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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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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全, 田, 錢)'씨는 중국과 한국의 성씨이다. 2015년 기준 대한민국 전체 인구(당시 51,069,375명) 중 약 1.47%, 749,257명이 이 성씨를 가지고 있으며 대한민국에서 16번째로 흔한 성씨이다.한자로는 全, 田, 錢 세 종류가 있다.
고려 멸망 당시 고려의 국성(國姓)이었던 '왕'씨(王氏)가 탄압을 피해 살아남기 위해 들 입(入)을 위에 붙이거나(全) 양 옆에 획을 붙여(田) 전씨로 변성했다는 야사가 유명하다.[1] 물론 全씨와 田씨 모두 왕씨와는 무관한 인물을 시조로 하므로 어디까지나 일설에 불과하다. 애당초 고려 당대 사료에 全씨와 田씨 인물들이 버젓이 기록되어 있다. 다만 조선 건국 뒤 대규모 왕씨 학살 사건은 실제로 있었고, 이 과정에서 변성을 통해 생존을 꾀했던 사람들의 사례가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만큼 본래는 왕씨였으나 현재는 전씨인 가계가 있을 수는 있다. 태조실록에는 왕씨들이 대개 어머니의 성씨를 따라 바꾸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들은 방계 왕씨들이다. 표기, 발음에 따라 '천'씨, '점'씨, '진'씨와 혼동할 수 있다.
2. 全
<colbgcolor=#c00d45><colcolor=#f0ad73> 백제의 성씨 전씨 全氏 | |
도시조 | 전섭 (全聶) |
인구는 2015년 기준 559,110명. 전체 순위 중 19위에 해당하며[2] 대한민국 전체 인구(2015년 당시 51,069,375명) 중 약 1.09%를 차지한다.
현재 18개 정도의 본관이 전하여 오나 이들 모두 백제 개국 공신인 환성군(歡城君) 전섭(全聶)을 시조로 하는 단일 계통임을 자처하고 있다. 전섭은 온조가 고구려를 떠나 남하하여 백제를 개국할 때 다른 9명의 신하와 함께 그를 보좌하였으므로 그 공을 인정받아 십제공신(十濟功臣)이라는 공신호를 받고 환성군[3]에 봉해졌다고 한다.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다방리에 위치한 비암사(碑岩寺)에서 발견된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의 기록에 의하면 전씨가 백제시대부터 성씨를 사용한 것이 고증된다. 비암사의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삼국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신라말 도선(道詵)이 중창했다. 극락전 앞에 있는 3층석탑의 정상부분에서 3점의 비상(碑像)이 발견되었는데,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은 국보 제106호로, 기축명아미타불비상(己丑銘阿彌陀佛碑像)은 보물 제367호로, 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彌勒菩薩半跏思惟碑像)은 보물 제368호로 지정되어 국립청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관대작이 된 전씨 인물을 총정리하여 1906년 간행된『전씨관면록(全氏冠冕錄)』에 따르면 역사상 봉군(封君) 35명과 정승급(政丞級) 12명, 상서급(尙書級:判書級) 43명, 참판(參判) 4명, 대장(大將) 7명, 병사(兵使)·수사(水使)[4] 4명 등을 배출했는데, 이는 대부분 고려시대의 인물들이며 반면에 조선시대에는 전체적으로 가세가 많이 기울었다. 조선시대에 가세가 기울게 된 이유는 당시 대부분의 전씨 인물들이 조선 건국을 반대하며 각자의 고향으로 낙향했기 때문이다.[5][6]
조선에 이르러 이전에 비해 가세가 기울었지만 '부자는 망해도 3년은 먹을 것이 있다'는 속담처럼 가문의 명성은 어느 정도 유지된 듯 하다. 경성일보(京城日報) 3741호와 매일신보(每日申報) 3757호에 실린 전씨대동종약 관련 기사에 "전씨(全氏)는 (이 기사를 쓴 시기인) 1918년 기준으로 250년 전 조선조의 명문이었으나 한때 조정관직에서 밀려난 뒤 그 자손이 과거에 급제해도 옥당(玉堂) 이상의 관리에 오르지 못하여, 각료급에 참여키 어렵게 되었다."라는 문구가 있다. 이를 보면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약 17세기 중반까지는 명문가로 인식된 듯하다. 기사에서 말한대로 1918년에서 약 250년 전이면 1668년인데 조선은 효종이 즉위한 17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서인이 중앙 정계에서 성장하여 1680년 이후 완전히 권력을 잡아 자신의 당이 아니면 고관대작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7] 이는 곧이어 노론과 소론의 당쟁과 세도정치로 이어져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진다. 전씨 종파 중 서인이나 노론, 소론, 세도가와 밀접하게 이어졌던 가문이나 종파가 없었기 때문에 서인이 득세한 17세기 후반부터 가세가 많이 꺾인 것이다.
