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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국(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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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lude(틀:토론 합의, 토론주소1=NondescriptCapriciousThreateningTray, 합의사항1=한사군과 미소군정을 틀에 존치하는 대신 첨자로 추가설명, 토론주소2=AnUtopianAndLudicrousThrill, 합의사항2=대한민국의 역대 공화국들은 글자 크기를 줄여서 존치, 토론주소3=SelfishFaultyLongingTurkey, 합의사항3=부제에 강조 표현을 삽입하기, 토론주소4=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4='구한말(개화기)' 서술을 '개화기'로 서술, 토론주소5=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5='남북국시대' 서술은 존치, 토론주소6=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6='삼국시대' 시대구분 표 내 칸은 세로 3칸으로 분리하며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중 첫 번째 칸은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서술 -> 두 번째 칸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서술하며 -> 세 번째 칸은 '고구려'/ '백제'/ '신라'만을 서술, 토론주소7=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7= '주호'는 삭제하되 -> '탐라' / '우산' 서술은 존치, 토론주소8=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8=조선건국준비위원회 서술은 존치하되 -> 남북한 / 임시정부 / 미군정 / 소련군정을 제외한 현대의 단체들의 이름 및 수식어는 모두 삭제한다., 토론주소9=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9=세로 열에 height를 모두 동일하게 지정하여 시각적으로 각 칸이 구별될 수 있도록 한다., 토론주소10=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10=본 틀 내 가야에 대한 첨자로 '가야는 신라의 복속 이후에도 사료에서 존재가 확인되어 7세기 중엽까지 반독립적 상태로 존속했다는 학설도 있음'을 서술한다., 토론주소11=RealChildlikeExclusiveJewel, 합의사항11=근대시점을 개화기\, 일제강점기로 구분하고 해당 정치체로서 개화기에는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 조선\, 대한민국 임시정부만을 링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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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국 · 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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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국
辰國

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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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국의 영역 (추정)
존속 기간<colbgcolor=#fff,#191919>기원전 4세기? ~ 불명
위치한반도 중남부지역
정치 체제복합족장사회(Complex Chiefdoms)
국가 원수한왕(韓王)
종족한(韓)민족, 예맥, 숙신[1], 한족[2]
언어고대 한국어
성립 이전청동기시대
(송국리유형, 천전리유형, 검단리유형)
멸망 이후삼한
현재 국가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북한|]][[틀:국기|]][[틀:국기|
속령
북한
]][일부지역]

1. 개요2. 역사
2.1. 문헌 기록2.2. 남한 일대를 아우르는 진국은 존재하였는가2.3. 고고학2.4. 왕사
3. 발해, 태봉과의 관계?4. 같이 보기5. 관련 유물

[clearfix]

1. 개요

진국(辰國)은 고조선부여와 공존했던 한반도 중남부지역에 일대에 존재했던 다민족 연맹 국가이다.

2. 역사

2.1. 문헌 기록

기록상에서 진국이 역사에 나타난 사례는 다음과 같다.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古之辰國也
[한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진한은 옛날의 진국이다.

{{{#!wiki style="text-align:right"
삼국지》(三國志). 한(韓)의 기록}}}
이후의 기록들을 보면 과거에는 셋 중 진한이 가장 강해서 진국을 대표했으나, 마한에게 주도권을 빼앗겨 마한이 진국을 대표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진한과 진국의 이름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 凡七十八國 … 皆古之辰國也
한은 세 갈래가 있는데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진(변한)이며... 모두 78개국이다... 전부 옛날의 진국이다.

{{{#!wiki style="text-align:right"
후한서》(後漢書) . 한(韓)의 기록}}}
《후한서》에는 삼한 모두의 옛땅이 '진국'(辰國)이라고 하는 반면 《정사 삼국지》에서는 삼한 중 일부분인 진한만이 진국인 것처럼 따로 기록돼 있어 큰 대조를 보인다. 《후한서》의 진국은 진왕(辰王)이 직·간접적으로 다스리는 영토 전체를 칭한 표현인 것으로 보이며, 《삼국지》 쪽을 우선시해서 진한이 진국의 전신이라는 방향으로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일단 '진'한이란 이름부터 진국과 관련성을 추정할 수 있기도 하다.
魏略曰 初右渠未破時 朝鮮相歷谿卿以諫右渠不用 東之辰國 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
일찍이 우거(右渠)가 격파되기 전에,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이 우거에게 간(諫)하였으나 (그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진국(辰國)으로 갔다. 그 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 곳에 산 사람이 2,000여 호(戶)나 되었는데, 그들도 역시 조선(朝鮮)·진번(眞番)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wiki style="text-align:right"
삼국지》의 <오환선비동이전>}}}
위략》(魏略) <동이전>(東夷傳)의 기록을 《삼국지》에서 인용했다.
傳子至孫右渠, … 眞番·辰國欲上書見天子, 又雍閼弗通.
(위만의 왕위는)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 우거까지 이르렀다. (중략) 진번과 진국이 천자께 글을 올리려 했으나 조선이 계속 가로막고 있어 한나라와 교통하지 못하고 있다.

