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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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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특징3. 배경4. 진행
4.1. 거부자에 대한 불이익4.2. 광복 이후
5. 목적
5.1. 대내외에 밝힌 목적5.2. 실제 목적
6. 조선인들이 보인 반응7. 일본인들이 보인 반응8. 사례
8.1. 창씨개명의 예외8.2. 성씨별 창씨개명 상황8.3. 저항 사례
9. 유명 인물의 창씨개명 목록10. 해외 사례
10.1. 독일계 미국인들의 창씨개명
11. 유사 사례
11.1. 강요 차원11.2. 자발적인 개명 차원11.3. 번역 차원
12. 한국13. 번역상의 표기14.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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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언어별 표기
한국어창씨개명
일본어[ruby(創, ruby=そう)][ruby(氏, ruby=し)][ruby(改, ruby=かい)][ruby(名, ruby=めい)](소시카이메이)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인들로 하여금 일본식 씨(氏)를 창설하고 일본식으로 개명하게 함으로써 일상생활 전반에서 한국식 성명 대신 일본식 씨명(氏名)을 사용하도록 정책적으로 강요한 일을 말한다. 교과서에서는 이해가 쉽도록 '일본식 성명강요'(日本式 姓名强要)라고도 하지만 역사학계에서는 창씨개명이라고 부르며 이쪽이 정책의 본질을 더욱 잘 나타내는 명칭이다.[1]

2. 특징

한국의 성명(名)을 일본식 씨명(名)로 바꾼 것이므로 창씨(氏), 즉 '씨'를 창제하는 일이 된다. 물론 개명(改名)이란 말을 보고 알 수 있듯 이름(名) 역시 함께 개조했다. 다만 창씨만 의무였고 개명은 자유였기 때문에 창씨만 하고 개명은 안 한 사람들도 많았다.

이처럼 일본의 귀족 및 무사 계급은 원래 앞에서 언급한 4대 성씨인 후지와라나 미나모토 등 성을 가진 일족의 후손들이 각자가 소유한 장원이나 저택의 지명을 따서 각각 씨명을 정하는 식으로 성과 씨를 구분해 사용했다. 예를 들어 센고쿠 시대의 유명한 무가 다케다 가문은 가문의 시조가 소유한 장원이 위치한 곳이 히타치노쿠니에 있던 다케다 장(竹田莊)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다케다 씨를 자처했다. 성과 씨의 차이 때문에 일본인은 예컨대 처가의 가업을 잇기 위해 사위가 씨를 바꾼다든지 하는 문제에 대해 한국보다 훨씬 덜 민감하다. 한국과 달리 씨를 바꾼다는 것에 조상을 부정한다는 의미가 훨씬 적기 때문이다.[2]

이후 메이지 시대에 와서 신분제 폐지 등 개혁의 일환으로 성 제도는 폐지되고 씨만을 사용하게 되면서 이전에는 성과 씨를 쓸 수 없었던 평민들에게도 씨가 부여되었다. 이때 씨의 개념을 조상의 근원을 나타내는 이름이 아니라 '한 가정(戶)의 구성원을 나타내는 이름'이라는 개념으로 보면서 한 가정의 구성원은 모두 씨를 통일시켰고 그래서 시집온 부인은 중국이나 한국처럼 본래 성씨를 쓰지 못하고 서양처럼 남편의 씨를 따른다든지, 반대로 데릴사위로 들어간 신랑은 처가의 씨로 개성한다든지 하는 일본식 부부동성 제도가 확고해졌다.

3. 배경

그 기원은 1890년대 일본에서 메이지민법(明治民法)의 제정을 통해 폐성창씨(廢姓創氏)를 이뤄낸 이토 히로부미와 우메 겐지로(梅 謙次郎) 교수가 새로운 식민지가 될 조선의 새로운 민법을 구상하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둘은 조선의 서구 문명화를 구실로 조선의 성 제도를 폐지하고 일본처럼 씨 제도로 바꿀 계획을 구상했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하고 우메 교수도 급사하면서 이 계획은 흐지부지 되었다.

일제가 조선을 병탄한 후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정서 상, 일본식 성명을 강제하면 매우 위험하다'고 여겨 이를 시행하지 않다가 1919년에 창씨정책 시안을 수립했지만 얼마 후 3.1 운동(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 이 계획은 유보되었으며 이후 일본은 1923년 조선민사령을 통해 조선의 호적을 일본식 이에(家)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식 호적제도로 개편했고 1929년에 다시 2안을 수립하는 등 재차 창씨개명을 시도했지만 본국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그러나 일본 입장에서도 조선인에게 일본식 이름을 부여하는 것에 대해서는 논쟁이 매우 많았다. 물론 도덕적, 인도적인 관점에서 반발한 것은 절대 아니고, 조선인이 일본식 성씨를 쓰고 일본에 동화되는 것, 즉 조선인이 일본인과 동등한 지위, 동등한 시민권을 가질 수 있다는 데 거부감을 표시한 것이다.# 무엇보다 조선인과 일본인은 같은 동아시아인이라 외형만으로 구분하기 어려워 조선인과 일본인이 섞여 순수 일본인이 사라질 것이라는 공포감이 있었다.[3] 실제로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에는 "15원 50전(じゅうごえん ごじっせん)"과 같은 구절을 말하도록 시켜서 어두에서 탁음 발음 가능 여부를 악용조선인을 구별하여 학살했다.[4] 이렇게 문화적 차이를 이용하지 않으면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분하기 어려웠다는 뜻이다. 성명까지 일본식으로 바꾸고 호적을 교체한다면 더욱 조선인과 일본인을 분간하기 어려워진다.

이 때문에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은 구분을 위해 조선인이 일본식 성명을 쓰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1910년대에도 몇몇 친일파들이 일본에 충성한답시고 일본식으로 개명 신청을 하고 일부는 자식이 태어나자 일본식 이름을 지어 호적에 올리려고 했지만 당연히 이 자들도 예외 없이 퇴짜를 맞았다. 이는 식민통치 당시 일본인이 1등 신민으로서 조선인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해야만 했고 그런 만큼 적용되는 법률이나 형벌 등도 차별화되었기 때문이다. 일본 내에서 그런 입장의 반발이 점차 사라지고 일제 정책이 조선인의 일본인과의 확실한 동화, 즉 내선일체 정책으로 굳어진 것은 최소한 1930년대 이후의 일인데, 이때조차도 보수적인 일본인들은 내선일체 정책에 반감을 가진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일본 내부에서의 내선일체 정책의 반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니토베 이나조 도쿄제국대학 교수를 필두로 조선의 점진적 동화를 주창하는 입장 또한 지속되어 왔다. 이들은 기존 무단통치의 가혹함이 오히려 조선 지배에 악영향이 됨을 지적하고 조선에 유화적인 통치를 펼쳐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일본을 우러러보게 한 다음 아예 일본인의 일부로 동화시켜 조선을 내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을 2대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水野 錬太郎) 등이 실정적으로 채택했으니 이것이 바로 문화통치다.

하지만 동시에 일본에서는 '식민지에도 자치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분화운동 역시 격렬히 제기되었고 이에 따라 동화와 자치를 동시에 추진하는 '자주협동정책'을 펼쳤다. 이는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배 방식인 연합주의를 일본 나름대로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프랑스도 열강 진입 초기에는 식민지에 강제적인 프랑스 동화를 강요했으나 격렬한 반발로 통치가 더 어려워지자 나중에는 동화와 거리를 두는 영국식 통치와 기존의 방식을 절충, 즉 자치와 동화의 병행 정책으로 노선을 틀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이르러 민족 말살 통치기로 접어들면 점진적 동화 정책이 사그라들고 본격적으로 일본이 야욕을 드러내더니 급진적 동화 정책으로 선회하였다. 1935년 일본의 국정교과서들은 조선인대만인일본인이라고 표기하는 등 이전보다 더욱 노골적으로 동화의 의지를 표명했다. 물론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침략의 정당성과 명분을 확보하기 위한 위선에 불과했다.

가령 관동군이 세운 괴뢰국의 사관학교였던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서는 당대 만주국에 국적법이 없음에도 일본인은 일계(日系), 조선·중국·대만인은 만계(滿系)로 구분하여 차별했다. 창씨개명과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첨언하자면 물론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서 일본인과 다른 민족을 아예 별도로 구분해서 식사시간에조차 서로 마주칠 일이 없을 만치 분리교육을 했다. 이후 조선인 학생들이 항의하자 조선인을 중국인과 분리하여 일본인과 함께 일본인으로서 교육받도록 하였다.

4. 진행

1936년 8월 전 육군대신이자 관동군 사령관인 미나미 지로가 7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천황이 조선에 방문해도 좋을 정도로 조선의 치안을 안정시키며 조선인들에게 천황 숭배 사상을 가지도록 정신을 개조하여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만드는 것과 조선에 징병제를 실시하고 조선 청년들에게 일본의 국방의 의무를 다하도록 교육의 확보를 목표로 삼았다. 그는 부임 직후 일본어의 생활화와 천황 숭배(궁성요배)를 방해하는 다른 종교들을 탄압했으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보다 강경책을 펼쳐 조선 내부의 독립운동 세력을 완전 독립과 자치, 좌와 우를 가리지 않고 때려잡아 조선의 표면적인 안정화를 가져왔다. 미나미 지로는 황민화와 징병을 기반으로 한 동화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1937년 10월 황국신민서사가 발표되었고 조선인들에게 신사참배를 의무화시켰다. 1938년 2월에 지원병제를, 4월에 조선어의 상용 및 교육 금지 정책과 더불어 일본어 보급 정책을 폈다. 5월에는 일본의 국가 총동원령을 조선에까지 확대했다. 그리고 조선인의 천황에 대한 충성심 고취와 완전한 일본화를 통한 사법 행정의 일원화와 징병 및 국가 자원의 동원을 완성하기 위해 조선에 조선식 성씨를 폐지하고 일본식 성씨를 새로 만드는 폐성창씨(廢姓創氏)를 강요했다. 총독부는 이 정책이 차별을 완전히 철폐하게 만들 것이라 말했고, 그 증거로 일본식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했지만 극도의 반발로 '폐성창씨'의 대체어로 '개성명(改性名)'이란 용어를 대신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대만도 폐성창씨가 시행됐지만 일본 입장에서 대만은 조선에 비해 중요도가 떨어졌고 일본 본토와도 거리가 먼 곳이었기 때문에, 굳이 본토 일본인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까지 적극적인 폐성창씨를 추진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대만인은 조선인과는 다르게 허가를 받은 사람만이 일본식 성씨를 가질 수 있었다. 즉, 조선에선 치욕으로 여겨졌던 폐성창씨가 대만에선 일종의 특권으로 여겨졌고, 초기에 시행률이 매우 저조했었던 조선과는 달리 대만에선 일본식 성씨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대만은 꽤 엄격한 자격을 필요로 하는 허가제였기 때문에 1944년이 되어서도 2%만이 폐성창씨를 했었다.)

목표 달성을 위해 일본은 먼저 조선의 지식인층을 겨냥해 수양동우회 사건흥업구락부 사건을 일으켜 좌우익을 망라한 조선의 수많은 지식인을 체포하고 고문을 거듭하면서 천황과 국가에 충성하는 황국신민이 되겠다는 전향서를 쓸 것을 강요했다. 매 앞에 장사 없다고 이광수를 비롯한 수백 명의 지식인이 사상 전향서를 쓰고 나서 겨우 풀려났다. 하지만 고문에도 불구하고 전향을 거부하고 구속된 조선 지식인들은 "조상을 욕되게 하는 폐성창씨를 강할 바에 차라리 우리들을 죽이라"고 미친 듯이 반발했다. 이들 대다수가 자존심이 강한 지식인들이었으니 일본식 성명의 강요가 더욱 치욕이었을 것이다. 이들의 반발에 놀란 조선총독부 경무국[5]미나미 지로에게 "일본식 성명을 강요하면 대규모 폭동(大規模な暴動)이 일어날 것이니, 일본식 성명을 강요하는 것을 불가능하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끝내 일본은 조선식 성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일본식의 새로운 성씨를 부여하는 것에 그치는 창씨개명으로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다.[6] 그렇게 1939년 11월 10일 제령 19호와 20호를 통해 창씨개명의 방침을 발표했으며 이는 1940년 2월 11일 기하여 효력을 발휘했다. 조선총독부는 기존의 '관습적 성명'과 더불어 일본식 씨명을 등재하고 일상생활에서 씨명을 쓸 것을 명령했다. 이렇게 호주의 아내와 어머니에게 집안의 성과 다른 성이 허용된 것과 달리 여자들에게도 같은 씨가 강요되었다.

