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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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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 · · · 황목 · 황보 · ·
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한자 표기가 다르더라도 한글 표기가 같으면 합산됨
}}}}}}}}}


1. 秋
1.1. 본관1.2. 역사1.3. 실존 인물1.4. 가상 인물
2. 鄒3. 椎4. 추씨를 예명으로 쓰는 인물5. 기타

1.

가을을 뜻하는 한자를 쓰는 한국중국의 성씨이다.

가장 일반적인 로마자 표기는 Chu[1]이다. 2011년 외교부 여권 통계에 따르면 Chu가 약 52%, Choo가 약 47%, Chou 등 기타 표기는 1% 미만이다. 참고로 '주' 씨도 Ch를 사용하기도 하므로 로마자 표기만 보고서는 '주' 씨인지 '추' 씨인지 알 수 없다. 다만 거의 대부분은 '추'씨일 가능성이 높다. 현행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에 따르면 Chu,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에 따르면 Ch'u이다.

1.1. 본관

추계 추씨[2]전주 추씨가 있는데 뿌리는 같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의 문헌에 함흥, 제주, 청주, 개성, 강화, 파평 등 47본까지 기록돼 있는데 이 또한 모두 혈족관계로서 같은 뿌리다. 인구는 2015년 기준 60,483명이다. 533성 중 66위.

1.2. 역사

본디 중국에 기원을 둔 성씨로서 한국보다 중국에 기록이 훨씬 많이 남아 있는데, 중국 춘추5패 제환공의 대부 (大夫) 중손추 (仲孫湫)가 그 아들의 성명 (姓名)을 추호 (湫胡)로 짓고 추 (湫)를 추 (秋)로 사용하면서부터 생겨난 성씨이다.

시조 추엽은 중국 남송 고종 소흥 11년 (서기 1141년) 문과에 급제하여 적부라직을 역임하였다. 적부라는 오늘날의 국립도서관장. 그는 인종 때 가솔을 이끌고 함흥 연화도에 정착하여 한국 추씨의 시조가 되었다. 시조 추엽의 묘소는 함경남도 함흥시 연화도에 있으며, 1868년 (고종 5년) 통훈대부 연천현감 남정하가 묘갈명을 썼다.

추엽의 아들 추황 (추영수)이 1209년 (희종 5년) 진사시에 장원급제하고,[3] 1213년 (강종 3년) 문과에 급제한 후 몽골의 침략으로 1232년 (고종 19년)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항전하던 비상 시대에 임금을 잘 모신 공으로 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문하시중을 역임하였으며, 명유 우대 정책에 힘입어 훌륭한 제자를 많이 배출하였기 때문에 이학종사 (理學宗師)로 추앙받았다.

추황의 아들 추적은 1260년 (원종 1년) 문과에 급제한 뒤 안동서기·직사관을 거쳐 좌사간에 오르고, 충렬왕 때 민부상서와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추적은 시랑 겸 국학교수로 재임할 때 명심보감을 편찬하여 중국에 전파하였다.

추적의 장남 추진은 교서랑으로 관직을 시작하여, 원주 판관을 지낸 다음, 천장시에 급제함으로써 일약 보문각 직제학으로 승진하였다. 공민왕이 등극한 후에 광록대부 병부상서가 되었으며, 친원파에 대한 숙청이 시작되자 과업을 수행하였다. 공민왕 12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궤장을 하사받았다. 시호는 충효.[4]

추진의 장남 추유는 1362년 (공민 11년) 18세에 성균시에 급제하였으나, 권세와 간신배들로 인하여 기울어져 가는 고려를 떠나 중국으로 귀환하였다.[5] 한국 양쯔강 하류 강변에 있는 고찰 금산사에 도착하여 주원장을 만나 혈맹을 맺고, 호주 출신의 지장 서달과 탕화와도 동지로서 뜻을 같이하기로 맹세하였다. 1363년 화주에서 반원군의 지도자 진우량의 대군을 격파하였다. 추유는 이 결전에 행군총관으로서 치밀한 작전을 세워 성의백과 함께 첫 출전하여 승전을 올린 것이다. 추유는 명나라 개국공신으로 병부시랑 좌간의대부가 되어 북벌군에 합류하여 원나라의 수도 연경을 점령하고 몽골 세력을 멀리 카라코룸으로 몰아냈다. 벼슬은 호부상서에 이르렀다. 1393년 (홍무 26년) 명나라의 안위사로서 조선을 방문하였다.[6]

추유의 아들 추귤은 1392년 (명나라 홍무 25년) 문과에 급제한 뒤 산동첨사가 되자 영락제를 황제의 보위에 올린 공신이 되어 상서좌복야에 이르렀고, 추귤의 아들 추섭은 1438년 (정통 3년) 명나라 문과에 급제하여 중서사인 등을 역임한 뒤 안찰사가 되었다.

