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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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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김동인
金東仁
파일:external/blog.joins.com/49fd80f2b2b57.jpg
일본식 이름 곤도[1][2]/가네히가시 후미히토[3][4]
金東文仁
창씨개명 히가시 후미히토
東文仁
아호 금동(琴童), 춘사(春士)
필명 김만덕, 시어딤, 김시어딤, 금동인
출생 1900년 10월 2일
평안남도 평양부 융흥면 하수구동
(現 평양시 중구역 서문동)
사망 1951년 1월 5일(추정) (향년 50세)
대한민국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동
직업 소설가, 문학평론가, 언론인
학력 가와바타 미술학교 (중퇴)
경력 조선일보 학예부장
배우자 김혜인 (? ~ ?, 이혼)
김경애 (? ~ 1951년) (1911 ~ 2008)[5]
자녀 1남 3녀
종교 유교 (성리학) → 개신교
비고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1. 개요2. 생애
2.1. 소설가 활동2.2. 친일 행적2.3. 광복 이후2.4. 말년
3. 사후4. 비판 및 논란5.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일제강점기소설가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전주, 는 금동(琴童) 또는 춘사(春士), 필명은 김만덕, 시어딤, 김시어딤, 금동이다.

현진건, 또는 김동리조차 단편적으로만 본다면 그의 작품성에 필적하지 못할 만큼 한국 문학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문호 중의 대문호이지만, 친일행각과 본인의 성품 때문에 매우 나쁜 평가를 받고 있다.[6]

소설로는 〈배따라기〉, 〈감자[7], 〈명문〉, 〈무지개〉, 〈광화사〉, 〈붉은 산〉, 〈운현궁의 봄〉[8], 〈광염소나타[9]가 있다. 김동인 소설의 특징은 경향성이 무척 다양하다는 점이다. 그것도 전혀 공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상반된 특성이 한 사람의 작품에서 발견된다. 〈감자〉와 〈명문〉에서는 자연주의, 〈광염소나타〉와 〈광화사〉, 〈배따라기〉에서는 탐미주의, 〈발가락이 닮았다〉는 인도주의 경향이 발견되고 <수평선 너머로>는 추리, <K박사의 연구>[10]SF적 경향마저 보여주는데 서로 다른 경향성이 한 작품에 깃들어 있는 경우도 있다.

이 사람을 기리는 동인문학상이 있다.

2. 생애

1900년 10월 2일평안남도 평양부 융흥면 하수구동(現 평양시 중구역 서문동, 대한민국 이북5도 행정구역상 평안남도 평양시 하수구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평양 하수구리 한 곳에서 8대를 내려온 토호 집안으로, 상당히 많은 논밭을 소유하고 있는 지주 계층의 갑부 집안이었다. 아버지 김대윤(金大潤)은 평양의 대부호이자 장로교 장로였다.[11] 김동인은 1907년부터 1912년까지 개신교 계통의 미션스쿨인 숭덕학교에서 공부한 뒤, 1912년 역시 개신교 계통인 숭실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 중퇴한 후 1914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학원 중학부에 입학했다.

1915년 도쿄학원의 폐쇄로 메이지학원 중학부 2학년에 편입했다. 1917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귀국하여 많은 유산을 상속받았다. 그러나 경제관념이 지독하게 없던 그는 사치벽으로 재산을 탕진해버린다. 그는 언제나 최고급 옷과 구두를 맞춰 입고 백금 시계에 백금 시곗줄을 달아 차고 다녔으며, 갖은 희귀한 꽃과 고급 그릇 수집을 취미로 삼았다. 경마, 마작도박에도 몰두했으며 낮에는 고급 요정 명월관에서 기생 수십명을 부리고, 밤에는 프린스 호텔에서 또 여자들과 놀아나며 돈을 펑펑 썼다. 일본도 제 집 앞마당 드나들듯 수시로 놀러다녔으며, 담배 1갑을 사려고 중국에서 신의주까지 인력거를 부르기도 했다.

그렇게 선친이 물려준 막대한 유산을 까먹던 김동인은 1920년대 후반에 보통강 수리사업에 뭣도 모르고 투자했다가 쪽박차고, 그 많은 재산은 물론이요 선친이 남겨준 400평짜리 대저택도 모조리 날려먹었다. 가뜩이나 난잡한 김동인의 오입질에 생활고까지 겹치자 더는 참을수가 없었던 첫 번째 부인 김혜인이 결국 자식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가출해 버려, 졸지에 이혼남이 되었다. 이후 김혜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는 떠나버린 전처를 디스하기 위해 '무능자의 안해'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와 동시대 문인이었던 현진건의 경우는 일제와의 타협을 거부한 대가로 가난에 찌들면서까지도 문학가로서의 지조를 지키기도 했다.[12] 아니면 황순원처럼 '일본을 찬양하는 글을 쓰느니 차라리 붓을 꺾고 말지' 라며 잠수를 타 버린 경우도 있다. 실제로 황순원은 일본의 요구를 무시해 버린 후, 고향으로 돌아가 은둔했다. 그리고 전두환 정권에도 협조하지 않았다고 한다. 메밀꽃 필 무렵으로 유명한 이효석 같은 경우는 친일 행적이 있지만 2차대전 와중에 가난과 질병 속에 시달리면서[13] 정말 어쩔 수 없이 해야 했고, 그 자신도 지인들에게 친일행위를 부끄러워하는 말을 했다. 또한 알고 지내던 문학평론가 이갑기(李甲基)로부터 "드디어, 네놈도 개가 다 되었구나?"라는 욕설을 듣고 당장 일자리를 때려친 사람이다고 알려졌지만 이 이야기는 허구라는 주장이 많다.