조선총독부는 "6개월 안에 호주(戶主)가 의무적으로 창씨를 해야 한다"고 압력을 넣었다. 만약 호주가 응하지 않아도 직권창씨라고 하여 이름을 강제로 바꿀 계획이었다고 한다. 모든 조선인들은 제령 19호에 따른 법정창씨에 해당됐다.

총독부에서는 미나미 지로 총독의 부임 이래로 오랫동안 창씨개명을 준비해서 건국기원절[7]인 1940년 2월 11일에 맞춰서 6개월 시한을 주고 각자 스스로 창씨하라고 집중 광고를 때렸다. 총독부는 창씨개명 절차를 매우 편리하게 해 주었고 비용도 깎아 주었다.

총독부는 매우 느긋한 태도로, 조선인들이 열화와 같이 호응하며 엄청나게 신청하리라 예상하고 현장 격려 공문까지 발송했다. 하지만 2월 11일 하루 경성부에서 창씨개명한 사람은 고작 48명이었고 12일에도 겨우 43명에 불과했다. 12일 창씨 신고를 한 주요 인물로는 이광수, 이승우, 이원보, 조병상, 윤갑병, 최지환 등이 있었다. 예상보다 말도 안 되게 적은 수치에 총독부는 발칵 뒤집혔고 기존의 느긋한 태도를 버리고 전국의 유지, 지식인들에게 "모범을 보이라"고 갈구면서 창씨를 유도했지만 2월 말까지 창씨 비율은 겨우 0.26%였고 2달이 지나도 1.07%에 그쳤다.

전국의 유림문중의 강력한 반발로 접수율은 터무니없이 낮았고[8] 시한의 절반이 지난 5월 20일까지 창씨개명을 한 가구 수는 조선 전체 428만 2754가구 중 고작 32만 6105호(7.6%)에 불과했다. 당시 별 창씨개명 비율은 경상북도[9] 22.8%, 충청북도[10] 12%, 충청남도[11] 9.6%, 평안북도 7.7%, 경기도[12] 7.1%, 평안남도 6.7%, 황해도[13] 6.1%, 강원도[14] 5.5%, 경상남도[15] 4.8%, 전라남도[16] 4.6%, 함경북도 3.7%, 함경남도 3.6%, 전라북도[17] 1.8% 순이었다.

이런 엄청난 무반응에 열이 뻗친 총독부는 강제로 창씨개명을 밀어붙여 나머지 3개월 동안 300만 가구를 창씨개명시켰다. 당시에는 이장이 사람들을 불러서 이름을 부르면 서류에 적는 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아예 5월 9일에는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반동적인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태형을 집행하는 일도 있는 자원아닌 자원이었다. 이에 따라 창씨개명 업무가 종료된 1940년 8월 10일에 집계된 통계로는 전체의 80.3%인 320만 116가구가 창씨개명이 완료되었다고 한다. 1940년 12월 법무국 조사과에 따르면 도별 창씨 호적수의 비율은 평안북도 87.3%, 강원도 85.0%, 충청남도 84.4%, 경상남도 84.3%, 경상북도 83.8%, 함경남도 83.5%, 전라남도 80.8%, 경기도 79.0%, 황해도 77.9%, 평안남도 77.3%, 전라북도 76.5%, 충청북도 70.5%, 함경북도 64.6% 이었고 전체 400만 8925가구[18] 중 80.5%인 322만 8931가구가 창씨를 완료했다. 그 이후로도 창씨개명 신청을 받아 1941년 81.5%로 늘어났다. 당시 신문들은 "xx군 oo% 달성!" 식으로 창씨개명을 독려하는 내용을 연일 선전하는 등 총독부의 강제력을 매우 절실히 입증했다.

4.1. 거부자에 대한 불이익

조선총독부에서는 창씨개명 거부자에게 불이익 조치를 내렸는데 저 아래의 것들을 전부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법도 없고 직장도 없어도 살 수 있거나 불굴의 의지를 지녔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월급을 주지 않거나 삭감하는 것이 회사 단위의 의무였을 정도니 자발적이었다는 주장은 걸러듣는 것이 좋다. 위인전에 나오는 사람들을 비롯해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한 경우도 있지만 대개 한국에서 명망이 높고 인맥을 통해 생활에 충분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빠스껫 볼에서는 스포츠 구단은 유니폼에 창씨개명한 이름만 적을 수 있고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선수를 구단에서 제명할 수 있다는 내용도 나왔다. 이 때문에 빠스껫 볼에서 민치호가 아사노 지코(淺野時子)라는 창씨명이 적힌 유니폼을 받은 것으로 설정된 것이다. 이외에 빠스껫 볼에서 몇몇 한국인 선수가 다나카 준페이, 요시다 다케시, 하세 료 등으로 창씨를 하기는 했다.

4.2. 광복 이후

1946년 10월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을 제정해 창씨 개명 이전의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으며 일부 제적등본(구 호적등본)에서도 해당 법령의 제정에 의거해서 수정한 흔적[19]을 찾아볼 수도 있다.[20] 모든 호적에 일괄로 정정한 사항이기 때문에 수기 호적인 시절에도 조선성명복구령에 의한 정정은 그냥 도장으로 다 찍어놓은 점이 이채로운 부분.

한때 한국 국적이나 조선적을 가진 재일동포나 중화인민공화국 또는 중화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재일 화교들은 일본 국적으로 귀화를 신청할 때 "당신과 같은 성씨는 일본에 없다"는 이유로 여전히 일본식의 창씨개명을 강요받았다. 그래서 성을 갈기 싫은 사람들은 가네다(金田), 아키야마(秋山) 등 자신의 성과 같은 한자가 들어간 성을 썼다. 내국인이 아니어서 생기는 불이익이 많으니 귀화를 결심하는 것이다. 특히 조선적을 가진 사람의 경우는 조선적 문서 참고.

다만 손정의는 일본 국적으로 귀화하면서 같은 이유로 거부당하자 '역창씨개명'을 시도했는데 일본에선 결혼하게 되면 보통 아내가 남편의 (데릴사위로 들어가면 그 반대) 성씨로 바뀌는 것에 착안해 일본인인 자기 아내를 손씨로 바꾸어서 일본인 중에 손씨가 있음을 증명하여 성명 한자를 그대로 두되 이름의 독음만 훈독으로 읽어서 '손 마사요시'가 되었다. 현재는 강희자전에 등록된 한자 + 인명용 한자 + 상용 한자 + 가타카나 + 히라가나라면 얼마든지 마음대로 창씨개명할 수 있다. 단, 이름은 상용 한자 + 인명용 한자 + 가타카나 + 히라가나만 쓸 수 있다. 하지만 읽기는 마음대로 신청할 수 있다.

그리하여 현재 한국인 중에 일본식 성씨, 예를 들어 山田, 金田, 松山 등을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5. 목적

5.1. 대내외에 밝힌 목적

미나미 지로는 창씨개명을 선포하면서 '조선은 이제 식민지가 아니라 내지다!' 라고 호기롭게 선언하면서 창씨개명을 실시하는 사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그리고 기존의 성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기존의 성은 그대로 남고 새로운 씨를 부여할 뿐이니 오해하지 말라는[21] 설명서까지 전국에 배포했다.[22] 그리고 이광수를 비롯한 지식인들을 대거 내세워서 창씨개명을 홍보했다.

5.2. 실제 목적

한반도를 "외지가 아닌 일본의 일부로 완전히 합병하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그래야 장기적으로 조선의 인력과 자원을 전쟁 등에 본격적으로 투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일전쟁으로 한창 군사력이 필요하던 시절에도 일제는 조선인을 믿지 못해 군인으로 써먹는다는 선택지를 피하려고 했고 징병 대신 특별지원병제도라고 하여 철저히 검증된 조선인들만 전장에 투입했다. 조선인들을 대규모로 군대에 보내서 병사로 삼았다가는 혹시 조선인들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23] 조선인 징병과 징용을 하자 일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드디어 우리도 황국신민으로서 맡은 바 의무를 다할 수 있게 됐다.'고 한 데는 이런 배경도 있었다. 그러다가 사정이 급하니까 '이제 차별하지 않는다.'는 떡밥을 교묘하게 끼워서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고자 한 것이다.

또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희석시켜 독립의지를 꺾기 위한 계획이었다. 표면상으로는 '일본식으로 개명한 조선인이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고 하였지만 일본은 끝끝내 '조선 거주 조선인과 조선 거주 일본인은 병역을 지지 않는다'며 내지인과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았다. 반면 일본 거주 조선인은 병역 차원에서는 내지인으로 간주하였다. 해방 직전인 1945년에야 겨우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에게만 제국의회 투표권이 주어졌다.

창씨개명은 조선식 이름을 아예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본식 이름을 새로 만드는 것이었다. 창씨개명을 해도 원래 이름과 창씨개명한 이름이 나란히 호적에 오른다.[24] 또 현재 일본에서 재일교포들이 신상을 숨기고 활동하는 것이나, 부락지명총람사건을 통해 부라쿠민의 출신지를 죽어라 캐내는 현대 넷 우익들의 모습이나, 류큐인이나 아이누 같이 일본의 정복전쟁을 통해 일본화된 지역의 토착민족이 야마토 민족계 이주민들과 갈등하거나, 생물학적으로는 아이누의 후예지만[25] 이미 문화적으로 야마토 민족에 동화될 대로 동화된 도호쿠인들이 일본 극우 세력에게 에미시 취급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 실제로 창씨개명을 전면적으로 했어도 조선인 차별이 없어졌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가끔 일본 극우들이 '창씨개명은 조선인을 위한 정책'이라거나 '조선인에게 일본인과 같은 권리를 주기 위한 관대한 조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같은 권리를 부여한다는 말은 같은 동원의 의무를 짊어지게 만들기 위해서 가져다붙인 것이다. 당시 조선인들 중 진성 친일파들을 제외한 대다수는 일본인이 되기를 혐오했다.당시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일본인'이라는 말보다 비하 단어인 왜놈이란 말이 더 통용될 정도였다.

친일파들마저도 일부는 정작 자신이 일본인이 되기를 싫어했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친일파들 중에는 진짜 일본이 좋거나 동경해서가 아니라 일본이 대세라서 일본 편에 선 기회주의자들도 굉장히 많았다. 또 그런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도 일반 조선인들처럼 일본인을 마치 일본인들이 조선인 보듯이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그렇게 바라본 일본인이 자신이 되라니 일부 기회주의적 친일파들에게도 창씨개명으로 일본인이 되라는 말이 그리 달갑진 않았다.

식민지 조선에서 포교활동을 하여 유의미한 정도로 조선인 신자를 확보하는 데 유일하게 성공한 일본 종교가 바로 천리교였다. 그런데 천리교에 입교한 조선인 신자들은 가족이나 지인들로부터 '왜무당(일본 무당)이 되었다.'는 비난이나 욕설을 들었다는 증언이 많다. 조선인이란 정체성을 버리는 것도 아니고 단지 종교를 받아들이는 데만도 이 정도 반발을 감수해야 할 정도였다.

