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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3 01:41:22

옥천 전씨


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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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 · · · 황목 · 황보 · ·
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한자 표기가 다르더라도 한글 표기가 같으면 합산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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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230><tablebordercolor=#F5F5F5> 파일:천안, 정선 전씨 종문.svg沃川 全氏
옥천 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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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충청북도 옥천군
도시조 전섭(全聶)
시조 전학준(全學浚)
중시조 전유(全侑)
파조 전광운(全光韻) / 전서공파(典書公派)
전인숙(全仁淑) / 봉상대부공파(奉常大夫公派)
전숙(全淑) / 판서공파(判書公派)
집성촌 대전광역시 대덕구·서구
강원도 양구군
충청북도 영동군·옥천군·진천군
충청남도 금산군
경상북도 봉화군·상주시·영주시
황해도 연백군
평안남도 용강군
인구 47,681명(2015년)
링크 옥천전씨 종친회(네이버 밴드)
옥천전씨 종친회(다음 카페)
옥천전씨 판서공파(네이버 카페)
옥천전씨 홈페이지


1. 개요2. 역사
2.1. 분적 이전2.2. 분적 이후
3. 족보4. 유적
4.1. 묘역
4.1.1. 전서공파4.1.2. 판서공파
4.2. 서원4.3. 재실
5. 분파
5.1. 전서공파(典書公派)
5.1.1. 지파5.1.2. 종친회
5.2. 봉상대부공파(奉常大夫公派)
5.2.1. 지파
5.3. 판서공파(判書公派)
5.3.1. 지파5.3.2. 종친회
6. 항렬7. 과거 급제자
7.1. 문과7.2. 무과7.3. 생원시7.4. 진사시7.5. 잡과
7.5.1. 역과
8. 집성촌
8.1. 대전광역시8.2. 강원도8.3. 충청도8.4. 경상도8.5. 북한
9. 인물
9.1. 역사인물9.2. 현대인물
9.2.1. 전서공파
9.2.1.1. 학촌파9.2.1.2. 구천파9.2.1.3. 망동파9.2.1.4. 만촌파9.2.1.5. 행정파
9.2.2. 판서공파
9.2.2.1. 화룡파
9.2.3. 계보 불명
10. 인구 분포11. 여담12. 참고자료

1. 개요

충청북도 옥천군을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옥천의 고호(古號)가 관성(管城)이므로 관성(管城) 전씨, 관산(管山) 전씨라고도 부른다.

한국의 모든 전씨백제의 개국공신 환성군(歡城君) 전섭(全聶)을 도시조(都始祖)로 모시며, 옥천 전씨 역시 환성군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있다. 때문에 전씨 종중에서는 본관을 일종의 분파처럼 말하여 옥천파(沃川派)라 일컫기도 한다.

2. 역사

2.1. 분적 이전

전섭(全聶)이라는 인물이 오간(烏干), 마려(馬藜), 을음(乙音), 해루(解婁), 흘간(屹干), 곽충(郭忠), 한세기(韓世奇), 범창(笵昌), 조성(趙成) 등 아홉 사람과 함께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 온조(溫祚)를 도와 기원전 18년 백제 개국에 공을 세우고, 그로 인해 십제공신(十濟功臣) 환성군(歡城君)에 봉작된 것을 한반도 전씨(全氏) 역사의 시초로 본다.[1] 그 까닭에 현전하는 전씨들은 관적을 막론하고 전섭을 도시조(都始祖)로 모시는데, 옥천 전씨도 그 중 하나다.

전섭의 후손인 전선(全愃)신라 때 정선군(旌善君)으로 봉해진 것을 계기로 정선을 관향을 삼았다 하며,[2] 전선의 후예인 전이갑(全以甲)왕건(王建)를 도와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전해진다.

2.2. 분적 이후

옥천 전씨는 전이갑의 7세손이자 고려 때 동정(同正), 또는 영동정(領同正) 벼슬을 지낸 전학준(全學浚)을 시조로 한다. 이는 전학준 이전의 계대가 한동안 모호하였기 때문인데, 지금은 북한 지역인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경릉리 묘소에서 "이갑(以甲)의 11세손이자 검교도위(檢校都尉)를 지낸 필(弼)의 아들 관성(管城) 전공(全公) 유(侑)"라고 쓰인 묘지석(墓誌石)[원문]이 발굴되면서 비로소 옥천 전씨가 정선 전씨 충렬공 전이갑의 후예임을 알게 됐다. 다만 문중에서는 여전히 전학준을 기세조(起世祖)로 모시는데, 이는 전학준을 시조로 하여 초기 족보를 편수했던 전팽령(全彭齡), 전명룡(全命龍) 등 현조(顯祖)들의 유지를 잇기 위함이다.

