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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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한자 표기가 다르더라도 한글 표기가 같으면 합산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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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8080><colbgcolor=#008080> 관향 | 충청남도 부여군 | ||
시조 | 온조왕(시조)/서존(徐存)(중시조) (『부여 서씨 세보』 내 주장) 서청습(徐淸習)(시조)/서수손(徐秀孫)(중시조) (『만가보』 내 주장) | ||
파조 | 관호당공파, 만호공파, 교위공파 직장공파, 소호공파, 정의공파 참의공파, 통정공파, 석선공파 만죽공파, 학생공파 | ||
집성촌 |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육곡리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승치리 | ||
평안남도 덕천군 풍덕면 율곡리 | |||
인구 | 17,145명(2015년) | 국내 280위 | ||
링크 | 서씨일가연합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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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충청남도 부여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조선 후기 이후 백제 의자왕의 태자 부여융이 당에서 서(徐)라는 성을 사여 받았다고 주장하며 백제의 국성(國姓)의 뒤를 이었다고 하여 스스로 일가의 근원을 온조왕까지 소급시켜 본다.다만 부여융 서씨 사여설은 사실로 보기에 의문점이 많으며, 1925년 『부여 서씨 세보』에 따르면 그 뒤 계보가 전해지지 않는다고 하여 공백 상태가 보이다가 서존(徐存)으로 그 뒤를 잇고 있다. 다만 이 또한 굉장히 문제가 복잡하여, 『증보문헌비고』에서는 본파의 시조로 서수손(徐秀孫)을 언급하나 『증보문헌비고』에서는 별파의 시조로 나타났던 서존이 『부여 서씨 세보』에서는 부여 서씨의 (중)시조인 것으로 인식이 바뀌었고, 『만가보』에서는 『부여 서씨 세보』에서는 2대조라고 하는 서청습(徐淸習)을 시조로 두고 서수손을 그 후손이라고 하였다. 그 밖에 이천 서씨, 대구 서씨 등 다른 서씨와 같이 서신일(徐神逸)의 후계라는 인식이 18세기에 나타나 『증보문헌비고』에 반영되어 있지만, 『부여 서씨 세보』에서는 이를 강하게 부정하고 있다.
2. 역사
1790년 무렵의 내용을 담고 있는 『증보문헌비고』(권 50, 씨족 5)[1]는 서씨(전체) 조목에서 "백제가 망하고 태자 부여융이 당나라에 들어가니 당나라에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를 제수하고 부여(扶餘)의 여(餘) 자를 고쳐서 서(徐) 자라 하였다"고 하는 주장이 일각에서 나왔다고 하여 부여 서씨의 백제 왕실 후계설을 언급하였다. 이는 후술하듯 『부여 서씨 세보(扶餘徐氏世譜)』에서 인용한 문건으로 백제 왕실 후계설을 언급했다고 하는 『계해초보(癸亥草譜)』가 1663~1664년 무렵의 저작임을 고려하면, 17세기 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의식으로 볼 수 있다. 이 주장은 현대에도 유명하지만, '의식'과 '사실' 사이의 간극이 굉장히 큰 주장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사실성을 별도로 논할 필요가 있으므로 아래 별도 단락에서 다룬다.한편 『증보문헌비고』에서 서씨 전체 조목 뒤에 설정된 부여 서씨조는 부여 서씨의 시조를 꼽으면서 첫 머리에 승사랑(承仕郞)을 지낸 서수손(徐秀孫)을 기록했다. 한편 서수손의 증손으로 서익(徐益, 1542~1587)을 언급했는데, 서익이 16세기 중후반의 인물이며 승사랑은 조선 왕조의 관직이므로 서수손은 15세기 후반 정도의 인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후술하겠지만 이에 대해서는 『부여 서씨 세보』 내용상의 근거도 있다.
『증보문헌비고』는 이어서 부여 서씨에서 또 다른 일파를 이룬 몇몇을 꼽으면서 고려 말에 상서를 지냈다는 서존(徐存) 외에 서춘(徐春), 서박(徐樸), 서봉상(徐鳳翔)을 일파를 이룬 인물로 꼽았다. 서존 외에 이 가운데 분명히 시대성을 부여할 수 있는 인물은 14세기에 보이는 판내부시사(判內府寺事)를 지냈다는 서춘 정도이다. 곧 가장 먼저 언급된 서수손보다 서존과 서춘의 활동 연대가 이른 것으로, 『증보문헌비고』의 내용을 받아들인다면 설명 그대로 각각 다른 계파를 이루고 있었던 것을 병렬시켰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한편 19세기 후반에 해남 윤씨 집안에서 만들어진 『만가보』에서는 부여 서씨 인물의 첫 머리로 동정(同正)을 지낸 청습(淸習)을 언급하고, 그 '후손(後)'으로 서수손이 있었다고 언급했다. 중간의 세대를 알 수 없는 경우라도 '몇 대손이다' 정도로 간추려 놓은 다른 집안에 비해 몹시 심플하다는 점이 걸리지만, 어쨌든 이에 따르면 서수손은 부여 서씨의 첫 대로서 시조는 아닌 셈이다. 또한 1920년대에 만들어진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는 『증보문헌비고』를 대체로 따르면서도 서춘조에 주석을 보태 "한 곳에서는 부여 서씨는 별장(別將) 동정(同正) 서청습의 후손이라고 하였다(一云扶餘徐氏別將同正徐淸習后)"고 기록했는데, 『만가보』와 같은 계통의 문건일 것이다.
그런데 1925년 편찬된 『부여 서씨 세보(扶餘徐氏世譜)』에서는 후술하는 백제 왕실 후계라는 인식에 따라 온조왕부터 의자왕까지를 열거하고 그 뒤를 비우고서 그 다음을 서존(徐存)을 (중)시조로 해 잇고 있다. 아예 "그(부여융) 뒤의 계보는 사라져 상서공(尙書公, 서존)부터는 증빙할 수 없으며, 몇 대조인지(도) 알지 못한다(其後系失, 無徵於尙書公, 不知爲幾世祖)"라고 하면서 서술을 시작해 2대째에 서청습을 두었고, 이후 청습-효리(孝理)-찬(贊)-희팔(希八) 대까지 1대에 1명씩의 이름을 기록한 이후 희팔 아래의 여러 자식들을 기록하였다.
이런 서존 (중)시조설은 물론 청습을 시조라고 한 『만가보』와 상충한다. 한편 『부여 서씨 세보』에서 서수손에 대해서는 11대로 정리되어 있는데, 이는 고려 말의 인물이라고 했던 서존의 11대손이 15세기 후반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 서수손이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증보문헌비고』와 『조선씨족통보』와 충돌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부여 서씨 세보』 내적 체계에서는 서존을 고려 말이 아닌 고려의 인물이라고만 해 이 문제를 피했다. 『부여 서씨 세보』는 또한 『증보문헌비고』의 서춘(徐春)으로 보이는 서춘(徐椿)과 서박을 6대, 서봉상을 9대째의 인물로 편입시켜 부여 서씨를 단일 계통으로 정리했다.
이렇게 되면 결국 다음과 같은 의문들이 남는다.
- 서존은 『증보문헌비고』와 같이 고려 말의 인물인가, 『부여 서씨 세보』와 고려 대의 인물일 뿐 고려 말의 인물이 아닌가?
- 서수손은 『증보문헌비고』와 같이 본래 시조였는가, 『만가보』에서 서청습의 후손으로 나타난 것이나 『부여 서씨 세보』에서 11대로 나타난 것과 같이 계보 중간에 위치한 인물이었는가? 만일 11대라면, 왜 그가 시조로 기록되었는가?
- 부여 서씨는 『증보문헌비고』와 같이 서존계/서수손계/서춘계와 같은 여러 계통이 병렬되는 다원적 구조였는가, 『부여 서씨 세보』에서 정리한 것과 같이 단일 계통이었는가?
- 청습은 『만가보』에서와 같이 시조인가, 『조선씨족통보』를 나름대로 조정해 볼 수 있듯 파조인가, 『부여 서씨 세보』와 같이 2대조인가?
이 문제는 굉장히 복잡한 문제이므로 아래 별도 단락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그 밖에, 18세기 무렵부터 부여 서씨는 이천 서씨와 동계라는 주장에 동조하기도 했으며 이에 따르면 부여 서씨의 시조 또한 이천 서씨의 주장대로 서신일(徐神逸)이거나, 아예 기자나 단군조선의 여수기(余修己)라는 주장에 동조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굉장히 문제가 많으며 1925년의 『부여 서씨 세보』에서는 부여 서씨 측에 의해 강하게 부정되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래에 어느 정도 다루겠지만, 이천 서씨 문서를 통해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어쨌든 막연하나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부여 서씨에게 14세기 후반~15세기의 여말선초가 굉장히 중요했던 시기라는 것이다.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서존과 서춘, 서수손이 그 사이에서도 거리가 꽤 있으나마 그 무렵의 인물이고, 『부여 서씨 세보』에 따르면 그 무렵보다 조금 앞선 인물인 서희팔의 아들 대부터 계보가 갈라지며 비교적 자연적인 형태의 계보가 만들어지게 된다. 이는 『세종실록지리지』에서 부여현의 토성으로 서씨가 언급되어 지역 기반을 갖고 있는 것과도 부합한다.