채만식 같은 경우는 자신의 친일행각에 대해 뉘우치고 반성하는 의미로〈민족의 죄인〉이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 역시 가난에 찌들어 6.25 전쟁을 2주 앞두고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평생 소원이 원고지를 넉넉하게 가져보는 것이었다고. 최서해도 말년에 매일신보의 학예부장을 맡았지만, 최서해의 가난한 형편이 잘 알려져 있었기에 지금은 물론이고 당시의 문인들마저 욕하지 않았을 정도[14]. 반면 김동인은 일제에 아부하지 않아도 될만큼 재력이 있었으나 본인의 방탕한 사생활 탓에 가난해졌고, 이후 본격적으로 친일을 시작했기에 모양새가 굉장히 추하다.

메이지학원을 중퇴한 뒤 같은 해 9월 다시 일본 도쿄미술학교인 가와바타 화숙(川端画学校)에 입학하여 서양화가인 후지시마 다케지(藤島武二)의 문하생이 되었다. 1919년 2월 일본 도쿄에서 주요한을 발행인으로 한국최초의 순문예동인지 《창조》를 창간하고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같은 해 창간된 순문학예술지상주의를 내세우며 이광수계몽주의와는 다른 움직임을 보였고, 한국어에서 본래 발달하지 않았던 3인칭 대명사("그녀")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참고로 ""는 이광수의 작품이다.[15]

1919년 2월, 일본 도쿄 히비야공원에서 재일본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독립선언 행사(2.8 독립 선언)에 참여하여 체포되었다가 하루 만에 풀려났다. 1919년 3월 5일 귀국했고, 그 뒤 26일 동생 김동평이 사용할 3.1 운동 격문을 기초해 준 일로 구속되었다가 6월 26일 풀려났다.

2.1. 소설가 활동

1920년대부터 가세가 몰락하면서 대중소설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1923년 첫 창작집 <목숨-시어딤 창작집>(창조사)을 자비로 발간했다. 1924년 8월 동인지 <영대>를 창간하여 1925년 1월까지 발간했다.

일반적인 독자들에게 있어 소설가 김동인의 미덕은, 쉽고 재미있게 쓴다는 점이다. 20년대 전성기를 구가한 근대 문인 중에서도 윗세대로 꼽히는 인물인 그의 작품들은, 2010년대에 현대 한국어 표기법으로 바꾸지 않고 그냥 읽어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고 가볍게 읽을 수 있다.

1930년광염소나타 발표. 또 9월부터 1931년 11월까지 동아일보에 실각한 흥선대원군을 돕는 젊은이들을 다룬 가상역사물 장편소설 <젊은 그들>을 연재했다.[16] 참고로 이 작품은 순수창작물이 아니다. 일본 닌자소설을 번역한 다음 배경 바꾸고 살을 덧붙인 작품이라서, 기승전결이 다소 어색한 부분이 있다. 어떻게보면 습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으로 여기서 키운 실력으로 최고작 <운현궁의 봄>을 집필한다. 1932년 7월 문인친목단체인 조선문필가협회 발기인, 위원 및 사업부 책임자를 맡았다. 1933년 4월 조선일보 학예부장으로 약 40여 일간 재직했다. 월간잡지 <야담(野談)>을 인수하여 1935년 12월부터 1937년 6월까지 발간했다.

1938년 쯤에는 후백제이었던 견훤을 주인공으로 한 장편소설 <견훤>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현재에는 재출간도 이루어지지 않아 구하기 어려운 소설이 되어버렸다.[17] 이 외에도, 쓰다가 중단한 소설들이 여러 개 있다. 전개가 잘 풀리지 않으면 그냥 연중하는 스타일이었던 듯.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한국 최초의 SF작가로 유력한 사람이다. 1929년에 발표한 <K박사의 연구>가 한국 최초의 창작 SF라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SF에 대한 학술적 연구가 뜸해서 크게 주목하지 않지만 한국 SF의 역사를 논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작가이다. 한국 SF에 대한 학술연구는 복거일 정도를 제외하면 작가, 작품별 연구보단 도입사, 변천사, 장르 자체에 대한 연구 위주로 주로 석박사 수준에서 논의된다. 지속적으로 창작활동을 한건 아동 SF문학가인 한낙원을 제외하면 복거일이 처음이었다.

이래저래 문제 많은 성격 탓에 이광수, 염상섭을 비롯해 원수진 사람이 정말 많았지만, 제자 정비석에게는 무척이나 자상했다고 한다. 정서죽에게 비석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도 김동인이었으며, 정비석이 쓴 소설들은 하나도 빼지 않고 열심히 검토해 주었고, 예술이 아닌 통속소설을 쓰는 것도 전혀 문제 삼지 않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18] 나중에 똑같이 친일하는 김억과는 절친한 친구 사이로, 염상섭과 앙숙이 된 데는 김억이 염상섭과 먼저 사이가 나빴던 탓도 컸다. 의외로 카프 작가들과는 사이가 괜찮았는데, 카프의 유사 소설가들 사이에서 거의 유일한 제대로 된 문인이었던 이기영을 발굴하는 데 공헌했다.