전학준의 현손[4]인 전유(全侑)가 고려 충숙왕 치세에 봉익대부(奉翊大夫)[5] 밀직부사(密直副使) 판도판서(版圖判書)[6] 상호군(上護軍)의 벼슬을 지내고 관성군(管城君)으로 봉해지면서 옥천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1933년에는 부여군 외산면 무수리에 사는 윤난수(尹蘭秀)의 집에서 관성군 전유의 화상과 찬문(讚文)을 발견하였다. 윤난수의 6세조 소남(邵南) 윤동규(尹東奎)가[7] 중국에 있는 용도각(龍圖閣)에서 동국 13현(東國 十三賢)의[8] 진상(眞像)을 발견하고 화공(畵工)을 시켜 모본(摹本)을 그려 와 대대로 간직하여 왔다고 한다. 이를 관성군 20세손인 전용하(全用夏)가 구해와 몇 년간 간직했으며, 을해보 간행 다음 해인 1936년관향의 자손들의 합의로 개모하여 목담서원에 봉안하였다. 현재는 송정(松亭) 전팽령, 사서(沙西) 전식(全湜)의 초상과 함께 봉안되어 있다.

관성군 전유는 세 아들을 두었으며, 후손들은 이들 삼곤계(三昆季)를 파조(派祖)로 하여 3개 파로 분파하였다. 관성군의 장남 전광운(全光韻)은 고려 말 정의대부(正議大夫)[9] 판비서감사(判秘書監事)를 지내고 이부전서(吏部典書)에 제수되었다가 치사(致仕)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그 자손들을 전서공파(典書公派)라 한다. 차남 전인숙(全仁淑)은 봉상대부(奉常大夫)[10]에 올랐으며, 봉상대부공파(奉常大夫公派)의 파조가 되었다. 3남 전숙(全淑)은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관성군(管城君)으로 봉해졌으므로[11] 그 자손들을 판서공파(判書公派)라 일컫는다.

고려 때 이미 옥천에 뿌리내린 까닭에 세종실록지리지옥천군토성(土姓)으로 옥천 육씨, 옥천 황씨에 이어 옥천 전씨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온 성씨를 의미하는 내성(來姓)에도 전씨가 있는데 이는 옥천 전씨 삼곤계(전서공파, 봉상대부파, 판서공파)의 파조들이 관직생활을 하다 고려 멸망 후 관향으로 낙향한 것을 새롭게 이주했다고 기록자가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에 들어서는 단종 절신 휴계(休溪) 전희철(全希哲), 청백리 송정 전팽령, 야옹(野翁) 전응방(全應房)[12], 효자 쌍암(雙岩) 전엽(全燁), 인봉(仁峰) 전승업(全承業), 충간공(忠簡公) 사서 전식, 병자호란 때 순절한 호종공신 규천(虬川) 전극항(全克恒), 설월당(雪月堂) 전익희(全益禧), 영서(𤃡西) 전명룡 등 다수의 인물을 배출했다.

조선조에 활약한 옥천 전씨 인물들은 학맥 상 서인이나 동인 어느 한 쪽으로 편중되지 않은 편이다.[13][14][15] 다만 남인들의 계보인 남보(南譜)에 옥천 전씨가 기록되어 있고 여기에 송정 전팽령과 그의 형인 송오(松塢) 전팽수(全彭壽),그리고 충간공 사서 전식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아[16] 현조를 중심으로 본다면 남인동인 계열이 주가 되는 편이다.[17]

3. 족보

1554년 송정 전팽령족보를 기록하는 등 계보는 꽤 일찍부터 확립되어 있었으나 인본은 현전하지 않는다.[18] 1635년 남은 사본을 바탕으로 족보를 새로 증수하였고 이후 주기적으로 대동보(大同譜)와 파보(派譜)를 만들어 왔다. 대동보는 1989년 기사보를 최신으로 하며, 봉상대부공파와 판서공파가 2019년 기해파보를, 전서공파가 2020년 경자파보를 간행하였다. 족보 간행 내력은 다음과 같다. 녹색은 대동보다.

4. 유적

4.1. 묘역

4.1.1. 전서공파

4.1.2. 판서공파

4.2. 서원

4.3. 재실

5. 분파

크게는 관성군 전유의 세 아들을 각각 파조로 하여 전서공파, 봉상대부공파, 판서공파로 나뉜다. 이들 삼곤계 아래로 세거지의 명칭을 파명(派名)으로 삼는 소파(小派)들이 다시 나뉜다.