전(全)과 김(金)이 한자가 유사한 관계로 혼란을 일으켜 전씨인 사람을 김씨로 잘못 기록된 경우가 종종 있었다. 삼국유사의 저자로 유명한 일연은 보각국사비의 비문을 근거로 김씨로 알려졌으나 최근 연구에서 비석의 비문이 왕희지의 서체라서 김(金)으로 보이는 글자는 사실은 전(全)이므로 전씨라는 주장이 등장했고 현재 학계에서 논의 중이다. 과거 합격자 명단인 국조방목에도 전씨인 사람을 김씨로 기록한 경우가 종종 보인다.[8] 조선 말 정부에서 문헌비고(文獻備考)를 편찬할 때 담당자들이 전(全)자를 김(金)으로 오인해서 전씨(全氏)의 고관을 모두 김씨(金氏)로 오록(誤錄)하니 전씨 종중(宗中)에서 1910년 이의 시정과 정정(訂正)을 정부에 몇 차례 청원하여 1년 뒤에 정부는 조사에 착수하고 거금을 지출하여 오류를 수정한 일도 있었다. 또한 조선 말에 편찬된 인물 백과사전인 전고대방과 청선고에 기록된 청백리 명단을 보면 명종조 청백리로 경주 김씨 김팽령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김팽령이 실존인물이고 과거합격 기록도 있어 맞는 기록이 아닌가 싶지만 1551년에 염근리 33인을 뽑았다는 기록에는 김팽령이 아닌 이름이 유사한 전팽령이 명단에 포함되었고 청백리에 대한 당대의 여러 문헌에도 모두 전팽령으로 기록되었다. 이를 통해 기록에 오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 종친회의 지속된 조사로 김팽령은 명종조 청백리 명단에 있는 전팽령의 오류로 판별되었다.[9]
평강(平康) 전씨(全氏) 학송(鶴松) 전유형(全有亨)[10]의 문집(文集)인 학송집(鶴松集)에는 전유형이 임진왜란 때 조헌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을 때의 일을 기록한 학송일기(鶴松日記)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일기의 내용 중 조헌과 주고 받은 편지에서 조헌이 전씨 가문을 삼한구족(三韓舊族) 즉 옛 적에 지체가 높았던 오래된 집안이라고 칭하는 부분이 있다.[11]
조긍섭(曺兢燮)의 문집인 암서집(巖棲集)에 옥산파인 추파(秋坡) 전억기(全抑己)의 묘갈명이 실려있는데 그 내용 중에 "전씨(全氏)는 백제와 고려가 일어났을 때 모두 공훈과 작록이 있었다."라는 부분이 있고 옥천 전씨 전팽령이 1554년에 작성한 족보의 서문에도 백제와 고려에서 높은 관직에 올라 명성이 있었다는 언급이 있다. 또한 원문에 '이제 조선조가 들어서서는 전사(음서)를 하신 분이 역시 많으니'라는 문구가 있는데 고려 초기 공산 전투에서 순절한 전이갑(全以甲), 전의갑(全義甲) 형제의 충절을 치하하여 그 후손에게 군역을 면제하고 음덕(蔭德)을 내리라는 명이 태조 왕건 때 있었는데 이 것이 조선 조까지 유지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족보 서문에 적힌 전사를 하신 분이 많다는 말은 바로 전이갑 형제의 충절로 받은 음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옥천, 완산(전주), 옥산(경산) 등 대개의 분파들은 정선을 대종으로 하는 상계(上系)를 존중하는 편인 반면, 천안 전씨의 경우 전섭으로부터 정선 득관조인 전선(全愃)까지의 세대 연수(年數)가 합리적이지 않은 점, 시조인 전섭이 천안을 식읍으로 받았다는 점 등의 이유로 정선파 위주의 상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1924년 『전씨총보(全氏總譜)』, 1966년 『전씨대동보(全氏大同譜)』를 간행한 이래 모든 全씨를 아우르는 대동보 편찬이 번번이 무산되어 왔다. 1991년 『전씨대동보』가 한 차례 더 발간되긴 했지만 천안파가 앞과 같은 이유로 불참하였고, 정선파의 일부 계파가 관향(貫鄕)을 명시하지 않고 단지 '전씨대동보'라고 명명하는 것에 대한 불만으로 참여하지 않아 불완전한 대동보에 그치고 말았다.