2.2. 친일 행적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50px-%EA%B9%80%EB%8F%99%EC%9D%B84.jpg
1939년 매일신보에 실린 기사.
중일전쟁이 한창일 때, '황군위문'을 조직해 일본군 위문 가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서 중국전선으로 위문 갔을 때 모습.

일제강점기 말기 중일전쟁 발발 이후 변절하였다. 1939년 2월 초중순경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 교육과를 찾아가 '문단 사절'을 조직해 중국 화북 지방에 주둔한 황군(皇軍)을 위문할 것을 제안했다. 그 제안이 받아들여져 3월 위문사(문단 사절)를 선출하는 선거에서 박영희, 임학수[19]와 함께 뽑혔고, 4월 15일부터 5월 13일까지 '북지 황군 위문 문단 사절'로 활동하여 중국 전선에 일본군 위문을 다녀와 이를 기록으로 남겨 "자랑스러웠다"고 글을 썼다.(...)

이 시기를 즈음해서 이 항목 최상단에 언급된 것처럼 히가시 후미히토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한다. 이후 히가시는 조선총독부의 외곽 단체인 조선문인협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41년 11월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내선 작가 간담회'에 출석하여 발언하였고, 같은 해 12월 경성방송국에 출연해 시국적 작품을 낭독했다.

일제로 완전히 넘어간 1942년의 후미히토도 일제에 의해서 체포된 적이 있긴 하다. 그렇다고 이게 무슨 독립운동 흔적이라도 보여줘서 그런 것은 아니고, 천황이 헌법상의 기관일 뿐이라는 내용[20]을 언급하면서 천황을 '그 같은 자'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의 정설은 "천황은 그냥 신이다"였기 때문에 후미히토는 천황 불경죄로 체포되어서 8개월간 구금된다. 이 사건 이후로 후미히토는 더더욱 자신의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서 노력했다.

이후 후미히토는 1943년 4월 조선총독부의 지시하에 조선문인협회, 조선하이쿠 협회, 조선센류 협회, 국민시가연맹등 4단체가 통합하여 조선문인보국회로 출범하자, 6월 15일부터 소설희곡부회 상담역을 맡았다. 그 외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선전, 선동하는 글들을 많이 남겼다. 1944년 1월 20일에 조선인 학병이 첫 입영을 하게 되자, 1월 19일부터 1월 28일에 걸쳐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황민화-징병제 실시 수감(隨感)'의 제목으로 학병권유를 연재하면서 선동했다.
파일:external/blogimg.ohmynews.com/1339771460.jpg
곤도 후미히토의 가장 대표적 친일소설 백마강
이 밖에 후미히토는 친일소설이나 산문 등을 여러편을 남겼다. 메이지유신을 지지했다고 하는 일본인 야나가와 세이간을 다룬 소설 <세이간의 길>은 연재가 중단되었으나, 임종국이 평가한 "조선의 역사소설은 마침내 김동인에 의해서 조선 역사를 버리고 일본 역사에서 취재한다는 난센스"라는 표현으로 충분할 것 같다. 실제로 완결된 대표적인 소설이 바로 <백마강>이다. 이는 백제 멸망 이후에 일본군이 백제부흥군을 보냈다가 박살이 난 백촌강 전투를 다룬 소설로, 이 소설을 쓴 이유를 후미히토 스스로 "내선일체의 성지 백제를 배경으로 신체제에 즉응하여 역사소설의 신기원을 만들고자"라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이 소설을 통해서 부여신사(夫餘神社)를 만들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당시, 후미히토는 세월이 오고가는지도, 세상이 바뀌는지도 모르고 일제가 패망했다는 것조차 모른 채[21]오전 10시 조선총독부 정보과장 겸 검열과장 아베 다쓰이치를 만나 "시국에 공헌할 새로운 작가단을 만들 수 있게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정오에 일본이 항복선언을 할 것을 알고 있던 아베는 이 청탁을 거절했다.

2.3. 광복 이후

8월 17일 임화김남천이 주도하는 중앙문화건설협의회 발족회에서 '이광수 제명'을 반대하며 퇴장하였으나, 18일 협의회가 발족되었을 때에는 회원에 가입되어 있었다. 같은 해 11월, 미군정청 광공국장의 호의로 서울 성동구 신당동(現 중구 약수동)의 적산가옥을 불하받았다.

이듬해 1946년 1월 우익단체인 전조선문필가협회 결성을 주선했다. 신탁통치 오보사건 이래 반탁 운동에도 적극 활동하여 '반공투사 애국자'로 둔갑했는데, 여기서 박헌영여운형, 김규식신탁통치안에 찬성이나 신중론을 주장했던 세력들을 '매국노'라고 대차게 비난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불하받은 적산가옥이 미군 당국에 접수되어 하왕십리동으로 이사했다.

