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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백 李基白 | |
출생 | 1924년 10월 21일 |
평안북도 정주시 오산 | |
사망 | 2004년 6월 2일 (향년 79세) |
학력 | 오산중학교 (졸업) 와세다대학 (사학 / 중퇴)[1]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사학 / 학사) |
약력 | 이화여자대학교 부교수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림대학교 사학과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림과학원 객원교수 이화여자대학교 석좌교수 한국사 시민강좌 책임 편집위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
1. 개요
대한민국의 역사학자.2. 활동
1924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했다.1941년 정주 오산중학교[2]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 와세다대학 사학과에 입학하여 재학하던 중 일본군에 징집돼 만주 관동군에서 복무했다. 종전 후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귀국, 1946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사학과에 편입해 1년 만에 졸업했다. 참고로 이때 졸업 학위논문으로 삼국유사 흥법편을 분석하여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되는 과정을 고찰한 「불교전래고(佛敎傳來考)」라는 논문을 집필했다. 이 논고를 수정 보완하여 「삼국시대 불교의 전래와 그 사회적 성격(三國時代 佛敎의 傳來와 그 社會的 性格)」(1954 역사학보)을 학계에 발표하였다. 이후로는 한동안 주 연구분야가 되는 고려 병제사나 신라사에 대한 연구에 집중했다. 정확히는, 초기에는 고려 병제사를 연구하다 고려 병제사 연구의 기본이 되는 신라 후기의 병제에 대해 연구해야겠다고 생각해 1957년 「신라사병고(新羅私兵考)」라는 논문을 발표한 것이 신라사 연구의 시작이었다.[출처1]
이후 이 연구를 확장해 신라 하대 진골귀족의 경제적, 정치적 기반을 고찰하여 신라 하대의 정치가 귀족연립적 성격을 띈다고 주장했다. 또 신라 상대와 중대의 사회적 성격도 고찰하여 신라 상대는 원시적 족장에서 성장한 귀족들로 구성된 귀족연합제, 중대는 왕의 권력이 전제적으로 작동하는 전제왕권 형식이었다고 주장했다. 현재까지도 뜨거운 감자인 신라 중대 전제왕권설의 첫 제안자가 이기백 교수였다.
이어 연구분야를 더 확장해 고구려와 백제의 정치도 검토하여 양국모두 초기의 형제상속이 부자상속으로 옮겨갔다는, 한국사 교과서에도 쓰여진 유명한 통설이 될 학설을 발표했으며 동시에 두 나라 모두 부자상속이 확립되는 시기에 왕비를 연속적으로 다수 배출하는 '왕비족'이 등장하였다고 보았다. 이후 국왕들이 이 왕비족의 여자들을 왕비로 들이던 시기에서 벗어나 왕이 자유롭게 왕비를 들이게 된 시기가 한국 고대의 전제왕권이 성립된 시기라고 주장했다.
이후로는 신라의 골품제와 고려 병제사 연구에 천착했으며, 1973년에는 신라 중대의 전제왕권 설립의 배경으로 왕비족으로서 위세를 누리던 박씨의 지위가 무너진 것과 갈문왕 제도가 중대 초에 사멸한 것을 꼽아 주목을 받았다. 한편 이 시기 집사부와 시중의 성격에 대해 현재까지도 통설로 이어지는, 초기에는 전제왕권의 필요에 따라 왕권을 보위하고 귀족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았으나 나중에는 독자적인 정치적 성격을 띄게 되었다는 설을 정립하였다. 이후 70년대 후반부터는 불교와 유교의 사상사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였으며, 이외에도 일일히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분야의 연구를 진행했다.
1963년부터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동양사의 전해종, 서양사의 길현모, 차하순 등과 함께 '서강사학'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1985년에 한림대학교 교수로 옮겨 1995년 퇴직했고, 한림과학원 객원교수와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석좌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초기 사학계에 영향을 미쳤으며, 민족사학을 개척하고, 한국사의 대중화에 힘썼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기백은 1970년대까지 여느 1세대 사학자들처럼 식민사학을 비판하며 민족의 주체적, 내재적 발전을 강조하는 입장이었는데, 80년대가 되어 강경 민족주의 성향을 띈 재야사학자나 환빠가 등장하자 민족 중심 사학에서 다소 멀어져 진리를 중요시하게 된다.[출처1] 특히 이러한 입장의 연장선상에서 1987년부터는 이기백의 주도로 역사학자들이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국사 시민강좌》와 같은 역사 잡지를 펴내기도 하였는데, 처음에는 호응이 좋았으나 가면 갈수록 수익이 줄어 들었다. 그러나 잡지의 총편집을 주도한 이기백의 노력 덕분에 《한국사시민강좌》는 이기백이 사망한 후로도 꾸준히 발행하다가 2012년, 50호를 마지막으로 끝을 맺었다.