이후 조선 중기부터 이름을 날린 사람들이 많았는데, 서익(徐益)은 조선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의주목사를 지냈고,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영향을 받아 육조방략(六條方略)으로써 북방을 선무(宣撫)하였다. 지우(志友)였던 이이(李珥)와 정철(鄭澈)이 정여립(鄭汝立)으로부터 탄핵을 받자 이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되기도 하였다.# 시조를 잘하여 명망이 높았다. 자신의 청탁을 거절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에게 앙심을 품고 훗날 파직시키는데 일조한 흑역사도 있다. 서익의 아들 6형제 중 장남 서용갑(徐龍甲)은 선조 때 영양현감과 덕천군수를 지냈다. 그 뒤 광해군 때 사색당파의 하나인 대북파가 일으킨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넷째 아우인 서양갑(徐羊甲)과 함께 화를 입었다. 후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현종 때 직간(直諫)을 잘하여 이상진(李尙眞) 등과 더불어 <오직(五直)>으로 불렸던 서필원(徐必遠)은 서용갑의 손자이다. 서필원은 목민관으로 백성을 사랑했던 명 관리였다. 호남에 대동법을 확대 정착시켜 백성을 도탄에서 구했다. 바른 말 잘하고 청렴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그러다보니 고관대작이 됐으면서도 경신대기근 때 굶어죽었다. 영의정 김육이 살아생전 아끼고 인정했던 사람이었다.
그 밖의 인물로는 서필원의 아들로 목사(牧使)를 역임했던 서경조(徐敬祖), 의금부 도사 서정훈(徐鼎勳), 사헌부 감찰 서계훈(徐啓勳), 돈녕부 도정 서운휘(徐雲輝) 및 서석조(徐錫祚) 등이 유명하다. 호조정랑 서규달(徐逵達), 현감 서진문(徐鎭文), 공조참판 서무덕(徐武德) 등도 등용되었다.
2.1. 시조 문제: 백제 왕실 후계설 및 부여융 개성(改姓)설
2.1.1. 당나라 사성(賜姓)설
『부여 서씨 세보』에서 인용한 『계해초보(癸亥草譜)』에서는 "백제의 후예는 실로 부여의 서(徐)(씨)이나 오래되어 세대(世代)를 고찰할 수 없다(百濟之後實爲扶餘之徐而久遠世代無可攷矣)"고 했는데, 서필원(1614~1671)을 말하는 '정의공(正毅公)'이 처음 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보아 그가 살아 있던 계해년인 1663년에 이미 그런 인식이 잡혀 있었던 듯하다.이후『증보문헌비고』에서는 서씨(전체)에 대한 조목에서 "백제가 망하고 태자 부여융(扶餘隆)이 당(唐)나라에 들어가니 당나라에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를 제수하고 부여(扶餘)의 여(餘)자를 고쳐서 서(徐)자라 하였다."고 하는 전승을 기록했고, 『부여 서씨 세보』의 본문 또한 부여융이 그 뒤로 본국에 돌아와 서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하면서 온조왕까지 시조 인식을 소급시켰으며,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망한 후 부여융은 당나라로 끌려갔는데 이때 당고종(唐高宗)에게 서씨(徐氏)성을 사성받고 백제의 구지에 설치된 통치기구인 웅진도독부[2]의 장관 웅진도독(熊津都督)에 임명된 후 다시 본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런 주장은 현대에도 굉장히 유명하며, 부여 서씨 측에서는 자신들이 백제 왕실의 후손이라는 의식을 갖고 각종 사업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주장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의 문제이다.
일단, 이 주장은 조선시대 당대부터 신뢰를 얻지 못했다. 『증보문헌비고』에서는 "일설에는, "백제가 망하고 태자 부여융(扶餘隆)이 당(唐)나라에 들어가니 당나라에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를 제수하고 부여(扶餘)의 여(餘)자를 고쳐서 서(徐)자라 하였다." 하나 문헌(文獻)에 증거가 없고 아간(阿干)인 서신일(徐神逸) 이전은 어느 씨[某氏]로부터 나왔는지 알 수 없으므로 …"라고 해서 국가 차원에서 이미 부정했다.[3] 애초에 『삼국사기』,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등에서 부여융은 죽을 때까지 부여융이라는 이름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에 조선시대 관념에서도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 주장은 20세기부터 발견된 현 중국 허난성 뤄양시 북망산에서 발견된 부여융의 묘지명을 비롯한 문헌 자료들에 의해 현대적으로도 완전히 반박되었다. 부여융의 생전 행적을 기록한 부여융 묘지명에는 서씨로 개칭했다는 기록은커녕 '서(徐)' 자 자체가 등장하지 않으며, 부여융은 당나라에 끌려간 뒤로도 부여문선·부여덕장(+ 관점에 따라 부여문사), 부여경, 부여태비 등 백제의 성씨를 온존한 후손들을 여럿 남겼다. 그러므로 당 황실이 부여씨를 고쳤다는 주장 자체가 전혀 근거가 없다. 더군다나 웅진도독부는 나당전쟁이 터지고 신라군에게 당나라군이 패전하자 676년 한반도에서 축출당했고, 이후 부여융도 당나라에서 지내다 생을 마감한 것 자체가 명백한데,[4]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백제 유민들을 규합하여 신라의 통치권을 뒤흔들 수도 있었던 당대의 중심인물인 부여융이 사성을 받은 상태로 백제 왕족을 엄중히 경계하던 신라 정부의 감시하에 있던 한반도로 돌아가 후손을 남길 수 있었는지에 대한 개연성이 부족하며, 애초에 이 후손에 대한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다.
2.1.2. 사성설에 대한 인식 변화와 (당나라 내) 개성설의 등장(1970~1980년대)
이와 같은 당나라 사성설은 사실 조선 중후기를 거치면서 모화사상에 따라 아예 중국의 유명인들과 시조를 연관 짓는 현상을 살펴보면[5] 그 출처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진주 강씨 측에서 시조로 모시는 강이식은 원래는 고구려 병마원수로 수나라를 격퇴한 인물이라고 전해지다가, 족보가 여러 차례 편찬되면서 수양제 밑에 있다가 고구려로 귀화한 인물로 정반대로 말이 바뀌게 된다. 당나라에서 성씨를 수여 받았다는 설화 또한 이 맥락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명백한 기록이 남은 게 아닌 이상 연관성을 섣불리 추정하기는 힘든 게 한국의 성씨들에 해당한다.이런 주장은 대한제국 시기 무렵부터 민족주의 사학이 태동하고, 또 일제강점기를 거쳐 민족의 생존 문제가 심각한 문제가 된 이후 1945년 한국이 독립하면서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조선의 모화사상이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굉장히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져, 오히려 학자들이 대중의 비난을 당대의 사실은 당대의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며 누그러뜨리려 나서야 할 판이 되었던 것이다. 1985년 최인호는 신문연재에서 이러한 '당나라 사성설'에 대해, 등장인물에게 『부여 서씨 세보』를 작성하던 시대에는 상상하지도 못했을 격한 반응을 보이게 하고 있다.
나는 비로소 원래 여(餘)씨였던 왕의 성이 어째서 시조인 융으로부터 서(徐…현재의 徐씨가 아니다)로 바뀌었는가 알 수 있었다.
당나라의 천제 고종(高宗)은 서울 장안(長安)에서 의기양양하게 개선한 소정방으로부터 전과를보고받은다음, 뜰아래 부복해 있는 망국(亡國)의 유민들을 향해 심히 꾸짖고 용서하였다.
그러나 융(隆)과 문사(文思)에게만은 꾸짖지아니하고, 망국에는 배신자였지만 자기나라에는 공신인 이들에게 새로운 성씨인 서(徐)씨를 하사했던 것이었다. 고종은 융이 기왕에 써왔던 여(餘)씨의 성에 밥식(食) 대신에 「두인(彳)」을 붙여 서(徐)씨로 바꾸어줌으로써 이 기특한 배신자에게 축복을 내려준 것이었다.
아아, 그렇다면.
책을 읽어가는 내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 핏속에는 왕가의 피가 흐르고있는 것이 아니라 오욕(汚辱)의 피가 흐르고 있는것이다.내이름은 자랑스러운 이름이 아니라 더러운 이름인 것이다.그것은 왕의 이름이 아니라 굴복자의 이름인 것이다.
조선일보 1985년 3월 23일자, 7면 '잃어버린王國 <17>
당나라의 천제 고종(高宗)은 서울 장안(長安)에서 의기양양하게 개선한 소정방으로부터 전과를보고받은다음, 뜰아래 부복해 있는 망국(亡國)의 유민들을 향해 심히 꾸짖고 용서하였다.
그러나 융(隆)과 문사(文思)에게만은 꾸짖지아니하고, 망국에는 배신자였지만 자기나라에는 공신인 이들에게 새로운 성씨인 서(徐)씨를 하사했던 것이었다. 고종은 융이 기왕에 써왔던 여(餘)씨의 성에 밥식(食) 대신에 「두인(彳)」을 붙여 서(徐)씨로 바꾸어줌으로써 이 기특한 배신자에게 축복을 내려준 것이었다.
아아, 그렇다면.
책을 읽어가는 내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 핏속에는 왕가의 피가 흐르고있는 것이 아니라 오욕(汚辱)의 피가 흐르고 있는것이다.내이름은 자랑스러운 이름이 아니라 더러운 이름인 것이다.그것은 왕의 이름이 아니라 굴복자의 이름인 것이다.