5.1. 전서공파(典書公派)

파조 전광운은 고려 말 정의대부 판비서감사를 지내고 이부전서에 제수되었다가 치사했다. 현손인 휴계 전희철의 옛 묘갈에는 '전광원(全光遠)'이라 기록되어 있었다고 전하며,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이 지은 송석충(宋碩忠)의 묘갈에도 '전광원'이라 기록되어 있다.[72] 관향인 충청북도 옥천군·영동군을 비롯해 경상북도 영주시·봉화군, 충청남도 금산군 등지에 세거한다. 휴계 전희철, 영서 전명룡, 야옹 전응방, 설월당 전익희, 언눔 전우익 등이 전광운의 후손이다.

5.1.1. 지파

파일:천안, 정선 전씨 종문.svg
옥천 전씨 전서공파 세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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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世
전광운
정의대부 판비서감사 이부전서
7世
전비
봉렬대부 사복소경
전감
선교랑
8世
전귀덕
선무랑 통례문봉례랑
전미덕
9世
전의
진의부위
전예
선차지인 가각부록사
전지
號농수 봉상대부 홍문관부제학
10世
전희식
사직
전희로
승훈랑 함열현감
전희철
號휴계 통정대부 부호군
전희윤
계천위
전맹검
통훈대부 사섬시정
전중검
11世 전근
전현
효력부위 대구판관
전거
전호
통훈대부 내자시첨정
전박
장사랑 현릉참봉
전창
통훈대부 사재감정
12世
전만령
참봉
전백령 전억령
전사영
부사과
전지영
號죽담 통훈대부 거제현령
전응복
내금위
전응방
號야옹
전응두
號송파
전응벽
승사랑 숙릉참봉
전응삼
號칠리수
전필적
증통정대부
전우적
13世
전우
참봉
전주
號설봉 통훈대부 홍원현감
전안
부사용
전관
통훈대부 공산현령
전성 嗣孫
전해
號학계 통례원인의
전홍
전천로
종사랑
14世
†전천기
봉직랑 예빈시봉사
전천성
선교랑
전천기
전천경
號길야당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
†전이헌
號채지재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
전성헌
승훈랑
전사헌
號양진당 봉사
전시헌
號수당 선교랑
전상헌
號매월당 승훈랑
전신헌
號송월당 봉훈랑
전이헌
전상문
통덕랑
전상무 전상길
15世
전결
증통정대부 장례원판결사
전설
號고산 장사랑 사재감참봉
전황
전택
號화암
전길
號삼성재
派名 진목정파 서정자파 이곡파 모산파 학촌파 연기파 공주파 진잠파 삼정파 강화파 진산파 구천파 망동파 거촌파 이계파 계천위파 안남파 산대파 신창파 조운파 조운파
※ 좌측부터 장파(長派)임.
† 입후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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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 종친회

5.2. 봉상대부공파(奉常大夫公派)

관성군 전유의 둘째 아들인 전인숙(全仁淑)의 후손들이다. 전인숙은 봉상대부 벼슬에 올랐다. 전인숙의 손자 전동(全棟)은 본래 진사였으나 조선 국초에 회유에 굴하지 않아 옥천의 호장(戶長)으로 강등되고 거느리던 노비는 관노비로 삼았다고 전한다. 자손들은 관향 옥천에 주로 분포한다. 독립운동가 단여(檀如) 전좌한(全佐漢) 등이 이에 속한다.

5.2.1. 지파

파일:천안, 정선 전씨 종문.svg
옥천 전씨 봉상대부공파 세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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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世
전인숙
봉상대부
7世 전윤해
8世 전동
9世 전충강 전의강 전현강 전우강
10世 전임 전벽 전당
11世 전석복 전원복
12世 전해 전성 전이중
13世 전의립 전무립 전경민
14世 전명택 전명우 전명승
15世 전동립 전동식 전초현 전국현 전초웅
派名 관향파 관향파
※ 좌측부터 장파(長派)임. }}}}}}}}}

5.3. 판서공파(判書公派)

파조 전숙은 봉익대부 판도판서를 역임하고 관성군으로 봉해졌다. 이러한 이유로 전숙을 후(後) 관성군 이라부르기도 한다. 관향인 옥천·영동경상북도 상주시, 충청남도 금산군일대에 세거한다. 송오(松塢) 전팽수(全彭壽), 송정 전팽령, 쌍암 전엽, 인봉 전승업, 충간공 사서 전식, 규천 전극항, 창주(滄州) 전극념(全克恬) 등이 전숙의 후손이다.

