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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10:48:17

소(성씨)

1. 한국의 성씨
1.1. 蘇
1.1.1. 집성촌
2. 한국/중국의 성씨
2.1. 邵
2.1.1. 집성촌
2.2. 蕭/肖
3. 일본의 성씨4. 실존 인물 및 가상 인물

1. 한국의 성씨

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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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한자 표기가 다르더라도 한글 표기가 같으면 합산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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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한국의 성씨의 하나. 본관은 경상남도 진주 하나 뿐이라고 한다. 신라 건국기에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경주 6촌 중 돌산 고허촌의 촌장 소벌도리부터 시작해 신라 중기의 장군 소경(알천)을 시조로 한다.[1] 그의 묘는 지금도 진주시 북부의 한 산에 있다,

알천은 신라의 진골로 소씨의 시조로 나오는 것에 대해서는 이런 해석도 있다. 사학자 이기백에 따르면 1979년에 진주 소씨 서울 종친회에서 사람이 찾아와 진주 소씨 종친회보(宗親會報)에 알천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본인에게 요청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이기백은 알천은 신라의 왕족이고 김씨이므로 소씨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적당히 둘러대고 거절하여 보냈는데, 이기백은 나중에 신라 말기 김해(金海)의 호족이었던 김율희(金律熙)소율희(蘇律熙)라고도 기록되기도 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고[2] 金은 음이 '김' · '금'이지만 그 뜻은 '쇠'이므로 蘇라는 글자와 서로 통용되어 쓰일 수 있다는 추론을 하게 되었다. 소씨도 김씨와 마찬가지로 '쇠'를 한자음으로 표기한 한 방식일 뿐이고 실은 둘 다 똑같은 성이라는 뜻. 이런 식으로 한자의 음(金은 금/김)과 뜻(쇠, 이후 음차해 蘇로 추정)으로 읽기를 병용하는 방식은 현대 한국어에서는 사용되지 않지만 고대 한국에서는 향찰 등 많이 사용되었다.[3]

이기백은 8세기 원성왕과 왕위를 다투다 패한 왕족 김주원강릉으로 낙향한 것처럼 실제로 김춘추와의 왕위 계승을 두고 대립하기도 했던 알천이 김춘추에게 패한 뒤 지방인 진주로 낙향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현대 한국에서는 배우 소지섭, 소유진과 야구선수 소형준 등이 유명하며 인구수는 52,427명으로 경기도와 전라북도 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다.[4]

중국통계에 따르면 41위의 성씨이며 710만명 정도가 존재한다. 대부분 광둥성에 거주하고 있으며 91.9%가 한족인 성씨이다.

1.1.1. 집성촌

2. 한국/중국의 성씨

2.1.

한국중국의 성씨이다. 주나라, 관직명, 초나라, 기타 소수민족을 포함하여 7가지 정도의 계통이 있다고 한다.

시조는 소공. 여담으로 소옹은 주나라 소공의 후손인데, 召자가 전하여 邵자로 되었다고 한다.
역사 인물로 고려의 문신 소태보(邵台輔)가 있으나 본관은 알 수 없다. 소태보는 고려 문종 말에 호부시랑을 거쳐 선종 때 여러 요직을 역임하고 헌종 때 이자의(李資義)의 난을 사전에 분쇄하여 수사도판리부사(守司徒判吏部事)에 올랐으며 숙종 때 수태사(守太師)가 되어 협모공신(協謀功臣)의 호를 받았다.

1790년(정조 14) 선무군관(選武軍官)으로 증광 무과에 병과 79위로 급제한 소응겸(邵應謙, 1738 ~ ?)이 있는데, 본관은 밀양(密陽), 거주지는 경기도 개성부(開城府)였고 아버지는 학생(學生) 소천극(邵天極)이었다.

인구순위는 2015년 기준으로 150위/1,309명으로 소씨의 통상인 蘇의 2.5%에 불과하다. 본관은 평산(平山) 단본이다.

인구가 적어 유명인은 찾기 힘들다. 본관이 본관인지라 남한보다는 북한에 상당수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1930년 국세조사때 전국에 191가구가 있었으며 그 중 3분의 2가 경기도 개풍, 연천, 장단군과 황해도 연백군, 평산군 등지에 살았고 나머지는 대부분 제주도에 살았다. 남북 분단 이후로는 순위가 내려갔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북한 지역에 있기 때문이다.[5]

남한 내에서는 제주도에 몰려있는 몇 안되는 희성이기도 하다. 정확히는 남한 내 평산 소씨의 절반이 제주 지역에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주도에 거주한 소씨는 대체로 후자라고 보면 된다. 이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제주 토착 성씨인 씨나 씨 등이 워낙 유명할 뿐더러 해당 두 성씨에 비해 인구가 적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은 한자가 다른 동음의 소씨가 존재한 탓에 더 묻힌 감이 있다.