{{{#!wiki style="text-align:right"
《한서》(漢書) 권95 <서남이양월조선전>(西南夷兩粤朝鮮傳) 조선(朝鮮)의 기록}}}
전한과 통교하려했다는 기록.
馬韓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目支國, 盡王三韓之地.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辰王)으로 삼았고, 목지국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 지역의 왕으로 군림하였다.
후한서》 〈동이전〉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爲王.
(변한·진한 24국) 가운데 12국은 진왕에게 신속(臣屬)되어 있다. 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으로 임금을 삼아 대대로 세습하였으며, 진왕이 자립하여 임금이 되지는 못하였다.
삼국지》 권30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中 변진
위에서는 삼한 중에서 마한이 가장 강력하다고 나온다.

또한 진국이라는 명칭이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진국을 의미한다고 파악되는 내용은 더 있다.

하나는 위만 이전 고조선의 지배자였던 준왕(기원전 250년경 인물)이 고조선의 왕좌에서 쫓겨난 이후, 남쪽 한지로 와서 '한왕'을 칭했다는 기록이며, 다른 하나는 삼한 성립 이후 마한의 맹주인 목지국 왕이 '진왕'이란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이다. 이 때문에 '진왕' 또는 '한왕'이라는 명칭이 진국을 대표하며, 이후 원삼국시대 대중국 교류 등에 있어 목지국 왕이 대표로서 '진왕'을 칭한다고 파악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기》에는 판본에 따라 ‘진번방중국'(辰番旁衆國), ‘진번방진국'(辰番旁辰國) 두 가지 기록이 공존한다. 이에 진국을 역사적인 실체로 인정하는 입장이 있는 반면 진번 곁에 있는 중국(衆國), 즉 여러 나라라는 보통 명사로 해석하는 입장도 있다. 따라서 진국이라는 존재 자체를 부인하거나, 또는 진국을 여러나라 중의 하나로 보는 등 그 설이 다양하다.

이들 중 《후한서》를 근거로 하여 진국을 한반도 남부 지역의 토착 정치집단군 전체에 대한 명칭으로서 ‘신지(臣智)의 나라’라는 뜻을 가진 집합 명사로 이해하기도 하며 이와 달리 《삼국지》의 자료를 취하면서 진국을 중남부 일부 지역에 성립되어 있었던 특정 집단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즉, '진국'이란 요동(遼東)의 세력이 점점 남하하여 지금의 경상도(진한)에 최종 정착지를 얻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한반도 중부 지역에 세운 정치집단이라는 것이다. 또, 위만(衛滿)에게 쫓겨나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 일대에 자리잡은 고조선 준왕(準王)의 치소가 진국이며, 이 준왕계의 진국이 경상도 지역으로 이동해 진한의 일부를 구성했다는 해석들이 있다.

하지만 자세한 기록들이 거의 없어 관련한 통일된 학설도 없으므로, 교과서에서는 고조선과의 중계무역만 다루고 그 외는 다루지 않는다.

2.2. 남한 일대를 아우르는 진국은 존재하였는가

현재 남한 지역 일대를 아우르는 진국이라는 정치체가 존재하였다는 논의는 핵심적으로 후한서 중 韓의 영역이 모두 옛 진국(辰國)이었다는 내용 및 마한의 왕이 진왕(辰王)으로도 지칭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나 마한의 왕이 노역을 피해 이주해 온 진(秦)나라 사람들을 나라 동쪽 땅을 분할해 살게 한 것이 시초로 된[4] 지금의 경상북도 서부 내지 일대에 성립된 진한(辰韓)을 가장 강대했던 마한의 왕이 진왕(辰王)진한(辰韓)의 왕(王)에 올라 통치권을 행사했다고 한다.[5] 또한 진한과 진나라가 서로 말이 비슷했다고 나온다.
진한(辰韓)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原註]

≪후한서≫에 이르기를, “진한의 늙은이(耆老)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진나라 망명자들이 한국으로 오매 마한이 동쪽 지역 땅을 떼어 주었다. 서로를 부를 때 도(徒)라고 하니, 진나라 말과 비슷하였으므로 혹은 진한(秦韓)으로 이름했다.’고도 하며 열두 개 작은 나라가 있어 각각 1만 호로써 나라를 일컬었다.”라고 하였다.