18개 본관(분파) 중에선 정선과 천안이 양대 분파로, 각각 10만 명을 상회한다. 본래 정선 전씨의 인구가 더 많았으나 2015년 기준 통계로 천안 전씨에게 역전되었다.[12][13] 이외에 옥천, 용궁, 경산(옥산), 완산이 중견급의 규모를 보이며 나주, 죽산, 성산, 성주, 안동, 평강, 부여, 함창, 계림, 기장, 황간, 팔거, 경성 등의 분파가 현전한다.
천안 전씨는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주로 볼 수 있다.[14] 정선 전씨는 정반대로 강원도와 경상도에 주로 거주한다.[15] 용궁과 옥산은 90% 경상도 지역이다.
여담으로 고려 시대 말기에서 조선 시대 초기까지 있었던 왕씨 대학살 사건을 피한 왕씨들이 조선조 시절 가장 많이 바꾼 성이 이쪽 전가라는 소문이 유명했었는데, 사실인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엄연히 본관도 시조도 있는 그냥 전씨이다. 아마 왕이 삿갓을 쓰고 민초로 살아간다는 스토리텔링이 설득력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추정된다.
2.1. 본관
전체 인구: 559,110명 (2015년 통계 기준 #)1. 정선 전씨 (旌善 全氏) (대종가)
신라조 정선군(旌善君) 전선(全愃)을 중시조로 한다. 모든 전씨 문중의 대종(大宗)이다.
인구:
2. 천안 전씨 (天安 全氏) (정선 전씨 분적종)
고려조 천안부원군(天安府院君) 전락(全樂)을 중시조로 한다.
인구: 176,239명
3. 옥천 전씨 (沃川 全氏) (정선 전씨 분적종)
고려조 동정(同正) 전학준(全學浚)을 중시조로 하며, 전학준의 현손 관성군(管城君) 전유(全侑)가 옥천을 식읍으로 받아 이를 관향으로 삼았다.
인구: 47,681명
4. 용궁 전씨 (龍宮 全氏) (정선 전씨 분적종)
고려조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 전방숙(全邦淑)을 중시조로 한다.
인구 : 30,142명
5. 전주 전씨 (全州 全氏) (정선 전씨 분적종)
고려조 완산군(完山君) 전집(全潗)을 중시조로 한다.
인구: 24,886명
6. 옥산 전씨 (玉山 全氏) (정선 전씨 분적종)
고려조 옥산군(玉山君) 전영령(全永齡)을 중시조로 한다.
인구: 15,659명
7. 경산 전씨[17] (慶山 全氏)
인구: 23,923명
8. 죽산 전씨 (竹山 全氏)
고려조 죽산군(竹山君) 전한(全僩)을 중시조로 한다.
