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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李鍾旭대한민국의 역사학자.
1946년 8월 17일생([age(1946-08-17)]세). 경기도 파주시 출신. 현재 서강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명예교수다.# 2009년 6월~2013년 2월에 제13대 서강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서강대학교 최초의 동문 출신 총장이다.
서강대학교 사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76, Kansas대학교 대학원 인류학과 수학
1977, British Columbia대학교 대학원 인류학 및 사회학과 수학
2011.5~2012.4: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 부회장
2010.12: 대법관제청 자문위원회 위원장
2009.11~2011.11: 한국가톨릭계대학총장협의회 부회장
2009.6~2013.2: 서강대학교 총장
2005.4~2007.4: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위원(매장문화재분과)
2004.7~2005.6: 교육인적자원부 제3기 기초학문육성위원회 위원
2002.6~2007.8: 서강대학교 박물관장
1997.9~1999.6: 서강대학교 교사편찬위원장, 인문과학연구원장
1997.1~1997.9: 서강대학교 교무처장, 연구처장
1993.3~1995.2: 서강대학교 사학과장
1992.9~1993.2: 서강대학교 박물관장
1988.9~1991.8: 서강대학교 박물관장
1982.9~1983.7: British Columbia대학교 인류학과 Post-doctoral Fellow
1985.9~2013.2 : 서강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1977.3~1985.8: 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2. 생애
한국 사학계의 대학자인 이기백의 수제자였으며, 그의 뒤를 이어 한국사학계 서강학파의 거두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현재는 정년퇴임을 하여 서강대 명예교수로 남아있다. 이기동, 노태돈, 노중국, 주보돈, 김태식 등과 함께 현재 한국 고대사학계의 거두로 손꼽히는 인물로, 특히 고구려, 신라와 관련해 많은 저술을 발표하였다. 한편 서울대학교의 노태돈과는 일찍부터 학문적으로 대립 관계에 있던 사이로 학계의 대표적인 라이벌로 손꼽힌다.이종욱은 삼국사기 초기기사를 긍정하여 삼국이 이미 초기 1세기경부터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이루고 있었다고 주장했던 반면에 노태돈은 이와는 정 반대로 삼국지 동이전과의 절충론을 통해 삼국은 여러 부체제의 연합국가적 성격으로 파악하는 견해를 발표하였기 때문이었다. 후에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얼마나 긍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다른 학자들과 충돌이 일어났는데, 초기기록에 대해 수정론적 자세를 취하는 학계의 통설을 포스트 식민사학이라고 비판하는 강수를 두었고 때문에 최근은 학계에서의 입지가 많이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1][2]
이와 관련하여 이종욱의 박사학위 논문[3]은 삼국사기 초기기록 긍정론의 입장에서 쓰여진 책이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수정론자인 이기백에 대해 수제자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선생님의 연구성과들은 대부분 잘못된 것 같습니다" 라는 내용의 논문을 들고온 것. 그러나 이종욱의 논문을 읽어 본 이기백은 논리적으로 자신의 견해보다 타당한 것 같다며 흔쾌히 박사학위 인준을 시켜주었다.[4]
마찬가지로 1985년 이기백 교수가 서강대를 정년퇴임 한 후 뒤를 이어 영남대에서 옮겨와 서강대 한국고대사 교수가 된 이종욱 역시 자신의 제자 중 하나가 자신의 골품제 연구를 부정하는 논문을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5] 하였는데 흔쾌히 박사학위를 인준해주었다. 이러한 학풍은 서강대 사학과의 전통이 되어, 서강대 사학과의 교수들은 학부와 대학원 수업에서 자신의 연구성과를 학생들이 비판하는 것을 거리끼기는 커녕 오히려 장려하는 분위기를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수정론자들을 매섭게 비판하는 편이다. 현 학계의 주류는 초기 기록이 부분적으로 와전, 과장된 부분이 섞여있다는 수정론이 대세인데 대표적으로 앞서 언급되었던 노태돈 노중국 김태식 교수 등을 위시하는 한국 강단 사학계에서는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지도, 완전히 부정하지도 않는 수정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여담으로 이와 관련하여 이들은 제1,2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위 주축 멤버였다. 그 회의의 공과를 따지면, 임나일본부설을 대폭 축소 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한편, 한국 고대사의 연대를 훨씬 후대로 정립 시켰다는 것에 대해 비판을 받는다.
고구려는 2세기 태조왕이후 ,백제에서는 3세기 고이왕이후 왕위가 세습되기 시작하였으며 신라에서는 4세기 내물왕부터.. (금성교과서 중학교판,2020년)
"마한, 진한, 변한 그 다음에 태고내... 태조대왕(고구려), 고이왕(백제), 내물왕 (신라)[6]...이것을 무너뜨린다는 것, 이것을 바꾼다는 것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넘어가는 것보다도 쉽지 않은 아주 어려운 문제가 될 수밖에 없죠. 한 패러다임이 다음 패러다임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모든 사람들이 쓰다소키치, 이병도 선생이 만든 틀 속에 안주하면 모 든게 편합니다.
이종욱, EBS 다큐시선 우리곁의 친일잔재 1부 제국의 학교
이종욱, EBS 다큐시선 우리곁의 친일잔재 1부 제국의 학교
발해를 한국사의 주류 국가로 보지 않는 대표적인 국내의 사학자이다. 아예 발해를 한국사와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것은 아니고 현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지분이 신라가 가장 크다는 주장이다. 이는 그가 주장하는 신라 정통론에 기인한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 중심의 한국 사학계의 연구에 의해 신라가 소외[7]되었다고 느끼는 모양이다. 따라서 남북국 시대나 통일신라-발해 등의 용어에서 발해가 신라와 대등한 위치로 병기되는 것에도 불편함을 드러낸 바 있다.