1995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받았다. 2004년 사망 후 3개월 뒤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3. 학문적 업적
그는 초기 한국 고대사를 연구한 1세대 사학자로서, 성읍국가, 연맹왕국과 같은 인류학적, 역사학적 단어들을 도입하여 한국 고대의 국가 발전단계를 제시하였다. 특히 성읍국가론의 경우 용어 자체의 문제점으로 인해 많은 비판이 제기됨에도 현재까지 일상적으로는 자주 쓰인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이기백은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 신라사 연구에 집중했는데, 이때 같은 세대의 다른 사학자들처럼 중국이나 일본의 사서보다는 한국의 사서를 중심으로 연구하였다. 이를 통해 신라의 국가체제가 상대 귀족연합 - 중대 전제왕권 - 하대 귀족연립정권의 순으로 변해갔으며, 한국의 초기 국가는 성읍국가 - 연맹왕국 -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성읍국가 시기 각 지방을 지배했던 부족장들이 연맹왕국 시기 왕권이 강해지면서 수도의 귀족으로 편재된다는 교과서의 설명은 이기백 교수가 주장한 학설에서 비롯되는 것이다.[출처1] 구체적으로 고구려는 초기부터 연맹왕국 단계에 진입했다가 고국천왕 시기 중앙집권화가 크게 진전되었으나 아직 연맹체적 성격이 남아있었고, 최종적으로는 소수림왕 시기에 중앙집권적 국가가 되었으리라 보았다. 백제의 경우 고이왕 시기 연맹왕국이 되어 근초고왕 시기 중앙집권 국가가 되었다고 보아 특이하게도 백제의 발전을 고구려보다 빠르다고 보았다. 신라의 경우 내물왕 시기 연맹왕국이, 법흥왕 시기 중앙집권적 국가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여전히 큰 틀에서는 수용되나, 타국의 사서에 대한 연구가 미진했던 점의 이유로 인해 세부적인 사항에서는 더이상 수용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연맹왕국 단계에서 중앙집권화 단계로 넘어가는 지표로 본 것들의 경우 이기백의 이론에 따르면 소수림왕 이전 연맹체 단계에 이미 연맹체적 특성을 모두 탈피한 것이 되기에 모순이 생긴다. 또 신라 중대의 왕권을 전제정치론으로 규정한 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논란이 존재한다.[출처2] 이중 성읍국가론의 경우 1970년대 부체제론 등장 이후 부체제의 기본을 이루는 '나부'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 그리고 종래의 부족국가론을 극복하기 위해 내놓은 이론이었다.
한편 화백회의와 상대등, 시중의 성격에 대한 통설을 제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화백회의가 왕권을 견제하는 귀족회의로서 처음에는 왕이 주재자였으나 후대에 상대등으로 바뀌었으며, 이 상대등은 귀족 전체의 이익을 중요시하는 화백회의의 주재자로서 시중과 왕권을 견제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시중의 경우 위에서 서술한 대로 처음에는 왕권을 보위할 목적으로 등장했으나 하대에는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되었다고 보았다.
한편 이기백은 한국 사상사 연구에 있어서도 업적을 남겼다. 그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이르는 한국의 사상적 흐름을 규명함으로서 한민족이 당면한 분단과 같은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자 했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풍수지리 등 원시신앙부터 불교사, 유교사 및 도교사까지 폭넓게 연구하였다.[출처3]
한편으로,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대한 문제에서는 제자인 이종욱과 달리 상당히 신중한 입장이었으며, 부정론은 배격하였지만 긍정론을 취하지도 않았다. 그의 이러한 입장은 '삼국사기 초기기록 수정론'이라고 불리며, 현 학계에서도 주류를 이루고 있다.
사서 인용상의 특징으로, 일관되게 한국 사서들. 특히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중점으로 연구를 진행하였으며 중국 사서나 특히 일본 사서에 대한 사료적 이용은 미비한 편이었다. 때문에 신라 정치사 연구에서 '재상'의 성격에 대해 오류를 보이는 등의 단점이 있었다.
4. 저서
대표적인 저서로는 《한국사신론》이 있다. 실제로 《한국사신론》은 오랫동안 국사 교과서 집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 책은 현재에도 한국사 개설서의 고전으로 꼽히며, 하버드 대학교에서도 번역하여 사용한다. 이러한 상징성 때문에 유사역사학 진영에서는 이병도에 이은 식민사학의 후계자라고 힐난하기도 한다(...).이와 비슷한 포지션의 책으로는 한영우의 《다시 찾는 우리역사》, 변태섭의 《한국사통론》이 있다. 이 세 권의 책은 현재까지도 역사교육과 학생이 임용고시를 준비하려면 적어도 한 번쯤은 읽어야하는 책으로 거론되고 있다. 그리고 일부 공무원 시험 준비생들과 강사들도 한국사 과목 심화 보충교재로 쓰기도 한다. 과거 행정고시(현 5급 공채) 1차 과목에 한국사가 있었던 시절(현재는 한능검 1~2급 취득으로 대체)에 《한국사통론》과 함께 고시생들의 사실상 필독 도서였다.