인구: 10,757명
9. 성산 전씨[18] (星山 全氏)
성산군파(星山君派): 고려조 성산군(星山君) 전흥(全興)을 중시조로 한다.
성산백파(星山伯派): 고려조 성산백(星山伯) 전순(全順)을 중시조로 한다.
인구: 2,772 가구, 8,738명
10. 완산 전씨[19][20] (完山 全氏)
인구: 2,526 가구, 7,568명
11. 강릉 전씨 (江陵 全氏)
인구: 2,044 가구, 6,333명
12. 경주 전씨 (慶川 全氏)
고려조 계림군(鷄林君) 전공식(全公植)을 중시조로 한다.
인구: 1,892 가구, 6,005명
13. 온양 전씨 (溫陽 全氏)
인구: 1,729 가구, 5,606명
14. 나주 전씨 (羅州 全氏)
고려조 나성군(羅城君) 전경(全卿)을 중시조로 한다.
인구: 1,629 가구, 5,169명
15. 성주 전씨[21] (星州 全氏)
인구: 1,410 가구, 4,654명
16. 감천 전씨 (甘泉 全氏)
고려조 감천군(甘泉君) 전언(全彦)을 중시조로 한다.
인구: 1,237 가구, 3,870명
17. 안동 전씨[22] (安東 全氏)
인구: 1,123 가구, 3,680명
18. 평강 전씨 (平康 全氏)
고려조 평강백(平康伯) 전빈(全賓)을 중시조로 한다.
인구: 865 가구, 2,734명
19. 김해 전씨 (金海 全氏)
인구: 530 가구, 1,634명
20. 원주 전씨 (原州 全氏)
인구: 524 가구, 1,606명
21. 광산 전씨 (光山 全氏)
인구: 494 가구, 1,519명
22. 선산 전씨 (善山 全氏)
인구: 459 가구, 1,519명
23. 진주 전씨 (晉州 全氏)
인구: 487 가구, 1,501명
24. 거창 전씨 (居昌 全氏)
인구: 467 가구, 1,474명
25. 강원 전씨 (江原 全氏)
인구: 451 가구, 1,431명
26. 경성 전씨 (鏡城 全氏)
인구: 431 가구, 1,374명
27. 남원 전씨 (南原 全氏)
인구: 426 가구, 1,288명
28. 고령 전씨 (高靈 全氏)
인구: 340 가구, 1,120명
보성 전씨 (寶城 全氏)
조선조 참의(參議) 전영달(全穎達)을 시조로 한다.
인구: 224 가구, 737명
부여 전씨 (扶餘 全氏)
조선조 부여에 수령으로 부임했던 전권(全綣)을 중시조로 한다.
인구: 148 가구, 473명
함창 전씨 (咸昌 全氏)
고려조 함창군(咸昌君) 전살리(全撒里)를 중시조로 한다.
인구: 115 가구, 392명
황간 전씨 (黃澗 全氏)
고려조 황간군(黃澗君) 전익(全翼)을 중시조로 한다.
인구: 64 가구, 237명
기장 전씨 (機張 全氏)
고려조 기장백(機張伯) 전영(全泳)을 중시조로 한다.
인구: 68 가구, 223명
팔거 전씨 (八莒 全氏)
고려조 팔거군(八莒君) 전원태(全元台)를 중시조로 한다.