6. 조선인들이 보인 반응

창씨개명을 할 것인가, 아니면 조선식 이름을 그대로 고수할 것인가? 이 문제가 조선인들, 그 중에서도 특히 지체 높은 양반층에게 걱정거리다. 미나미 총독은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할 생각이 없다고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그래놓고는 똑같은 성명서에서, 만약에 조선인들이 일본식 이름을 채택하면 기쁘겠다고 분명히 시사하는 바람에 골치만 더 아파졌다. 나는 이처럼 열광적으로 조선의 모든 것을 일본 것에 맞추어 순응하도록 강요하는 처사가 아주 부질없고 지혜롭지 못한 정책이라고 본다. 다양성이야말로 삶에서 양념 같은 것이다. 일본이 열망하는 대제국은 반드시 다민족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다민족 구성원들에게 모든 면에서 정확히 똑같아지라고 강제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정책이 아닐 수 없다.[26]
윤치호 일기 (1940년 1월 4일자)#

유학의 영향이 아직 강하게 남아서 조상과 가문이 절대적이었던 시절이고 직관적으로 '성을 갈아버리는 행위'니 창씨개명은 '민족의 정체성'에 앞서 '가문의 정체성'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유교적 관점으로도 '충(忠)'의 대상인 왕조가 사라져버린 아노미 상태였지만, 그의 반대급부로 족보와 가문에 대한 집착 및 자부심이 굉장한 시대였다.

전북 고창의 의병출신 설진영(薛鎭永, 1869~1940)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경우 아이를 퇴학시키겠다는 학교의 통보를 받았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울자 설진영은 할 수 없이 창씨개명한 뒤 자신은 조상을 볼 면목이 없다면서 돌을 안고 우물로 뛰어들어 자살했는데 이 설진영의 이야기를 일본인 소설가 카지야마 토시유키가 <족보(族譜)>라는 소설로 발표했고, 1978년에는 임권택 감독이 이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 족보를 만들었다.

창씨개명은 명목상으로는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행해진 것이었기 때문에 유명 인사 혹은 아이러니하게도 친일반민족행위자 등 '유·무형의 압박과 강요를 이겨낼 수 있었던 사람들'은 창씨개명을 거부할 수 있었다. 윤치호는 "당국이 이미 창씨개명하기로 결정한 이상, 조선인들이 창씨개명하도록 반드시 조치를 취할 것이다. 그들은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저명한 조선인들을 반일분자로 블랙리스트에 올릴 것이다."[27]라고 말하며 저명한 친일파들도 오래 못 버틸 거라고 봤고 실제 페널티도 있긴 했지만 성씨를 바꾼다는 반감으로 끝까지 버틴 사람들도 있긴 했다. 대표적으로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일본 제국 육군 중장까지 오른 홍사익 외에 경술국적 중 한 명인 윤덕영, 기업인 박흥식, 방응모 등 현재 친일인사로 분류되지만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꽤 있다.

그러나 조선의 정체성이 희미해진 1930년대 이후 출생자들은 이미 창씨개명에 익숙하여 오히려 조선 이름보다 일본 이름을 더 세련되게 느끼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박완서의 자전소설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의하면 자신의 창씨개명하지 않은 보쿠엔쇼[28]라는 이름을 부끄러워하며 하나코·하루에 같은 일본 이름이 듣기 좋아 부럽다는 내용이 나온다. 실제로 이 세대는 1945년 해방되어서도 우리 일본이 패망하였는데 왜 기뻐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세대임을[29] 생각해 보면 일제강점기가 조금만 더 길었어도 창씨개명은 이전 세대에 비해 거부감 없이 널리 퍼졌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필리핀의 사례가 해당 대체역사에 가까운 대표적인 사례인데 앵글로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영미권 성명을 쓰고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이나 필리핀인들이 스페인어 성명을 쓰는 게 그 예다.[30]

창씨개명의 피해자들[31] 중에는 직업 특성상 개명된 이름을 불러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들은 80세가 다 되거나 심하면 팔순이 지나서도 서로를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이렇게 창씨개명을 하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징집, 징용, 정신대 등으로 끌려간 많은 이들이 서류상으로 조선 말 이름이 아닌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등록되어 21세기에 이르기까지 피해자들의 신원 파악부터 적잖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7. 일본인들이 보인 반응

그리고 민심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그 말씀은 옳은 말씀입니다만, 총독부의 윗사람은 이런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급자가 지방에서 활동하며 조선인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특히 재작년인가, 그 성씨령, 즉 이름을 바꾼다고 하는 일이 있었는데, 성과가 좋아서 거의 80%까지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는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그들의 충심에서 나온 것이라면 좋겠지만, 때로는 경찰의 압박에 의해 한 것이다. 또는 학교의 학생을 이용해 학부모들에게 압력을 받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되었다는 불평도 들리는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그런 쪽은 너무 무리하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전 총독 시절에는 그런 쪽에 힘을 많이 쏟았다고 합니다만, 지금은 자연히 맡기고 있기는 하는 겁니까. 오늘은 그것은 어떠신지, 그 점을 여쭙고 싶습니다.
- 미즈노 렌타로 <귀족원 속기록 1943년 2월 26일 제81회 제국의회 귀족원 예산위원 제3분과회(내무성, 문부성, 후생성) 제2호> #
다음은 창씨개명 문제, 지원병 문제 등에 관변의 강압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이것은 저희도 말씀하신 바와 같이 같은 말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저도 그런 일에 대해 책임 있는 입장에 서게 되었기 때문에, 그런 일에 대해서는 잘못된 것이 있다면 시정을 하고 싶어서 여러 가지 사실의 진상을 조사해 보았습니다만, 반드시 그런 일이 절대 없었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으며, 일부 유감스러운 사례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제대로 운영해 나가고 싶다고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다나카 다케오 당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답변

8. 사례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할 경우 대체로 그 집안의 문중이 모두 모여서 회의로 정했는데, 마침(?) 씨(氏)의 유래 가운데 하나가 제후의 봉토를 의미하고 이게 본관하고 의미가 비슷하므로 조금이라도 고전을 읽어 본 문중 일원들은 고전에 맞추려고 본관과 비슷하게 창씨했다. 안동 권씨(安東權氏)[32]라서 안도(安東)[33], (盧)씨의 시조가 용강군(龍郡) 출신이라 오카무라(村), 하동(河東) 정(鄭)씨라서 가와히가시(河東) 혹은 가와토(河東) 등으로 창씨개명한 경우가 많다. 본관을 그대로 사용한 창씨개명이 가장 흔한 편으로, 지명이니까 일본어로 읽었을 때도 그다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 안도, 오카무라, 가와히가시·가와토는 일본에도 있는 성씨이므로 위화감이 없었다. 만약 본관을 일본식 한자음으로 읽어 다소 위화감이 있다면 본관과 본래 성을 합친 이름으로 개명하기도 했다.[34] 박정희고령 박씨다카기(高木)는 박(朴)의 목()자와 고령 박씨의 고()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심영[35] 등의 청송 심씨는 본관인 청송(靑松)에서 글자를 따 와 아오키(靑木)로 창씨개명하였다.

이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가지는 성씨에 대한 인식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다. 메이지 유신 때 평민들에게 일괄적으로 성씨를 부여한 일본에서는 성이 같은 것은 그저 '우연'이지만 한국은 성씨에 대한 관념 자체가 일본과 달랐기 때문에 그 심리적 반감이 만만치 않았다. 조선 후기에 우후죽순으로 생긴 성씨는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연고와 밀접한 관계인 것이 많았다.

본래의 한국식 성씨의 본관 + 성씨와 본관을 붙여 일본식 성씨로 바꾼 것 말고도 원래 한국식 성의 글자를 파자한 사례도 있다. 예를 들어 장(張)씨는 유미나가(弓長)로 창씨개명했는데, 파자한 유미나가의 한자를 합하면 弓 + 長으로 張이 된다. (朴)씨의 경우 마찬가지로 朴을 파자해 기노시타(木下)로 바꾸기도 했다.[36] 일부 최(崔)씨의 경우는 한자의 산 산(山)과 새 추(隹)를 분리하여 가야마(佳山)로 창씨하고 일부 정(鄭)씨도 한자를 파자하여[37] 다카무라 혹은 덴오(奠邑) 등으로 창씨하였던 사례가 있다.

혹은 성씨별 시조 설화에서 의미를 따 온 경우도 있었다. 박씨의 경우 위처럼 파자한 사례도 있지만 대체로 신라 박혁거세 신화에서 따와 '신라의 우물'(나정 참고)이라는 의미를 담아 아라이(新井)이나 마쓰이(松井)도 많이 썼다. 대표적인 인물이 재일동포 출신 중의원 의원인 아라이 쇼케이(박경재)였다. 경주 이씨는 시조 이알평이 시조설화에서 표암봉 바위에 내려온 것에서 따 와 이와모토(岩本)로 정하는 것을 고려했다고 한다.

전주 이씨는 대체로 아사모토(朝本), 미야모토(宮本), 구니모토(國本)[38]로 바꾸었는데, 이유는 조선 왕실. 종근당을 세운 이종근이 처음 만들었던 약방 이름은 '궁본(宮本) 약방'이었다.[39]

이밖에도 본래의 성씨나 본관에 일본 성씨에 굉장히 자주 들어가는 한자인 (다), (야마), (하라), (가와), (무라), (모토) 등을 합성한 예는 일제강점기에 흔히 쓰인 창씨법이다. 후술될 유명인의 창씨명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여자들의 경우 창씨개명을 할 때 이름 뒷부분에 (코, )자를 붙여서 했다고 한다.[40] 남자는 원래 이름 그대로 바꾸거나 원래 이름의 한 글자에 (오), (로), (야) 등을 붙여서 하는 경우가 많았다.

8.1. 창씨개명의 예외

남(南)씨·류(柳)씨·임(林)씨·계(桂)씨·오(吳)씨는 창씨개명을 안 해도 별 일 없이 넘어갔다는 듯. 일본에도 미나미(南)·야나기(柳)·하야시(林)·가쓰라(桂)·구레(吳)가 적지 않게 있어서 창씨개명이 큰 의미가 없었다. 총독부도 별 말 안 한 것 같고. # 다만 국민총력부락연맹의 이사장이었던 유대흥(柳大興)이라는 사람은 류(柳)씨이기에 창씨개명을 안 해도 되지만[41] 사람들에게 강제하는 입장이라 어쩔 수 없이 야나모토(柳本)로 창씨했는데 '나는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한 것이다. 나도 창씨개명에 반대한다'는 발언을 해 경찰에게 적발되어 잡혀갔다가 친일 경력 덕에 검찰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거꾸로 이 때문에 애먼(?) 일본인이 조선인으로 오해(?)받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당시 조선과 조선인을 옹호하는 글을 많이 썼던 미술사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그 이름을 한국식으로 음독하면 유종열이고 위화감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광화문 철거를 반대하는 등 조선의 문화를 보호하는 운동을 맹렬하게 펼쳤는데[42] 그것 때문에 그를 싫어하는 일본인들이 저놈 이름하고 글쓴 거 봐도 영락없는 조선인 아니냐면서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다른 의미로 웃기는 사례로, 7대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郎, 남차랑)가 부임하자 종씨가 보위에 오르셨다면서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남원에서 일가족을 이끌고 상경한 어떤 남씨가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희성인 경우와 겹치면 이런 핑계(?)가 먹히지 않았다. 김(金)씨(金) 씨가 이미 일본에 있었지만[43] 일본에서는 희성인 데 반해 조선에서는 20%를 차지하는 아주 흔한 성이어서 조선인의 대명사로 여겨졌기 때문에 대부분은 창씨개명의 대상이 되었다. 안(安)씨차(車)씨 역시 일본에 야스(安) 씨와 구루마(車) 씨가 있기는 하지만 흔치 않은 성씨[44]다 보니 창씨개명을 했다. 당시 해당 씨가 그대로 일본에서도 통용된다는 증거를 행정을 집행하는 서기에게 제시하지 못하면 무조건 창씨개명의 대상이 되었고 고전이나 일본 사정에 통달하지 못한 일반적인 조선인이 이런 사례를 제시하기는 어려웠다.[45]

남궁(南宮)씨도 성이 2글자이고 일본식으로 읽으면 음독으로는 '난구'[46]가 되고 훈독으로는 '미나미야'[47] 정도가 되어 그럭저럭 일본 성씨하고 비슷하게 보여서 그대로 놔뒀는데도 이미 창씨개명을 한 줄 알고 아무 불이익도 받지 않고 그냥 넘어가기도 했다. 실제로 일본에도 이와테현에서 유래된 南宮씨가 있었으므로 이름만 그럴싸하면 창씨는 물론이고 개명도 하지 않아도 됐었다. 사실 남궁씨 뿐만 아니라 2글자로 된 성을 가진 사람들은 일본인과 큰 구분이 안 간다는 이유로[48] 창씨개명이 얼추 면제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8.2. 성씨별 창씨개명 상황