1947년 3월 <백민>에 산문 '망국인기(亡國人記)'를, 1948년 5월 <백민>에 산문 '속 망국인기' 연재했다. 1948년 3월부터 1949년 8월까지 '신천지'에 산문 '문단 30년의 자취'등을 발표하면서 자신이 일제강점기에 저질렀던 수많은 친일 활동 행적에 대해 반성하기는커녕 변명하는 등 논조를 썼다. 그 주요 내용은 "일제 말기의 친일 행위는 민족해방을 위한 결단이자 고육책, '조선어와 조선소설'을 지키기 위한 체제 내적 저항 행위'"라고 자기 스스로 미화한 것이다.(...) 이 짓은 이무영이나 서정주도 했다

이 사람이 '백담비'에 관한 이야기를 예견이라도 하듯이 중얼거린 적이 있었다. 백담비는 자신의 하얀 털을 너무나도 사랑하여 흙탕물은 길을 돌아가는 수가 있더라도 피하지만, 일단 한 번 더럽혀지면 자포자기하여 흙탕물에서 이리저리 뒹군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김동인의 삶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린다.[22]

2.4. 말년

말년에는 사업에 실패하여 이로 인한 우울증불면증에 시달렸다. 그래서 "한국삼국시대를 배경으로 중국삼국지연의 못잖은 대작을 써보겠다"는 취지로 역사소설 <을지문덕> 집필에 들어갔으나, 1949년 7월에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30쪽 정도를 집필하는 데 그쳤다. 그래도 1949년 연말까지는 상태가 상대적으로 나쁘지 않았으나 연말이 되면서 병이 악화되어 하반신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이후에는 몸도 가누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피난을 떠나려 했지만 이미 중풍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그를 뱃사공이 태우길 거부하면서 왕십리 자택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자택에 돌아와있던 그를 잡으러 북한군이 여러 차례 찾아왔으나, 이미 김동인은 건강이 악화되어 폐렴까지 걸렸고, 혼자서는 식사도 못 하고, 용변도 볼 수 없는 산송장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말도 못하는 사람 잡아들여봐야 심문도 무리고 둬도 곧 죽을 게 뻔해서 그들도 포기하고 그냥 돌아갔다. 그렇게 위태위태한 투병생활을 이어가다 1.4 후퇴 다음 날인 1951년 1월 5일 이후에 하왕십리동 자택 인근에서 병으로 쓸쓸히 사망한 걸로 추정한다. 날짜가 정확하지 않은 까닭은 당시 부인 김경애가 자녀들을 피난시키기 위해 집을 비웠고 동네 사람들조차 전부 피난 간 터라, 그의 임종을 지켜본 사람은 없다.[23] 적어도 1월 4일까지 살아있던 것은 확실하지만 그 이후 사망했다.

김동인의 차남이었던 김광명이 2010년 인터뷰에서 이 당시의 상황을 회고했는데, 김광명에 의하면 김동인은 이미 이 즈음 임종 직전의 상황이어서 부인 김경애는 자녀들만 한강 이남으로 피신시키고 다시 돌아와 김동인의 임종을 지켜볼 계획이었다. 하지만 계획이 틀어져 한강 이북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해졌고, 결국 7개월이 지난 1951년 8월이 되어서야 집에 잠깐 들릴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집은 엉망이 된채로 김동인 시신이 없어서 주변을 둘러보니 누군가에 의해 김동인은 시신으로 집 근처의 밭고랑에 버려진 채로 발견되었고, 부패가 너무 심해서 입고 있던 옷으로 겨우 김동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때 김경애와 자식들이 방치되어 있었던 그의 시신을 거두었으나 당시의 상황이 상황인지라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르는 것은 불가능했고, 결국 1951년 11월 무연고인 군인들과 함께 홍제동 화장터에서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졌다고 한다.

3. 사후

1955년에 '사상계'가 김동인의 이름을 딴 동인문학상을 제정하여 1956년부터 시상을 시작했다. 사실 이건 좀 놀라운 일이다. 사상계의 발행인인 장준하는 과거 광복군에서 활동했던 이력도 있어서, 친일파에 호의적인 매체는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다. 황석영의 말에 따르면, 장준하가 김동인과 마찬가지로 서북 지역 출신이었기에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제정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상계최남선의 복권을 위해 애쓴 매체이기도 해서, 동인문학상의 제정이 단순히 작가의 연고 문제 때문만으로 결정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서북 출신 문인이 김동인만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후 동인문학상1956년부터 1967년까지는 사상계사, 1970년에 사상계가 망한 후 중단되었다가 1979년부터 1985년까지 동서문화사, 1987년부터는 사상이 정 반대인 조선일보사가 주관하여 매년 시상되고 있다. 이 인연으로 조선일보는 1987년 총 17권으로 구성된 김동인 전집을 출간했다.[24]

1977년에 그의 흉상과 문학비가 서울 인왕산 아래 사직공원에 제막됐다가 1988년부터 서울어린이대공원 야외음악당 근처 빈 터로 이전됐다. 2020년에 광복회 측이 해당 비석의 철거 혹은 안내판 설치를 요구하자 2021년 2월 서울시설공단 측은 QR코드 형식으로 안내판을 세웠고, 9월 들어서 이전을 논의 중이라고 했다.

그 밖에 제헌 국회의원으로 국회부의장을 지낸 김동원의 이복 동생이다.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 문학 부문에 포함되었다. 또한, 국가기관 친일진상규명위에서도 그의 이름이 포함돼있다.