또 다른 곳은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이다. 전라북도에는 소씨 인구가 많은데 그중 익산의 소씨 인구수가 비교적 많다.

2.1.1. 집성촌

2.2. 蕭/肖[6]


중국에서는 원래 蕭와 肖 둘 다 성으로 쓰고 있다가,[7] 간체자를 제정할 때 1975년 지금의 간체자보다 더 간략화시킨 《제2차 한자간화방안》을 발표하면서 肖(닮을 초)를 蕭(맑은 대쑥 소)와 통합시켰다. 그러다가 1986년에 폐지하면서 蕭는 萧로만 간화하도록 했는데, 성으로 쓰는 蕭는 중국에서 여전히 肖로 많이 쓰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 肖씨의 조상은 蕭씨였을 가능성이 높다.

난릉 소씨의 경우 위진남북조의 육조시대 중 2개 왕조 (남제, 소량)를 세워 76년간 남중국을 통치하였다. 하지만 이민족 국가에 정복되었다. 또한 거란족 출신 역사 인물들 중에서 소씨를 많이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소손녕소배압, 소굴렬 등이 있다. 이민족이지만 뜬금없이 대거 사용하게 됐는데 그 이유는 태조(요) 항목 참조.

3. 일본의 성씨

[ruby(宗, ruby=そう)][ruby(氏, ruby=し)]
소씨
파일:쓰시마 소 가문 문장.svg
<colbgcolor=#008080> 소 가문의 가몬
구석에 세운 네 개째 결
隅立て四つ目結
본성 코레무네씨(惟宗氏)
간무 헤이시(桓武平氏) 토모모리류(知盛流)(자칭)
가조 소 시게히사(宗重尚)
종별 무가(武家)
화족(華族)(백작)
근거지 쓰시마국
도쿄시 메구로구 카미메구로
당주 제38대 소 타츠히토(宗立人)[8]
일본 발음은 そう, 한국식 독음으로는 '종'씨이다.

대대로 쓰시마를 지배한 다이묘 가문의 성씨. 한국에는 임진왜란에 참전한 소 요시토시덕혜옹주와 결혼한 소 다케유키 백작이 유명하다.