성씨 순위 100위 이상만 기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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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金) 가네우미(金海、かねうみ), 가네오카(金岡、かねおか), 가네다(金田、かねだ), 가네모토(金本、かねもと), 가네시로(金城、かねしろ),
요시카네(慶金、よしかね), 가네야마(金山、かねやま), 가나에(金江、かなえ), 가네야(金谷、かねや), 가네자와(金澤、かねざわ),
가네가와(金川、かねがわ), 가네우라(金浦、かねうら), 가네하라(金原、かねはら), 가네무라(金村、かねむら), 가네이(金井、かねい),
가네키요(金淸、かねきよ), 가네모토(金源、かねもと), 가네코(金子、かねこ), 가나시마(金島、かなしま), 가네마쓰(金松、かねまつ),
가네바야시(金林、かねばやし), 가네미쓰(金光、かねみつ), 미쓰야마(光山、みつやま), 오카다(岡田、おかだ), 미쓰모토(光本、みつもと), 게이린(鷄林、けいりん)
2 (李) 미야모토(宮本、みやもと), 구니모토(國本、くにもと), 아사모토(朝本、あさもと),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이와무라(岩村、いわむら), 이와모토(岩本、いわもと)
마키야마(牧山、まきやま), 우시미네(牛峰、うしみね), 마시로(眞城、ましろ), 히라카와(平川、ひらかわ), 아오키(靑木、あおき),
니야마(丹山、にやま), 야마모토(山本、やまもと), 리무라(李村, りむら), 리노이에(李家, りのいえ), 나가카와(永川、ながかわ), 기고(木子、きご), 스모다(李田、すもた)
3 (朴) 아라이(新井、あらい), 아마모토(天本、あまもと), 이모토(井本、いもと), 무라이(村井、むらい), 보쿠하라(朴原、ぼくはら), 보쿠다(朴田、ぼくだ),
보쿠자와(朴澤、ぼくざわ), 보쿠야마(朴山、ぼくやま), 보쿠무라(朴村、ぼくむら), 마쓰가와(松川、まつがわ), 다케야마(竹山、たけやま), 기노시타(木下、きのした), 기모토(木本、きもと),
기야마(木山、きやま), 기무라(木村、きむら), 다카기(高木、たかぎ), 게이린(鷄林、けいりん), 미쓰야마(密山、みつやま), 마쓰이(松井、まつい)
4 (崔) 다카야마(高山、たかやま), 야마카(山佳、やまか), 가야마(佳山、かやま), 야마모토(山本、やまもと), 야마에(山江、やまえ),
오야마(大山、おおやま), 도야마(東山、とうやま), 와야마(和山、わやま), 즈이시로(隋城、ずいしろ), 사이(佐井、さい), 사이모토(崔本、さいもと), 야마우치(山内、やまうち), 쓰야마(津山、つやま)
5 (鄭) 지야마(智山、ちやま), 다메카와(爲川、ためかわ), 무카에다(迎田、むかえだ), 오카와(大川、おおかわ), 가와히가시(河東、かわひがし),
미쓰시로(三城、みつしろ), 미쓰야마(三山、みつやま), 덴오(奠邑、てんおう), 데이야(鄭家、でいや), 데이무라(鄭村、ていむら), 다케하시(竹橋、たけはし), 아키야마(秋山、あきやま), 요시모토(義本、よしもと), 마쓰오카(松岡、まつおか)
6 (姜) 신노(神濃、しんのう), 가미모토(神本、かみもと), 가미구모(神雲、かみぐも), 신야마(晉山、しんやま), 오카(岡、おか), 가미야마(神山、かみやま), 간다(神田、かんだ), 도쿠오카(德岡、とくおか), 교모토(姜本、きょうもと)
7 (趙) 도요타(豊田、とよた), 시라카와(白川、しらかわ), 조케(趙家、ちょうけ), 미나야스(咸安、みなやす), 다카모토(高本、たかもと), 도요하라(豊原、とよはら), 나카야마(中山、なかやま), 야마모토(山本、やまもと), 니시하라(西原、にしはら),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하야시가와(林川、はやしかわ)
8 (尹) 히라누마(平沼、ひらぬま), 이토(伊東、いとう), 이하라(伊原、いはら), 시게마쓰(茂松、しげまつ), 마쓰모토(松本、まつもと)
9 (張) 하리모토(張本、はりもと)[흥덕], 유미나가(弓長、ゆみなが)[인동], 나가타니(長谷、ながたに), 다마야마(玉山、たまやま), 나가야마(長山、ながやま), 하세가와(長谷川、はせがわ), 하리마(張間、はりま), 하리노(張野、はりの)
10 (林) 하야시(林、はやし)[비개명]
11 (韓) 기요하라(淸原、きよはら), 니시하라(西原、にしはら), 미모토(箕本、みもと), 아사카와(朝川、あさかわ), 오하라(大原、おおはら), 미노하라(箕原、みのはら), 기요모토(淸本、きよもと), 기요야마(淸山、きよやま), 마쓰바라(松原、まつばら), 이노우에(井上、いのうえ)
12 (吳) 구레(吳、くれ)[비개명], 구레야마(吳山、くれやま), 구레무라(吳村、くれむら), 도쿠야마(德山、とくやま), 구레시로(吳城、くれしろ), 미쓰이(三井、みつい)
13 (徐) 다쓰시로(達城、たつしろ), 오시로(大城、おおしろ), 오카와(大川、おおかわ), 오야마(大山、おおやま), 오하라(大原、おおはら), 조카와(徐川、じょかわ), 다쓰가와(達川、たつかわ), 조다쓰(徐達、じょたつ), 요시모토(義本、よしもと)
14 (申) 히라야마(平山、ひらやま), 히라타(平田、ひらた), 히라무라(平村、ひらむら), 사루모토(申本、さるもと), 다카타(高田、たかだ)
15 (權) 안도(安東、あんどう), 겐토(權東、けんとう), 곤도(權藤、ごんどう), 곤야마(權山、ごんやま), 곤모토(權本、ごんもと), 요시모토(吉本、よしもと)
16 (黃) 기하라(黃原、きはら), 요시무라(芳村、よしむら), 히야마(檜山、ひやま), 기타(黃田、きた), 기모토(黃本、きもと), 히로타(廣田、ひろた), 히라모토(平本、ひらもと), 히라우미(平海、ひらうみ), 나가미즈(長水、ながみず), 히로가와(廣川、ひろかわ), 마사하라(昌原, まさはら)
17 (安) 야스다(安田、やすだ)[53], 야스모토(安本、やすもと), 안도(安藤、あんどう), 다케야스(竹安、たけやす)[54], 야스야마(安山、やすやま), 야스키(安木、やすき), 야스쿠니(安邦、やすくに), 야스하라(安原、やすはら), 아다치(安達、あだち)
18 (宋) 노야마(野山、のやま), 무카야마(迎山、むかやま), 쓰보야마(壺山、つぼやま),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마쓰바라(松原、まつはら), 노다(野田、のだ), 오하라(大原、おおはら), 무네모토(宗本、むねもと), 소무라(宋村、そうむら), 온즈(恩津、おんづ), 야마모토(山本、やまもと), 기야마(木山、木山), 기가와(木川、きかわ), 소모토(宋本、そうもと)
19 (全) 에하라(江原、えはら),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마쓰바라(松原、まつばら), 마쓰다(松田、まつだ), 기쿠하라(菊原、きくはら), 젠케(全家、ぜんけ), 야마다(山田、やまだ), 젠모토(全本、ぜんもと), 젠이(全井、ぜんい), 젠시로(全城、ぜんしろ)
20 (洪) 난요(南陽、なんよう), 도요야마(豊山、とよやま), 도쿠야마(德山、とくやま), 히로카와(洪川、ひろかわ), 히로하라(洪原、ひろはら), 도코(唐洪、とうこう), 나가야마(永山、ながやま), 미쓰이(三井、みつい)
21 (柳) 야나기(柳、やなぎ)[비개명], 야나기사와(柳澤、やなぎさわ), 야나기가와(柳川、やなぎがわ), 야나기와라(柳原、やなぎわら), 야나모토(柳本、やなもと)
22 (高) 다카야마(高山、たかやま), 다카시(高志、たかし), 다카시마(高島、たかしま), 다카키(高木、たかき), 다카코(高子、たかこ), 다카다(高田、たかだ), 다카하시(高橋、たかはし), 요코시로(橫城、よこしろ), 도라(度羅、とら)
23 (文) 후미이와(文岩、ふみいわ), 후미히라(文平、ふみひら), 후미하라(文原、ふみはら), 후미아키(文明、ふみあき), 후미카와(文川、ふみかわ), 에시로(江城、えしろ), 난페이(南平、なんペい), 후미모토(文本、ふみもと), 후미야마(文山、ふみやま), 후미무라(文村、ふみむら)
24 (梁) 야나가와(梁川、やながわ), 요시하라(良原、よしはら), 난바라(南原、なんばら), 야나하라(梁原、やなはら), 야나모토(梁本、やなもと)
25 (孫) 오무라(大村、おおむら),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덴니치(天日、てんにち), 마고다(孫田、まごた), 시게야마(茂山、しげやま)
26 (裵) 다케모토(武本、たけもと), 호시야마(星山、ほしやま)
27 (曺) 마사야마(昌山、まさやま), 나쓰야마(夏山、なつやま), 다치야마(立山、たちやま)
28 (白) 시라카와(白川、しらかわ), 시라이시(白石、しらいし), 시로하라(白原、しろはら)
29 (劉) 다마가와(玉川、たまがわ), 가와니시(河西、かわにし), 에하라(江原、えはら), 시라카와(白川、しらかわ), 노베야스(延安、のべやす)
30 (許) 모토시마(許島、もとしま), 모토무라(許村、もとむら), 이시와타(石渡、いしわた), 이와무라(岩村、いわむら), 이와타(岩田、いわた),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31 (南) 미나미(南、みなみ)[비개명]
32 (沈) 아오마쓰(靑松、あおまつ), 마쓰모토(松本、まつもと), 아오키(靑木、あおき)
33 (盧) 오카무라(岡村、おかむら), 도요카와(豊川、とよかわ), 가미모토(神本、かみもと), 가와하라(河原、かわはら), 미즈하라(瑞原、みずはら), 우에다(上田、うえだ)
34 (丁) 자야마(茶山、ちゃやま), 조토(丁藤、ちょうとう), 마치다(町田、まちだ), 다케시마(武島、たけしま)
35 (河) 가와모토(河本、かわもと), 가와하라(河原、かわはら)
36 (郭) 쓰토야마(苞山、つとやま), 니시우라(西浦、にしうら), 마키노(牧野、まきの), 이와타니(岩谷、いわたに), 니시하라(西原、にしはら)
37 (成) 나리모토(成本、なりもと), 나리타(成田、なりた), 나리야마(成山、なりやま)
38 (車) 구루마다(車田、くるまだ), 나가타(永田、ながた), 다카타(高田、たかた), 도도로키(轟、とどろき)
39 (朱) 아케모토(朱本、あけもと), 모토시로(本城、もとしろ), 네이노(寧野、ねいの)
40 (禹) 니야마(丹山、にやま), 우모리(宇森、うもり)
41 (具) 아야시로(綾城、あやしろ), 아야하라(綾原、あやはら), 아야베(綾部、あやべ), 아야모토(綾本、あやもと), 구하라(具原、ぐはら)
42 (辛) 가라시마(辛島、からしま), 시게미쓰(重光、しげみつ), 미카와(三川、みかわ)
43 (任) 도요카와(豊川、とよかわ)
44 (田) 다무라(田村、たむら), 사와다(澤田、さわだ), 다나카(田中、たなか)
45 (閔) 빈하라(閔原、びんはら), 모토시로(本城、もとしろ), 이와무라(岩村、いわむら), 이와모토(岩本、いわもと), 가도후미(門文、かどふみ)
46 (兪) 유하라(兪原、ゆはら), 마쓰바라(松原、まつばら), 기젠(杞前、きぜん), 유무라(兪村、ゆむら)
47 (柳) 야나기(柳、やなぎ)[비개명], 야나기사와(柳澤、やなぎさわ), 야나기가와(柳川、やなぎがわ), 야나기와라(柳原、やなぎわら)
48 (羅) 도미타(富田、とみた), 우에무라(上村、うえむら), 마쓰시마(松島、まつしま)
49 (陳) 진나이(陳內、じんない), 진카와(陳川、ちんかわ), 진다(陳田、ちんだ), 미쓰야마(三山、みつやま), 오하라(大原、おおはら)
50 (池) 이케다(池田、いけだ)
51 (嚴) 이와모토(岩本、いわもと), 나시로(奈城、なしろ)
52 (蔡) 사이하라(蔡原、さいはら), 사이카와(蔡川、さいかわ), 히라오카(平岡、ひらおか), 히라마쓰(平松、ひらまつ), 히라모토(平本、ひらもと), 사카와(佐川、さかわ)
53 (元) 모토무라(元村、もとむら), 하라모토(原元、はらもと), 하라무라(原村、はらむら), 하라야마(原山、はらやま)
54 (千) 지하라(千原、ちはら), 지다(千田、ちだ), 지바(千葉、ちば)
55 (方) 가타야마(方山、かたやま)
56 (孔) 교쿠하라(曲原、きょくはら), 고무라(孔村、こうむら), 히하라(檜原、ひはら), 마사하라(昌原、まさはら), 고베(孔部、こうべ)
57 (康) 야스하라(康原、やすはら), 야스히로(康宏、やすひろ), 야스다(康田、やすだ), 야스나리(康成、やすなり)
58 (玄) 겐부(玄武、げんぶ), 노베야마(延山、のべやま)
59 (咸) 나리모토(成本、なりもと), 간네(咸根、かんね), 간하라(咸原、かんはら), 에하라(江原、えはら), 가와모토(河本、かわもと), 마쓰바라(松原、まつばら)
60 (卞) 벤다(卞田、べんだ), 구사타니(草溪、くさたに), 도쿠하라(德原、とくはら)
61 (廉) 미즈하라(瑞原、みずはら), 우메하라(梅原、うまはら), 다치하라(立原、たちはら), 이시카와(石川、いしかわ)
62 (楊) 야나기(楊、やなぎ)[비개명], 기요미즈(淸水、きよみず), 기요하라(淸原、きよはら), 와다(和田、わだ), 야나기하라(楊原、やなぎはら)
63 (邊) 하라베(原邊、はらべ), 하라카와(原川、はらかわ)
64 (呂) 미야하라(宮原、みやはら), 미야모토(宮本、みやもと), 로이(呂井、ろい)
65 (秋) 아키야마(秋山、あきやま), 아키타(秋田、あきた), 아키히타(秋常、あきひた)
66 (魯) 에무라(江村、えむら), 에모토(江本、えもと), 하나무라(華村、はなむら)
67 (都) 미야코(都、みやこ)[비개명], 미야코다(都田、みやこだ), 쓰모토(都本、つもと), 미야코가와(都川、みやこがわ)
68 (蘇) 구사카(草禾、くさか), 이소(伊蘇、いそ), 와다(和田、わだ), 아키타(秋田、あきた)
69 (愼) 마야마(眞山、まやま), 마하라(眞原、まはら)
70 (石) 이시하라(石原、いしはら), 이시카와(石川、いしかわ), 이시무라(石村、いしむら)
71 (宣) 요시카와(宣川、よしかわ), 나카하라(中原、なかはら)
72 (薛) 다마가와(玉川、たまがわ),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히로모토(弘本、ひろもと), 오야마(大山、おおやま)
73 (馬) 기가와(木川、きがわ), 아리마(有馬、ありま), 우마노(馬野、うまの), 바바(馬場、ばば)
74 (吉) 요시모토(吉本、よしもと), 요시다(吉田,よしだ), 데라사이(寺再、てらさい), 엔요(延陽、えんよう)
75 (周) 슈모토(周本、しゅうもと), 도쿠하라(德原、とくはら)
76 (延) 노부하라(延原、のぶはら), 나카야마(中山、なかやま), 나카모토(中本、なかもと), 노베야마(延山、のべやま)
77 (房) 후사하라(房原、ふさはら)
78 (魏) 나가모토(長本、ながもと)
79 (表) 오모다(表田、おもだ), 야마자키(山崎、やまざき), 신카와(新川、しんかわ)
80 (明) 아카시(明石、あかし), 아케가와(明川、あけがわ), 아카치(明地、あかち), 다치모리(日月、たちもり)
81 (奇) 이와사키(岩崎、いわさき)
82 (潘) 요네다(米田、よねだ), 가와무라(河村、かわむら)
83 (羅) 도미타(富田、とみた), 우에무라(上村、うえむら), 마쓰시마(松島、まつしま)
84 (王) 오모토(王本、おうもと), 오지마(王島、おうじま), 마쓰다(松田、まつだ), 마쓰시로(松城、まつしろ), 오야마(王山、おうやま), 오하라(大原、おおはら)
85 (琴) 고토가와(琴川、ことがわ), 가네다(金田、かねだ), 이마다(今田、いまだ)
86 (玉) 오하라(大原、おおはら)
87 (陸) 구다시로(管城、くだしろ), 구가미(陸海、くがみ)
88 (印) 시루시마(印島、しるしま), 다카키(高木、たかき), 다카무라(高村、たかむら)
89 (孟) 니하라(新原、にいはら), 마쓰오카(松岡、まつおか), 마쓰바라(松原、まつばら)
90 (諸) 에가와(穎川、えがわ), 우루시바라(漆原、うるしばら)
91 (牟) 무타(牟田、むた), 다니모토(谷本、たにもと)
92 (蔣) 기바야마(牙山、きばやま),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구니모토(國元、くにもと)
93 남궁(南宮) 난구(南宮、なんぐう)[비개명]
94 (卓) 다카야마(卓山、たかやま), 미쓰야마(光山、みつやま)
95 (鞠) 아오야마(靑山、あおやま), 아오타(靑田、あおた)
96 (余) 요시카와(宜川、よしかわ), 도미모토(富本、とみもと)
97 (秦) 하타(秦)[비개명], 난바라(南原、なんばら), 마쓰바라(松原、まつばら), 오쿠라(大倉、おおくら), 도요타(豊田、とよた)
98 (魚) 우오카와(魚川、うおかわ), 우오니시(魚西、うおにし), 니시카와(西川、にしかわ), 우오누마(魚沼、うおぬま)
99 (殷) 고슈(幸州、こうしゅう), 마쓰에(松江、まつえ), 에모토(江本、えもと)
100 (片) 가타야마(片山、かたやま), 가타모토(片本、かたもと)