2009년 11월 대통령 직속 산하 기구인 '친일진상규명위'에서 김동인의 친일 행적을 인정하고 수록되었을 때, 그의 아들이 이의제기를 걸었다. 이의제기를 건 근거가 '1942년 치안유지법으로 구속되어 수감되었던 것'[25]을 제기한 것인데, 2010년 11월 26일 재판부에서 김동인의 친일 행위를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재판부는 “김씨는 1944년 1월16~28일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황민화-징병제 실시 수감’을 10회 연재했고, 20일 ‘일장기 물결-학병 보내는 세기의 감격’이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징용을 직접적이고 자극적으로 선전 또는 선동했다”고 밝혔다. 이어 “당시 매일신보는 유일한 우리글 일간지로, 게재 횟수가 11회에 이르는 점 등을 비춰보면 김씨가 전국적 차원에서 징용을 주도적으로 선전 또는 선동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작가 사후 70년이 경과하여 대부분의 작품은 공유마당, 위키문헌 등에서 볼 수 있다.

4. 비판 및 논란

친일 행적을 제외하더라도, 다른 문인들에 대한 잦은 인격적 모독 등으로 애초에 많은 논란을 빚은 인물이다. 그가 높이 산 인간상이라고는 〈광염소나타〉에 등장하는, 예술을 위해 세상 도덕 윤리조차 무시하고 한 몸 불사르는 예술지상주의자나, 〈대수양〉에 등장하는 초인적 지도자뿐이었다. 이외의 인간들은 그에게 고려대상이 아니었고, 그렇기에 경멸하고 비웃는데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4.1. 염상섭 비하

염상섭과는 염상섭이 데뷔하기 전부터 견해 차이로 사이가 무척 나빴는데, 그의 대표적인 단편소설 〈발가락이 닮았다〉는 염상섭의 행실을 비꼰 소설이라는 소문이 당대에 널리 퍼졌다. 염상섭이 발끈하자 김동인은 "염상섭을 모델로 한 건 아니다"라고 해명하면서 사과하긴 했지만, 사과하면서도 소설의 내용은 실화라는 뉘앙스를 은근히 풍겼을 정도.

자기 사생활도 깨끗한 편이 아니었던 김동인이 별다른 원한 관계도 없는 염상섭을 저격한 데는 좀 더 복잡한 내막이 있는데, 염상섭이 먼저 김억의 실화를 바탕으로 이를 비꼬는 소설을 쓰자 시인인 김억이 친구인 김동인을 찾아와서 "시인인 나는 소설을 못 쓰니, 자네가 대신 좀 써달라"고 부탁해서 나온 소설이었다고 한다. 소설의 모티브가 염상섭이라는 소문이 난 것도, 다름 아닌 김억이 술자리에서 실언을 해버려서라고 한다.

한편으로 이 소설 제목 자체가 염상섭의 작품 세계나 작가관을 비판하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한국 최초의 자연주의적 소설'로 평가되는데, 김동인은 그 소설이 에밀 졸라 등 서구 자연주의 소설에 비하면 영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 소설에 나오는 실패자의 모델이 김동인 자신이었다는 것은 덤. 그래서 "서구 작가들 자연주의 소설이랑 비교하니 발가락 정도는 닮았던데?"라고 비꼬기 위한 의도도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이다.

이광수와도 사이가 나빴다. 이는 심한 라이벌 의식에 기반한 것이었다. 김동인의 문학 활동 자체가 이광수의 성공을 지켜보고 "내가 이광수보다 못할 게 없다"는 의식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한국 현대문학의 선구자를 꼽으라면 가장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이광수고 그 다음을 김동인을 꼽는데, 김동인은 이에 대해 심한 경쟁의식을 느끼고 이광수를 적대했다. 이광수가 수양 동우회 사건 이후 친일로 돌아서자 김동인은 춘원을 찾아가 은근히 자살을 권유하기도 했을 정도. 이광수가 소설 〈단종애사〉를 쓰면서 수양대군을 비판하자, 그에 반론하듯이 <대수양>이란 소설을 써 수양대군을 찬양하기도 했다. 이광수는 '내가 쓰면 반대로 생각하길 좋아하나?' 하며 그의 행동을 비꼬았다고 한다. 친일은 똑같이 사이좋게 했지만.

4.2. 김명순 음해

작품에서 여성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으로도 악명 높다. 1939년부터 연재한 〈김연실전〉이 대표적이다. <김연실전>은 기생 출신의 어머니를 둔 김연실이라는 주인공이 어머니의 '나쁜 피'가 끓은 나머지, 어릴 때부터 일본어 개인교사와 아주 깊은 관계를 맺고 거기에 어른이 돼서도 수많은 남성들과 육체관계를 맺으면서 그것을 자유연애라고 주장하다가 결국 파멸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관점으로는 하도 표현 수위가 너무 높아서, 당시 사람들은 '김동인이 야설 쓰나요?' 하고 민망해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21세기 시점에서 보더라도 (노골적인 성애문학을 제외하면) 상당히 수위가 높은 편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당대의 이른바 "신여성"이 되는 것을 바라지만, 종래는 겉멋만 들려 성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타락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대놓고 다룬 소설이다. 인성과 별개로 예술적 의의가 있는 김동인의 다른 작품과 달리, 문학으로서의 가치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물론, 단편적으로 묘사되는 시대상 이외에는 얻을 것이 없는 작품.