주류 사학계와 대립하는 주장을 많이 하는 학자다보니 나무위키의 여러 역사 관련 문서에서는 이종욱 교수의 견해를 반대편에서 비판하는 입장의 서술이 대부분이다. 대표적으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 관련[8]이나 필사본 화랑세기[9] 관련해서 나무위키에서는 이종욱 교수가 미는 견해를 틀린 것으로 보는 게 많다.
대표적으로 이종욱이 진서(眞書)라고 주장하는 <화랑세기> 같은 경우는 위작(僞作)으로 보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2.1. 화랑세기 관련
한편으로는 박창화가 필사한 화랑세기 진서론을 밀고 있는 대표적인 역사학자인데,[10] 이 문제에 대해서도 화랑세기 위서론을 앞장서 주장하고 있는 노태돈과 대립하고 있다. 다만 학계에서는 대체로 화랑세기를 위서로 보고 있으며, 사료적 가치는 찾아볼 수 없다고 보는 관점이 자리잡고 있는데, 해당 논란에 대해서는 화랑세기 문서를 참조.3. 저술 목록
- 『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0.
- 『新羅國家形成史硏究』, 一潮閣, 1982.
- 『古朝鮮史硏究』, 一潮閣, 1993.
- 『韓國史上의 政治形態』, 一潮閣, 1993.
- 『한국 초기국가 발전론』, 새문사, 1999.
- 『한국의 초기국가』, 아르케, 1999.
- 『한국 고대사의 새로운 체계: 100년 통설에 빼앗긴 역사를 찾아서』, 소나무, 1999.
- 『新羅骨品制硏究』, 一潮閣, 1999.
-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 김영사, 2000.
- 『한국사 연구 100년: 과거-문제』, 서강대학교 출판부, 2000.
- 『신라의 역사: 그들의 왕국: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읽은 신라와 신라인 이야기』, 김영사, 2002.
- 『화랑』, 휴머니스트, 2003.
- 『역사충돌: 한국 고대사의 민족만들기·역사만들기 신화 무너뜨리기』, 김영사, 2003.
- 『건국신화: 한국사의 1막 1장』, 휴머니스트, 2004.
- 『고구려의 역사』, 김영사, 2005.
- 『색공지신 미실』, 푸른역사, 2005.
- 『민족인가, 국가인가?: 신라 내물왕 이전 역사에 답이 있다』, 소나무, 2006.
- 『주몽에서 태조대왕까지: 고구려의 국가 형성과 성장에 대한 <모델 3>(서강학술총서 2)』, 서강대학교 출판부, 2008.
- 『춘추: 위대한 정치 지배자, 김춘추』, 효형, 2009.
- 『신라가 한국인의 오리진이다: 경주 신라길을 답사하며 한국인의 근원을 묻는다』, 고즈윈, 2012.
- 『상처받은 신라: 그 안에 한국인 정체성의 원점이 있다(서강학술총서 90)』, 서강대학교 출판부, 2016.
- 『김유신』, 지식산업사, 2022.
[1] 아무래도 삼국사기 초기기사가 보다 나중의 기록과는 달리 교차검증이 잘 되지 않고, 고고학적 연구성과와도 쉽게 연결되지 않는데다가 초기 국왕의 수명과 재위기간 및 계보에 조작이 이루어진 점이 확실하기 때문에 어느정도 수정해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의견이 학계에서 유력하다.[2] 이에 관해 노태돈을 실명을 거론하며 비판했고, 주보돈 등의 학자들이 재반박 ,반발 하면서 노태돈 주보돈 김태식 등과는 감정의 골이 깊어진 상태이다.[3] 이종욱, <新羅國家形成史 硏究>, 서강대 박사학위논문, 1981[4] 반면 이종욱 교수의 학술적 라이벌인 서울대학교 노태돈 교수는 서울대학교 박사 학위를 받지 못했었다. 석사 학위자 상태로 서울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고 수십년이 지난 이후에 서울대로부터 연구성과를 인정받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 물론 역량이 부족해서 못받은게 아니라 원래 인문학 계열은 박사 학위를 받는게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었다. 한 분야의 학계를 주도하는 인물이고 젊은 시절부터 두각을 보인 인물임에도 함부로 박사 학위를 주지 않았을만큼 엄격했던 것. 과거 인문학 계열 원로 교수님들 중에서는 의외로 석사 학위자로써 명문대 교수로 임용되신 분들이 생각보다 많다. 지금도 이공계에 비해서는 대체로 박사학위 받는데 걸리는 기간이 길고 박사학위를 못 딴 채 박사과정 수료로 마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게 인문학이다. 한 가지 아이러닉 한 점은 차후 그 노태돈 교수의 박사 논문을 심사하고 인준한 인물이 바로 이종욱 교수에게 박사학위를 준 이기백 교수라는 사실.[5] 전미희, <新羅 骨品制의 成立과 運營>, 서강대 박사학위논문, 1998[6] ‘태고내’라고 현재 학계에서 정설로 취급 받는 한반도 고대국가 형성의 시기를 두고, 쓰다 소키치 등 식민주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를 한국 주류학계가 그대로 이었다는 것이다.[7] https://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601739 여담이지만 이종욱(李鍾旭) 교수 본인도 경주 이씨며 종(鍾)자 돌림이다.[8] 삼국 역대 군주들 문서나 삼국사기 초기기록 수정론 식민사관설 문서 참조.[9] 아예 없어진 역사책, 유사역사학서적이라는 분류가 달려있다.[10] 이때문에 그의 제자이자 유명 블로거인 초록불도 환빠류의 상고사 유사역사학에 대해서는 비판하지만 화랑세기는 긍정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현재는 회의적인 시각으로 돌아선듯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