또 최치원이 말하기를 “진한은 본래 연나라 사람으로서 도피해 온 자들이므로 탁수(涿水)의 이름을 따서 그들이 사는 고을과 동리 이름을 사탁(沙涿)·점탁(漸涿) 등으로 불렀다.”신라 사람들의 방언에 탁(涿) 자를 읽을 때 발음을 도(道)라고 한다. 그러므로 지금도 혹 사량(沙梁)이라 쓰고, 양(梁)을 또한 도(道)라고도 읽는다.)신라 사람들의 방언에 탁(涿) 자를 읽을 때 발음을 도(道)라고 한다. 그러므로 지금도 혹 사량(沙梁)이라 쓰고, 양(梁)을 또한 도(道)라고도 읽는다.[原註]
삼국유사 권 제1 제1 기이(紀異第一) 진한(辰韓)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y_001r_0020_0170_0010
辰韓은 馬韓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노인들은 代代로 傳하여 말하기를,
“옛날의 망명인으로 秦나라의 苦役를 피하여 韓國으로 왔는데, 馬韓이 그들의 동쪽 땅을 분할하여 우리에게 주었다.”고 하였다.
・・・
지금도 秦韓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처음에는 6國이던 것이 차츰 12國으로 나뉘어졌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30 동이전(東夷傳) 한(韓)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jo_004r_0010_0070_0110
辰韓은 그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되, 秦나라에서 亡命한 사람들로서 苦役을 피하여 韓國에 오자, 마한이 그들의 동쪽 지역을 분할하여 주었다 한다.

그들은 나라(國)를 邦이라 부르며, 弓은 弧라 하고, 賊은 寇라 하며, 行酒를 行觴이라 하고, 서로 부르는 것을 徒라 하여, 秦나라 말과 흡사하기 때문에 혹 秦韓이라고도 부른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한(韓)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jo_003r_0010_0070_0040
위 문헌 기록들은 辰韓 외에 秦韓이라는 이칭이 상용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지금도 秦韓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라고 기록되었는데 진한(辰韓)이 본래 秦韓으로 쓰였음을 시사하며 진한(辰韓)의 진(辰)이 진(秦)의 동음동의어(同音同義語)임을 명료히 확인하고 있다.

또 '韓'은 고대에 신라에서 '國'을 뜻하는 말로 사용됨이 확인된다.
“신라 제27대에 여왕이 왕이 되니 도(道)는 있으나 위엄이 없어 구한(九韓)이 침략하였다.

만약 용궁 남쪽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곧 이웃나라의 침입이 진압될 수 있다. 제1층은 일본, 제2층은 중화, 제3층은 오월, 제4층은 탁라(托羅), 제5층은 응유(鷹遊), 제6층은 말갈, 제7층은 거란, 제8층은 여적(女狄), 제9층은 예맥(穢貊)이다.”
삼국유사 권 제3 제4 탑상(塔像第四)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y_003r_0020_0060_0050
≪해동안홍기(海東安弘記)≫에 이르기를 “9한이란 것은 1. 일본(日本), 2. 중화(中華), 3. 오월(吳越), 4. 탁라(乇羅), 5. 응유(鷹遊), 6. 말갈(靺鞨), 7. 단국(丹國), 8. 여진(女眞), 9. 예맥(濊貊)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 제1 제1 기이(紀異第一) 마한(馬韓)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y_001r_0020_0040_0020
즉 辰은 辰으로 의역됨이 확인된다고 볼 수 있다.
辰王은 月支國을 통치한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30 동이전(東夷傳) 한(韓)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jo_004r_0010_0070_0020
또 위 문헌 기록들은 월지국(月支國)을 통치하는 마한의 왕이 여러 문헌에서 '진왕(辰王)'으로 지칭된 연고가 마한이 秦(중국)의 난민들에게 마한의 동부 영토를 할양하고 마한의 왕이 그 영지의 작위를 스스로 辰王진한(辰韓)의 왕(王)으로서 통할했던 것에 있음을 시사하고 있으며 진왕(辰王)과 진국(辰國)의 진(辰)은 위 문헌 기록에 의하여도 오직 삼한(三韓)의 진한(辰韓)과 연관될 뿐, 소위 韓이 성립되기 이전에 한반도 남부를 아우르는 정치 집단의 명칭이라는 것에는 하등 시사점이 존재하지 않으며 후한서와 같이 전기의 사료를 베껴 후대에 재편한 내용의 와전에 의한 것이고 지나친 해석에 불과하다. 한반도를 아우르는 진국(辰國)이라는 정치체가 존재하였다는 가설은 여러 문헌 기록에 의하듯이 진한(辰韓)의 성립 배경과 진국(辰國)과 진한(辰韓)이 명칭에 있어서 서로 연관된다는 전제와 중국의 왕조 진(秦)에서 유래되는 진한의 명칭을 재고한다면 성립할 여지가 없는 설로 일축된다고 볼 수 있으며 문헌 고증학적으로 과도한 학설이라 말할 수 있다.
韓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馬韓, 둘째는 辰韓,세째는 弁韓인데, 辰韓은 옛 辰國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30 동이전(東夷傳) 한(韓)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jo_004r_0010_0070_0010
이 기록이 마한과 변한, 진한이 이전에 모두 진국으로 하나의 나라였다는 취의의 기록이라고 한다면 '옛 辰國'이 구태여 辰韓에만 국한되어 해설되지 않았을 것임이 명백히 다분하며 이 기록에서 마한, 변한, 진한 중 진한만을 옛 진국과 연관시킨 것은 진한의 변혁된 정치 체제를 옛 체제와 비교하여 이른 것임이 개연적으로 분명하다.
已柢國·不斯國・・・이 있어서, 弁韓과 辰韓의 합계가 24國이나 된다.

