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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6 21:01:16

전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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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전좌한.jpg
출생 1899년 4월 27일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죽향리
사망 1986년 4월 15일 (향년 86세)
인천광역시
묘소 경기도 파주시 낙원공원 묘지
본관 옥천 전씨
이명 박헌(朴憲), 최강(崔綱)
사운(沙雲), 단여(壇如)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1. 개요2. 생애
2.1. 밀정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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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는 일제의 밀정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현재까지 건국훈장 박탈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2. 생애

1899년 4월 27일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죽향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전보현이며, 어머니는 문화 류씨다. 전좌한의 집안은 옥천에서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으며, 종조부인 전흥규(全興奎)의 후원으로 옥천공립보통학교(현재 죽향초등학교)와 서울 영화학당(永化學堂)에서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그러던 중 1920년 12월 종조부에게 '경성상업실업단(京城商業實業團)'이라는 비밀결사로부터 납세불납운동 문서가 전달되었다.

이 문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정서'의 서명과 함께 '명령'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그는 이 문서에 따르기로 하고 고향 후배 임선재(任善宰)와 함께 문서를 인쇄하여 우편으로 발송하고, 옥천군청 앞 게시판 등 여러 곳에 게시하였다. 이로 인해 전좌한은 1921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출판법 위반과 치안방해죄로 1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6년 김응선, 계의산(桂義山)과 함께 다시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김응선은 당시 만주지역 정의단 소속으로 이전에 신돌석 의병진에서도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전좌한은 기차 안에서 창의단 소속이라고 자신을 밝힌 계의산을 만났다. 그는 김응선에게 계의산을 소개하였고, 셋이 함께 의열투쟁을 펼치기로 약속하였다. 그들은 조선총독부, 시청, 신궁 및 종로서 등에 폭탄을 투척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포고문을 살포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전좌한과 김응선은 고향에서 폭탄 6개를 만들어 1925년 음력 9월초에 그 중 1개를 옥천군과 금산군의 경계에 있는 진위산(鎭威山) 산속에서 실험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같은 마을의 김운용(金云用)·정명옥·송암우 등에게 서울구경을 시켜준다는 구실로 이들을 거사에 가담시켰다. 그들이 폭파하기로 결정한 기관은 경성의 조선총독부 청사 두 곳과 조선은행, 조선신궁, 종로경찰서 등이었다.

그는 다섯 기관의 폭파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며 김응선에게 같이 행동할 수 있는 동지를 요청하였다. 김응선은 송암우 등 3명의 고향 청년에게 경성을 구경시켜준다고 하고 1927년 1월 28일 그들을 데리고 경성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일제 헌병대에 탐지되어 송암우 등 3명의 청년이 숙소에서 체포되었다. 거사 전날 계의산과 김응선이 잠시 전좌한을 만나러 나간 사이 헌병대가 그들의 숙소를 급습한 것이다. 김응선과 계의산은 만주 봉천으로 도주했고 김응선은 체포되었으며, 전좌한은 매제 신화수(申華秀)의 집에서 몇 개월간 숨어 지내다 만주로 건너갔다.

매제의 소개로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양기탁을 찾아갔다. 거기에서 그는 지안(集安)을 거점으로 국내외에서 격렬한 무장활동을 전개하던 참의부 소속의 이응서(李應瑞)를 알게 되었다. 그는 이응서, 남정, 김봉준(金鳳俊) 등과 함께 '조선혁명군대본영'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전좌한은 그해 초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조선총독부 폭파 계획을 다시 거행하기로 이들과 합의하였다. 거사 날짜는 경복궁 자리에 새롭게 청사를 건설한 조선총독부 낙성식 날인 10월 1일로 잡았다.

그는 선발대를 데리고 무기를 은닉할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먼저 국내로 잠입하기로 하였다. 선발대 일행은 안동(安東, 현재의 단동)에서 국내로 잠입하려 하였으나 경계가 삼엄해 무기를 휴대하고 국경을 통과할 수가 없었다. 일행은 할 수 없이 무기와 서류 등은 소포로 발송한 후 열차편으로 경성에 들어와 소포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소포의 내용물이 경성우체국에서 발각되면서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전좌한, 남정, 김봉준 등 선발대는 이번에도 거사를 실행에 옮겨보지도 못하고 모두 체포되었다. 전좌한은 두 차례에 걸친 일제 주요시설 폭파 미수혐의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또 다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뒤 1931년 3월 가출옥하였다. 그는 출옥 후 경제적으로 매우 비참한 생활을 영위했다고 하며, 행상하는 부인을 따라 떠돌아다녔다고 한다.

이후 3명의 자식 중 두 아들을 8.15 광복 직후 병으로 죽었고, 남은 아들마저 6.25 전쟁에서 전사했다. 이후 부인마저 병사하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주변의 도움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다가 재혼 후 서울과 인천 등지에서 거주하였다. 전좌한은 1986년 거주지 인천에서 87세의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유해는 가족의 뜻에 따라 경기도 파주의 낙원공원묘지에 묻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전좌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독립운동을 하다가 말년을 불우하게 보낸 비운의 인물로 여겨지겠지만 그가 사실 밀정이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1. 밀정 논란

1984년 11월 28일, 동아일보는 독립유공자 밀정 혐의 자료가 발견되었다고 보도했다. 발단은 당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송상도의 <기려수필>에서 비롯되었다. 송상도의 기록에 따르면, 전좌한과 계의산은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의 경부였던 카와사키(河崎)와 다나베(田邊)의 밀정이었다는 것이다. 전좌한이 1차 거의 때 동지들과 같이 잡히지 않았던 것도 폭파사건을 임의로 꾸민 뒤 일제에 밀고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그가 체포된 후 징역 5년을 선고받은 것은 폭탄 테러에 관련됐을 뿐 아니라, 사욕을 위해 동족을 밀고한 행위를 일본인 판사조차 곱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동아일보는 1963년 전좌한의 공적을 심사했던 독립유공자상훈심의회의에서 이런 기록들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당시 아직 살아있었던 전좌한은 송상도와 자신은 일면식도 없기 때문에 그 기록을 믿을 수 없다며 혐의 일체를 부인하였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이후인 1990년대 들어 민족문제연구소 등이 전좌한과 관련된 재판 기록을 조사한 결과, 그가 일제의 밀정으로 활동한 정황이 드러났다. 사실 그는 판사와의 심리과정에서 자신이 카와사키에게 밀고했음을 시인한 바 있었는데, 카와사키는 경기도 일대의 치안을 담당하던 경찰 간부로, 경성에서 발생하는 의열투쟁으로 상당히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전좌한은 1차 거사 직전 자신이 밀고했음을 물론, 형사대에 김응선의 존재를 지목해주었으며, 만주로 갔던 것도 카와사키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자백하였다.

이에 대해 <매일신보>는 전좌한의 '연극에 속아' 체포된 다른 피고 가족들의 분노와, '개인의 부당한 보수를 바라 사건을 날조한 가증가오(可憎可惡)니 엄벌이 필요'하다고 날선 비판을 서슴지 않았던 일본인 검사의 논고 내용을 보도하였다. 또한 동아일보 1927년 8월 23일 기사에 따르면, 전좌한은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소속 하기, 전변 두 형사의 밀정으로 사건을 임의로 꾸민 후 경찰에 밀고했다고 한다.

이 사실이 보도되면서 전좌한의 건국훈장 서훈을 취소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지만, 국가보훈처는 현재까지 전좌한의 건국훈장 서훈을 유지하고 있다.


[1] 밀정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서훈을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