8.3. 저항 사례

한편 일부 조선인들은 창씨개명에 아주 심한 반감을 느껴서 얌전히 창씨개명을 당하는 대신 DQN 네임 저리가라 할 정도로 온갖 개드립, 비웃음, 풍자가 섞인 개명을 하면서 언어유희역관광을 꾀했다.

9. 유명 인물의 창씨개명 목록

창씨개명을 한 사람들이 반드시 모두 친일반민족행위자인 것은 아니다. 1941년 기준으로 조선인의 81.5%가 창씨개명을 했는데 그렇다면 절대 다수의 조선인이 친일파란 뜻이 된다. 당시 거부자에 대한 엄청난 불이익 때문에 학교 진학 및 취직 등 현실상 어쩔 수 없이 했던 사람이 대다수이며 당시 미취학 아동이라 사실상 저항할 수 없었던 입장의 사람[68]도 상당수다. 항일 독립운동가 중에도 창씨명을 가진 사람은 많다. 대개가 일본인이나 친일파로 위장하기 위해 창씨개명한 경우이며, 위에서 보듯이 창씨개명을 지시한 조선총독부일본 정부를 조롱하기 위해 일부러 욕설로 창씨명을 만들기도 했다.

반대로 창씨개명의 자발성을 홍보하기 위해 친일반민족행위자들 중에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경우 역시 종종 있다. 대표적으로 조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제2차 세계 대전의 전범으로 기소되어 처형된 홍사익이나 일본 중의원 정치인과 정치깡패로 활동했던 박춘금 등이 있다.

아래의 목록에는 8.15 광복 이후에 활동을 한 사람도 있는데, 대부분은 재일 한국인으로 일본에서 나고 자란 탓에 현실적인 이유로 일본 귀화를 선택해야했던 경우에 속한다. 당연히도 이는 타국 귀화자들의 통상적인 개명과 같은 경우이므로 비난의 여지가 없다. 물론 일본의 우경화에 동조하는 신친일파의 사례가 없진 않으나, 모든 일본 귀화자가 이런 경우라고 보는 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뿐이다.

인물 성씨 기준으로 가나다순 정렬. 창씨개명 원리는 옆에 쌍점(:)을 붙이고 적으며 그 밖의 부연 설명은 창씨개명 원리 설명 뒤에 추가하기 바란다.

이름 표기 시 표준 외래어 표기법을 준수하여 표기하며 일제강점기 이후 출생한 현대 인물들은 이곳에 작성하지 말 것.

개명된 이름은 모두 리다이렉트 처리 바람.

===# ㄱ #======# ㄴ #======# ㄷ #======# ㄹ #===
===# ㅁ #===
===# ㅂ #===
===# ㅅ #===
===# ㅇ #===
===# ㅈ #===
===# ㅊ #===
===# ㅌ #===
===# ㅍ #======# ㅎ #===

10. 해외 사례

10.1. 독일계 미국인들의 창씨개명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독일계 미국인들이 탄압을 피해 영국계 성씨로 창씨개명을 하였다.
<rowcolor=#000> 前
슈미트(Schmidt) 스미스(Smith)
뮐러(Müller) 밀러(Miller)
슈나이더(Schneider) 테일러(Taylor)
피셔(Fischer) 피셔맨(Fisherman), 피셔(Fisher)
코흐(Koch) 쿡(Cook)
베버(Weber) 위버(Weaver)
치머만(Zimmermann) 카펜터(Carpenter)
플라이셔(Fleischer) 부처(Butcher)
비어만(Biermann), 브라우어(Brauer) 브루어(Brewer)
호프만(Hoffmann) 스튜어드(Steward)
융(Jung) 영(Young)
융커(Junker) 스콰이어(Squire)
슈마허(Schumacher) 슈메이커(Shoemaker)
파스빈더(Fassbinder) 쿠퍼(Cooper)
바그너(Wagner) 웨인라이트(Wainwright)
엥겔(Engel) 엔젤(Angel)
베커(Becker) 베이커(Baker)
베르크만(Bergmann) 마이너(Miner)
게르버(Gerber) 태너(Tanner)
개르트너(Gärtner) 가드너(Gardener)
헤르초크(Herzog) 듀크(Duke)
에거(Egger), 에거스(Eggers) 해로우(Harrow)
퓌르스트(Fürst) 프린스(Prince)
히르슈(Hirsch) 벅(Buck)
바이스(Weiß) 화이트(White)
슈바르츠(Schwarz) 블랙(Black)
브라운(Braun) 브라운(Brown)
푀르스터(Förster) 포레스터(Forester), 포스터(Forster)
크뤼거(Krüger) 포터(Potter), 크루거(Kruger)
예거(Jäger) 예거(Jager), 헌터(Hunter)
바흐(Bach) 브룩(Brook)
부슈(Busch), 보슈(Bosch) 부쉬(Bush)
게르스테(Gerste) 발리(Barley)
바스(Barth) 비어드(Beard)
아이히만(Eichmann) 오크맨(Oakman)
프리드만(Friedmann) 피스메이커(Peacemaker)
글뢰크너(Glöckner) 벨맨(Bellman)
트링크바서(Trinkwasser) 드링크워터(Drinkwater)
드룸프(Drumpf) 트럼프(Trump)
아이젠하우어(Eisenhauer) 아이젠하워(Eisenhower)
후버(Huber) 후버(Hoover)

11. 유사 사례

11.1. 강요 차원

11.2. 자발적인 개명 차원

11.3. 번역 차원

12. 한국

한국에서도 귀화인들에게 한국식 이름을 만들도록 시키긴 한다. 한국 민법에서는 1993년 이후 호적에서의 성명 글자를 성을 제외하고 5글자로 제한시켰기 때문이다. 다만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으로 귀화하러 오는 외국인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특별히 귀화인을 겨냥했다기보다는 이름이 긴 사람이 속속 생겨나자[202] 업무를 처리하기 난감해진다는 이유 때문에 행정편의주의적인 관점에서 이름의 글자수를 제한시키기는 한다. 예외 규정이 둘 있는데, 1993년 이전 호적에 등록한 자, 그리고 한국 국적자와 외국 국적자의 혼인으로 출생한 자의 경우 외국 국적자 측의 성을 따르기로 결정하여 외국식 이름으로 한국 호적에 등록시킬 때는 5글자 초과가 가능하다. 없는 성을 만들어도 된다는 게 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이 귀화할 경우 일본인으로써의 성씨를 그대로 써도 되기는 하다.