조선일보 1985년 3월 23일자, 7면 '잃어버린王國 <17>
'당나라에게 성씨를 하사 받는다'는 개념이 1985년의 한 한국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는지를 암시하는 문장이다. 이런 시대적 배경 때문인지, 이보다 연도는 앞서지만 1971년 부여 서씨 300여 가구가 문공부에 무령왕릉의 관리권을 요구하면서 주장한 내용에는 당나라 사성설과도 다른 주장이 등장한다.
○…서기 6백60년 백제 최후의 임금 의자왕의 태자 융(隆)이 당(唐)나라에 끌려가 평민이되면서 부여 서씨로 개명,귀국했는데 융태자는 무령왕의 6대손이며 종손인 서씨는 무령왕의 37대손에 해당한다는 것.
조선일보 1971년 7월 25일자 7면, '"武寧王은우리先祖"…색다른 진정
조선일보 1971년 7월 25일자 7면, '"武寧王은우리先祖"…색다른 진정
경위는 알 수 없지만, 당나라 사성설이 아니라 당나라에서 부여융이 개성(改姓)해 귀국했다고 하는 설이 등장했다. 물론 이 또한 부여융이 낙양에서 죽었다고 하는 부여융 묘지명의 내용 및, 부여태비와 같이 당나라의 황족과도 혼인할 정도로 부여씨가 가세를 잘 유지했다는 사실과 상충해 사실로 볼 수 없다. 다만 이전의 족보 등과도 충돌하는 주장을 감수하면서 부여씨가 서씨로 고쳐진 경위에 대해 '평민이 된' 상황 등을 가정하는 것은 '사성'의 가치가 민족주의 기조 속에서 크게 떨어진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아래 단락의 '신라 내 개성설'과 연결해 보면 그 모티브가 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2.1.3. 현대의 '신라 내 개성설'
이와 같이 스멀스멀 수정되어 나가던 주장들은 결국 현재 변칙적인 주장으로서는 가장 많이 언급되는, 가칭 '신라 내 개성설'로 고쳐진다. 곧 신라의 탄압을 피해 부여씨가 서씨로 개성(改姓)했다는 주장으로, 1970년대 후반에야 등장한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전통 문헌은 물론 일제강점기에도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주장으로, 앞의 맥락을 보아 당나라 사성설이 당나라 내에서 탄압을 받아 개성했다는 설로 슬쩍 바뀐 뒤 다시 그 배경을 신라로 고친 것이다. 애초에 그 이전의 한문으로 된 근거 하나 제대로 제시하기 힘든, 출처가 불분명한 이 주장을 사실이라고 보는 데는 크게 무리가 따르며,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있다.- 부여씨가 서씨로 고쳐진 것은 당이 성씨를 하사한 것이 아니라 신라의 탄압을 피해서였다고 하는 주장.
→ 이런 주장은 사실 굉장히 익숙할 수 있는데, 바로 왕씨 몰살로 인한 개성(改姓) 이야기를 그대로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 주체와 객체만 조선과 왕씨에서 신라와 부여씨로 바꿨을 뿐이다.
왕씨 몰살은 한때 야사가 아니냐는 의심까지 받다가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탄압을 피해 성씨를 고쳤음이 분명히 정사체 역사서에서 확인되어 겨우 그 딱지를 뗀 반면, 부여씨에 대해서는 그런 정사체 문헌의 기록이 없음에도 이런 주장을 내놓고는 하는데, 이런 주장이 등장한 시기를 고려하면 어느 쪽이 어느 쪽을 따라한 것인지는 분명하다.
신라가 부여씨를 탄압했다고 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등에 직접적인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백제의 유명한 왕비족 중 하나였던 대성팔족의 하나인 백제의 진(眞)씨는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에 진모씨(眞牟氏)로 버젓이 등장한다. 또한 신라 중앙에 진출한 국로(國老)였던 경흥은 수씨(水氏)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마찬가지로 대성팔족의 하나인 목(木)씨라는 주장이 학계에서 정식으로 제시된 바 있다. 고구려까지 사례를 넓히면 당나라에서 고조 이연(李淵)의 피휘에 걸려 중국 측 기록에서는 철저히 천(泉)씨 등으로 고쳐진 고구려 연씨 일족의 연정토에 대해서 오히려 신라에서 중국의 피휘 영향을 받지 않은 기록이 남게 되었고, 역으로 신라에서 고구려 유력 일족에게 성씨를 바꾸도록 강제하지 않았던 상황을 배경으로 남은 연정토에 대한 기록 덕분에 연개소문 등이 원래 연씨였음이 복원될 수 있었다. 고(高)씨 고연무는 670년 아예 신라와 함께 협동 군사 작전을 벌이고 이후 보덕국에 합류했고, 안승에게는 신라 왕실의 일원으로 편입한다는 의미에서 김씨를 내려주었는데 그 이전까지는 예전의 성씨를 그대로 쓰게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곧 신라가 멸망한 옛 왕실을 탄압해 성씨를 못 쓰게 했다거나 하는 주장에는 애초에 글로 쓰인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백제계·고구려계 유력 성씨의 사례를 통해 보아도 정황 증거를 찾기 힘들다.
- 부여씨(扶餘氏)의 여(餘) 자가 서(徐) 자가 되었다는 주장.
- 『증보문헌비고』에 이미 등장한 주장이기는 하나... 여기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주장을 할 수 있을 것인데, ① 의도적으로 고쳤거나, ② 착오했다고 보는 설일 것이다.
→ ① 의도적으로 고쳐 썼다고 보는 설에 따르면, '손수변(재방변)(扌)'과 '나 여(余)'가 결합한 '궁굴릴 도(捈)' 자가 버젓이 존재하는데 자획을 쓰는 법이 다른 '徐'가 채택된 이유를 알 수 없다. 굳이 이 가설을 택한다면 부여 서씨 선대의 한자 교양 수준을 낮추어 보는, 과연 부여 서씨에게 유리할지 알 수 없는 시각에 근거해야 자연스러워진다.
② 성씨의 개념 자체가 아버지와 본인, 자식들에게 이어지는 '이름'의 일부분인 개념인데, 글씨를 잘못 써서 자신과 자기 아버지의 이름의 일부분을 음가가 완전히 다른 글자로 와전시켰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더욱이 이렇게 자기 이름의 일부분까지 오자로 바꿔칠 정도로 문예의 수준이 떨어졌던 집단이라면, 어떻게 현재까지 확인된 단 한 건의 문헌 기록도 없이 부여씨에서 유래했다는 과거를 기억할 수 있었겠는가?
- 서(徐)의 좌변 '彳'은 부(扶)의 좌변 '扌'와 형태가 유사하다. 부(扶)의 우방 사내 부(夫), 여(餘) 자 가운데 좌변 밥 식(飠) 자가 축약되고, 부(扶)의 좌변 손수변(扌)이 어쩌다 보니 중인변(彳)이 되어 서(徐)자가 되었을 것이다.
→ '조금 걸을 척(중인변)(彳)'의 1획·2획은 우상에서 좌하로 내려가는 서법으로 쓰고 3획은 1·2획의 아래에 있으며 직선으로 세로획을 마감해, 1·2획을 좌에서 우로 가는/좌하에서 우상으로 올라가는 서법으로 쓰며 3획이 1·2획을 관통하고 3번째 세로획을 갈고리로 마무리하는 '손수변(扌)'과는 서법이 완전히 다르다. 이 둘 사이에 서로 상통하는 뜻이 없으므로 통가자로 썼다고도 볼 수 없다. 역시 직접 이름으로 썼다면 착오하기 어려우며, 이미 쓰여 있는 글씨를 보고나 나올 수 있는 착오이다.
사실 이 주장은 『증보문헌비고』에서 "단군(檀君) 때에 여수기(余守己)가 예국(濊國)의 군장(君長)이 되어 아홉 아들이 모든 군(郡)을 나누어 맡았는데, 뭇 백성에게 공이 있었다. 그러므로 중인변(衆人邊:彳)을 따라서 서씨(徐氏) 성을 내려 주었다."고 하는 설의 표절로 볼 여지가 크다. 심지어 이 원본은 왜 중인변(彳)을 썼는지에서도 '인덕(人德)을 얻었기 때문'이라는 하여튼 짜맞추기는 잘 짜맞춰놓은 설인데, 그것에 비하면 아예 열화판 표절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 부여융 자체도 의자왕이 아주 늦게 왕위에 오른 만큼 장성한 상태에서 태자가 되었기에 백제 멸망기에 자손이 있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는 점과 더불어 부여융 자체가 아닌 부여융의 자손들이 한반도에 남아서 대를 이었던 것이 부여융 본인이 아예 한반도에 돌아간 것으로 와전되었다는 주장.
→ 부여문선·부여덕장 등 확인되는 부여융의 아들은 당의 묘지명에서 확인되기 때문에, 당에서 백제 왕족을 끌고 갈 때나 웅진도독부가 붕괴해 부여융이 달아날 때 동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문헌으로 입증할 수 있는 아들은 모두 당으로 간 것을 제외하고 문헌으로 입증할 수 없는 아들이 신라 땅에 남아 문헌으로 입증할 수 없는 수백여 년의 기간 동안 문헌으로 입증할 수 없는 후계를 이었다는 것인데, 설명만으로도 문헌으로 입증할 수 없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문헌으로 입증할 수 없는 주장이 쌓인 옥상옥으로 볼 수밖에 없다.
