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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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한자 표기가 다르더라도 한글 표기가 같으면 합산됨 | }}}}}}}}} |
1. 弼
본관은 《증보문헌비고》에 대흥(大興), 전주(全州) 등 2개 본관이 나타나며, 1985년도 및 2000년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도 이 2개 본관이 모두 나타난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기존의 대흥 본관 외에 대전(大田)과 예산(禮山)이라는 본관이 새롭게 등장했다.인구는 1930년 조선총독부 국세조사에서 전국에 73가구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 중 65가구가 함흥시를 비롯한 함경남도에, 6가구가 강원도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985년 209명(대흥 181명, 전주 8명, 기타 및 미상 20명), 2000년 251명(대흥 172명, 전주 66명, 기타 및 미상 13명), 2015년 기준 121명(대흥 92명, 대전 19명, 예산 7명, 기타 3명)으로 매우 적다. 그래서 귀화성으로 착각되기도 하지만 정작 중국에서는 이런 글자로 성씨를 삼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필씨는 문헌상 《고려사》와 《동국통감》 등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고려사》 열전 이의민 조와 《동국통감》 권26 고려기(高麗紀) 고려 명종 계사년(1173) 겨울 10월 조를 보면, 이의민이 고려 제18대 의종을 동경(東京, 現 경상북도 경주시)에서 살해하자 동경의 부호장(副戶長)을 지낸 필인(弼仁) 등이 몰래 관을 마련해 의종의 시신을 물가에 묻어 주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61 「앙엽기(盎葉記)」에 수록된 「동국제성(東國諸姓)」을 보면, 이덕무가 1789년(정조 13) 《동국여지승람》을 수보하면서 한성부 호적을 일일이 검사한 뒤 당시 한성부에 거주하던 사람들의 성씨를 모두 기록해놓았는데, 이 중에서도 필(弼)씨가 나타난다.
1.1. 대흥 필씨
대흥 필씨(大興弼氏)의 시조는 필몽량(弼夢良)으로, 조선시대 무과에 급제했다고 한다. 그의 후손인 필두만(弼斗萬)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필두만의 증손으로 함흥부에 거주하던 필성뢰(弼聖賚, 1752 ~ ?)[1]는 1792년(정조 16) 식년 생원시에 3등 60위로 입격한 뒤 1798년(정조 22) 식년 문과에 을과 6위로 급제했다.[2] 《국조방목(國朝榜目)》에 필성뢰의 본관은 대흥(大興), 거주지는 함흥(咸興), 아버지는 학생(學生) 필은상(弼殷相)이고 조부는 필흥방(弼興邦), 증조부는 필두만(弼斗萬), 외조부는 이춘발(李春發)이며 위로 형 필성려(弼聖礪)가 있었다고 각각 기재되어 있었다.필성뢰는 이후 1798년부터 1818년(순조 18) 사이에 승정원 가주서(假注書)·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와 권지(權知) 교서관 부정자(校書館副正字, 종9), 성균관 학록(學錄, 정9품), 성균관 학유(學諭, 종9품), 겸(兼) 양현고 봉사(養賢庫奉事, 종8품), 오수역 찰방(察訪, 종6품), 부사과(副司果, 종6품),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정6품),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 종5품),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 종6품), 예조 정랑(禮曹正郞, 정5품), 사헌부 장령(掌令, 정4품), 부사직(副司直, 종5품),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 종3품) 등을 역임했다.
또한 비슷한 시기인 1801년(순조 1) 함경도 덕원도호부(現 강원도 원산시)에 거주하던 필조은(弼祚殷, 1772 ~ ?)은 정시(庭試) 무과에 병과 37위로 급제했다. 《숭정3신유하이정종대왕제향세실경과정시문무전시방목(崇禎三辛酉夏以正宗大王躋享世室慶科庭試文武殿試榜目)》에 필조은의 본관은 대흥(大興), 거주지는 덕원(德源), 아버지는 유학(幼學) 필광삼(弼光三)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필조은은 1819년(순조 19)부터 1835년(헌종 1) 사이 수문장(守門將), 부사과(副司果, 종6품), 동관진 병마첨절제사(潼關鎭兵馬僉節制使, 종3품), 전라우수영 수군우후(水軍虞侯, 정4품), 부호군(副護軍, 종4품), 오위장(五衛將, 정3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3품), 황해도 중군(中軍, 정3품), 충장위장(忠壯衛將, 정3품) 등을 역임했다.
1809년(순조 9) 함경도 함흥부에 거주하던 친기위(親騎衛) 소속 기병 필범집(弼範集, 1765 ~ ?)은 증광 무과에 병과 113위로 급제했다. 《숭정3기사동원자탄강경과별시증광문무과전시방목(崇禎三己巳冬元子誕降慶科別試增廣文武科殿試榜目)》에 필범집의 본관은 대흥(大興), 거주지는 함흥(咸興), 아버지는 업무(業武) 필대룡(弼大龍)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1.2. 실존 인물
2. 畢
《증보문헌비고》에는 대흥(大興), 여주(驪州), 배음(拜音)[3], 추자(楸子)[4] 등의 본관이 나타난다. 이 중 대흥 필씨(大興 畢氏)의 시조는 필몽량(畢夢良)으로, 조선시대 무과에 급제한 인물이라고 한다.1985년과 2000년 시행된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성씨로,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한양(漢陽) 등 1개의 본관이 나타났다. 그러나 한양 필씨 등 이 필씨에 대해서는 자료가 미비해 알 수 없다.
인구는 2015년 기준 53명(한양 9명, 기타 44명)으로 弼씨보다 적게 나타났다.
《고려사》에 따르면, 필광찬(畢光贊)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1105년(예종 즉위) 11월 검교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상호군(上護軍)에 임명되었고, 1110년(예종 5) 3월에는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임명되는 기록이 있다. 또한 1233년(고종 20) 이른 바 필현보의 난을 일으킨 필현보도 고려사에 등장한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61 「앙엽기(盎葉記)」에 수록된 「동국제성(東國諸姓)」을 보면, 이덕무가 1789년(정조 13) 《동국여지승람》을 수보하면서 한성부 호적을 일일이 검사한 뒤 당시 한성부에 거주하던 사람들의 성씨를 모두 기록해놓았는데, 당시 한성부 호적에서는 나타나지 않으나 옛 《동국여지승람》에는 나타났던 성씨 중 하나로 필(畢)씨가 언급되었다.
2.1. 실존 인물
3. 관련 문서
[1] 승정원일기에 필성재(弼聖齎)로 오기되어 있기도 하다.[2] 승정원일기 정조 22년(1798) 3월 22일 기사를 보면, 당시 임금인 정조가 필성뢰에게 "필씨 성에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옛날에도 혹시 있었는가?"하고 묻는다. 이때 필성뢰가 " 없었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정조가 "《해동잠영보(海東簪纓譜)》에 필씨 성이 유독 누락되어 있는데, 지금 이 자가 과거에 급제했으므로 뒤에 이 성씨의 족보를 덧붙일 만하겠다."라고 언급된다.[3] 고려시대 청주 소속 배음소(背陰所).[4] 고려시대 청주 소속 초자소(椒子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