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3-13 02:24:08

문선명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창시자'''
파일:문선명 통일교 총재.jpg
<colbgcolor=#00566A><colcolor=#fff> 출생 1920년 2월 25일[1]
평안북도 정주군 덕달면 덕성동[2]
(現 평안북도 정주시 원봉리)[3]
사망 2012년 9월 3일[4] (향년 92세)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미사리로 267-177
청심국제병원 8층 특별병실
묘소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미사리로 324-275,
천정궁박물관 외부 본향원
서명
파일:문선명 서명.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0566A><colcolor=#fff> 본관 남평 문씨[5] 의안공파[6] 이곡-참의공파 33세[7]
부모 아버지 문경유, 어머니 김경계
형제자매 7남 6녀 중 차남(다섯째)
배우자 최선길 (이혼)
한학자 (재혼)
자녀 10남 7녀[8]
[[제호|{{{#fff 제호}}}]] 천일국진성덕황제억조창생만승군황태평성대만사형통
(天一國眞聖德皇帝億兆蒼生萬勝君皇太平聖代萬事亨通)[9]
신장 177cm[10]
학력 정주공립보통학교# (졸업)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 / 졸업)
와세다대학 부설 고등공학교#[11] (전기과 / 졸업)
}}}}}}}}}

1. 개요2. 생애
2.1. 유소년기2.2. 청년기2.3. 첫 결혼 이후2.4. 종교활동 2.5. 북한에서의 활동2.6. 남하 이후 통일교 설립2.7. 사망
3. 주요 활동4. 가족관계
4.1. 비공식 자녀4.2. 공식 자녀
5. 학위 및 수상6. 여담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창시자이자 선문대학교 설립자. 언론 등 대외적으로는 주로 '총재'라는 호칭을 쓴다. 평안북도 정주군 출생. 개명 전 이름은 문용명(文龍明).

박정희 정부의 코리아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 미국에서 특히 더 유명세를 치렀다. 해외에서는《자칭 메시아이자 창교자인 종교 운동가》(뉴욕타임즈),#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방대한 종교 및 기업제국을 창건하다》(워싱턴포스트),#《1970년대 미국을 휩쓴, 가장 논란이 되는 종교지도자》(LA타임즈), 《수천 쌍 합동결혼식의 주재자》(가디언), 《거대 기업제국의 창시자》(TIME) 등으로 표현되는 기사들이 나온다. 심지어 토마스 해리스의 소설 한니발 극초반에 "이 인간에게 FBI가 건물을 싸게 임대했네 어쩌네"하는 구절이 나온다.

해외에서 문 목사(Rev. Moon)라고 하면 지금도 대부분 문선명을 가리킨다. 한국의 위상이 높지 않던 시절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인 중 한 명이었고,[12] 특히 1970년대 미국에선 워싱턴 모뉴먼트에 30만 명의 미국인들을 결집시키는 등 컬트적인 열풍이 불었다. Moon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하다.[13] 구글 번역이 문재인 관련 기사를 번역할 때도 Mr. Moon을 자주 문선명으로 번역한다는 2017년 기사도 나왔다.

2. 생애

파일:어린문선1.jpg
파일:어린문선2.jpg
와세다대학 부설 고등공학교 유학 시절 문선명. 정가운데에 서 있는 사람이 문선명이다.

2.1. 유소년기

1920년 1월 6일[14] 평안북도 정주군 덕달면(德達面) 덕성동(德星洞)의 '문촌(文村)'으로 불리던 남평 문씨 의안공파 집성촌에서 문경유(文慶裕)와 김경계(金慶繼) 슬하의 7남 6녀 중 다섯째(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본래 대대로 유교집안이었으나, 열 살 무렵, 그의 형인 장남 문용수(文龍壽)와 누나인 3녀 문효순(文孝淳)이 정신질환을 앓아 치유를 위하여 가족들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였고, 정주군 덕언면 덕흥동의 덕흥장로교회를 다니며, 개신교로 개종하였다. 이후에 교회 덕분인지는 모르나 둘의 정신질환은 완치되었다.

어릴 때부터 그의 집안은 상당히 부유하였다. 일제강점기 당시 지방 조선인이 일본 와세다대학 부설의 고등학교에 유학까지 했다는 건, 머리도 머리지만 나름 부유층이었음을 의미한다. 문선명이 자서전에서 밝히길, 어릴 때 굶주린 사람들이 집에 찾아오면 가족들이 항상 밥을 거저 줬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작은할아버지 문윤국이 독립운동가로서 집안의 전 재산을 독립운동자금으로 헌납하며 평생을 독립운동에 매진하자 집안의 가세가 점점 기울어갔다.