- 의자왕에게도 자손이 아주 많았던 점 및 굳이 의자왕의 자손이 아니라도 백제의 긴 역사에 따라 여타 방계 왕족들도 매우 많았기 때문에 여타 백제 왕족의 후손들이 그래도 당대의 유명인이자 정통 후계자였던 부여융의 후손을 칭한 게 전해진 것이라는 주장.
→ 부여융이 당에 건너갔음이 분명해지자 '다른 왕자가 있었을 수 있다'며 갑자기 부여 서씨도 주장하지 않는 부여융 갈아치우기를 내세우는 주장으로, 부여 서씨 측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부터 의문이다.
결국 신라 내 서씨 개성설은 근대에서조차 출처를 찾을 수 없는 추정들일 뿐으로, 객관적으로 주장되는 것이 아니라 결론을 정해놓고 근거를 짜맞추는 경향이 매우 심하다.
부여 서씨 외에도 백제 왕실과 관련 있다고 주장하는 성씨로는 이천 서씨와 의령 여씨가 있는데, 이천 서씨의 경우 서씨가 모두 같은 시조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증보문헌비고』에서 보이는 인식을 계승하면서 부여 서씨와 같은 논거를 쓰는 것이지만 정작 부여 서씨 측의 문건으로 『증보문헌비고』보다도 늦은 『부여 서씨 세보』에서조차 그런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편 의령 여씨의 경우에는 백제부흥운동을 이끌며 웅진도독부의 부여융과 대립했던 왕자 부여풍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2.2. '중시조' 단계의 문제
2.2.1. 서수손 시조설
2.2.2. 서존 (중)시조설
다음으로 『부여 서씨 세보』에서 내세우는 서존 (중)시조설에 대해 살펴보면, 앞서 언급했듯 서존의 역사적 위치에 대한 서술은 크게 두 계통으로 갈린다. 『부여 서씨 세보』는 단순히 '고려 조'에 그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병부상서·태원군(太原君)을 지내다가 관직에서 물러나 호장(戶長)이 되었다고 한 반면, 『증보문헌비고』는 그가 '고려 말'에 상서였다고 하였다. 언뜻 보아 1790년까지 그 서술 시점을 소급할 수 있는 『증보문헌비고』를 따르는 것이 옳아 보이지만, 『부여 서씨 세보』에서 인용한 17세기 후반의 『계해초보』와 1760년의 『경진보』에서도 '상서공'을 중시조로 하는 가계 의식은 굉장히 중요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므로 오히려 『증보문헌비고』가 국가의 공적 문서로서의 위상이 앞설 뿐 연대적으로는 부여 서씨 족보 측의 주장이 역으로 앞선다고 볼 여지도 있다.그러나 내용을 질적으로 비교하면, 결국 명확히 한 쪽이 문제임이 드러난다. 서존의 아래에 부여 서씨 5대로 나타나는 서희팔(徐希八)은 무신정권기의 문관인 이순목(李純牧)과 혼인했는데, 따로 논하겠지만 서희팔의 역사적 위치에 다소 문제가 있기는 해도 부여 서씨 1대의 3~4대 정도 뒤에 그가 위치했다고 보는 데까지는 큰 문제는 없다. 이순목은 1212~1251년 무렵 활동 기록이 나타나므로 그 딸이 혼인할 정도면 13세기의 늦은 전반~13세기 후반 정도에 활동한 사람일 것이고, 서희팔도 대략 그 무렵의 인물이라고 보면 3~4대조 위는 12세기 전반~후반 정도에 그 활동 시기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금자광록대부', '병부상서'는 고려 문종 때인 1076년 정2품의 품계로 제정되어 원 간섭기에 폐지되었다가 공민왕 5년(1356) 부활하는데, 서존을 12세기 전후의 인물로 본다면 『부여 서씨 세보』의 서술을 여기까지 맞춰보는 데는 사실 큰 문제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태원군 봉작이다. 고려 중기까지 왕실인 왕씨가 아닌 이성(異姓) 제후에게 주어진 것은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의 오등작이지, 13세기 말 충선왕 대에 제도가 고쳐지며 등장한 부원군-군(君)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병부상서는 정3품으로, 종1품이 되어서야 받을 수 있는 군(君)호에는 못 미친다. 결국 '태원군'이라는 호칭에서 부여 서씨 족보의 시대 착오가 드러나는 셈이며, 그 행적이 사실이라고 본다면 차라리 『증보문헌비고』에서 말한 것처럼 서존은 '고려 말'의 사람일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이렇게 시대가 확정되면, 문제가 또 한 가지 생긴다. 서존이 봉군(封君) 제도가 존재했던 고려 후기의 사람이라면 『부여 서씨 세보』에서 말한 대로 서존이 '금자광록대부' '(병부)상서'를 지냈다는 인식 또한 사실성은 떨어지기 때문이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고려시대의 '6부 상서'는 원 간섭기에는 '6조 판서'로 격하되었다가 공민왕 5년(1356)~11년(1362)에만 부활해 쓰였다. 금자광록대부도 마찬가지로 고려시대 동안 정2품의 품계로 쓰이다가 원 간섭기가 되어 국내의 문산계에서 사라졌으며,[6] 병부상서와 같은 시기 동안만 종1품 상의 품계로 부활했다. 따라서 두 관직과 품계는 모두 공민왕 5년~11년 사이에 받은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병부상서는 종3품으로 종1품 상에는 미치지 못해 둘이 조합될 수 없으며, 『고려사』에는 서존에 대한 기록이 없을 뿐만 아니라 1358년에는 홍사범(洪師範)·1361년에는 목인길이 병부상서였으므로 TO를 비집고 들어갈 공간도 만만치 않다.[7]
또 『부여 서씨 세보』에서는 서존이 관직에서 물러나 호장을 맡았다고 되어 있는데, 전직일지언정 병부상서는 족보에서 보이는 태도와 같이 '(전) 상서공'으로 불리며 대우 받는 인사로 호장과는 완전히 격이 다르다. 호장은 지방에서야 조선시대의 아전에 비교하면 높은 지위라고 해도 그것이 중앙의 상서직을 지낸 인물에 비교될 것은 전혀 못 되며, 지방에 한 명이 있는 것도 아닌 복수가 존재했던 인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굳이 비유하자면 국방부장관이 퇴직한 후 고향에서 행정복지센터 팀장을 맡았다는 수준의 말이 안 되는 인사이다. 족보가 조상을 드높이기 위해 애쓰는 문서라는 성격을 고려하면, 차라리 애초에 그가 호장 일을 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사실성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를 키우는 것이 바로 『만가보』의 인식이다. 『만가보』에 따르면 부여 서씨의 시조는 현재의 족보에서는 서존의 아들이라고 한 청습인데, 청습이 지냈다는 '금오위 별장 동정'은 정7품 5명이 정원으로 존재한 금오위 별장과 동격으로 대우한다는 관직으로 기록에 남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평범한 무반직의 동정직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8] 곧 정말 담백한 청습의 지위에 비해, 서존의 지위는 교차검증할 자료가 부족한 상황 속에서도 계보상 6~7대쯤에 들어가야 시대상이 아귀가 맞아떨어질 정도로 곧바로 모순이 드러난다. 게다가 금오위 별장직은 대략 10세기 말쯤 설치된 이후로 조선 건국 직후에야 사라지기 때문에 청습이 앞서 언급한 희팔에 대해, 현재 족보에서 위치한 대로 3대 위에 있었다고 해도 아무런 모순이 없다. 결국 밑그림은 청습의 계보였고, 서존은 그 위에 입혀진 새로운 층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상황이 된다.
이 청습은 『조선씨족통보』에서는 서춘 조목에 시조라는 일설이 있다고 하면서 소개되었다. 그렇다면 청습에 대한 계보를 가장 잘 전하고 있던 것은 부여 서씨 내에서도 서춘계였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런데 『부여 서씨 세보』의 원전이 되는 『계해초보』를 작성한 서필원은 『부여 서씨 세보』에 따르면 서박-서수손계였다. 이제 그 위상을 믿을 수 없음이 드러난 서존을 제외하면, 서박은 서춘의 형제로 나타난다. 공교롭게도 『부여 서씨 세보』의 「보계변」에서 이천 서씨와 장흥 서씨의 결합을 강력하게 비판했듯 다른 계보를 접붙일 때 억지로라도 형제 관계로 설정하는 것은 흔하디 흔한 일이었다. 그 점에서 본래는 서청습~서춘의 계보가 이들과 분리되어 있었다고 보면, 서박이 1309~1356년 및 1362~1369년 동안 존재했던 '봉익대부'라고 하므로 대략 고려 중기 무렵까지 올라가는 이들의 계보를 앞설 수 없고 관직도 판내부시사였다는 서춘에 비해 진사에 불과했던 서박의 관료 및 등용 체계 내에서의 위치도 압도적으로 낮아 족보의 주도권 면에서도 밀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된다. 『만가보』에서는 서수손이 서청습의 몇 대손인지조차 쓰이지 않고 그저 '후손'이라고만 하여 굉장히 막연하게만 연결되어 있는데, 그 점을 고려하면 원래 부여 서씨 내부의 상황이 어땠는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서수손계의 서익과 서필원 등이 관료계에서 이름을 날리고, 또 족보 작성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이 때 (서청습-서춘계는 아니었을 것이지만, 주어가 된 계파가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으나)[9] 서청습-서춘의 지위를 밀어낼 만한 인물로서 원래는 고려 말의 인물로 오히려 서춘/서박에 비해서조차 다소 늦은 고려 말 공민왕 대의 인물로 인식된 서존의 계보를 고려 중기 무렵까지 올라가는 청습의 계보 위에 끌어올려 삽입하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볼 여지가 있다.