문제는 이 <김연실전>이 타깃으로 한 사람이 당대의 저명한 여성 소설가 김명순이었다는 것이다. 김명순의 아명이자 필명이 탄실(彈實)이었고, 어머니가 기생 출신 이었다. 노골적으로 노린 설정이다. 김명순은 실로 어마어마한 악성 루머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남자와 이야기만 해도 며칠 후에 그 남자와 연애를 했니 깊은 사이니 소문이 부풀려졌을 정도였다. 김동인은 이런 김명순에 대한 악성 루머를 마치 사실인 양 그대로 소설화했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실제로 <김연실전>을 읽어 보면, 이게 소설인지 연예 찌라시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실제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26]을 묘하게 비틀어 풀어 놓는 서술방식을 줄곧 사용하고 있어, 누구라고 말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실제로 누구를 가리켜 창작했는가를 확연히 알 수 있다.

작품 발표 이후 김동인은 "소설 〈김연실전〉의 모델이 김명순이라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부인했으나, 염상섭에게 수그릴 때와 마찬가지로 사실인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오늘날에도 악성 루머는 명예훼손으로 법적대응을 해도 피해자에게 꼬리표가 남는 마당에, 그 당시 이러한 악성 루머는 사회적 사망 선고나 다름없었다. 결국 김명순은 한국땅을 떠나 일본으로 간 뒤 어렵게 살다가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으니 간접적인 살인 사건이라 할 만하다. 김동인은 평소에도 "여자에겐 영혼이 없다."라면서 여성 비하를 서슴치 않던 인물이었다. 그런 김동인이었으니, '연애 대장'이니 뭐니 하면서 오만 악성 루머에 시달리던 김명순은 좋은 먹잇감이 되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성 작가 김일엽도 일방적으로 무척 증오했다.

이외에도 단편 〈정희〉에서 '여자는 그저 결혼해서 남편 수발이나 들어야 한다'는 노골적인 결론과 함께, 의식 있고 자유롭게 사는 신여성들을 대놓고 비판하기도 했다.