5.3.1. 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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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전씨 판서공파 세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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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世
전숙
봉익대부 판도판서 관성군
7世 전사추 전도
8世 전오이 전오례 전오용
9世 전효순
10世 전응경 전응보 전원계 전원말
11世 전팽조 전팽수 전팽령 전수부
12世 전형 전혼 전환 전열 전영립 전엽 전황 전득수
13世 전이근 전이신 전이공 전이경 전여즙 전여림 전여주 전경남 전복남 전수남 전이일 전흔 전순 전한 전돈 전승업 전창국 전신국 전성국
14世 전식 전굉 전준 전면 전낙 전해 전속 전철 전극경 전급 전징 전익 전계 전의원
15世 전극항 전극념 전극항 전극침 전극징 전극층 전극성 전극선 전극황 전극민 전극순 전극관 전극용 전극문 전호태 전호점 전호림 전호진 전호익 전호택 전세량 전세기 전세회 전세백 전세정 전세림 전세권 전세빈 전세주 전세장 전세춘 전명휘 전명규 전명위
派名 각신파 자부파 노동파 창주공파 간목파 화룡파 오덕파 적하파 성당파 은풍파 무주파 적하파 용산파 서산파 연산파 홍성파 목담파 진천파 서화파 봉산파 율림파 독곡파 홍산파 목담파 옥산파 이평파 의정부파 갈전파 필력파 길왕파 중가파 구일파 양구파
※ 좌측부터 장파(長派)임. }}}}}}}}}

5.3.2. 종친회

6. 항렬

파일:천안, 정선 전씨 종문.svg
옥천 전씨 항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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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수 전서공파 판서공파 대동항렬
신해
1911
무술[78]
1958
경자
2020
갑진
1904
을해
1935
갑인
1974
1世 同正公 全學浚
26世 준○
埈○
달○
達○
재○
在○
27世 우○
遇○
만○
萬○
우○
遇○
○호
○鎬
○옥
○鋈
○기
○錡
우○
遇○
28世 ○구
○九
○훈
○勳
○구
○九
해○
海○
철○
澈○
영○
泳○
○구
○九
29世 병○
丙○
기○
基○
병○
丙○
○식
○植
○병
○秉
○근
○根
병○
丙○
30世 ○녕
○寧
○종
○鍾
○녕
○寧
병○
炳○
경○
烱○
혁○
爀○
○기
○基
31世 성○
成○
수○
洙○
성○
成○
○균
○均
○배
○培

용○
鎔○
승○
丞○
32世 ○범
○範
○상
○相
○범
○範
○우
○雨
○종
○宗
33世 용○
庸○
환○
煥○
용○
庸○
상○
相○
정○
正○
34世 ○재
○宰
○신
○新
○섭
○燮
○헌
○憲
35世 정○
廷○
중○
重○
정○
廷○
오○
五○
36世 ○규
○揆
○규
○揆
○호
○鎬
○혁
○赫
37世 보○
輔○
일○
壹○
영○
泳○
택○
宅○
38世 ○종
○宗
○주
○柱
○익
○益
39世 승○
承○
환○
煥○
욱○
旭○
40世 ○헌
○憲
○채
○埰
○구
○求
41世 오○
五○
진○
鎭○
42世 ○혁
○赫
○철
○澈
43世 택○
宅○
계○
桂○
44世 ○기
○琪
○영
○榮
45世 욱○
旭○
규○
圭○
46世 ○박
○博
○태
○兌
47世 호○
浩○
48世 ○병
○秉
49世 형○
炯○
}}}}}}}}}

매 수보 때마다 천간법(天干法), 오행상생법(五行相生法), 수교법(數交法)을 고루 사용하여 항렬자를 제정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타성에 비해 대동항렬을 철저히 지키는 편은 아니며, 파별로 다른 항렬자를 사용하기도 한다. 특히, 삼곤계는 서로 다른 항렬자를 사용하는 편이다.

7. 과거 급제자

7.1. 문과

7.2. 무과

7.3. 생원시

7.4. 진사시

7.5. 잡과

7.5.1. 역과

8. 집성촌

8.1. 대전광역시

8.2. 강원도

8.3. 충청도

8.4. 경상도

8.5. 북한

9. 인물

9.1. 역사인물

9.2. 현대인물

9.2.1. 전서공파

9.2.1.1. 학촌파
9.2.1.2. 구천파
9.2.1.3. 망동파
9.2.1.4. 만촌파
9.2.1.5. 행정파

9.2.2. 판서공파

9.2.2.1. 화룡파

9.2.3. 계보 불명

10. 인구 분포

순위 시/도 지역별 인구비율(‰) 인구수(명)
1 대전광역시 3.491 5,304
2 충청북도 2.197 3,402
3 세종특별자치시 2.184 436
4 경상북도 1.300 3,409
5 대구광역시 1.254 3,055
6 충청남도 1.226 2,497
7 인천광역시 1.021 2,882
8 경기도 0.931 11,202
9 서울특별시 0.895 8,562
10 강원도 0.708 1,062
11 울산광역시 0.654 743
12 부산광역시 0.627 2,135
13 전라북도 0.554 1,000
14 경상남도 0.408 1,323
15 제주특별자치도 0.303 179
16 광주광역시 0.163 242
17 전라남도 0.141 248
전국 0.959 47,681

대체로 관향 옥천을 비롯하여 집성촌들이 위치한 충청 지역과 영주, 상주 등 주요 현조(顯祖)들이 터전을 닦은 곳들이 있는 경북 지역에 높은 비율로 분포한다. 반면, 호남과 제주 일대는 상대적으로 인구비율이 낮은 편이다.