2.2.3. 서청습 시조설과 청습-효리-찬-희팔 계보의 문제
이상과 같이 의심스러운 점이 많은 서존은 아무튼 현재 족보상 부여 서씨의 1대조로 되어 있고, 그 뒤는 청습-효리(孝理)-찬(贊)-희팔로 이어진다. 언급했듯 서존과 달리 청습의 관직 이력은 그다지 의심할 필요가 없으며, 『만가보』에서 그가 시조였던 정황이 드러나듯 그가 원래 부여 서씨의 시조로 여겨진 인물이라고 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처럼 계보상으로 4대 동안 자식으로 대마다 남자 단 한 명만 나타나는 것은 그다지 자연스럽지 않은 현상이다.물론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족보인 15세기 후반의 『안동 권씨 성화보』에서도 초반부 9대 동안 전형적으로 이와 같이 한 대에 한 명씩만 이름이 열거되며 계보가 이어지는 현상이 나타나듯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 형식의 계보는 드문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 계보에서 실제 부자 관계가 아닌 인물이 계보에 끼어드는 것 또한 드문 일이 아니다. 예컨대 강릉 김씨 족보에서는 김주원이 김문왕의 아들의 후계라고 설명되었으나, 9세기의 금석문인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를 통해 김주원이 김문왕이 아닌 김인문의 후손임이 밝혀짐으로써 후대 후손들이 조상을 잘못 끼워넣었음이(또는, 그나마 최대한 양보한다면 조상을 잘못 기억하였음이) 밝혀진 바 있다.[10] 반면 그와 같이 계보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누락이 생겼을 여지도 충분한데, 예를 들어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보이는 부여현 서씨의 유일한 유명인사인 고려시대의 서공(徐恭)[11]은 『부여 서씨 세보』에서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현상은 사실 고려 후기~조선 중기 형성된 시조 의식의 템플릿과 같은 형식으로, 고려 때에 본관 제도가 보편화되면서[12] 시조가 설정되지만 그 뒤로는 '오래되어 세대(世代)를 고찰할 수 없다'거나, 각 대마다 단 한 명의 인물만이 등장하며 대를 잇는 모습이 널리 확인된다. 곧 고려 후기~조선 중기까지 특정 성씨의 동족 집단이 형성되면서 '혈연의 연결에 대한 기록은 상세하지 않으나 어쨌든 어느 시대 우리 집안 사람이라고 전해지는 유명한 인물'을 배치해 시조와 중시조, 그리고 계보를 당대에 가장 보편적이던 형식에 따라 설정, 정리하면서 족보를 만드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인 것이다. 이런 과정은 일찍이 학계에서 '한국의 성씨는 단순히 부계 계통으로 맺어진 생물학적·자연적 혈연 집단이 아닌 특별한 사회적·역사적 형성물'이라는 말로 정리된 바 있다.[13]
결국 이때의 계보를 100% 신뢰할 수만은 없지만, 부여 서씨의 청습~희팔 때까지의 계보는 의외로 정합성이 있는 편이다. 딱 한 가지 결정적인 문제점을 제외하면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서찬과 서희팔의 위치가 서로 바뀌거나, 적어도 그 행적은 서로 바뀌어야 한다. 『부여 서씨 세보』에서 대수별로 나타나는 이들, 그리고 이들과의 대조를 위해 인용하는 6대·7대(일부)에 대한 기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 2대 서청습 : 금오위 별장 동정
→ 이미 위의 문단에서 서술했듯 금오위 별장은 정7품으로 정원은 5인인데, 동정직은 그와 동격이라는 의미에서 명의만 준 관직이다. 족보에서 사칭했다고 의심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대단한 관직이 아니다.
- 3대 서효리 : 문림랑(文林郞)·태창서(太倉署) 승(丞). 광주 이씨로 보승(保勝) 별장이었던 이극화(李克和)의 딸과 혼인함.
→ 문림랑은 성종 대부터 원 간섭기 이전 종9품 상의 문산계이고, 태창서는 문종 때 만들어진 관청으로 승(丞)은 종8품이며 4명이 정원이었다. 문관 말직으로 역시 시대적으로나 위계적으로 의심할 만한 관직은 아니다. 이극화는 어떤 시대의 사람인지 알 수 없으나[14] 보승은 고려의 중앙군과 주현군 제도에서 두루두루 보이는 명칭으로 별장 또한 정7품의 드물지 않은 관직이다.
- 4대 서찬 : 중현대부(中顯大夫) 감문위(監門衛) 대호군(大護軍). 제천 안씨의 광정대부(匡正大夫) 첨의평리(簽議評理) 상호군(上護軍) 안적촌(安迪村)의 딸과 혼인함.
→ 감문위도 시대성은 약한 관직이지만, 나머지는 검토가 필요하다. 대호군-상호군은 고려 후기에 대장군-상장군을 고친 관직으로, 일반적으로 공민왕 대에 고쳤다고 알려져는 있으나 실제로는 무신정권기부터 그 이름이 보인다. 안적촌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는 기록이 없다. 이까지는 시대가 고려 후기로 넘어갔다는 정도로 퉁칠 수 있지만 중현대부(종3품 하)-광정대부(정2품)는 1308~1356년과 1362~1369년 동안에만 쓰인 문산계이고,[15] 첨의평리(簽議評理: 僉議評理, 종2품)는 1308~1330년과 1362~1369년에만 쓰였다. 곧 이들은 14세기의 관직 체계에 속하여 서희팔보다 확실히 연대가 늦다. 한편 감문위 대호군(대장군)은 종3품으로 선대를 문관 말직(종9품 상~종8품)을 지낸 서효리로 보든, 흥위위 보승 별장(정7품)을 지낸 서희팔로 보든 상당히 급격한 등급 상승인데, 의심스러운 점이 있지만 서희팔-서찬의 행적을 바꾸어 본다면 이순목을 통해 부여 서씨 선대가 많은 도움을 얻어 대호군까지는 아니더라도 출세가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으로 볼 여지 정도는 있다.
- 5대 서희팔 : 흥위위(興威衛) 보승 별장. 중국에 사절로 가다가 물에 빠져 죽음. 합천 이씨 상서좌복야 한림학사(翰林學士) 이순목의 딸과 혼인함.
→ 흥위위 역시 고려시대의 무관직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시대성은 약하다. 그러나 이순목은 1212~1251년에 걸쳐 활동 연대가 거의 온전히 드러나는 인물로, 이 인물의 딸은 앞서 언급한 대로 13세기의 늦은 전반~13세기 중반의 인물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서찬보다 확실히 연대가 빠르다. 일단 이 둘에 대한 정보는 위치가 바뀌었다고 치면, 중현대부/광정대부/첨의평리 등의 관직이 나타나는 서찬 대의 활동은 14세기 전반(1308~1330년 무렵)과 공민왕 대(1362~1369년) 가운데 14세기 전반에 속해야만 뒷세대와 위치가 뒤바뀌지 않고 말이 된다. 이래도 서희팔-서찬 사이의 간격이 꽤 길기는 한데, 그래도 완전히 불가능한 정도까지는 아니다. 한편 서희팔은 본인의 관직에 비하면 굉장히 높은 지위의 인물과 혼인한 것으로 아마도 이 맥락에서 부여 서씨 선대가 족단을 이루고 이름을 알리는 데 큰 도움이 됐을 법한데, 야속하게도 서희팔 본인은 아주 슬픈 형태로 죽음을 겪고 말았다. 그나마 어쨌든 말이 되게 짜맞추려면 요절은 아니고 만년에 중국으로의 바닷길에 올랐다가 변을 당했다고 하는 쪽이 여러 모로 정합성이 있다.
- 6대
- 서춘 : 정순대부(正順大夫) 판내부시사(判內府寺事). 양주 정씨의 호장 정선(鄭善)의 딸과 혼인함.
→ 정순대부는 정3품 상의 문산계로 앞서 언급한 중현대부/광정대부와 마찬가지로 1308~1356년과 1362~1369년 동안 쓰였고, 내부시라는 명칭은 원 간섭기 이후로 한정하면 1308년 이후의 어느 시점(기록이 분명하지 않다)과 1356년 사이, 또 1362~1369년 사이에 쓰였다. 서찬과 동시대에 관직을 지녔다고 보는 것은 어색하니 서찬을 14세기 전반의 인물로, 서춘을 공민왕 대 인물로 볼 수 있다. 정선은 호장인 만큼 정사서에서는 확인이 어렵다. 한편 감문위 대호군직 다음 대에서 이제는 문관으로 관직을 바꾸어 정3품 상까지 올랐다고 하는 것은 의아스러우며, 그러고서 혼인 상대가 고작 지방의 호장의 딸에 불과했다는 것은 더더욱 의심스럽다.
- 서박 : 진사(進士). 재령 정씨로 봉익대부(奉翊大夫)로 추증된 호조판서 정준(鄭俊)의 딸과 혼인함.
→ 봉익대부는 종2품 하의 문산계로 1309~1356년과 1362~1369년 쓰였다. 대수를 맞추려면 역시 공민왕 대의 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진사는 과거 시험에 붙었다는 정도라 의심까지 할 것은 없다. 호조판서라는 정준은 충분히 높은 관직이지만 정사서에는 보이지 않아 교차검증되지는 않는다.