4.3. 인종차별

당대 식민지 조선에 만연했던 중국인 차별 의식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작품에 반영했다. 김동인이 혼자 중국인을 차별한 게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하에 있으면서도 '우리가 저 중국인들보단 낫다'는 우월 의식으로 자위하는 게 당대 조선인들에게 있었다. 이런 상황은 중일전쟁기 일제의 기조를 반영한 것인 동시에, 19세기 말 임오군란원세개청나라 군대와 함께 조선에 들어온 동순태호 등 화교상인들의 부가 조선인 평균수준을 능가하게 된 상황에 대한 반감 등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1931년 평양화교 학살 당시 방어책으로 맞서던 화교들을 비난하고 이 분위기를 타고 쓴 작품이 〈붉은 산〉이다. '삵' 정익호가 중국인 지주에게 대들다가 죽은 것을 미화한 내용인데, 요즘 기준으로는 레이시즘 문학이지만 과거에는 교과서에도 실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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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통적 운율·정서를 계승한 시인.[2] 조국 광복 염원·의지 및 부정적 현실 극복을 다룬 시인.[3] 정치적 이념을 배제한 순수 서정시를 추구한 유파. 특정 사상이나 계급주의적 관점을 강조하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에 반발하며 등장했으며, 시 동인지 《시 문학》을 중심으로 순수 서정시 운동을 주도했다. 김영랑, 박용철, 정지용, 신석정 등의 시인이 활동했다.[4] 부정적 현실을 지식인의 관점에서 비판한 소설이 많았다. 특히 의식의 흐름 기법이 많이 쓰였다. 대표적으로 이상날개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 있다.[5] 장편소설 중에서도 일제 강점기에 부정적 인물이 득세하던 현실을 반영한 소설이 이때 주목받았다. 대표적으로 채만식태평천하, 염상섭삼대가 있다.[6] 계몽주의에 기반한 농촌 계몽 소설, 향토적 삶을 다룬 향토적 농촌 소설, 식민지 지배와 통치 제도의 억압성과 부조리로 인한 농촌의 현실을 다룬 현실 비판적 농촌 소설이 있다.[7] 만주 사변 이후 더욱 극심해진 일제의 사상 통제와 검열을 피해, 역사적 사건을 다루어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자 하였다.[8] 당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중일전쟁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심화되어 아예 한국어 사용 자체를 금지할 지경에 이른 관계로 주제 의식이 모호하고 불분명한 몇몇 단편들만 간신히 명맥을 이었다. 대표적으로 순수 소설인 황순원'별'이 1941년에 발표되었다. 이 시기에 학창시절을 보낸 전후세대(1920년대생) 작가들은 체계적인 한글 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다른 세대와 비교도 안되는 굴곡진 인생 경험을 했음에도 이를 풀어내는데 한계가 있었고 이전 세대와 60년대 부상한 한글세대(김승옥 등) 사이에 끼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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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많은 국내 자료에서 '곤도'로 표기되는데, '金(kon)'은 어두 환경인지라 표기법에 따라 예사소리로 시작하는 '곤'으로 쓸지 몰라도, '도쿄(Tōkyō)'를 '도교'로 쓰지 않듯이 어말의 '東(tō)'는 '토'로 쓰기에 합치면 '곤토'가 되어야 옳다. 과거 한국어 화자들은 '私(watashi)'를 '와다시'로 읽는 등 일본어 비어두의 파열음 역시 예사소리로 받아들인 바 있는데, 이와 유관한 듯싶다.[2] 한편 '金東'의 독음 자체도 다소 생소한데, 이 성씨는 기존의 일본 성씨에는 없었으며 창씨로 인해 새로이 탄생한 성씨이므로 비교적 적은 수의 식민지 조선인만 사용했음을 고려하면 독법이 그리 파편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의 인명한자사전에 따르면 '가네토(かねとう), 가네히가시(かねひがし), 긴토(きんとう)'로만 쓰였다고 나와 있다. 그렇다면 '곤토'는 극도로 예외적인 독음이었거나 한자로만 적힌 문헌 자료를 오독한 독법일 수 있다. 근거자료#1, 근거자료#2, 근거자료#3[3] 창씨가 '金東'으로 나와 있는 이름의 경우는 다소 생소해도 '곤토'로 읽을 수 있겠지만, '東(Higashi)'라고만 쓰인 경우도 있으며 이를 '金東'에 적용하면 '가네히가시'라고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어서 양쪽 모두를 기재한다.[4] 나루히토 덴노의 남동생 후미히토 친왕과 이름이 같다(한자까지).[5] [부고]소설가 김동인 부인 김경애 여사 별세[6] 이러한 면에서 서정주와도 유사하다.[7] 1935년에 동명의 단편집으로 출간되었다. <감자>, <태형>, <명화 리디아>, <눈을 겨우 뜰 때>, <어지러움>, <피고>, <딸의 업을 이으려>, <명문> 등의 8편이 수록되어 있다.[8] 1948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9] 사후에 전집 단편선에 수록되었다.[10] 그 연구라는 게 으로 먹거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11]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북한편에 보면 김동인은 어렸을 때 상당히 땡깡이 심해서 걸핏하면 드러누워 울고 불고 했는데 그 부모들은 그가 바닥에 드러누워 땡깡 부리고 울 때마다 바닥에 이불 깔아 주고 그 위에서 땡깡 부리게 했다고 한다. 혹시라도 울면서 발 구르다가 발에 가시라도 박힐까 봐. 어쩌면 그의 교만한 성격은 이런 식으로 어렸을 때부터 이미 배태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12] 그전에 현진건은 손기정일장기 말소사건에 연루된 일이 있다.[13] 이것 때문에 아내와 차남을 잃고 말았고, 심지어 이들의 후손들도 정말 가난하게 살고 있다.[14] 비록 일제강점기였지만 당시 문단은 유학을 다녀오거나, 최소한 근대적 교육을 받은 도시민들이 주류였다. 하지만 최서해는 식민지 소작농 가정의 보통학교 중퇴자라는 바닥 중에 바닥의 배경에서 독학으로 문단에 등단한 인물이며 한국 문학계에 이름을 알린 작가 가운데 가장 기구한 인생을 살았다. 생활고로 간도에서 막노동과 두부 장수 등으로 생계를 꾸리기도 했으며 결국 병마로 1932년에 31세로 짦은 삶을 마쳤다.[15] 명사의 성별구분도 없고 3인칭 대명사를 잘 안쓴 한국어에 없던 번역체 표현이라서, 우리말 글쓰기를 강조한 이오덕은 "차라리 이름으로 부르라"고 강조했다.[16] 그는 스스로 역사물을 고증성에 따라 역사소설, 역사담, 야담 등으로 분류했고, <운현궁의 봄>은 역사소설, <젊은 그들>은 역사담으로 구분된다. 80년대에 KBS-2에서 드라마로도 만든 바 있다.[17] 그러나 위키문헌에 가면 있다.