11. 여담

12. 참고자료


[1] 물론 오간, 마려를 제외한 인물들의 이름이 정사(正史)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기원전 18년경은 한반도에 성씨라는 개념이 안착하기 훨씬 이전 시기이므로 이는 단지 전씨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생긴 오래된 전승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적어도 7세기 이전부터 전씨(全氏)로 일컬어지는 씨족집단이 백제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 이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전씨, 정선 전씨 항목을 참조.[원문] '旌善君以甲十一世孫檢校都尉弼之子忠肅王朝奉翊大夫密直副使版圖判書上護軍封管城君管城全公侑之墓'[4] 전학준-전효격(全孝格)-전대부(全大富)-전필-전유[5] 고려 후기의 종2품 문산계.[6] 일부 족보에는 민부전서(民部典書)라고도 전한다.[7] 본관은 파평이며 성호사설의 저자 이익의 제자로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다.[8] 동국 13현 명단: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 관성군(管城君) 전유(全侑), 문희공(文禧公) 유경(劉敬)[100], 최유경(崔有慶), 김진손(金振孫), 추수경(秋水鏡), 정래(鄭萊), 전득시(田得時), 문래(文萊), 조대림(趙大臨), 강지(姜漬), 이익재(李益齋), 황면재(黃勉齋)[9] 고려 후기 정3품 문산계.[10] 고려 후기 정4품 문산계.[11] 때문에 전숙을 후관성군(後管城君)이라고도 한다.[12] 휴계 전희철의 손자이다. 소과에 합격했지만 조부의 유언을 본받아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자인 야옹정(野翁亭)을 건립한 후 산수를 즐기고 후학을 양성하며 평생 은둔하는 삶을 살았다. 퇴계 이황과도 교류하여 동인과 관계를 맺었다. 이황과의 교류를 알 수 있는 사례로 야옹정의 현판이 퇴계 이황의 친필이며 현판과 함께 정자 건립을 축하하는 시도 한 수 지어주었다고 한다.[13] 세거지가 기호학파의 주요 지역인 회덕과 영남학파의 본거지 중 하나인 안동 인근에 모두 집중되어 있기는 하지만 지역과는 상관없이 영남 지방대구에 거주하는 인물이 서인으로 활동한 경우가 있는 반면 서인이 지배적인 충청좌도(現 충청북도)에서 동인 세력으로 꾸준히 영향력을 발휘한 경우도 있다.[14] 전서공파는 야옹 전응방이 퇴계 이황과 교류하며 동인과 관계를 맺었다. 이 후 증손인 전해(全海)가 풍산 류씨 류경심(柳景深)(족질(族姪)이 류성룡)의 사위가 되며 류성룡의 문하에 들어간다. 이렇듯 15세기 중반 영주의 옥천 전씨는 퇴계 이황과의 교류, 풍산 류씨와 혼인을 계기로 동인의 일원이 된다. 옥천 전씨와 풍산 류씨의 관계는 옥천 전씨 중 일부가 대구로 이거한 뒤에도 이어진다. 전유장(全有章)이 류성룡의 아들인 류진에게 방문하고 류경심의 문집인 구촌집(龜村集) 편찬에 참여하는 등의 인연을 이어갔다. 전해의 사후 전해의 삼남 전시헌(全時憲)이 밀양 손씨와 혼인을 계기로 대구로 이거하게 된다. 이들은 새롭게 입향하여 대구에서는 기반이 적었기에 영천 이씨와 경주 최씨 등 기존에 정착한 가문과 혼인을 하였고 혼인이 이어진 가문이 한강 정구의 문인인 것을 기반으로 17세기 중반까지는 남인계로 활동했다. 특히 전유장은 대구의 수서원(首書院)이자 남인계 사족의 거점이 되는 연경서원의 원장을 맡는 등 남인 사이에서 인정받는 인물이었다.[15] 그러나 시간이 흘러 전유장은 대구부사와 경상도관찰사로 온 이유겸, 홍처후, 한수원, 이상진과 교류를 통해 서인으로 기울게 된다. 남인 사이에서 인정받던 인물이었으나 서인으로 전향하였기에 전유장은 당시 향촌 사회에서 비판을 받는데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서인으로 활동한 이유는 대구의 옥천 전씨는 전유장이 서원의 원장을 맡으면서 사회적 지위는 확보되었으나 충분한 경제적 기반이 마련되지는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후반의 조선은 경신대기근을 대표로 하는 여러 대기근을 겪으며 엄청난 경제적 위기를 맞이한 시기였기에 대구의 옥천 전씨는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날 수단으로 서인 계열인 관찰사의 천거를 통한 관직 진출에 주목한 것이었다.