)'와 신라어 '벌(火·伐)'과 동일한 어휘로 추정되며 다른 마한의 여러 나라에서도 국호로 쓰인 점으로 볼 때, '점리비국'은 오기(誤記)로 인한 도치이고 《한원》의 '고비리국'이 올바른 표기로 파악된다. 이처럼 현재 통용되는 《삼국지》의 판본에서 도치의 사례를 확인할 수 있는 만큼, '분신(濆臣)'은 '신분(臣濆)'의 잘못된 도치라는 견해를 작위적인 해석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7] 고고학 연구성과에 따르면 3세기 중엽에는 백제는 한강 중·하류 유역의 중심 세력으로, 신라는 영남 지방 동부 일대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한 것으로 파악된다.[8] 중랑장은 군(軍)의 지휘관으로 장군과 동급이다. 군(軍)의 예하부대를 부(部)라고 하는데, 그 지휘관은 도위나 사마(司馬)였다. 부의 예하 부대를 곡(曲)이라고 하며, 그 지휘관은 후관(候官)이었다. 원래 이민족 편성 부대의 중랑장·사마 등은 한인(漢人)으로 임명하여 지휘권을 독점해왔으나, 위나라 때부터 이민족 수장을 사마·후관보다 격을 높인 도위·백장으로 임명하여 그 지휘권을 위임한 것이다. 여기서 백장(長)은 아래에 나오는 백장(長)과 글자가 다름을 유의.[9] 《삼국지》에는 비류수 전투옥저동예가 일시적으로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자, 그들을 대상으로 조세와 징병의 의무를 부과했다고 쓰여있다.[10] 인수는 도장을 의미하고, 의책은 옷과 모자를 의미한다. 당시엔 작위의 등급에 따라 도장의 재질과 도장끈의 형식에 차등을 두었는데, 의복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11] 오죽하면 한인(韓人)들은 의책을 좋아하는 풍속이 있다는 언급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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