본인들은 타이라노 토모모리의 후손으로 혼세를 타이라(平)라고 자처했는데, 실제로는 도래인 계열인 하타성(秦姓)의 고레무네씨(維宗氏)가 본성이라고 한다. 소씨는 고레무네를 줄여서 뒷글자만 사용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가이에키 없이 가마쿠라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천 년 가까이 한 지역에서 영지를 유지한, 일본사 전체를 통틀어 드문 케이스다.[9] 헤이안 시대 말기에서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12세기경에 그 이전까지 쓰시마 현지를 지배했던 아비루 씨를 몰아내고[10] 쓰시마 섬의 주인이 되었다.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때에는 두 번이나 여몽연합군에 털리고,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에 또 왜구의 근거지로 지목되어 공격당하기는 했지만 의외로 일본 역사에서는 드물게 전란에 휘말리지 않고 평온하게 지낸 편. 가마쿠라 시대에 처음 섬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센코쿠 시대에 영주가 된 쓰시마 소 씨가 메이지 시대까지 별 문제 없이 집권하고 있었을 정도로 사실상 조선 시대 초기 이후로는 쓰시마가 직접적으로 외부로부터 군사 공격을 받은 일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일단 기본적으로 쓰시마는 산이 너무 많아 농업 시대에는 별로 가치가 없는 땅이었기 때문에 전근대에는 어느 나라에서도 욕심을 내지 않았다. 다만 그런 지리적 위치 때문에 자체적인 식량생산과 조달이 어려워서 어딘가로 나가서 교역을 하거나 약탈을 하거나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세종 1년(1419년) 상왕 태종과 이종무의 지휘 하에 쓰시마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졌고, 왜구들의 반격으로 완전히 토벌하지는 못했지만 나름 효과를 봐서 1421년 4월 쓰시마 도주 소 사다모리(宗貞盛)가 통상을 요청하자 조선 조정은 왜구를 회유하려는 목적으로 삼포(부산포, 내이포, 염포)를 개방하고 왜관을 설치했다.[11] 소 요시모리는 1443년에는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조선 사신단의 서장관 신숙주와 면담해 쓰시마에서 조선에 보내는 세견선 수를 1년에 50척으로 약정한[12] 계해약조를 맺기도 했는데, 이때 "세견선(조선에 오는 무역선) 수를 정하지 말자"고 고집을 부리는 요시모리에게 "세견선 수가 정해지면 확실히 이익이 당신에게 돌아가겠지만, 정해지지 않으면 당신 밑의 가신들이 지멋대로 자기들 이익만 챙길 텐데?"는 말로 설득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조선은 쓰시마 섬을 정벌하는 강경책으로 대마도와 왜구들에게 긴장감을 주는 한편 교린정책의 일환으로 부산포, 염포, 제포 등 3포를 개항하고 왜관을 두어 일본인들이 무역을 하거나 상업 활동을 하도록 하는 유화책도 병행하였고, 그 결과 왜구들의 수는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 쓰시마 소 씨의 입장에서도 이렇게 조선과의 교역 규모를 약정하는 약조의 체결이나 조선측과의 교섭권을 자신들이 독점하는 것은 쓰시마 섬 안에서 그리고 일본 국내에서도 소씨의 지위를 높이는 한 요인이었다. 그러나 삼포왜란 때에는 중종반정 이후 왜관에 대한 강경책과 더불어 왜관에 주어지던 혜택도 줄어드는 것에 대한 반발로 도주 소 요시모리(宗義盛)가 나서서 왜란을 뒤에서 사주했다가 조선군이 반격하자 급히 주동자의 목을 베어 바치고 조선에 화의를 구하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규슈를 정벌할 때 히데요시에게 항복해서 쓰시마 지역의 지배를 인정받았지만, 대신 일본군이 조선과 명나라로 가는 중간 기착지를 제공해야 하는 처지에 몰렸다.[13] 소 가문의 당주였던 소 요시토시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였는데, 그는 두 나라가 전쟁나서 좋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기에 전쟁을 막으려고 1590년에는 조선에 조총 몇 점을 진상하거나[14] 조선에 조선 통신사를 요청해[15] 이들을 복속사로 속여 히데요시에게 알현시키기도 했다. 그 유명한 '명으로 가고자 하니 길을 빌려 달라(假道入明)'라는 문구도 쓰시마 섬이 조작한 것으로, 원래 문구는 '명을 정벌하려 하니 길을 안내하라(征明嚮導)'였다. 대마도주가 택도 없는 무례한 요구를 조선이 받아들일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다소 완화된 표현으로 조작했던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 편에 섰던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처형당한 뒤에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가문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을 것, 그리고 조선에게 어떻게든 용서 받아내고 조선과의 국교 재개시켜 내라는 두 가지 임무를 갖고 사면받았다. 쓰시마로서도 먹고 살아야 되니까 조선에 무역 재개를 요청하는데, 조선에서는 북방의 여진족이 흥하고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을 쇄환해야 했기 때문에[16] 국교 재개에 의지를 보일 수밖에 없었고, 츤데레처럼 불구대천의 원수들이라 욕하면서도 '대마도만은 허락해줄지도...?'라고 말을 흘리면서 쓰시마 섬을 설레게 했고, 쓰시마에서도 포로 일부를 석방하면서 징징댄 결과 일단 조선은 사명대사를 '탐적사(探賊使)'라는 명분으로 일본에 파견하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접견한다.

조선에서는 명의 조공책봉체제에 편입시키려고 쇼군의 칭호를 '국왕'으로 해야 한다고 했고, 먼저 굽히고 들어가는 쪽이 아쉬운 쪽, 즉 국서를 먼저 보내는 쪽이 지고 들어간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니들이 먼저 국서 보내렴" 하는 입장을 취했다. 일본은 당연히 거부하고, "국교 재개하려면 니네가 먼저 국서 보내라"라고 요구. 서로 기싸움을 하는데, 이 과정에서 속 타는 쓰시마가 국서를 위조해 일본이 먼저 국서를 보낸 것처럼 문서를 쓰고 조선의 요구사항 중에 "왕릉 도굴한 자를 잡아서 보내라"는 항목을 만족시키려고 다른 죄를 지은 죄인을 보내서 '얘가 바로 조선 왕릉 도굴한 놈임여'라고 하니, 조선은 일본이 먼저 보낸 줄 알고[17]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 : 국서에 답하고 포로를 데려오는 사신)을 파견. 이들이 가져온 국서에 '국서에 답한다'는 표현이 있자 쓰시마 도주 소 요시토시는 이 국서마저 국서를 보낸다는 문장으로 조작. 결국 국교가 회복되고 무역도 제한되긴 했지만[18] 재개된다.