#[16] 17세기 忠淸道 沃川 資風書堂의 운영과 인적구성-고수연[17] 남보에 기록된 옥천 전씨 인물 3명이 모두 판서공파 인물이듯이 판서공파에 소속된 종파 중 대부분은 동인의 계열을 이어나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옥천에 집성촌이 있는 종파의 경우 조선 후기에 들어 옥천서인이 지배적인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향력이 강했다. 문중서원인 목담서원이 동인서원인데도 노론 집권 시기에 건립된 점, 충청북도에 건립된 8개의 문중서원 중 서인계 서원이 아닌 곳이 목담서원과 백록서원 두 곳인 점, 제향 인물에서도 남당서원의 이황, 기암서원의 강백년, 목담서원의 옥천 전씨 인물, 백록서원의 권상을 제외하면 모두 서인계 인물인 것과 옥천에 남아있는 옥천 전씨와 관련된 유적지를 보면 중앙 정계와 옥천서인이 집권했더라도 옥천에서의 영향력은 여전히 유지되었다.#[18]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1476년에 발행된 안동 권씨성화보(成化譜)이고 족도(族圖)로 범위를 넓히면 1401년에 발행된 해주 오씨의 족도가 가장 오래되었다. 이외에 16세기에 발행된 족보로는 1562년에 발행된 문화 류씨가정보(嘉靖譜) 그리고 1565년에 발행된 강릉 김씨을축보(乙丑譜)가 대표적이다. 비록 현존하지는 않지만 1554년에 발행된 기록이 있기 때문에 족보가 발행된 시기는 다른 가문의 오래된 족보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다.[19] 전팽령의 형인 전팽수의 증손이다.[20] 족보 간행 이후 생원시와 진사시에 입격하였다.[21] 송파 전응두의 5대손[22] 전응두의 6대손[23] 무술보의 사업을 주관한 모산파 곡남 전계선의 아들로, 숙부 전술선(全述善)에게 입후하였다.[24] 전결의 7대손이자 영서 전명룡의 방5대손.[25] 야옹 전응방의 9대손[26] 규천 전극항의 6대손[27] 당시 성인은 한 냥, 아동은 닷 돈의 수단 비용을 받았으나 경비가 부족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8] 現 개성시 장풍군 대덕산리[29] 전유의 관직이 판도판서(版圖判書)였으므로 이렇게 부른 것이다.[30] 안회의 자가 자연(子淵)이므로 통상 '안연'이라 불린다.[31] 파조 이부전서 전광운의 손자.[32] 배위 회덕 황씨의 묘소는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서정리 산13에 있다.[33] 전귀덕의 장남.[34] 전의의 차남,[35] 전귀덕의 차남인 전예의 장손. 부친인 휴계 전희철이 영천(榮川)으로 은거한 후에 선조의 묘소를 돌보지 못할까 우려하여 장남을 옥천으로 돌려 보냈다고 전한다.[36] 전희로의 손자. 진목정파의 파조.[37] 전희로의 손자이자 전만령의 동생. 서정자파의 파조.[38] 전호의 장남.[39] 전사영의 3남.[40] 전사영의 4남. 삼정파의 파조.[41] 전안의 장남.[42] 전천성의 손자이자 학촌파조 전설의 3남.[43] 파조 전광운의 증손이자 전귀덕의 차남.[44] 배위 상산 김씨의 묘소는 충청북도 옥천군 군서면 오동리 산56에 있다.[45] 파조 전광운의 현손이자 전예의 장남.[46] 전희철의 차남.[47] 전박의 장남,[48] 전박의 차남. 구천파의 파조.[49] 전박의 3남. 망동파의 파조.[50] 전박의 4남. 거촌파의 파조.[51] 전박의 5남. 이계파의 파조.[52] 전응복의 아들.[53] 후(後) 관성군, 판서공파의 파조.[54] 판서공파조 전숙의 차남.[55] 전도의 차남인 전오례의 아들.[56] 전효순의 장남.[57] 전응경의 장남.[58] 전응경의 차남.[59] 전응경의 3남.[60] 전팽조의 장남.[61] 전팽조의 차남.[62] 전팽조의 3남.[63] 전팽령의 장남.[64] 전엽의 장남.[65] 전환의 장남.[66] 전경남의 아들.[67] 전혼의 장손이자 전여림(全汝霖)의 장남.