대신 한자를 한국 한자음이 아닌 방식으로 읽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된다.[203] 예를 들어 사토 마사요시()라는 일본인이 한국으로 귀화를 할 경우, 자기 이름을 한국어로 읽는 그대로 쓰고 싶다면 원칙적으로는 성명을 한글 '사토마사요시'라고 써야 하며,[204] 마치 인명용 한자 이외의 한자를 이름에 썼을 때처럼 한글로만 이름을 표기해야 한다. 물론, 佐藤을 성으로, 正義를 이름으로 등록시켜 사용할 수 있지만, 이 경우에는 성명을 한국 한자음대로 무조건 '좌등정의'로 읽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일본 성씨를 한국식으로 쓰는 예가 양산시에 거주하던 망절씨의 시조 망절일랑.[205] 호사카 유지도 귀화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발음 그대로 쓰고 있는데, 공문서에는 순한글 성씨 및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다. 한국 출생이지만 황목치승(荒木治丞)도 일본식으로 읽으면 '아라키 하루스케'라는 평범한 일본인의 이름이다.

네이버 지식iN에 '창씨~'등으로 검색하면 '제 이름은 ○○○인데, 제 창씨명이 궁금해요'라는 질문이 다수 나온다. '창씨'라는 것은 (성)씨를 '만든다란' 뜻이기에 창씨명이 '일본식 이름'이란 뜻이 아니라는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애초에 이름이란 고유명사이니 이름이 홍길동이면 일본에서도 홍길동(에 가까운 발음)이라서 굳이 일본식으로 음독/훈독할 필요는 그닥 없다. 현재는 洪吉童(ホン·ギルドン) 또는 シム·チョン(沈淸)처럼 쓰는 게 보통. 일본에 완전히 정착해서 자식 낳고 산다면 몰라도.[206] 사실 굳이 바꾸는 경우는 개인 취향 문제이거나 현지에서 상용하지 않는 한자이거나 해서 발음을 곤란해 한다거나 아니면 공식 성명은 아니지만 현지인과 친근하게 교류하기 위해 별칭으로써 재미삼아 만들어 붙이는 경우이다. 또는 드물지만 업무상/학술적인 이유로 불가피하게 재특회가 활개치는 지역에서 체류해야 하는 경우에도 (일본인으로 위장하기 위해)하는 경우도 있다 한다. 사실 그런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더라도, 외지인 티가 나면 이지메하거나 배척하여 끼워주지 않으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한다. 물론 일본의 조직에 끼어들 일이 없는 단기체류자는 해당사항이 없다.

이는 미국 등 서양권 국가로 유학/이민/귀화한 사람들 중에서도[207], 가끔 로마자로 한국이름을 표기할 수 있음에도 "제임스 리" 라던지 "데이비드 킴" 같이 현지식 이름을 지어다가 붙이는 경우[208]가 있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한자를 파자해서 일본식/중국식 성명표기를 하고 싶으면 하면 되고, 하기 싫으면 안하면 된다. 온전히 상황과 주변 환경, 대인관계에 따른 개인의 선택일 뿐이다.

이름을 바꾸는 것은 아니지만 한자문화권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소개할 때 일본식 한자음을 빌어서 하는 경우는 많다. 예를 들어 이름이 성준이라면 '세이타의 成에 슌스케의 俊입니다.' 하는 식으로. 이건 단순히 표기법이나 뜻을 이해시키기 위한 차원을 넘어서 각종 지원서 등의 공문서에서는 비록 발음은 한국식, 중국식으로 후리가나를 달더라도 한자식 이름을 쓰는 외국인이라면 이름을 한자로 써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 내에서 한자와 독음이 잘 매치가 안 되는 성명을 가진 사람의 경우에도 똑같이 한다. 단, 이 경우는 다른 사람의 이름보다는 대중적으로 쓰이는 훈독음을 알려준다.

사실 저런 한국식 한자성명의 일본식/중국식 독음에 대한 문의가 넘치는 이유는, 해당국에서는 한자성명 사용자는 타국인이라 할지어도 한자 표기를 강요하며, 그렇게 표기된 한자를 현지인들은 자기들 멋대로 읽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중국, 일본국적/출신 체류자의 성명이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히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한자 표기를 아예 지우고 로마자 표기나 순한글 표기가 가능한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중국과 일본은 허락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는 로마자 표기가 우선이지만, 한자를 쓰는 경우가 이렇다는 것이다. 그나마 일본은 재류신고 등 공문서를 제외하면 한국식 독음대로 가타카나 단독 표기를 하는 것은 가능하나, 한어병음 단독 표기를 절대 불허하는 중국답이 없다.

13. 번역상의 표기

참고로 서양의 인물은 언어마다 이름을 다르게 표기하는 경우가 많고[209] 지금도 교황이나 왕족의 이름을 적을 때는, 요한 바오로 2세영어로 쓸 땐 John Paul II, 이탈리아어로 쓸 땐 Giovanni Paolo II, 우크라이나어로는 Іван Павло II라고 쓰는 것과 같이 언어마다 다르게 표기하는데 이 경우는 창씨개명처럼 취급하기 곤란할 듯하다. 호적상의 사람 이름을 고치는 게 아니라 그냥 과거 유럽의 관례를 따라 이름을 해당국 국어로 '번역'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리 앙투아네트는 원래 마리아 안토니아였다. 그냥 마리아가 프랑스에서는 마리, 영국에서는 메리라고 자동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 같은 원리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인물 이름들은 유럽권에서는 자국의 언어(표기 방식)로 '번역'된다.

따라서 만약 민족국가 형성 전, 여러 국가의 역사에 영향을 미친 인물의 이름이라면 차라리 당대의 공용어 격인 라틴어(또는 그리스어)로 표기하는게 중립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대표가 카롤루스 대제. 좀 경우는 다르지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유사한 사례다.

한편 이런 '번역식' 인명표기는 한자문화권에서도 똑같다. 현대에는 원어를 존중하여 표기하는 경우가 많지만[210], 근대 이전 인명/지명은 그런 것 없이 자국의 방식대로 읽고 쓰는 게 보통이다. 현대 한국어에서 일본어 한자 읽기가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건 역사적인 이유가 겹치면서 생긴 특수한 예이고, 한국도 근대 이전에는 일본의 인명/지명도 예외없이 한국식으로 읽었다. 근대 이전의 풍신수길, 이후는 이등박문을 생각하면 된다. 중국의 경우도 19세기 말~20세기 초 인물들은 한국식 독음과 중국식 독음 모두 통용된다. 표기법상으로야 신해혁명 이후 인물은 중국식 독음 표기가 원칙이지만 대략 이홍장원세개, 양계초 이후 인물들이 여기 해당한다. 손문, 장개석, 모택동이 대표적이고, 이들보다 후대 인물로 20세기 후반~21세기 초엽까지 활동한 등소평, 조자양, 강택민도 한국식 독음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호금도, 습근평중국인들의 이름이 거의 한국식 독음으로 불리지 않는다. 단, 조선족들이나 북한에서는 여전히 한국식 독음으로 부르고 있다. 또 영화배우인 양조위, 장국영, 유덕화 등의 경우도 한국식 독음이 널리 퍼져 있다.

이렇게 읽는 법이 정착된 것은 외래어 표기법이 비교적 최근인 1987년에 발표된 영향이 크다. 중국인이건 일본인이건 일평생 한자 그대로 읽어왔는데 어느날 갑자기 싹 바꾸라고 하니 당시의 지식인들과 기자들이 이걸 어색해 해 그동안 읽던 방식 그대로 써 온 것이다. 그런 표기법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고, 이는 현재 우리도 '모택동, 등소평'이라고 쓰지만 않지 그게 누구인지는 다 알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그 시절에 사회생활을 하시던 분들이 은퇴한 2000년대 이후에는 한자를 그대로 읽는 표기법은 점점 사라지고 중국, 일본식 독음대로 표기하고 있다. 앞으로 등장하는 일본인, 중국인은 100% 모국어 독음으로 표기될 것이다. 지금은 일종의 과도기라고 생각하면 될 듯 하다.