1635년국서 위조가 밝혀지면서 쓰시마가 털릴 위기에 처하지만 에도 막부는 이를 묵인해줬고 다른 다이묘들과 로쥬가 합의하여 대신 감독관을 파견하면서 양속적 성격이 강했던 쓰시마 섬은 일본에 편입되어 대조선 외교 창구 같은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2000년 이후 16~18세기 동아시아 은 교역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까지 쇠퇴했던 중국 - 일본의 은 교역을 대체하는 창구로서 대마도의 은 무역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조선과의 교역을 담당해 온 쓰시마 번이니만큼 아메노모리 호슈 같은 걸출한 외교 담당 관리도 있었고, 조선어 통역관을 양성하는 소학교도 세워졌다.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치현과 더불어 옛 다이묘들에게 작위가 주어졌는데, 쓰시마 소 씨의 경우 고쿠다카가 1, 2만 석을 겨우 왔다갔다 하는 정도로 자작에 해당했지만 조선과의 교역을 맡아왔다는 점을 감안해서 백작의 작위가 주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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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실존 인물 및 가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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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씨대종회에서는 진주 소(蘇)씨가 소벌도리 공 후손이 아니라고 주장[2]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에는 소율희, 《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에는 김율희로 되어 있다.[3] 소벌도리는 경주 최씨의 시조이기도 한데, 그렇다면 최(崔) 역시 쇠(金)의 발음에서 나온 것일지......[4] 집성촌이 전라북도 익산남원, 수원시에 있고 서울을 제외하면 전라북도 거주인구가 가장 많다.[5] 경기도 내에서도 대부분 미수복 지역에 거주한 것도 한 몫한 듯 하다.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은 평산소씨 최대 집성촌이다.[6] 한자로는 '닮을 초'로 쓰이며, 간간히 '소'라고도 부른다. 한때 매소성 전투을 '매초성 전투'라고도 했었다.[7] 다만 蕭씨는 비교적 흔한 편이었으나 肖씨는 아주 드문 희귀 성씨에 속했다.[8] 소 다케유키 백작의 아들이다.[9] 다른 사례로 사쓰마의 시마즈, 소마 나카무라(相馬中村) 번주 소마씨(相馬氏), 히고 히토요시(肥後人吉) 번주 사가라씨(相良氏) 정도가 있다.[10] 다만 아비루 씨 자체는 멸망하지 않고 그대로 섬에서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고, 오늘날에도 아비루 씨는 쓰시마에서 흔한 성씨로 남아있다.[11] 아울러 명나라 쪽으로 갔던 왜구들도 현지에서 궤멸되고 무로마치 막부의 지배권도 자리를 잡아가면서 왜구는 줄어들었다.[12] 대신 조선측에서 세사미(歲賜米)라는 명목으로 해마다 쓰시마 도주에게 쌀 2백 섬씩을 주었다.[13] 현대라면 전쟁특수라도 누렸겠지만 그딴 건 없고 뱃길 안내를 위해 끌려가서 다시 돌아오지 못한 일도 비일비재. 거기다 식량부족으로 기아에 시달리면서 쓰시마 섬은 임진왜란 동안 상당한 고생을 한다. 그래서인지 당시 쓰시마 도주 소 요시토시는 일본이 조선을 완전히 점령할 경우 농사가 가능한 거제도를 받기로 했다고 한다.[14] 그러나 이미 화포 무기를 지닌 조선은 총통에 비해 위력이 약한 조총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전쟁이 일어난 이후에야 조총의 장점을 인식하게 된다.[15] 이 통신사가 바로 황윤길과 김성일의 통신사다.[16] 다만 포로 쇄환 임무는 노비로 부리고 있는 주인이 보내주지 않거나, 본인이 돌아가봐야 가족도 다 죽고 없다며 돌아가기를 거부하거나, 혹은 조선에서와는 달리 어느 정도 대접을 받고 지위가 보장되었던 장인들의 경우 조선 조정의 쇄환에 제대로 응하지 않았다.[17] 사실 조선측에서도 쓰시마에서 범릉(犯陵, 왕릉을 파헤친) 사건의 범인이라고 보낸 자들이 실은 쓰시마 도주한테 속아서 온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냥 넘어갔다.[18] 임진왜란 이전에는 부산포, 제포, 염포 세 포구가 개항되어 있었건만 임진왜란 이후에는 부산포 하나로 제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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