그 중에서 12國은 辰王에게 臣屬되어 있다.

辰王은 항상 馬韓사람으로 王을 삼아 대대로 世襲하였으며, 辰王이 자립하여 王이 되지는 못하였다.
魏略: 그들은 옮겨온 사람들이 분명하기 때문에 馬韓의 제재를 받는 것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30 동이전(東夷傳) 한(韓)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jo_004r_0010_0070_0120
삼국지(정사)를 포함한 이전에 쓰인 기존의 역사서를 후대에 재편한 후한서의 기록과 대조되게 삼국지 위지에서는 위와 같이 진왕은 (변한·진한 24국) 중 12국만을 다스렸다고 구체적으로 기록되었으며 위략(魏略)에서 "그들은 옮겨온 사람들이 분명하기 때문에 마한의 제재를 받는 것이다."라는 곳에서도 보듯이 삼한(三韓) 중 진(辰)이 秦(중국)의 난민들에 의해 성립된 집단임이 확인된다.
辰韓의 王은 항상 馬韓 사람을 세워 대대로 이어 가고, 진한 스스로 왕을 세울 수 없었으니, 그들이 분명히 흘러 들어와 산 사람이기 때문이다. 항상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
양서(梁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신라(新羅)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jo_008r_0010_0040_0010
準王은 그의 近臣과 宮人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를 경유하여 韓의 지역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韓王이라 칭하였다.
魏略: 準의 아들과 친척으로서 나라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그대로 韓氏라는 姓을 사칭하였다. 準은 海外에서 王이 되었으나 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30 동이전(東夷傳) 한(韓)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jo_004r_0010_0070_0040
또 위지에 의하면 마한의 성립은 준왕이 '한(韓)'으로 남하해 세운 것이 시초이며 당시에 준왕이 스스로를 '韓王'으로 칭했으며 그의 아들을 비롯한 후손들도 당시에 '韓'이라는 성을 사용했다는 기록에 의하여도 단군조선 당대에도 남한 일대는 韓으로 지칭되는 부족 집단이 존재했으며 그 지역을 대국적으로 통칭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일찍이 우거(右渠)가 격파되기 전에,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이 우거에게 간(諫)하였으나 (그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진국(辰國)으로 갔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30 동이전(東夷傳) 한(韓)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jo_004r_0010_0070_0050
진국(辰國)이 한반도 남부를 아우르고 있었다는 설에 의하면 여기서 역계경이 향하였다는 진국은 남쪽(南之)으로 해설됨이 마땅하기에 진국은 고조선의 동녘 내지 동남에 위치하였음을 내포한다.