[68] 전식의 장남인 전극항(全克恒)의 아들. 사서집에 실린 행장, 시장, 묘갈명, 신도비명과 무술보(1718)에는 이름이 '<后+山>', 행장과 묘갈명 원문에는 이름이 '𦦛'라 되어 있다. 무술보와 행장, 묘갈명에는 전극항의 적장남으로 되어 있으나 시장과 신도비명에는 전극념의 차남으로, 전극항에게 사자(嗣子)가 없어 입후하였다고 되어 있다.[69] 전후의 6세손.[70] 전후의 6세손.[71] 전희(全曦) 계열[72] 송석충은 전희철의 사위이며, 박승임은 송석충의 외손서(外孫壻)다. 즉, 박승임의 부인인 예천(醴泉) 권씨(權氏)에게는 전희철이 외외증조부(外外曾祖父)가 된다.[73] 진잠파.[74] 행정파.[참고] 갑인 대동세보에는 판서공파의 하위 분파로 송로, 송오, 송정공파가 있고, 그 아래 다시 지파로 나뉘는 것으로 기술하였지만 기사 대동보에서는 다만 세거지명으로 지파를 칭하고 그 위에 별도의 파명(派名)을 두지 않았다.[참고] [참고] [78] 遇는 甲에 해당하고, 甲은 木에 해당하므로 그로부터 오행상생의 원리에 따라 신해보에서 천간법으로 정한 항렬자를 정정하였음을 밝히고 있다.[79] 독립유공자 전기서·전만표전인평 전 중앙대학교 국악대학 교수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80] 작가 전우익이 이 마을 출신이다.[81] 독립유공자 전정석이 이 마을 출신이다.[82] 전희철이 영주에 우거하게 된 것은 영천 민씨(榮川 閔氏) 집안으로부터 비롯된 복잡한 혼맥으로 인한 것이다. 17세기 경 간행된 영주지(榮州誌)에 따르면 본래 여주에 살던 민용(閔庸)이 영주에 입향하면서 영천 민씨의 비조(鼻祖)가 되었고, 그 딸이 덕산 송씨(德山 宋氏) 송계(宋啓)에게 출가하였다. 송계는 본래 덕산에 살았으나 처가인 영주 화천(禾川), 즉 현 영주시 하망동 일대에 옮겨 살았다. 송계의 딸은 다시 감천 문씨 문손관(文孫貫)에게 출가하였고 문손관 역시 처가인 화천에 살았는데, 이 문손관의 딸이 바로 전희철의 부인이다. 즉, 3대에 걸친 처가살이로 인해 옥천 전씨들이 영주에 살게 된 것. 참고로 문손관의 손자인 창계(滄溪) 문경동(文敬仝)은 퇴계 이황의 처외조부다.[83] 송천(松泉) 최흥원(崔興源)이 지은 노송정(老松亭) 정지년(鄭知年)의 행장에 '사직 전희철 공과 함께 경회루에서 사육신과 울며 작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후대에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전희철의 행적을 칭송하는 시를 지었고 성재(性齋) 허전(許傳)은 휴계전공유사서(休溪全公遺事序)라는 글을 통해 그의 행적을 칭송했다.[84] 100칸 이상은 왕족의 권한이었다. 따라서 99칸은 왕족을 제외한 범위에서 최고의 부자인 것이다.[85] 활계(活溪) 이대유(李大㽕), 충암(忠巖) 김대호(金大好), 고강(高江) 정곡(鄭谷), 풍뢰당(風雷堂) 박정필(朴廷弼), 의재(毅齋) 박이겸(朴以謙), 영모재(永慕齋) 박정로(朴廷老), 난고(蘭皐) 우흥룡(禹興龍), 비암(秘巖) 박이항(朴以恒), 심천(深川) 박정량(朴廷亮), 석계(石溪) 민욱(閔昱), 화암(花巖) 전택(全澤), 고산(孤山) 전설(全渫)이 계원으로서 결성한 계회.[86] 시호를 하사하는 교지가 현재까지 남아있는데 교지에 따르면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임금을 받들었다(危身奉上)하여 '충'이요. 정직하여 간사함이 없다(正直無邪)하여 '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87] 정경세의 문집인 우복집(愚伏集) 제1권 시(詩)편에 제자인 전극항에게 부친 시가 있는데 전극항을 수재(秀才)라고 칭하였다. 전극항 이외의 제자에게 수재라는 표현을 쓴 경우는 권후(權垕)에게 부쳐준 시 밖에 없으며 우복집에 권후에게 준 시는 제2권에 수록되어 있지만 전극항에게 준 시는 제1권에 수록된 것을 보아 정경세가 전극항을 제자로서 매우 아꼈던 것으로 보인다.[88] 시문에 관한 일화로 9살에 우복 정경세의 문하에 처음 들어갈 때 우복이 산장(山庄)을 주제로 시를 짓게하니 그 자리에서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다른 일화로 동생 전극념이 남긴 증도승지규천산인유사(贈都承旨虯川山人遺事)에 따르면 '그 재주가 민속(敏速)하기를 마치 귀신이 실어다준 것 같아 작은 종소리 울릴 시간에 사운시를 짓고 밥 한 그릇 먹을 시간에 회문시(回文詩)를 지었다. 