14. 참고 문헌



[1] 교육계를 위해 변호하자면 '창씨개명'이란 4음절 자체에는 강제성이 드러나지 않으므로 일본식 성명강요로 쓴 것이다.[2] 당장에 3대 천하인들도 보면 씨를 바꾼 경우가 많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바꾸기 직전의 씨는 하시바였고 또 그 이전에는 기노시타였다. 그밖에도 후지와라, 헤이지 등을 쓰기도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어릴 적에는 마쓰다이라 이에야스였다.[3] 21세기에도 일본의 정치적 목표는 엘리트주의, 민족주의, 보수주의이며 외국인의 시민권 획득에 큰 제한을 두고 있다.[4] 조선인뿐 아니라 중국인, 오키나와인, 심지어 관서 출신 일본인과 청각장애인들도 상당수 살해당했는데 이들 역시 어차피 외형적 차이는 크지 않았고 저 발음들은 못했기 때문이다.[5]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치안을 담당했던 경찰기관.[6] 대조적으로 대만에선 기존의 폐성창씨를 그대로 추진했는데, 조선과는 달리 허가를 받은 자만이 일본식 성씨를 가질 수 있었다. 심지어 대만은 조선과 달리 폐썽창씨에 긍정적인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 입장에선 자신들이 조선인에 비해 더 차별 받는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7] 초대 덴노인 진무 덴노가 일본을 건국한 것을 기념하는 날. 한국의 개천절 같은 기념일이다.[8] 다만 황도유림(천황과 일본 제국을 위해 헌신하라는 유학을 따르는 유림들)의 세력이 컸던 경상북도에서는 유림들의 참여율이 초기, 후기 가릴 것 없이 높게 나타났다. 2월에만 전체의 50%가 넘는 창씨개명이 경상북도에서 접수되었다. 초기 경상북도에서 유달리 창씨개명 참여율이 높았던 것도 이 때문인 듯. 창씨개명이 완료될 때까지 전체 경북 유림 2만 6842명 중 2만 6670명이 창씨에 참여하였다.[9] 지금의 대구광역시,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덕구리 및 천평리,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포함, 울진군 전역 및 영양군 수비면 본신리 제외[10] 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포함,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제외[11] 지금의 대전광역시, 세종특별자치시(부강면 제외) 포함, 논산시 연무읍 고내리, 황화정리, 마전리, 봉동리, 안심리, 신화리 제외[12] 지금의 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옹진군 백령면, 대청면, 연평면 (서해 5도) 제외) 포함, 연천군 신서면 제외[13] 현재의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 대청면, 연평면 (서해 5도)을 포함[14]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경상북도 울진군영양군 수비면 본신리 포함, 영월군 상동읍 덕구리 및 천평리는 제외[15] 지금의 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포함[16] 지금의 광주광역시, 제주특별자치도 및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포함[17] 지금의 충청남도 금산군 전역과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고내리, 황화정리, 마전리, 봉동리, 안심리, 신화리 포함, 부안군 위도면은 제외[18] 호주의 소재불명 등 창씨를 할 수 없는 호적 제외[19] 朝鮮姓名復舊令에依하야名復舊 檀紀四貳七九年拾貳月貳拾四日改訂함(조선성명복구령에 의하여 이름을 복구함. 단기 4279년 12월 24일 개정함.)[20] "한국식 이름을 가졌던 사람이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으로 일본식 이름을 가지게 된 경우라면 성명복구령에 의하여 당연히 종전의 한국식 이름으로 복구되었어야 하는데 아직까지도 창씨개명된 일본식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면, 그 창씨명은 이미 무효로 된 이름이므로 개명의 절차에 따라 개명할 사항이 아니고 호적 정정의 대상으로서 호적공무원이 직권정정절차에 따라 정정하여야 할 사항이고, 다만 그러한 창씨개명의 사실이 호적(제적)상에 명백히 나타나 있지 아니한 때에는 사건본인은 그러한 사실을 증명하는 서면을 첨부하여 직권정정을 촉구하는 의미의 호적정정 신청을 본적지 시(구)·읍·면의 장에게 제출할 수 있을 것이다."(구 호적선례 2-339).[21] 이렇게 링크한 이유는 바로 밑 문단에 서술.[22] 다만 이는 사실 기만에 가깝다. 이미 일본에서도 성씨는 거의 합쳐져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씨고 성이고 다 갈아지는 것이나 다름없다.[23] 사실 일제 입장(...)에서는 이 우려가 기우는 아니였던 것이, 조선인 징병이 시행된 후 징병된 조선인들이 일본군에서 배운 기술이나 무기등을 가지고 탈출해 독립군측에 도움을 준 경우(...)도 많았고(당장 지청천 등이 해당 케이스다.) 쁘락치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24] 원평등귤은 일본에서도 4대 본성이라고 하여 일본인도 개명하기 어려운 성씨이다. 도쿠가와 등의 유명 가문도 그러했기 때문에 해당 성씨로 창씨개명이 어려웠던 건 딱히 조선인을 차별했다고 볼 수 없다. 또한 '조선인임을 알 수 있는 성씨로만 창씨개명을 할 수 있었다'는 주장도 실제 개명 사례를 보면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다.[25] 다만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이 도호쿠 지방에서도 아이누-조몬인의 혈통은 높아봤자 9%정도다. 이들이 아이누의 생물학적 후예라 하긴 무리가 많다.[26] 윤치호는 1940년 6월 17일, 성을 이토(伊東)로 바꾼 후 이토 치코(伊東致昊)로 개명했다.[27] 윤치호 일기:1916~1943(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463페이지[28] 당시 일제가 미군 공습에 대비하여 실시했던 '방공연습'의 일본어(호코렌슈)와 발음이 비슷해서 놀림을 받았다.[29] 물론 다 그랬던 것은 결코 아니다.[30] 무려 300년 이상을 지배받았으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 모두 스페인어를 아직도 쓰고 이름도 스페인 이름이거늘 전쟁까지 벌이며 독립했다. 스페인이 벌이던 차별에는 이들도 반발했고 시몬 볼리바르 같은 남미 독립 영웅도 심지어 스페인 계 핏줄이 흐르는 혼혈 귀족임에도 스페인과 남미는 다른 나라라고 주장해 독립전쟁을 이끌었다. 필리핀 독립을 이끌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수백여 년 지나도 일본에 대하여 일본어나 이름은 낯설지 않아도 차별이 이어질 테고 결국 이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31] 현재 이들은 고인이거나 살아 있더라도 일제강점기에 갓난아기여서 '개명'을 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창씨개명 피해자들 중 중년층도 제법 되는 편이었으나 이들이 모두 65세를 넘는 200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창씨개명의 피해자들은 전원 노인이 되었으며 왠지 남자들이 많아 보이는 것은 당시 취학률은 남자 쪽이 여자보다 더 높았기 때문이었다.[32] 조선시대 당시 대표적인 명문가 중 하나로 유명 인물로는 권근·권람·권율 등이 있다.[33] 혹은 안토. 한자 표기는 같다.[34] 이를테면 안동의 안(安)과 권(權)을 따서 안켄(安權)이라고 한다거나.[35] 본명 심재설. 야인시대의 등장인물로도 나왔던 친일반민족행위자로서 심영이라는 예명으로 알려져 있다.[36] 소설 비명을 찾아서의 주인공 기노시타 히데요(木下英世 목하영세)도 조선식 성은 박씨다.[37] ex)鄭 = 奠+邑[38] 현대 일본에서는 國 대신 国을 쓰지만 당시에는 國이 표준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일본에서 인명에서는 国을 안 쓰고 國을 쓰는 경우가 있다.[39] 그러나 전주 이씨를 제외한 다른 본관의 이씨 집안들은 창씨개명할 당시에 자나 자 등을 일본식 이름 작명에 사용하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다.[40] 1930~40년대에 태어난 할머니 이름이 춘자(春子), 방자(方子)와 같은 이름이 많은 것도 그 이유다. 한국인이 듣기엔 촌스런 옛날 이름 이지만 일본어로 바꾸면 하루코, 마사코 등 지극히 평범한 여자아이 이름이 되기 때문이다.[41]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읽으면 야나기 다이코인데 일본 현지에서도 통할 정도였다.[42] 그래서 일제강점기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1984년에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았다.[43] 재일교포와 상관없는 도호쿠 지방에서 종종 보이는 성씨. 실존 인물로는 전 야구선수 곤 히로아키 등이 있다.[44] 사타케 요시시게·사타케 요시노부의 가신으로 구루마 쓰나타다(車斯忠)라는 사람이 있는데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 등장하긴 하지만 사타케 팬이 아니면 기억에도 잘 안 남을 이 사람이 구루마 씨의 대표 인물로 소개될 지경이다.[45] 그래서 반대로 이런 고전 쪽에 통달한 지식인들의 모임인 조선어학회의 회원 중에는 본인의 성이 일본의 씨로 쓰였다는 사례를 고전에서 찾아내 서기에게 제시했고 어쩔 수 없이 서기가 수용해서 그대로 넘어간 사례가 있다. 조선어학회는 당시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이 대거 집결한 곳이라 자연히 이 분야를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46] 음독 그대로 세키가하라 전투 때에 근처에 난구 산(南宮山) 이 있어서 일본인들은 한두 번 정도는 들어 본 지명이다.[47] 훈독(미나(미)+미야)[48] 일본의 성씨한국의 성씨와는 반대로 한자로 썼을 때 2글자인 성씨가 다수이다.[흥덕] 흥덕 장씨의 대다수는 하리모토로 창씨하였다.[인동] 인동 장씨가 주로 쓴 일본식 씨명으로, 베풀 장자를 파자해 장궁이라는 새 뜻으로 만든 것.[비개명] [비개명] [53] 순흥 안씨의 대다수는 야스다로 창씨하였다.[54] 죽산 안씨중에 타케야스로 창씨한 사례들이 있다.[비개명] [비개명] [비개명] [비개명] [비개명] [비개명] [비개명] [62] 倉衛는 의미상으로는 관계 없는 한자지만 '먹어라'라는 뜻인 喰らえ와 독음이 같다.[63] 이 때문에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를 이용한 언어유희를 많이 했다고 한다. 이에 착안한 것인지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에서 주인공 박열이 이 궁호를 빌미로 일본 교도관에게 천황을 욕보이면서 낄낄대며 개기다가 두들겨맞으며 고문당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64] 일본어로 "지쿠쇼"라고 읽히는 그 단어를 한국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다.[65] 대략 "엄이섭입니다." 같은 의미가 된다.[66] 여담으로 해당 성씨의 발음은 이와지(いわじ) 내지는 이와니(いわに)로 읽히게 된다.[67] 참고로 도요토미 가문을 무너뜨리고 에도 막부를 세운 도쿠가와의 성은 조선인들이 창씨명에 쓸 수 없게 했었다.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아들들이 일본 제국 본토에서 아직도 귀족 가문으로서 귀족원 의원, 귀족원 의장을 지내는 등 현역 귀족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으로 스스로 메이지 덴노에게 정권을 넘겨줘서 도쿠가와 가문은 근대화 이후에도 메이지 신정부의 귀족 가문으로 편입되었었다.[68] 지금의 80대 중반~후반(1935~1941년생). 대표적으로 쓰키야마 아키히로(月山明博)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17대 대통령 이명박이 이 케이스다. 단, 이명박은 오사카 태생의 재일 한국인이었다.[69]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음악인으로 활동한 인물이다.[70] LG그룹 2대 회장 구자경과는 동명이인인 1888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경찰로 활동하였다.[71] 위의 인물과는 동명이인으로, 1906년생의 공산주의 계파의 독립운동가이다.[72] 성우 기영도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73] 독립운동가, 1931~1932년생, 함경북도 경흥군 출신.[74] 독립운동가, 1925년생, 평안북도 자성군 출신.[75]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인 1899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사회주의 계파 사회운동가 겸 언론인으로 활동했다.[76] 친일파, 1886년생, 황해도 재령군 출신[77] 독립운동가, 1915년생, 경기도 경성부 출신.[78] 대한민국의 가수 김명기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79]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인 1893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하였다.[80] 대한민국의 무술인 김명화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81] 또는 당시 서울 용산역(山驛)에서 "전투에서 전사하여 기차에 실려 돌아오는 황군 장병의 시신에서 깊은 감명을 받아 슬퍼했다"는 경험을 토대로 용산역(山驛)을 이름에 반영했다는 의견도 있다.[82]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83]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봉두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84] 링크된 대한민국의 기업인 김삼만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85] 독립운동가, 1896년생, 경기도 경성부 출신.[86] 독립운동가, 1910년생, 강원도 철원군 출신.[87] 대한민국의 양궁선수 김신애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88] 김억 시인은 김소월 시인의 스승이었다. 김소월의 유명한 시 '삼수갑산 - 차안서선생삼수갑산운'의 '안서선생'이 스승 김억을 일컫는다. 번역하면 '안서선생께 보내는 삼수갑산 운(답시)'로, 김억의 시 삼수갑산에 대한 답시임을 나타낸다.[89]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90] 친일반민족행위자, 1886년생, 경상북도 문경군 출신.[91] 독립운동가. 1915년생, 황해도 금천군 출신.[92] 친일반민족행위자, 1880년생, 한성부 출신.[93] 승려, 1884년생, 경상남도 함양군 출신.[94] 친일반민족행위자, 1888년생, 한성부 출신.[95] 독립운동가, 1915년생, 경상북도 김천군 출신.[96] 전자는 일본에서 일본인으로 위장해 생활할 당시에 사용하던 이름으로, 후자는 갑신정변 실패 이후 위험에 처하자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파 세력들과 함께 떠난 일본행 망명길에서 승선한 지토세마루(千歳丸)호가 일본에 도착한 이후 헤어졌던 선원 쓰지 도주로(辻藤十郎)가 지어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97] 가수 김재선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98]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김재천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99] 한화그룹의 초대회장 김종희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00] 독립운동가, 1902년생, 경기도 고양군 출신.[101] 링크된 인물들과는 동명이인1873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하였다.[102] 독립운동가. 1921년생. 강원도 양구군 출신.[103] 독립운동가. 평안북도 후창군 출신.[104] 1877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했다.[105] 친일반민족행위자, 1902년생, 충청북도 제천군 출신.[106] 독립운동가, 1916년생, 경기도 경성부 출신.[107] 친일반민족행위자, 1896년생, 전라남도 여수군 출신.[108] 독립운동가, 1889년생, 경기도 경성부 출신.[109] 링크된 인물들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10] 1904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법조인으로 활동했다.[111] 야구선수 박광명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12] 정치인 박광진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13] 1905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언론인으로 활동하였다.