- 7대
- 서첨(徐詹, 서춘의 아들) : 봉선대부(奉善大夫) 군기시(軍器寺) 소윤(少尹). 숙부인(淑夫人)인 하동 정씨 소윤(少尹) 정을진(鄭乙珍)의 딸과 혼인함.
→ 봉선대부는 종4품 상의 문산계로 1308~1356년에만 쓰였다. 반면 군기시 소윤은 군기시의 차관으로 종5품이기는 하나 일반적으로 소감(少監)으로 쓰였고, 문헌상으로 '군기소윤'이 보이면서 연대가 확실한 것은 1380~1391년으로 고려 말에 잠깐 쓰였으며 이 '군기소윤'은 적어도 조선 태조 말 이전에는 '군기소감'으로 복구되었다. 소부시(小府寺)에서 1362~1369년과 1372~1391년(이 해 소부시 폐지) 동안 소감이 소윤으로 고쳐져 쓰인 사례를 참고하면 그 무렵의 상황을 말할 것이다. 둘 중 봉선대부를 버리고 소윤이 쓰인 연대 중에서도 뒤를 따르는 쪽이 서춘과의 간격을 고려할 때 좀 더 가능성이 있다. 한편 숙부인(淑夫人)은 『경국대전』 단계에나 보이는 정3품 상 당상관의 아내에 대한 칭호로 논할 가치도 없는 오류이다.
- 서진(徐進, 서박의 아들) : 금마군 임씨와 혼인했는데, 봉의대부 서운(書雲)(관) 부정(副正) 임덕우(林德雨)의 딸임.
→ 서운(관) 부정은 고려 대부터 조선 대까지 오랫동안 유지된 관직으로 시대적 특정성을 찾기는 어렵다. 봉의대부는 원나라부터 명나라 초까지 쓰인 정5품 상 문산계인데, 한반도에서 이를 수여받았다면 원나라 때, 공민왕이 즉위해 양국 관계가 파탄나기 전이었다고 하는 쪽이 말이 된다. 서진과 아내 두 사람의 부친인 서박과 임덕우가 동세대인 셈이니 말이 안 되는 것까지는 아닐 것이다. 임덕우는 다른 데서 보이지 않는다.
곧 이상의 연대를 정리하면, 일단 서찬과 서희팔의 행적은 무조건 선후 관계가 바뀌어야 말이 된다. 그 조정을 하고 나면 서청습(12세기 중후반?) - 서효리(12세기 후반~13세기 전반?) - 서희팔(13세기 전반~후반?) - 서찬(14세기 전반?) - 서춘·서박(공민왕 대?) - 서첨·서진(고려 말?) 세대 정도로 끼워맞춰 볼 수 있다. 다만 일단 이렇게 조정해도 서희팔과 서찬의 세대 간격은 꽤 길다. 또한 서찬과 서춘의 지위가 급상승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있고, 서희팔과 이순목의 연결이 도움이 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하면 서찬이 저 지위에 오른 것은 그럭저럭 말을 맞춰볼 여지가 있으나 서춘이 서찬 정도 관직으로 일한 사람의 아들이고 판내부시사에 올랐는데 혼인 상대가 고작 호장의 딸이었다는 것은 굉장히 의문스럽다. 또 서첨 대에는 아예 명백히 시대 착오적인 부인 수식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점들에서 족보에서 이 부분에 대해 가필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처음 제시한 문제를 다시 꺼내자면, 아무튼 서찬과 서희팔의 경우 명백히 기록이 뒤섞이는 등 문제가 생긴 점은 결국 부여 서씨 족보 스스로부터 17세기 전까지는 족보가 제대로 편찬되지 않았다고 증언했듯 계보 자료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물론, 부여 서씨 족보에서는 내용에 사실성이 엿보이는 부분도 적잖이 있으며 이것보다 심각한 족보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런 점을 어느 정도 인정하더라도 『부여 서씨 세보』의 내용은 조선 중후기 이후 '재구성'되었다는 한계가 분명히 보이며, 비판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다만 여러 모로 의심하더라도 어느 정도 맥락은 읽어낼 수 있다. 서청습이 무관 중하위 관직의 동정직으로 관직 경력을 시작하고, 서효리 대에는 말직이나마 정직(正職) 문관으로 진출했으며, 서희팔 대에는 동정직이 아닌 정직 무관으로 진출하는 한편 당시 잘 나가던 문관과 혼맥을 맺으면서 서찬 대까지 가문의 위격은 계속 상승일로를 탔다. 공민왕 대 무렵 서춘, 서박(+ 연대가 끌어올려지기 전의 서존) 등의 파조가 여럿 나타나는 것은, 물론 시기상 여러 개혁으로 다양한 세력이 이른바 신진사대부로 진출하며 조선 초까지 그들의 개국에 대한 공로를 논하곤 했던 족보 문화 속에서 일반적인 세계관에 맞추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들이 나서면서 부여 서씨의 깃발 아래 모이게 되는 맥락이 완전히 부자연스럽지는 않다.
결과적으로 부여 서씨는 이런저런 과장을 다 걷어내고 나면 12세기 중후반 무렵부터 고려 관료계의 말단에서 시작해 혼맥을 맺으며 성장한 집안이며, 14세기 중반부터는 부여 서씨, 또는 적어도 부여 서씨에 합류한 각 파가 형성되어 이름을 알려나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이 성장해 나가는 과정은 하나의 훌륭한 성공 서사로 꼽힐 여지가 있고, 단지 조상의 1대째부터 다른 집안보다 우월하고 뛰어나야만 했다고 하는 먼치킨류 세계관을 이입시키려는 때에나 부족하게 느껴질 뿐이다.
2.3. 이천 서씨 동계설
한편, 1702년의 『대구 서씨 임오보』 서문에서는 이천 서씨-달성 서씨 동계설이 등장한다. 그에 따르면 "서씨의 족보는 세상에 전하지 않아서 그 시작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달성과 이천의 서씨는 같은 근원에서 나왔다고 하니, 곧 권씨와 김씨가 함께 신라를 조상으로 삼고 선우씨와 한(韓)씨가 모두 기자의 뒤를 이은 것과 같은 것이다. 서씨가 같은 성관임은 이치로는 그럴싸하나 문헌이 부족하여 고찰해내 믿을 수 없다. (그러나) 미주(睂州: 眉州)의 족보가 소(蘇) 장사(長史)(소미도, 蘇味道)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또 어떤 위해가 되겠는가?(徐氏之譜, 不傳於世, 故不知所始. 而或云達城利川之徐同出一源, 夫權·金同祖新羅, 鮮于·韓竝系箕子則一. 徐之同貫, 理或然矣, 文獻不足, 不可考信. 睂州之譜, 不及蘇長史, 又何害也?)"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문구 그대로 읽어보아도 알 수 있듯 이 설은 애초부터 문헌 근거가 없음을 자백했다.[16] 게다가 그 근거부터 '다른 집안이 그러니 우리 집안도 그럴 것'이라는,[17] 족보를 앞다투어 편찬하던 성씨들 간의 경쟁 의식을 생각하면 기상천외한 논법을 사용해 동계설의 방증으로 삼고 있으며,[18] 끝의 미주 소씨 이야기는 전근대에 '족보 편찬의 근원'으로 많이 인용되었던 중국 미주 소씨 측의 족보 서문에서 '미치지 못하는(不及)', 곧 족보에서 빠질 수 있는 사례도 있다고 언급한 것을 끌어다 붙인 것뿐으로, 다른 족보에서도 틀에 찍은 듯 보이는, '딱히 근거는 없는데 주장은 하고 싶다(...)'는 경우에 쓰이는 상투어구에 불과하다. 그나마 이런 주장은 전근대에나 먹힐 만한 필치일 뿐 그런 얄팍한 문식으로 비판의 칼날을 피할 수 없는 근현대의 시각에서는 전혀 의미 없는 문구에 불과하며, 오로지 스스로 문헌 근거가 없음을 자인했음이 남을 뿐이다.그런데 이런 주장에 대해, 놀랍게도 1760년의 『부여 서씨 경진보』 서문에서는 "우리 부여의 세계(世系)는 백제로부터 (왕조가) 세 번 변하면서[19] 서씨가 되었으니, 이천과 달성은 모두 같은 뿌리를 지녔지만 가지가 다른 것이다(我扶餘世系百濟三變爲徐氏, 利川·達城皆同根而異支也)"라고 하여 대구 서씨에 이어 '서씨 동일 기원설'에 동조했다. 이 주장은 1790년에 정리된 것으로 추정되는 『증정동국문헌비고』의 서씨(전체) 조목(93쪽)에서 이천·달성·부여 등 서씨 7파는 조상이 같으며 서씨의 기원에 대한 한 설로 '백제가 망하고 태자 부여융이 당나라에 들어가니 당나라에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를 제수하고 부여(扶餘)의 여(餘) 자를 고쳐서 서(徐) 자라 하였다'는 부여융 기원설을 싣게 만드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언뜻 보아 당황스러운 이 현상은, 바로 『부여 서씨 경진보』의 범례를 살펴보면 어떤 의도에서였는지 알 수 있다. 곧 "대개 세간에서 이천·달성·장성·연산의 본관이 우리 부여씨에서 나왔다고 칭하는데, 분파가 어느 대에 있었는지 알지 못하니 조금 더 두루 생각하여 이를 바로잡을 것이다(蓋世稱利川·達城·長城·連山諸貫同出於吾扶餘氏, 而未知分派之在於何代, 姑俟博考而正之)"라고 하였다. 즉, '서씨 동일 기원설'을 인정하는 이면에는 그 대종(大宗) 자리를 부여 서씨가 가져가겠다는 야심이 숨어 있었다. 