인구: 34 가구, 115명
2.2. 한자 표기
全(온전할 전)은 강희자전 부수에 따르면 入(들 입) 부수자이기 때문에 윗부분을 入로 쓰는 것이 바른 자형이다. 현재 한자 급수시험에서도 윗부분을 入로 쓰도록 하고 있으며, 정체자를 쓰는 대만과 홍콩에서도 윗부분을 入로 쓰는 것을 표준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대법원 선정 인명용 한자표에서도 윗부분을 入로 쓰며, 허용자체는 없다.보기그러나 전씨 중앙 종친회에서는 꼭 人(사람 인)을 윗부분에 쓰는 것을 고집하고 있다. 그 근거로 설문해자의 소전(小篆)[23] 자형을 들고 있는데, 자형만으로 보면 윗부분이 人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설문해자에는 현재의 全을 或體(혹체, 이체자)로, 仝의 윗부분을 入로 쓴 모양을 정자로 삼아 入로 쓴다는 것을 밝혔다.[24]
그러다가 청나라 때 段玉裁(단옥재)의 설문해자 注에 이르러, "소전을 따르는 것은 마땅히 대전(大篆)[25]의 잘못이다. 仝과 全은 모두 人으로 쓰니 앞뒤를 따질 필요가 없다. 오늘날은 모두 대전을 따르고 仝은 同(같을 동)으로 여긴다."[26]라고 밝혀, 현재 전씨 중앙 종친회의 의견과 어느 정도 공통점을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윗부분을 人으로 쓰는 형태는 일본 신자체와 중국 간체자가 따르고 있으며, 강희자전을 기준으로 한 옥편에서는 윗부분을 人으로 쓰는 형태를 속자로 여기고 있다. 이러한 人과 入의 혼란은 內(안 내)[27]를 内로, 兪(점점 유)[28]를 俞로 쓰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內의 자형 변천, 兪의 자형 변천.
기계 유씨 측에서는 '점점 유'를 兪로 쓰는지, 俞로 쓰는지 정확한 입장을 밝히지는 않았다. 자형의 입장을 밝힌 성씨로는 제주 고씨와 거창 신씨도 있다.
3. 田
전씨(田氏)는 규성(嬀姓)의 대표성씨로 순임금의 후손이다. 또 중국 제나라(田齊) 왕실(王室)후예로 전한다.[29]규성(嬀姓)의 대표 성씨는 진씨(陳氏)이다.
전씨 자체가 본래 진씨를 쓰다가 전씨로 바꾼 성씨로서, 여러 역사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전제의 마지막 왕인 건의의 셋째아들인 전진이 다시 진씨를 회복하여 진진이 되었는데, 이 계통이 중국 진씨의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진씨는 중국 5대 성씨의 하나로서, 중국, 베트남, 동남아를 아울러 인구 약 1억을 전후하며, 백가성 중 10번째이다.
전라남도 담양을 본관으로 하는 담양 전씨(田氏)들이 거의 대부분이며, 연안, 하음, 평택 전씨 또한 담양 전씨에서 분파된 것이다. 그 외 예산, 남양, 영광 전씨가 있으며 그 중 남양 전씨의 경우 개성 왕씨에서 변성된 거라고 알려져 있다.[30]
담양 전씨의 시조는 전득시(田得時)이다. 대대로 담양(潭陽)의 향리 집안이라고 한다. 그 선계(先係)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중국의 전국시대 제나라(田齊)의 종친으로 전한다.[31] 담양 시조 묘역에서 매년 양력 5월 5일 대제가 열린다. 인구는 2015년 기준 186,469명이다. 전씨 삼은(三隱)으로 불리는 야은 전녹생, 뇌은 전귀생, 경은 전조생 삼형제가 유명하며, 현재 담양 전씨들은 모두 이들 삼형제의 후손이다.
이 성을 쓰는 유명 인사로는 탤런트 전광렬이 있다. SBS 드라마 올인의 모델이자 카지노로 잘 알려진 파라다이스 그룹 전락원(田樂園) 창업주와 손자 파라다이스 그룹 전필립(田必立) 회장이 있다.
그 외 조선시대의 유명한 도사 전우치는 담양 전씨와 남양 전씨가 자기네 인물이라고 서로 주장하는 중이다.
田 자를 쓰는 담양 전씨는 삼남(三南)지방인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특히 전북, 충남, 대전, 부산/울산/경남권에 많은 편으로 경상북도 울진에도 집성촌이 있다. 울진 입향조는 경은 전조생의 네명의 아들 중에서 장남인 전순(田順)의 아들 전자수(田子壽)이다. 전자수의 손자 전훈(田勳) 즉 경은 전조생의 6세손이 경상남도 의령에 뿌리를 내리니, 전훈은 의령 입향조가 된다. 전훈의 여섯 아들이 의령은 물론 경남 일대에서 가문을 크게 일으켰다. 요즘도 의령 일대에서는 담양 전씨가 사돈에 팔촌까지 얽혀 있어서 다른 성씨가 담양 전씨 가문의 흉을 봤다가는 의령을 떠나야 한다고 할 정도로 가문이 번성하였다.