[114] 김옥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후 떠난 일본행 망명길에서 지토세마루(千歳丸)호의 선원 쓰지 도주로(辻藤十郎)가 지어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115] 박정희의 창씨개명이 오카모토 미노루(岡本 実)나 마쓰모토(松本)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가 실제로 창씨개명 시기에 정식으로 작명한 일본식 이름은 "高木正雄" 하나뿐인 것으로 추측된다.* 북한이 그의 친일행적을 비판하려는 목적으로 퍼뜨렸다는 주장도 있고, 일부 전문가들도 본관인 고령(高霊)과, 본명인 정희(正熙)의 "正"등을 가져와 본관과 본명을 일부 유지하여 "高木正雄"라고 창씨개명을 하였기에, 2차 개명을 하였단 걸 입증할 확실한 증거와 마땅한 이유가 없다는 점을 들어 이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다.[116] 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 박태산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117]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1883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하였다.[118] 동명이인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박흥식과는 다른 인물로, 1900년대 중반 전라북도 남원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119] 대한민국 제 28대 법무부 장관을 지낸 백상기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20] 1893년생. 일제강점기대한민국의 법조인으로 활동한 인물로, 1919년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암살할 목적으로 자신의 집에 찾아와 자금을 요구하던 의열단윤병구, 유석현, 김지섭 등의 독립운동가들을 일본 경찰에 밀고하여 체포하도록 하였으며, 1927년에는 일본인 교장을 배척하는 운동을 벌였던 박종운, 박일봉 등 주도 학생들의 재판에 판사로 참여, 같은 달 비밀결사 단원 김응선 등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어 열린 재판에서 판사로 참여, 1931년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을 계획하고 전개한 임종만, 고인환 등의 학생들의 검사 측의 항고로 열린 항소재판과 이들에 대한 면소결정을 파기하여 본래 법원으로 돌려보냈고, 1932년에는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국민부, 군사부의 김형건, 박차석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어 열린 재판에 참여하는 등 여러 친일 행적을 보인 인물로, 이러한 경력으로 1934년에 일본 정부로부터 훈 5등 서보장을 수여받는 등 일본 정부로부터 여러 차례 훈장을 받은 인물이다.[121] 1879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했다.[122] 독립운동가, 1908년생, 경기도 경성부 출신.[123] 독립운동가, 1913년생, 경기도 양주군 출신.[124]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1900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교육인으로 활동하던 인물이다. 여담으로, 친일파 김활란과는 학교 선후배 관계이다.[125] 역사학자 서중석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26]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1890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경찰로 활동했던 인물이다.[127] 1942년 일본으로 밀항하여 해방 이후에도 이 이름을 통명으로 삼았고, 일본에서 사업을 하는 동안 사실상의 본명으로 사용했으며, 현재도 일본에서는 이 이름을 쓴다. 그의 아들들 역시 일본 통명이 있다.[128] 교육인 신정균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경기도 포천군 출신 인물이다.[129] 교육인 신정균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전라북도 옥구군 출신 인물이다.[130] 친일반민족행위자임과 동시에 인도네시아의 독립운동가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131]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1890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한 인물이다.[132]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기업인으로 활동한 인물이다.[133]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1889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했다.[134] 대한민국의 기업인, 정치인, 비서실장을 지낸 유영민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35] 영화감독 유영선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36] 중앙일보 연재 청와대비서실[137]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1897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하였다.[138] 정치인과 기업인을 지낸 이경희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139] 해발 152 m짜리 야트막한 산이지만, 헤이조쿄를 둘러싼 야마토 3산 중 가장 신성시되었다. 만요슈에서도 가구산을 자주 언급하며, 오늘날 일본도 중요성을 인정하여 역사적풍토특별보존지구로 지정하여 보존한다. 지금도 종교인들이 종교적 목적으로 가구산에 오르곤 한다. 진무 덴노가 도읍했다는 우네비산도 아니고 하필 가구산에서 이광수가 성을 따왔음은 가구산이 야마토 3산 중 가장 특별한 곳임을 알았다는 증거이다.[140] 그러나 이 설을 반박하는 의견 중 하나로, 당시 이광수가 자신이 살던 이북 지역의 묘향산(妙香山)의 지명을 가져와 가야마(香山)로 창씨하였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141] 대한민국의 모델 겸 유튜버인 이남수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42] 구한말 시기의 조선 관료인 이도재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43]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1897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목회자로 활동하였다.[144] 위의 이동화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당시 일본에서 활동한 사회기관단체인이다.[145] 참고로 이명박 형제는 '상' 자 돌림을 쓰고 있고(이상득-이상은), 이명박 역시 족보에는 돌림자가 사용된 '이상정(李相定)'으로 기재되어 있다. 호적상 성명과 족보상 성명이 다른 경우는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실제 사례로는 조국[211], 김대건 신부[212], 이만희[213], 한동숙[214], 심대평[215], 정형돈[216] 등이 있다.[146] 대한민국의 작곡가 이민수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47] 독립운동가, 1898~1899년생, 경상북도 상주군 출신.[148] 독립운동가, 1916년생, 평안북도 선천군 출신.[149] 이 사람의 아들.[150] 게임개발자 이승찬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51] 이영은으로 이어지는 인물들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52]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1893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은행원으로 활동하였다.[153]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1886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했다.[154] 국회의원 이재옥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155] 무협소설 작가 이재일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156] 국민의힘에서 활동하는 법조인 출신 정치인 이정만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157] 독립운동가, 1900년생, 경기도 파주군 출신.[158] 독립운동가, 1919년생, 경기도 고양군 출신.[159] 친일반민족행위자, 1885년생, 경상도 울산도호부 출신.[160] 독립운동가, 1914년생, 충청남도 연기군 출신.[161] 대한민국의 정치인 이주상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162]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이진영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163] 친일반민족행위자, 1903년생, 경기도 한성부 출신.[164] 친일반민족행위자, 1909년생, 전라북도 전주부 출신.[165] 독립운동가, 1920년생, 경기도 수원군 출신.[166] 서정주가미카제 미화 및 찬양시 '마쓰이 오장 송가'의 주인공이다.[167] 학병으로 징집되었을 당시 일본 당국에 의해 작성된 육군전시명부에 창씨개명한 성 張安 옆에 가타카나로 하리야스(ハリヤス)라는 독음이 적혀져있다.[168] 대한민국의 초대 여성가족부 장관 장하진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69] 영화감독 전창근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영화감독과 배우로 활동한 인물이다.[170]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인 1889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경찰관료로서 활동한 인물이다.[171] 지토세마루 선장 쓰지 가쓰자부로(辻勝十郞)의 아들로, 김옥균과 유혁로에게도 일본식 이름을 직접 지어줬다.[172] 대한민국의 드라마 감독 정대윤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73] 기업인 정상봉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74] 대한민국 제 7대 기상청장 정순갑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75] 뮤지컬 배우 정영주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76] 대한민국의 제 22대 국방부 장관과 제 42대 내무부 장관을 지낸 주영복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77] 대한민국의 경찰공무원 최경락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78] 국회의원 최병권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79] 후백제의 관료 최승우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180]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최윤경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181] 대한민국의 아이돌 가수 최준홍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182]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183] 1892년생.[184] 1895년생.[185] 대한민국의 펜싱선수 하태규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86] 일제강점기에 활동하였던 기업인이다.[187] 1885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했다.[188] 정치인 홍건표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89] 제 4대 국군방첩사령관 황유성 중장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190] 위의 황종률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목회자로 활동한 인물이다.[191] 다 알다시피 이슬람교에서 돼지는 기피의 대상, 힌두교에서 소는 신성한 존재다.[192] 문제는 여기도 중국계 성씨는 너무 중국인 이름 같아서 화교나 그 후손으로 백프로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193] 가령 유명한 역도 선수 나임 술레이마노프(Наим Сюлейманов)는 나움 샬라마노프(Наум Шаламанов)로 변경되었다. 튀르키예로 탈출하고 나서 이름을 나임 쉴레이마놀루(Naim Süleymanoğlu)로 바꿨다. 해당 인물은 2017년 11월 사망.[194] 혈통상 불가리아계였지만 조상이 오스만 제국 시절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대대로 무슬림으로 살아가게 된 포마크인 또한 독립국가 불가리아의 무슬림 탄압을 피해 튀르키예계와 함께 지금의 튀르키예 땅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다.[195] 공교롭게도 튀르키예인의 가까운 친척뻘 민족인 아제르바이잔인들 또한 독립국가 아제르바이잔에 사는 이들은 자신들을 지배했던 러시아 제국소련의 영향을 받아 튀르키예식(아제르바이잔식) 이름과 슬라브식 성씨를 쓴다.[196] 단순히 스웨덴의 지배를 받은게 아니라 스웨덴 입장에서는 건국 초부터 원주민인 핀인들을 정복하면서 편입된 그냥 '본토의 일부'였다.[197] 그래서 같은 우랄계 민족인 헝가리인들이 주변국 주민들에 비해 평균 신장이 작은 반면, 핀란드인들은 평균 신장이 주변국 주민들과 큰 차이가 없다.[198] 고대 유대인 사회에서는 성씨라는 개념이 없었는데 디아스포라 이후 유럽에 정착하면서 성씨 개념을 받아들이고 아무래도 현지에서 가장 익숙한 게르만/슬라브식 성씨를 만든 것이다.[199] 다만 중화권 출신 이민자의 경우 대개 전자를 택하는 편이다. 한자의 한국식 독음도 중국어의 방언 비슷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200] 이탈리아어 위키백과나 프랑스어 위키백과에서도 후안 카를로스 1세의 항목명은 Juan Carlos이다. 번역명을 썼다면 Giovanni Carlo나 Jean Charles로 기재되었을 것이다. 단, 폴란드어 위키백과에서는 Jan Karol이라는 번역명으로 기재되었다.[201] 영어권에서 에스파냐 국왕의 이름을 지칭할 때는 이사벨 2세까지는 번역명을 사용하고, 후안 카를로스 1세부터는 원어 그대로 표기한다. 그 사이에 재위한 알폰소 12세알폰소 13세도 원어 그대로 부르기는 하지만, 이 경우는 알폰소에 대응하는 영어 이름이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아 번역명을 사용할 수 없었다.[202] 예를 들어 박초롱초롱빛나리[203] 대한민국에서는 법률로 인명용 한자를 지정하는데, 인명용 한자의 음까지 같이 규정한다.[204] 귀화하는 외국인의 경우 순한글 성씨도 가능하다. 단, 성과 명 사이에 띄어쓰기는 불가능하다. 저술가로 유명한 박노자가 귀화할 때 이런 식으로 성명을 지어 그의 가족관계등록부상 정식 이름은 '티코노프블라디미르'다.[205] 아미키리 이치로(網切一郞)가 한국으로 귀화하면서 이름의 한자 표기를 그대로 유지하고, 한국식으로 읽은 '망절일랑'을 이름으로 사용한 케이스이다.[206] 그 경우도 귀화하지 않으면 한국 이름 그대로 쓰는 사람도 많다. 특히 성인이 돼서 넘어간 케이스. 당장에 김무영 같이 일본에 완전히 정착했는데도 한국 이름을 꿋꿋이 유지하는 사례도 있다.(이 사람은 부인이 일본인인데다가 미필이라 한국에 돌아오면 군대에 가야하기 때문에 그걸 회피하기 위해서 일본에 정착했을 수도 있다.)[207] 혹은 장기체류 하지 않더라도 그냥 재미삼아서[208] 물론 이런 경우는 사실 발음 문제가 크다. 구미권에서는 ㅓ나 ㅡ같은 모음의 발음을 어려워하기도 하고(우리에게 친숙한 언어 대부분은 ㅡ발음이 없다), 한국 이름 중 현지어로 이상하게 들리는 글자가 있는 경우(석-suck, 범-bum, 일-ill 등) 등이 있다.[209] 예를 들어 프랑스잔 다르크(Jeanne d'Arc)는 영어로 Joan of Arc로 적는 경우가 많다. 잔 다르크가 현대인이었으면 프랑스어 표기 그대로 적었을 텐데 옛날 사람이거나 현대의 인물이라도 왕족일 경우에는 전통적인 방법대로 이름을 '번역'한다.[210] 물론 쿨하게 씹고 전통적인 방식대로 '번역'하는 경우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