그 사실성에 많은 문제가 있음은 일단 접어두고, 9세기의 인물이라는 이천 서씨의 서신일과 고려 때의 인물이라는 대구 서씨의 서한 모두 온조왕 대까지 연대를 올려버리는 부여 서씨 측의 주장에 따르면 한참 후손에 불과하므로, 이런 부여 서씨 측의 주장은 그 의도대로 담론을 휘어잡을 만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여 서씨 측에서는 자신들이 가장 첫 머리에 있다는 주장을 증명할 만큼 광범위한 족보를 철저히 편찬해 인정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1925년의 『부여 서씨 세보』가 이천 서씨를 중심으로 서씨는 모두 일가라는 주장을 강력하게 반대하며 만들어진 문건이라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만가보』를 비롯한 어디에서도 7세기 후반까지 이어진 백제 왕실과 중시조라고 주장되는 인물 사이의 계보를 명확히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뜬금없게도 이 문제에 대해서 부여 서씨 측에게서 '대종(大宗)'의 깃발을 채 올 만한 주장은 1763년 『달성 서씨 계미보』의 서문에서 보인다. 이 족보에서는 서씨는 모두 같은 집안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천 서씨의 시조는 아간공(서신일), 부여 서씨의 시조는 온조, 달성 서씨의 시조는 소윤공(서한)이라고 나누어 계보를 정리했다. 그러면서 누군지 밝혀지지 않은 이천 서씨의 주장이라고 하면서, 기자의 40대손인 준이 남쪽으로 도망쳐 이천의 서아성(徐阿城)에 정착했다고 하는 설을 제시했다. 곧 이 이천 서씨 기자 및 준왕 후계설에 따르면, 백제 왕실을 조상으로 내세우는 부여 서씨 측조차 한 수 접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물론, 이 설을 따라서 믿어줄 만한 신뢰성이 있는지는 이후 부여 서씨 측의 입장에서 보듯 별개 문제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 대해 굉장히 황당하다고 할 만한 것은, 정작 이천 서씨의 족보를 쓰는 측에서는 1845년 『이천 서씨 을사보』 시점까지도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천 서씨 을사보』는 옛 발문에서 '대저 우리 서씨는 신라 말에 일어나 …(惟我徐氏起於羅季[20] …)', (새) 발문에서 '신라 때에 뿌리를 두고 고려 조에 번창하였다(根於羅季, 於麗朝蔓)'고 해 다른 족보의 어떤 표현보다도 단호한 형태로 그 이전으로 서씨 측의 기원이 올라갈 가능성을 끊어두었다. 곧 달성 서씨 측이 내세운, 200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기자 및 준왕 후계설이 이 말 앞에서 설 여지가 없고, 백제 왕실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부여 서씨 측도 '이천 서씨는 신라 말에 일어났다'고 하는 주장대로면 당연히 같은 집안일 수 없다. 개별 출처 자료의 연대는 불분명하지만, 19세기 후반의 『만가보』에서도 이들 집안을 서로 다른 집안으로 기술한 것을 고려하면 『이천 서씨 을사보』에서 보인 무심한 태도는 사실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것이다.
결국 이천 서씨의 깃발을 가지고 대구 서씨, 달성 서씨, 부여 서씨가 난전을 벌이는 상황 속에서 정작 이천 서씨 측에서는 전혀 이들에 동참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 19세기 중반까지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한편 1790년 무렵 국가에서 편찬한 문헌인 『증정동국문헌비고』에 이 '서씨 동일 기원설'이 실린 것은, 18세기 중후반 대구 서씨 측에서 많은 중앙 관료를 배출한 것을 고려하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1775년 『대구 서씨 을미보』를 작성한 서명응의 형은 소론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었던 서명선이고, 서명응 본인과 서명응의 아들 서호수(徐浩修)는 유명한 정조 대의 학자이자 관료였으며, 서호수의 아들 서유구도 『임원경제지』라는 방대한 저작을 남긴 이름난 학자로 한국사에 관심이 많다면 스쳐는 지나갔을 법한 정도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반면 『증정동국문헌비고』에 실린 주장은 이천 서씨를 수위로 내세웠기에 부여 서씨 측 주장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이천 서씨 경진보』에 보이는 서신일의 아버지라는 서직(徐稷)에 대한 기술이나 같은 『증정동국문헌비고』의 서씨 전체 조목이 아닌 이천 서씨 개별 조목에 보이는 서신일의 선대라는 서두라에 대한 주장이 보이지 않아 이천 서씨 측의 주장을 그대로 실었다고 보기도 어려우므로 이들의 주장은 간접적으로만 걸러져 인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런 서씨들의 기자 및 준왕 후계설·백제 왕실 후계설(+ 단군조선 여수기 후예설)에 대해서, 국가에서는 '문헌에 증거가 없고, 아간인 서신일 이전은 어느 씨로부터 나왔는지 알 수 없'다며 직설적으로 근거가 부족함을 지적했다.
이런 주장은 19세기까지와 달리, 20세기에 들어서는 이천 서씨 측에 의해 수용되어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천 서씨가 자신들이 서씨들의 종주임을 주장하는 상황이 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굉장히 당황하며 분개한 것이 부여 서씨 측이었다. 물론 주장의 사실성 문제에서 부여 서씨 측도 그다지 잘했다고 할 것은 없으나, 어쨌든 부여 서씨 측에서는 관련된 집안들 중에서도 이른 시기에 나서서 기껏 '서씨 동일 기원설'을 밀어주었더니, 살점은 몽땅 이천 서씨 측이 채가고 자신들의 주장인 부여 서씨 백제 기원설은 국가에서 근거가 없다고 하는 설의 하나로 박제되어 버린,[21] 일은 크게 벌였는데 본전은커녕 손해만 잔뜩 본 상황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때문에 1925년 『부여 서씨 세보』에서 부여 서씨 측은 「보계변(譜系辨)」이라는 편목을 실어 이천 서씨 측이 족보의 내용을 모칭(冒稱)하고 있다면서 같은 분야 내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며 이천 서씨 측과 거리를 벌렸다. 그 결과 1925년 『부여 서씨 세보』에는 서신일 등 이천 서씨 측과 합의한 시조가 될 수 있는 인물이 부여융과 서존 사이에 있지 못하게 되었다. 비록 이 「보계변」에서조차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서씨는 부여씨에서 나온 것'이라며 마지막 동일 기원설의 실마리를 남겨두기는 했지만, 그 밖에 이천 서씨를 비판하는 내용은 지금도 이천 서씨 측의 주장에 가장 먼저 들이댈 수 있을 만한 날카로운 칼날로 남게 되었다.
사실 9세기의 서신일을 시조로 내세우는 이천 서씨 측과 비교할 때, 오히려 서신일보다도 더 빠른 시대에 시조가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부여 서씨는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설 이유 자체가 없었다. 또한 애초에 부여융에 대한 주장이 본인들의 계보 의식에 필수불가결하며 특이한 것뿐이지, 부여 서씨 측에서 진정한 시조로 보는 것은 당연히 부여융 집안의 시조인 온조왕이다. 그런데 근대 역사학에 의해 박살나기 이전, 20세기까지도 기자 및 준왕 후계설을 내세우던 이천 서씨(정확히는 '서씨 동일 기원설') 측과 부여 서씨 측이 동계라고 하면, 부여 서씨의 시조 온조왕은 준왕이 세운 마한을 멸망시켰으므로 종갓집 왕조를 속임수를 총동원해 짓밟아버린 전통 유교 관점에서 극악무도한 존재가 된다(...). 잠시 오월동주했으나 근본적으로 여러 모로 서로의 주장이 상극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으며, 그 간극이 결국 부여 서씨의 의도가 좌절로 돌아간 시점 이후 오히려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돌아오면서 「보계변」의 목소리로 터져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2.3.1. 『부여 서씨 세보』 「보계변」의 강한 거부와 부정
3. 항렬표
부여 서씨 항렬표 | ||||||
세(世) | 26 | 27 | 28 | 29 | 30 | 31 |
항렬자(行列字) | 진(鎭) | 록(祿) | 영(榮) | 훈(勳) | 기(基) | 선(善) |
세(世) | 32 | 33 | 34 | 35 | 36 | 37 |
항렬자(行列字) | 승(承) | 식(植) | 형(炯) | 배(培) | 현(鉉) | 창(昶) |
세(世) | 38 | 39 | 40 | 41 | 42 | 43 |
항렬자(行列字) | 석(晳) | 유(裕) | 세(世) | 용(鎔) | 윤(潤) | 수(秀) |
4. 인구 분포
년도 | 가구 | 인구 | 인구 순위 |
1985년 | 3,032가구 | 13,041명 | - |
2000년 | 4,486가구 | 14,312명 | 259위 |
2015년 | - | 17,145명 | 280위 |
5. 집성촌
6. 유명인
- 서양갑: 강변칠우 중 한 명이자 의주목사 서익의 서자.
- 서필원
- 서창빈: 아이돌그룹 stray kids의 멤버.