물론 현재는 역사학이 많이 발전하고 연구되어 비 전공 분야에서는 중요도가 낮아진 책이지만 한국사를 개괄적으로 이해하려면, 그리고 한국사 전공자라면 한 번쯤은 탐독할 필요가 있는 책이라는 점에 여전히 변함이 없다.
저서 《민족과 역사》 중 일부인 <민족문화의 전통과 계승>이 과거의 국어 교과서에 실려있어서 적지 않은 학생들이 기억하고 있다. 서구화된 우리 사회에서 외래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해야 하고, 우리가 보존하고 발전 계승할 전통과 인습을 구분하여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해야하며 이는 국수주의나 배타주의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외국 선진문화 섭취의 원동력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생전에 이화여대에서 강의한 녹취록을 토대로 사후에 제자들에 의하여 엮여져 《한국사학사론》이 편찬되기도 했다.
총서 《이기백한국사학논집》(15권+별권)이 발간되어 있다.
5. 여담
《국어사개설》로 유명한 한국어 학자였던 서울대 명예교수 이기문(1930~2020)은 그의 동생이다. 형은 한국사 연구에 큰 족적을 남겼고, 동생은 한국어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총체적인 기틀을 마련했다. 《국어사개설》 역시 연구의 진척과 함께 비판받는 부분도 많이 있으나, 아직까지 두 사람의 책이 강단에서 나름대로의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면 대단한 형제가 아닐 수가 없다.그의 수제자인 이종욱의 박사 학위논문(이종욱, <新羅國家形成史 硏究>, 서강대학교 대학원 박사 학위논문, 1981)은 《삼국사기》 초기기록 긍정론의 입장에서 쓰여진 책이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수정론자인 이기백에 대해 수제자가 박사 학위논문으로 "선생님의 연구 성과들은 대부분 잘못된 것 같습니다" 라는 내용의 논문을 들고온 것. 그러나 이종욱의 논문을 읽어 본 이기백은 논리적으로 자신의 견해보다 타당한 것 같다며 흔쾌히 박사 학위 인준을 시켜주었다.
마찬가지로 이기백의 뒤를 이어 서강대 한국고대사 교수가 된 이종욱 역시 자신의 제자 중 하나가 자신의 골품제 연구를 부정하는 논문을 박사 학위논문으로 제출(전미희, <新羅 骨品制의 成立과 運營>, 서강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8)했는데 흔쾌히 박사 학위를 인준해주었다. 이러한 학풍은 서강대 사학과의 전통이 되어, 서강대 사학과의 교수들은 학부와 대학원 수업에서 자신의 연구성과를 학생들이 비판하는 것을 거리끼기는커녕 오히려 장려하는 분위기를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다.[8]
생전에 이기백을 알고 지내던 교수들이나 동료들이 평가하기를
"자신이 연구가 부족하다고 여기거나 연구해도 타당성이 낮으면 확신을 가질 때까지 함부로 가설이나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다른 사람이 타당한 이야기를 제시하면 그것을 거리낌 없이 수용하는 점잖으신 분."
이라고 평가하는 분들이 많다. 실제로 대학원 수업 시간에서 대학원생들이 이기백 교수의 입장을 비판하더라도 그 의견이 타당성이 있으면 이기백 교수 본인이 칭찬하면서 수용했다고 한다. 또한 학술대회의 대화록을 보더라도 이기백의 이와 같은 면모가 잘 드러난다.6. 관련 문서
[1] 재학 중 일본군에 징집되어 졸업하지 못했다.[2] 이 학교는 이승훈이 설립한 학교로, 이승훈은 이기백의 종고조부, 즉 고조부의 동생이다.[출처1] 전덕재(Jeon Deog-jae). "이기백의 사학과 한국고대사 연구." 韓國古代史硏究 0.53 (2009): 81-124.[출처1] [출처1] [출처2] 김수태(Kim Soo-tae). "신라사에서의 전제정치론과 왕권." 역사와 담론 0.85 (2018): 1-47.[출처3] 김수태(Kim Soo-tae). "이기백의 한국사상사연구와 왕권." 한국고대사탐구 27.- (2017): 429-466.[8] 물론 어설프게 덤비면... 비판할 의욕이 넘치는 것과 비판할 능력이 있는 것은 매우 다르다. 사실 사학과를 나와서 제대로 학회에 한번 나가보면 어설픈 지식으로 상대방을 깠다가 호되게 박살나는 걸 수두룩하게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