일본 성씨로 잘 알려진 다나카(田中)씨 중 담양 전씨에서 파생된 경우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해 일본 총리를 지낸 다나카 가쿠에이[32] 가 자신의 가계에 대해 "담양 전씨의 후손으로 시조 전득시의 12대손이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언급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총리 재임 당시 김영선 주일대사와의 만남에서 이를 밝히며 한국에 대한 친근감을 표시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일본 정계의 대표적인 친한파 인물이기도 했다. 다나카 가쿠에이의 딸은 일본 외무상을 지낸 다나카 마키코[33]이고, 사위는 일본 방위상을 지낸 다나카 나오키[34]이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국내 소재 대학 최초의 박사학위 취득자 전풍진이 담양 전씨이다.
4. 錢
2015년 기준 3,678명으로 전씨 중 가장 적다.세종실록지리지 - 경상도 부분을 보면, 상주목 문경현의 토성(土姓), 상주목 지례현(知禮縣)의 토성, 안동대도호부 속현인 부계현(缶溪縣)의 토성 등으로 전(錢)씨가 기록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 전씨(錢氏)의 역사는 적어도 고려 시대까지로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들어서 1483년(성종 14) 식년 무과에 갑과 3위(탐화랑, 探花郞)으로 급제한 내금위(內禁衛) 전세정(錢世禎)이 보인다. 전세정의 자는 자서(子瑞)이며 당시 거주지는 전라도 광주목(光州牧)이었다. 전세정의 아버지는 선략장군(宣略將軍) 부호군(副護軍) 전유인(錢惟仁)이다. 그리고 조선 후기 들어서 신임사화에 연루된 이수민(李壽民)의 군관을 역임하다가 옥사한 전인좌(錢仁佐, ?~1722)가 나타난다.
이 성을 쓰는 유명 인사로는 대한민국 초대 사회부 장관인 전진한, 전진한의 형이자 정치인 전준한, 탤런트 전인화, 농구 선수 전주원, 더불어민주당 소속 정치인 전상헌, 독립유공자 전인발 등이 있다.[35]
관향인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상괴리에 문경 전씨(聞慶錢氏) 집성촌이 있다.
5. 기타
가장 일반적인 로마자 표기는 Jeon이다. 2011년 외교부 여권 통계에 따르면 Jeon이 약 54%, Jun이 약 25%, Chun이 약 10%, Chon이 약 3%, Jeun이 약 1.54%, Cheon이 약 1.48%, Joun 등 다른 표기는 1% 미만이다. 참고로 Ch를 사용하는 경우(예: 전두환, 전인지, 전수경 등) '전' 씨인지 '천' 씨인지 알 수 없으므로, '천' 씨와의 혼동을 피하고자 한다면 Ch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음운론적으로 성씨 '전'의 ㅈ은 무성음이므로 Ch가 더 가깝기는 하지만). 현행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에 따른 표기는 Jeon,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에 따른 표기는 Chŏn이다.창작물에서는 나씨와 더불어 '저는 ○○'이라는 뜻으로 말장난식 이름을 지을 때 이용되는 성씨이다. 또한 직위나 직책명과 결합하면 전(前)을 연상케 하여 드립으로 많이 이용된다. 대표적으로 전 대통령. 게다가 성만 따서 말하면 전 전 대통령이 된다. 전(全)씨 성을 가진 대통령인지, 이전의 이전 대통령을 말하는지 헷갈린다.
6. 유명 인물
자세한 내용은 전(성씨)/목록 문서 참고하십시오.