장문대작(長文大作)이라도 문장에 어색함이 없고 어법이 신기하며 의취(意趣)가 표일했다. 독자로 하여금 어금니에 바람이 나게 하고 모골이 신선같이 느껴지게 하여 세상 사람들이 베껴 외우게 되니 거의 종이값을 올릴 정도였다. ...(중략)... 사람들이 이태백후신으로 볼 정도였다.'라고 전해진다.[89] 이 시회의 시작은 1196년 최충헌의 난을 피해 상주에 살았던 백운(白雲) 이규보부터이다. 시회는 1862년까지 총 51회 열렸는데 시회의 개최자나 참석자로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규보, 김종직, 유호인(兪好仁), 김일손, 이황, 이준(李埈), 채득기(蔡得沂), 홍여하(洪汝河), 신석번(申碩蕃), 이만부(李萬敷), 정종로(鄭宗魯) 등의 인물이다. 이 인물들은 모두 한국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문장가이므로 낙강시회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시회임을 알 수 있다. 시회의 역대 내력은 다음을 참고[90] 낙강시회의 역대 참석자 중 삼 부자가 함께 참석한 경우는 전씨 삼 부자가 유일하다.[91] 삼가(三嘉) 이씨라고도 한다.[92] 과거시험 중 첫 단계인 소과를 사마시라고도 하는데 이 사마시를 합격한 사람을 기록한 명단을 사마안이라 한다. 사극에 나오는 생원진사가 이 사마시를 합격한 사람이란 의미이다. 옥천에는 이 사마안이 현재 3가지가 남아있다. 대중의 인식과 달리 당시 양반은 한 사람을 기준으로 직계 4대조안에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없다면 그 사람을 양반으로 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양반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관직에 나갈 생각이 없더라도 최소 사마시에는 합격해야 양반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사마안은 해당 지역에서 특정 가문의 영향력을 유추하기에 좋은 자료이다.[93] 朝鮮後期 沃川地方 士族의 存在形態 : 司馬案을 中心으로 - 이정우[94] 입향조는 해당 지역에 처음 자리 잡은 조상이다. 지금과 달리 지역 간 이동이 흔한 시절이 아니기에 만약 지역을 옮긴다면 아내의 가문이 해당 지역의 유력가문인 경우에 그 지역으로 가서 아내의 가문을 바탕으로 터를 잡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대표적인 예로 양동마을여주 이씨가 있다. 만약 여러 가문의 입향조가 모두 같은 가문을 통해 입향했다면 그 가문은 지역에서 강한 영향력을 지닌 가문이라는 의미이다.[95] 일부 논문에서는 선산 곽씨 또한 옥천 전씨와 혼인을 통해 입향했다고 보기도 한다.[96] 세력을 이끈 중심 가문으로 옥천 전씨, 선산 곽씨, 하동 정씨, 인천 이씨 등이 있다. 이들은 삼계서원 건립의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서원의 원장이 이들 가문에서 대부분 나왔을 정도로 서원의 운영에도 가장 많은 관여를 한다.[97] 조상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 있다는 것은 그 가문이 지역의 유력한 양반가임을 의미하고 특히 여러 위패 중 가장 윗 자리에 모셔진 인물의 가문은 지역에서 영향력이 가장 강한 가문이라는 의미이다. 삼계서원과 이 서원의 뒤를 잇는 삼양서원에 모셔진 위패 중 가장 윗 자리에 모셔진 위패가 바로 옥천 전씨 가문의 인물인 전팽령의 위패였다.[98] 갈등의 자세한 내막은 삼계서원 문서 참고[99] 대곡영당은 계사년에 훼철되었다고 하는데 대곡영당이 사라져서 지은 목담서원이 1765년에 건립되므로 기록에서 말하는 '계사년'은 1713년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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