추섭의 아들 추서는 명나라 성화 원년 (1465년) 문과에 급제한 뒤 도지휘사가 되었을 때 왜구명나라 해안의 도처에 침범하자 봉수제를 시행함으로써 왜구를 소탕하였으며, 벼슬은 병부상서에 이르렀고, 추서의 아들 추천일은 명나라 정덕 원년(1506년) 진사시에 급제하고, 정덕 5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좌시랑을 지냈다.

한편, 조선에 남아있던 8세손 추익한은 홍문관 부수찬, 호조좌랑을 거쳐 호조정랑으로 승진한 뒤, 한성부윤을 끝으로 관직을 떠나 고향인 강원도로 낙향하였다. 영월 유배 중인 단종을 극진히 모신 충신으로 단종의 영정을 모신 영모전과 충절사에 엄흥도·정사종과 함께 배향되었다

10세손 추수경은 명나라 문과에 급제하여 안찰사 등 요직을 역임한 후, 벼슬은 무강자사에 이르렀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여송의 부장으로서 명나라 총병아장으로 아들 5형제와 함께 조선에 파병되었다. 곽산, 동래 등지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함께 참전한 아들들과 전주의 추동에서 살았다. 정유재란 때 전주싸움에서 전사하여 사후에 완산부원군에 추봉되었는데,선조가 공을 기려 본관을 부여하였다. 전주 추씨의 시조.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하였는데, 한말 칠의사[7] 중 한 사람인 추치경은 충주 장현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순국하였고, 추용만과 추용소 형제[8]합천에서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본 수비대를 공격하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또한 추기엽은 해남·영암 등지에서 150여 명의 부하 의병을 이끌고 육지와 해상에서 일본군과 대소 40여 회의 전투를 수행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가 순국하였고,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으며, 추삼만, 추진구, 추칠성 등에 대하여도 활발한 의병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건국훈장 독립장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그 외에 독립운동가 추교철은 1919년 7월 군자금 모집을 통해 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비밀결사 독립애국단을 조직하는 한편, 임시정부로부터 군자금 모금지령서를 교부받아 자산가들에게 독립군 명의의 사형선고서를 우송하며 군자금 수합활동을 펴다가 1920년 일경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고,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으며, 추경춘, 추공집, 추규영, 추득천, 추병갑, 추병륜, 추병원, 추성렬, 추성배, 추은명, 추홍순 등도 3.1운동에 적극 가담한 공로로 정부에서 각각 건국훈장 애족장과 건국훈장 애국장, 그리고 대통령표창 등을 추서하였다.

1.3. 실존 인물

1.4. 가상 인물

2.

본관은 미상. 2000년도 인구조사 당시 전국에 209가구 642명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경상북도 상주군 낙동면 성동리에 추석숭(鄒石崇) 1가구가 사는 것으로 나타난 바 있다.

역사적으로 제나라의 재상 추기. 제나라의 사상가 추연, 고구려의 장수 추발소, 후한의 병주자사 추단, 후한의 북군중후 추정, 서진의 좌장군 추담, 수나라의 관료 추문등, 후백제의 장수 추허조, 고려의 관료 추언규 등이 있지만, 지금의 추씨와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가상 인물로는 수호전추연추윤이 대표적이다.

3.

중국에만 있는 성씨로 중국에서도 1,000명 미만의 희귀 성씨이다. 산시성에 다수가 있다고 한다.

가상 인물로는 시이 켄수(추권숭)이 대표적이다.

4. 추씨를 예명으로 쓰는 인물

5. 기타

사실 侴라는 '성씨 추'라는 한자가 있긴 하지만 인명에도 쓰이질 않는 완벽한 벽자다.

[1] 걸그룹 f(x)Chu~♡, 그리고 에이핑크Mr. Chu와 철자가 같다. 참고로 일본에서는 뽀뽀나 키스할 때 나는 소리를 Chu라고 표현한다. 한국으로 치면 이 되는 셈.[2] 지금의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추계리.[3] 고려사 권74, 지제28, 선거 (選擧)2 #[4] 추적의 차남 추뢰 또한 국학에서 배운 뒤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사간원 사간에 이르렀다.[9][5] 여기서 한국의 추씨들이 분화된다. 중국으로 귀환했던 추유의 후손들은 10세손 추수경에 이르러 임진왜란명나라 총병 이여송의 부장으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고, 한국에 남아있던 추진의 후손들은 8세손 추익한에 이르러 다시 역사에 이름을 드러내게 된다.[6] 추진의 차남 추협 또한 1363년 형 추유를 따라 중국으로 떠나 절강성에서 농민군을 모아 한때 8,000명의 군세를 거느리고 명나라 창업에 큰 훈공을 세워 추유와 함께 건국 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벼슬은 태복에 이르렀다.[7] 추치경(추성손), 김용이, 김재관, 오문룡, 우재봉, 박원용, 우규하[8]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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