[1] 대충 저 야사의 내용은 왕씨의 씨를 말리라는 정책 때문에 王에서 온갖 마개조를 해서 나온 것이 전(全, 田), 주(主), 옥(玉) 등의 성이라는 내용. 더 나아가서 차(車) 등의 성도 여기에서 2차 가공되어 나온 성이라는 얘기가 있다. 보통 야사에서는 왕이 삿갓을 썼다거나(全) 속세와 단절한 민초가 된다거나(田) 점 하나 찍으면 모를 줄 알고 위장했다거나(主, 玉)등의 스토리텔링으로 묘사된다.[2] 20위, 558,853명인 '홍'씨(洪氏)랑 인구 수가 거의 비슷하다.[3] 환성은 지금의 천안이다.[4] 흔히 말하는 그 병사(兵士)가 아닌 현재의 장성급에 속하는 병마절도사를 의미한다. 수사 또한 수군절도사의 준말이다.[5] 이러한 대표적인 인물로 정선 전씨의 채미헌(採薇軒) 전오륜(全五倫)과 옥천 전씨의 전숙(全淑)이 있다. 전오륜은 조선 건국을 반대하였다가 본향안치(각자의 고향에 가두어 둠)라는 처벌을 받았고 이후에는 서운산에서 은거하며 살았다. 이러한 행적으로 그 후손들은 과거합격에 불이익을 받았다고 한다. 전숙은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던 중 조선이 건국되자 옥천으로 낙향하여 적하리에서 살았다. 전숙이 은거하던 지역은 관직을 버린(棄仕) 선비가 은거하던 곳 또는 나이든 선비가(耆士) 살던 곳이라 하여 기사천(棄仕川, 耆士川)으로 불리게 되었다.[6] 수록된 인물 중에는 실존여부가 의심되는 인물도 포함되어 있기에 수록된 모든 인물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다만 현존하는 종파 중 3개의 종파를 제외한 대부분이 고려 때 생겨난 종파이고 당대의 저명한 학자가 삼한구족(三韓舊族) 즉 옛날에 문벌이 좋았던 가문이라는 말을 한 일화를 보면 조선에 비해 고려 때 문벌이 강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7] 서인의 권세를 엿볼 수 있는 근거로 조선의 문묘에 배향된 18명 중 신라나 고려 때 사람인 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를 제외하면 총 14명인데 이 중 절반이 넘는 8명이 서인 계열 인물이다.[8] 명단을 자세히 보면 완산 전씨인 전하민(全夏民), 옥산 전씨인 전경창(全慶昌), 용궁 전씨인 전형(全灐)과 전근사(全近思), 옥천 전씨인 전극항(全克恒)과 전명룡(全命龍), 전팽령(全彭齡) 등이 모두 김씨로 잘못 기록되었다.[9] 당시 종친회에서 제시한 근거는 이 글에 첨부된 파일을 참고바람.[10] 1566년 ~ 1624년 자는 숙가(叔嘉)이다. 괴산의 유생으로서 조헌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1605년 40세에 문과에 장원 급제했다. 광해군과 인조를 거치며 분병조참의, 광주목사, 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그러다 동지중추부사로 있던 인조 2년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반란군과 내통했다는 무고에 정상적인 절차없이 성철(成哲) 등 37인과 함께 참형을 당하였다. 다행히 훗날 신원이 회복되었고 이조판서로 증직되었다.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의민공(義敏公)이다. 의술에도 조예가 깊어 광해군과 왕비의 병을 고치는 데 참여하기도 했으며 시신을 직접 해부하고 배운 것을 그림으로 기록한 오장도(五臟圖)를 그렸다.[11] 해당 내용의 한문번역은 이 글을 참고[12] 2015년 인구조사에서 선선 전씨(旋善全氏)와 시선 전씨(施善全氏)가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한자를 착각한 공무원의 실수로 보인다.# 이들을 모두 포함하면 정선 전씨는 176,226명이 된다.[13] 겨우 13명 차이이다.