2.3. 고고학

고고학적 관점에서 진국은 기원전 4세기경부터 '세형동검'문화(細形銅劍文化)[8] 혹은 '점토대토기'문화(粘土帶土器文化)가 성행했던 한반도 중서부(서남한)의 충청, 호남을 중심으로 한 중남부지역에서 청동기 제작과 보급을 통해 원거리 교역을 주관하면서 일정한 범위의 정치 집단들을 통할하던 정치적 구심체로 해석할 수 있다. #

진국 사회는 정치적인 지배자가 농경의례를 비롯한 각종 제사의식과 교역을 주관하는 동시에, 농경기술을 지도하거나 행정·군사 기능을 겸하는 제정일치사회(祭政一致社會)였다고 본다. 그리고 이 지배 집단의 주된 묘제는 적석목관묘(積石木棺墓)[9]와 토광묘(土壙墓)였다. 경제적으로는 석제 농기구와 목제 따비·괭이를 사용해 벼와 함께 조·기장·수수 등 잡곡을 경작하는 농업 경제를 기반으로 한 사회였다.

진국 시기 지배자의 대표적 분묘 유적으로 충청남도 당진 소소리 유적, 충청북도 충주 호암동 유적, 부여 합송리 유적, 장수 남양리 유적, 전남 화순 대곡리 유적 등이 있다. 세형동검·동과·동모·세문경과 함께 일부 유적에서는 중국 전국시대의 주조 철제 도끼·끌 등이 부장되어 있어, 서북한의 대동강 유역과의 교류 관계를 시사하고 있다.

2.4. 왕사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진왕(辰王)은 마한의 도읍국 월지국(月支國)을 통치했다고 한다. 또 이 지위는 항상 마한 사람들이 올랐고 해당자가 스스로 자립해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고 한다. 월지국의 군장 등위 대상을 도읍지 월지국의 국인이 독점하고 있지 않았고 마한 각지의 유력자들이 여럿에 의해서 월지국의 군장(마한왕, 진왕)으로 선출되었음이 시사된다.

진국의 군주에 관해서는 문헌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삼국지》 동이전에 따르면 3세기 중엽에 한(韓) 연맹체의 수장국인 목지국의 군장은 '진왕(辰王)'을 자칭하고 있다고 전한다. 또한 이 '진왕'은 진한변진도 다스리지만 그 지위는 마한이 독점한다고 하는데, 이를 통해 목지국에서 독점적으로 세습하던 지위는 아닌 것으로 보여진다.

3. 발해, 태봉과의 관계?

발해 건국 초기의 국호인 진국(震國, 振國)이나 진단(震旦), 궁예가 태봉(후고구려)을 세운 뒤 중간에 잠시 썼던 국호인 마진(摩震) 등이 진국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도 있으나, 근거가 빈약하다. '마진'은 불교의 '마하진단'(摩訶震旦, Maha Cinisthana)을 줄여서 끼워맞췄거나, 이 진국이 아니라 마한과 진한의 머릿글자를 합친 것이라는 추측도 있고. 고대의 음가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발음이 같은 이두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도 무리다. 그래도 연관이 없다는 확실한 근거도 없으니, 연관성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을 열어둘 수는 있겠다.

4. 같이 보기

5. 관련 유물


[1] 고조선 멸망 후 예맥, 숙신 등 유민들이 내려와 마한과 진한에 소국을 세워 삼한의 맹주 목지국을 위협하기도 했다.[2] 위만조선으로 한족들이 유입되었다.[일부지역]강원도 지역 일부.[4] '진한(辰韓)'이라는 지역의 구분, 강역이 형성되게 된 연혁에 대한 것에 불과하며 경상도 지역의 주민이 대부분 중국의 난민이었다는 논지와는 하등 관련이 없으니 주의 바란다. 토착민이 살고 있는 곳에 일부 난민이 온건 역사적으로도 흔한 일이었다.[5] 후한서는 후대에 삼국지 등 기존 사료를 취합하여 베껴 쓴 부분이 많기 때문에 月支國이 目支國으로 와전되는 등 오류를 찾을 수 있다.[原註] [原註] [8] 세형동검은 거의 청천강 이남에서만 발견되고 있어, "한국식 동검"으로 불리기도 한다.[9] 그 외에 옹관(독무덤)도 보이는데 옹관은 고인돌처럼 진국 출현 이전부터 한반도 전역에서 존재해오던 묘제이다. 초기 국가 시대에 들어서는 독립적으로 분포하기도 하지만 목관묘나 석관묘와 함께 발견되기도 한다.## 그리고 참고로 목'관'묘와 목'곽'묘는 다르다. 나무 덧널로 널방을 만드는 목곽묘 문화는 진국 이후 시기에 유입되었는데,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는 서북한 지역의 낙랑 무덤에서 나타나며, 한반도 중·남부에서는 영남 지역에서 삼한 시대에 해당하는 2세기 중엽부터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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