[18] 다만 소설이라는 양식의 특성상 소위 '예술소설'(=순수문학)과 '통속소설'의 경계라는 것이 원래부터 그리 명확하고 공고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소설이라는 양식은 원래 대중성, 즉 '많은 독자들에게 널리 읽힐 수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핵심적인 특징이자 목적으로 하여 탄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소위 '근대문학의 시대'에 소설이 교양이나 사회 참여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도 '(다른 문학 양식에 비해) 대중에게 널리 읽힌다(=널리 소비된다)'는 특징 때문에 이런 대중적 목적에 적절한 매체였기 때문에 근대문학을 상징하는 문학 양식으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결국 책을 많이 팔아 돈을 벌기 위해서든, 순수하게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를 남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이든, 자신의 주장이나 신념을 널리 알려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든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읽을만한 소설(=대중적인 재미를 가진 소설)을 쓰는 것이 소설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는 것이고, 이를 벗어나 사람들에게 이해와 공감을 받기 힘든 이야기를 자신만의 만족(예컨데 예술적 만족감)을 위해 쓰는 것은 '소설은 원래 그런 게 아니다. 그럴거면 차라리 일기를 써라' 식의 비아냥을 듣는의 사도(邪道)로 취급받기 쉬운 것이다. 이 점에서는 '순문학'이 '통속문학'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이해(+그래서 순문학을 하는 이들이 통속문학을 하는 이들을 무시할 것이라는 생각)가 오히려 순문학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이 가지는 컴플랙스의 일종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까 김동인과 정비석의 관계에서도 '정비석이 통속소설을 쓰는 것을 김동인이 전혀 문제시하지 않고 오히려 격려했다'는 사실이 별다르게 특이하다고 할만한 것도 아니다. 당장 김동인의 작품중에서도 가상역사물이나 SF와 같은 현대 서브컬쳐의 주요 장르에 속하는 작품이 튀어나온다. 그나마 정비석을 '한국의 대표적인 통속소설가'로 자리잡게 해 준 계기는 노골적인 선정성으로 50년대 남한 사회에 컬쳐쇼크를 불러온 자유부인인데, 선정성으로 따지면 김동인에게도 <김연실전>이 있으니 제자한테 뭐라고 할 이유가 없는 셈이며, 그놈의 문학성을 따지자면 차라리 당대 한국 사회에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안겨주고, 전근대적 가부장제에 기반한 사회규범이 급속히 해체되리라는 것을 한발 먼저 예측해 보여준 <자유부인>의 문학성이 그냥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여류 문인 하나 조지기 위해 흑색선전하겠다'는 악의의 실현 이외에는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하는 <김연실전>만 못하다고 평가받을 이유도 없을 것이다. 이러니까 '순문학과 통속문학의 본질적인 차이는 사실 판매량'(=안팔리는걸 꾸역꾸역 쓰면 순수문학, 그게 잘 팔리게 되면 통속문학으로 전락한다.)느니, '원래 순문학의 하위분야에 소설은 없다는 걸 문학 공부 안한 사람들은 모른다' 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19] 당시 조선 최고의 영문 번역가. 후에 월북하여 북한에서 나오는 영어 선전물을 썼다.[20] 이를 천황 기관설이라고 부르는데, 이게 김동인의 독자적 학설은 아니고 일본 내에서 천황이 어떤 존재인가를 가지고 논쟁이 벌어졌던 내용이다. 천황 기관설은 "주권은 국가에게 있고(국가 주권설), 천황은 대통령이나 수상과 같이 헌법에 의해서 인정되는 국가의 최고 기관으로, 다른 기관들과 협력해서 다스린다"는 학설이다. 그에 반대되는 것이 천황 주권설(군주 주권설)로, "주권은 천황에게 있고, 더 나아가서는 천황의 조상인 신의 혈통에게 주권이 있다(왕권신수설)"는 신칙 주권설로 나갔다. 그나마 온건 소수파였던 천황 기관설은 2차 대전 이전에 깔끔하게 박살나고, "천황=신=국가의 모든 것"이라는 것이 확립된다. 이 부분만 고려하면 2차 대전까지 일본은 명목상 전제군주정이다. 그리고 "천황은 신"이라는 주장이 승리하면서, 2차 대전 시기에 "천황은 신"이라고 홍보를 하게 된다. 그리고 2차 대전 패전 선언서 '신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이 부분에서 주권의 주체이기를 포기한다는 이야기가 된다.[21] 사실 일반대중들은 이미 늦어도 1945년 초에 낌새를 느꼈지만(애초에 도쿄가 불바다되고 조종사에게 자폭공격이나 시키고 있던 게 전보로나마 들어오고 있었으니 소문이 안 퍼지는 게 이상했다), 엘리트 친일파라는 사람이 오히려 국제정세를 잘 못보는 게 허다했다(...) 일본이 승승장구하던 초반 상황만 보고 친일로 전향한 것인데 이제 와서 재전향하기에는 뭐하니 애써 현실부정을 했던 것이었다.[22] 흥미롭게도 제자백가에 속하는 사상가인 순자는 "소인은 뜻대로 일이 풀리면 교만하면서 편벽되고, 곤경에 처하면 자포자기해 못난 짓을 한다"고 《불구편》에 쓴 바 있다. 이 역시 김동인의 생애와 절묘하게 맞물린다.[23] 냉돌방에서 싸늘하게 죽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때 부인이 이불 밑에다 3만 원을 넣어 두고 갔는데 그 3만 원도 이불과 함께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고. #[24] 국문학 작가 전집, 문학전집 발간은 80~~90년대에 활발하다가 2000년대부터 사그라들았다. 조선일보사 17권 전집은 백마강 같은 친일작품과 비문학까지 포함시켜 2022년까지 출간된 김동인 전집중에 가장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1~13권까지는 문학작품, 14~16은 산문, 17권은 연구서로 구성되어 있다. 엄밀히 말해 전집은 아닌데 출간 이후 추가로 발굴된 글(주로 해방후에 우익 활동하며 쓴 산문이다.) 혹은 연재되었다는 사실만 전하고 발견되지 않은 소설이 있기 때문이다. 김동인은 호구를 위해 굉장히 다작했고, 이때 알려진 것 외에도 여러 필명을 사용했으며, 후대 연구자들이 확보하기 힘든 잡다한 신문, 잡지 기고문도 많아서 엄밀한 의미의 전집은 불가능하다.[25] 이것은 상단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천황을 일개 인간으로 언급했다가 정보원의 밀고로 처벌된 사건이다.[26]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다. 디스패치 등의 연예지나 증권가 찌라시에서 연예인들의 루머를 퍼뜨릴 때 사용하는 묘사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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