[14] 한반도 서쪽[15] 한반도 동쪽[16] 2015년 인구조사에서 선선 전씨(旋善全氏) 8858명과 시선 전씨(施善全氏) 403명이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한자를 착각한 공무원의 실수로 보인다. 이들을 모두 포함하면 176,226명이다. #[17] 사실상 경산 전씨와 옥산 전씨는 한 종파로 분류되며, 종친회에서도 두 종파를 묶어서 칭한다.[18] 관향은 같지만 성산군(星山君)파와 성산백(星山伯)파로 구분된다.[19] 완산(完山)은 전주의 옛 이름으로 전주 전씨와 같다.[20] 또한 전두환 대통령의 본관이기도 하다. 즉 아이러니하게도 전두환 대통령의 조상의 뿌리는 백제계로 볼 수 있다.[21] 성산 전씨와 같다.[22] 감천(甘泉)은 예천의 지명인데, 한때 안동에 속했으므로 안동 전씨는 감천 전씨와 같다.[23]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나서 대전(大篆)을 중심으로 채용한 자형.[24] 《說文》:“仝(윗부분이 入),完也。从入,从工。全,篆文仝从玉。純玉曰全。(윗부분이 全, 아랫부분이 丣),古文仝。”[25] 중국 통일 이전에 진나라가 쓰고 있던 자형. 소전의 원형이 된다.[26] 按篆當是籒之誤。仝全皆从人。不必先古後篆也。今字皆从籒。而以仝爲同字。[27] '안 내'의 소전 자형만으로 보면 内의 형태로 되어 있지만, 설문해자 注에서는 內가 入을 따른다는 것을 밝혔다. 송나라 때의 설문해자에서는 入을 따른다는 설명이 없지만, 청나라 때의 注에서 "入也。从冂入。自外而入也。(들어가는 것이다. 冂과 入을 따른다.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밝혔다.[28] 兪도 소전 자형에서는 윗부분이 亼으로 되어 있으며, 설문해자의 설명에서도 "空中木爲舟也。从亼从舟从巜。(빈 속의 나무로 배를 만드는 것이다. 亼과 舟와 巜를 따른다.)"라고 밝혔다. 강희자전에서는 斜(비낄 사)의 왼쪽 윗부분도 入으로 썼기 때문에, 무조건 入으로 쓰는 것이 정자는 아니며 人과 入의 혼란을 강희자전이 가중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29] 중국 백가성 중 76번째[30] 다만, 조선시대 초기 왕씨 탄압으로 인해서 성씨를 바꿨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왕씨들이 살아 남기 위해 왕에서 한자를 바꾸었다는 설이 있다. 양쪽에 세로줄을 쳐서(田) 바꿨다거나 사람 인(全)을 써서 살아남았다는 설이 있다.[31] 임치지란(臨淄之亂) 때 동래(東來)하였다고 전한다.[32] 1970~1990년대까지 다나카 총리부터 타케시타 총리까지 일본 경제 부흥기를 이끌던 자민당을 지배한 주류 파벌은 다나카 가쿠에이로 대표되며, 다나카파로 불린다. 현재도 자민당 누카가파가 다나카파를 계승하고 있으며 또한 다나카 가쿠에이의 마지막 제자로 불리는 니카이 도시히로가 2021년 현재 일본 집권 여당 서열 2위인 자민당 간사장을 역임할 정도로 일본 정계에 영향력이 컸던 인물이다.[33] 다나카 가쿠에이의 부인이 병약해서, 어머니를 대신해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수행하며 국민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다나카 가쿠에이의 고향이자 '다나카 왕국'으로 불리던 니카타현에서 6선 중의원을 하며, 일본 최초의 여성 외무상이 됐다. 다만 외무상으로서 자질은 높게 평가받지 못했다.[34] 장인의 영향력 때문인지 처가의 성씨를 따랐다. 실제 일본 언론들도 처가의 후광으로 방위상이 됐다고 봤다.[35] 한국의 전씨와는 무관하지만, 첸쉐썬 박사의 성도 이 전(錢)이다. 중국의 전(錢)씨는 중국에 분포한 성씨를 소개한 책인 백가성 중 두 번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