- 서승진: 제26대 산림청장
- 서승현(소방공무원): 대한민국의 소방공무원 소방감
- 서인국
- 서지선: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스트리머
[1] 1908년 편찬된 『증보문헌비고』의 제계고(帝系考)는 본래 1770년 편찬된 『동국문헌비고』 단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다가, 1790년 『동국문헌비고』를 개정해 『증정동국문헌비고』를 수록할 때 '씨족고(氏族考)'로 편찬되었다. 『증보문헌비고』의 내용 가운데 '보(補)'가 붙어 있는 것은 1790년까지, '속(續)'이 붙어 있는 것은 1790년 이후 정리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서씨조가 속한 제계고에는 '보(補)'가 붙어 있어 1790년 『증정동국문헌비고』 때 등장한 내용으로 보인다.[2] 고구려 멸망 후 설치된 안동도호부의 하위기구였다.[3] 『증보문헌비고』에서 정설로 채택한 설은 기자조선설에 입각해 "기자(箕子)의 40세손 기준(箕準)이 난을 피하여 이천(利川)의 서아성(徐阿城)에 살았으므로, 그 후손이 이로 인하여 성씨(姓氏)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하는 설인데, 현대에는 당연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설이 되었다. 결국 서신일 이전에는 계보가 확실하지 않다는 정보만 남는 셈이다. 다만 이천 서씨조에서 서신일의 선조로 '서두라(徐豆羅)'라는 인물을 기록했으나, 『부여 서씨 세보』에는 서두라도 서신일도 등장하지 않는다.[4] 상기했듯이 부여융은 묘지명까지 발견된 인물이다.[5] 물론 진작에 소호 금천씨를 끌어다 붙인 적이 있던 경주 김씨·김해 김씨의 사례처럼 꼭 조선 중후기에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며, 고대부터 근세, 심지어는 20세기까지도 오래도록 그 명맥을 유지했다.[6] 이 동안 금자광록대부는 원나라의 압력 아래 놓인 고려의 분위기 속에서 아예 국왕의 책봉직으로 나타난다.[7] 사실 '고려 말에 병부상서를 지냈다' 또한 6년이라는 한정된 시간 대비 굉장히 많은 사람의 행적으로 보이는 족보의 내용 중 하나이다. 경주 정씨의 정상덕(鄭尙德), 도강 김씨의 김희조(金希祖), 의성 김씨의 김광부(金光富), 의흥 박씨의 박을규(朴乙規), 해남 김씨(당악 김씨)의 김남보(金南寶) 등등... 이 가운데 예컨대 『고려사』 등에서 행적이 보이는 김광부 등은 실제로 병부상서에 올랐던 것은 아니고 추증이었다고 보기도 하는 등 어느 정도 여지가 있는 설명을 하기도 하고, 또 병부상서라고 썼을 뿐 병조판서였을 것이라고 하는 등 하여튼 '아예 틀린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변론하거나, 아예 원나라에서 병부상서를 지냈다고 나가기까지도 하지만, 여하튼 생각보다 귀한 자리였던 고려 말의 '병부상서'를 지냈다고 한 족보를 가진 사례가 좀 많은 집안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이 가운데서 깃발을 세우려면 좀 치열하게 따지고 나설 필요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8] 이 동정직은 현대의 '열정페이 인턴'에 비견될 정도로 갈수록 위상이 떨어져 간 직책으로, 족보에서 아무리 관직을 부풀리는 경향이 강하더라도 이것까지 가칭이라고 보기에는 좀 슬플 정도의 위상을 지닌 직책이다. 굳이 비판적으로 접근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9] 이 때 단순히 서박-서수손계가 그랬다고 보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측면도 있다.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서존계와 서박계, 심지어는 서박계와 서수손계조차 서로 다른 계파였던 정황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한 『만가보』에 따르면 서청습이 서수손으로 이어지므로, 서청습-서춘계와 서수손계의 결합이 서박계와 서수손계의 결합보다 빨랐을 여지도 충분하다. 아무튼 이들의 주장이 어떻게 합쳐졌는지 그 중간 단계는 현재로서 정확히 알 길이 없다. 확실한 것은 '상서공' 서존이 중시조로 처음 나타나는 『계해초보』 단계에서 서수손의 증손 서필원이 그 편집을 주도하여 명의를 남겼으며(물론 아예 여기에조차 그새 이후에 이름 없는 인물이 가필해 자료를 수정했을 가능성도 있다),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서청습-서춘계는 그 사실을 알았다면 서존을 위에 올리는 데 동의하지 않았을 법하다는 것 정도이다.[10] 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 형식 계보가 사실은 조선까지 나올 것도 없이 아예 기원전을 오가는 이른 시기부터 등장했음과, 그것이 얼마든지 후대의 입맛에 의해 작위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유명한 사례는 마태오의 복음서와 루가의 복음서 사이에 나타나는 예수의 계보일 것이다. 정말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보이는 형식과 행위인 셈.[11] 이천 서씨의 서공과는 동명이인으로 보인다. 이천 서씨 서공은 이천현조에서 따로 소개되며 행적도 겹치지 않는다.[12] 특히 이 중 고려 초에 일어난 것을 '토성분정(土姓分定)'이라고 하는데, 최근에는 이것이 실제 국가에 의해 진행된 사업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설이 제시되어 있기도 하다. 다만 명확한 자료적 근거는 없음에도 고려 초에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고 보는 견해가 많은 지지를 받아왔을 정도로, 한국의 족보에서 유달리 고려 초에 개국공신 아무개가 이름을 날려서 시조 또는 중시조가 되었다는 형식이 만연해 있음은 사실이다.[13] 미야지마 히로시, 노영구 옮김, 1995, 『양반』, 도서출판 강, 56쪽.[14] 1192년의 김유신처이씨묘지명(金有臣妻李氏墓誌銘)에서 같은 이름이 보이고 시대도 대략 맞춰볼 여지가 있으나 이극화의 손윗누이가 되는 묘지명의 주인공은 원주 사람이라고 하여서 광주 이씨라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당장 지금 여기서 뜯어보고 있듯 족보는 원체 유동성이 큰 자료이므로 짜맞춰볼 여지가 없는 수준은 아니다.[15] 여기서부터 보이는 '대부'류 문산계들은 특히 향리들에게 엄청나게 뿌려댄 명예직으로, 실제 관직에서 그 정도 지위까지 진출했다는 사실을 전혀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 이해해야 한다. 오히려 관직 없이 이런 대부직만 내세우는 경우일수록 향리일 가능성이 더 높을 정도. 이 결과 조선 초에도 자신이 무슨무슨 대부 문산계를 받았다며 향직에서 벗어나려는 향리들이 속출하자 조선 건국 초 고려시대의 봉익대부(정2품 하), 조선 당대의 통정대부(정3품 상) 이하는 모두 향리직으로 돌려보낸다는 조치를 취하기까지 했다.[16]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족보가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는 것은 서문에 애초에 '신전(新鐫, 새로 지음)'이라고 박아넣은 대구 서씨 측의 사정일 뿐 이천 서씨나 부여 서씨 모두 그 이전부터 족보가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점이다. 이천 서씨 측은 1524년 『갑신보』를 편찬했다고 주장했고 당장 1700년에도 『경진보』를 편찬했다고 하며, 부여 서씨 측은 앞서 언급했듯 1663~1664년 동안 『계해초보』를 편찬했다고 한다. 곧 '서씨의 족보는 세상에 전하지 않아서 그 시작을 알 수 없다'는 주장부터 원래는 대구 서씨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주장이었던 셈이다.[17] 한 가지 짚어볼 만한 점은 선우씨와 한씨의 '기자 후예설'에 대해서 서씨 측에서 이후처럼 적극적으로 '우리도 사실 기자 후손이다'라며 나서지 않고 남의 집안 일로만 얘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로부터 미루어, 18세기 중반 이후에 등장하는 기자 후예설은 이 무렵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의심해 볼 만하다.[18] 오히려 이런 주장은 족보 연구자들 사이에서 잘 알려져 있는, 18세기 중반 이후부터 조상의 연원을 엄청나게 올려잡는 한때의 풍조로 말미암아 본관을 달리해도 성만 같으면 동일한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다며 난무한 조상동원설(祖上同源說)의 이른 사례라고 보기에 충분하다. 청주 한씨 측의 주장은 특히 2019년 정식 학술 논문이 나와 17세기 초반에 등장한 것으로서 당대에도 많은 반발을 받은 주장이며, 군역의 회피를 위한 목적성까지 담아 확산되기도 한 설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19] 또는 공자의 '군자삼변(君子三變)'을 염두에 둔 표현일 수 있는데, 이후 고려와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는 내용 등이 언급됨에 근거해 일단 이렇게 풀었다.[20] 링크한 원문에서 이 부분의 끝 글자는 '李'이나 그대로는 해석이 되지 않는다. '(어느 시대의) 말'을 뜻하는 '季'의 착오이거나 오자를 그대로 기재한 듯하다.[21] 이후 『증보문헌비고』의 내용이 현재 대부분 집안의 족보 주장의 가장 큰 뿌리가 되었음을 고려하면 이는 충분히 어떤 지점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특히 근대식 인쇄술과 자본이 들어오면서 책을 통한 정보의 유통의 속도가 굉장히 빨라졌기 때문에, '서씨 측 누가 백제 왕실 후손이라던데 그거 근거 없음'이라는 말이 이전보다도 훨씬 널리 퍼져 버리게 된 상황이었으니 이를 본 부여 서씨 측의 입장이 어땠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