열여섯 살의 문선명은 1935년 4월 17일 부활절 새벽, 정주의 묘두산(猫頭山)에 올라 기도하던 중 문선명 앞에 예수의 환영이 나타나, 예수가 문선명에게 "고통받는 인류 때문에 하나님이 너무 슬퍼하고 계시니라. 지상에서 하늘의 역사에 대한 특주부(特主婦)[15]의 사명을 맡아라."라고 말했다고. 문선명은 이 경험으로 자신이 메시아로서 태어난 존재임을 자각했다고 한다. 문선명은 그 경험 이후 계속 고뇌하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고뇌를 담아 16살 때 '영광의 면류관'이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그는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세 곳의 서당을 다녔다.[16] 1934년, 15살 때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사립 오산보통학교[17] 3학년에 편입하였다가, 1935년 정주공립보통학교 4학년으로 전학하여 1938년 졸업하였다. 그런데 1938년 3월 25일,[18] 문선명이 자원하여 그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소견발표를 하게 되었다. 문선명은 경찰서장, 군수, 면장 등이 모인 자리에서 "일본인들은 하루빨리 보따리를 싸서 일본으로 돌아가라."며 일제의 식민정책을 비판하고 교사 개개인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연설을 일본어로 했다. 이 때문에 그 이후부터 문선명은 요시찰인으로 지목되었다고 한다.

2.2. 청년기

1938년 경성상공실무학교[19] 전기과에 입학하여 1941년 졸업하였다. 재학 때에는 서울 동작구 흑석동의 하숙집에서 하숙을 했다. 그런데 그 하숙집의 주인인 이기봉(李奇峰)은 당시 용산구 서빙고동의 서빙고오순절교회[20] 다니고 있었고, 문선명도 그 교회에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됐다. 또한 이기봉의 어머니인 강숙경(康淑卿)은 종로구 내자동의 자택에서 '내자동 새예수교회'를[21]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 인연으로 문선명은 내자동 새예수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이 때 김백문[22]이 교회에 문선명과 같이 다녔다. 그러던 1939년 강숙경은 흑석동 명수대에 교회 건물을 지었고, '조선예수교회 명수대예배당'이라는 간판을 걸었다. 이 교회 신축 과정에 문선명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교회 완공 후 문선명은 주말마다 그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21세 때인 1941년 4월 1일 일본 와세다대학 부설 고등공학교(高等工學校) 전기과에 입학하여 1943년 9월 30일 제 25회로 졸업하였다. 유학을 가기 위해 처음 창씨개명을 하였었다. 창씨개명한 이름은 에모토 류메이(江本龍明). 유학 중 한인 유학생들의 지하 항일 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일본 경찰의 기록에 문선명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八)昭和十七年九月上旬頃東京都淀橋區戶塚町一ノ五二三白鷺莊に於て大原麟瑞は友人たる專修大學生高山允德、早大生江本某、早大生松本鍋禧の三名に對し支那蔣介石軍の下に朝鮮獨立運動者が參加し日本と戰爭し居る旨を强調同志として獲得せんとして朝鮮獨立に關し宣傳煽動を爲したり。[23]

(8) 쇼와 17년(1942년) 9월 초순에 도쿄도 요도바시구(현 신주쿠구) 도쓰카마치 1-523 시로사기소에서 오하라 린즈이[24]는 친구인 센슈대학생 다카야마 인토쿠, 조대(와세다대학)생 에모토 [25], 조대생 마쓰모토 가키 3명에게 지나(중국)의 장제스 군 아래 조선 독립 운동자가 참가하여 일본과 전쟁하고 있다는 뜻을 강조, 동지로 획득하려고 조선 독립에 관하여 선전 선동을 하였다.
《特高 月報》(특고 월보) 쇼와 18년(1943년) 12월 호 125쪽##

위 문서는 문선명의 독립운동에 대한 현존하는 거의 유일한 공식 자료이다. 문선명과 당시 동창이자 친구였던 엄덕문(嚴德紋)은 에모토 모가 문선명이 맞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선명은 와세다대학이 아니라 와세다대학부설고등학교의 학생이었고, 자료엔 성만 있고 이름을 아무개라고 적었으니 참 애매하다. 물론 당시 경찰이 그의 이름도 정확히 몰랐던 수준이니 와세다대학도 잘못 적은 기록일 수도 있긴 하다. 게다가 위 문서에서 경찰에 검거된 사람의 명단에는 주동자 오하라 린즈이의 이름만 있다. 이렇듯 기록이 애매해서 문선명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참고로 문선명의 하숙집은 도쓰카마치 1-503으로 지하 항일 운동을 한 1-523 시로사기소와는 걸어서 1~2분 거리였다.

이에 대해 더 자세한 문선명의 썰로는, 입학 초에 '한인유학생회'(밀칭: 엽전회)라는 비밀 결사단체의 신입생 환영회에 참가하였고, 그 이후부터 지하 항일 운동에 꾸준히 일조했다고 한다. 이 단체는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일왕 암살 계획을 도모하는 지하활동을 벌였다고 한다. 본인은 주로 일본 정권을 비판하는 전단지를 배포하고 다니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 때 문선명은 자주 경시국 도쓰카(戸塚)경찰서[26]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2.3. 첫 결혼 이후

1943년 10월 중순에 문선명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문선명은 최선길과 맞선을 보고 결혼했고, 이전에 하숙하던 서울 흑석동의 이기봉의 하숙집에 신혼집을 차렸다. 당시 문선명은 서울 용산구 한강로에 있었던 '가시마구미(鹿島組)'라는 토목건설회사에서 근무했다. 그러던 1944년 10월, 서울 흑석동에 살고 있던 문선명의 집에 경기도경찰부 특고(特高) 형사들이 들이닥쳐 문선명을 체포했다. 문선명은 '독립운동을 한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경기도경찰부 경성본정(本町)경찰서'로[27] 연행되었다. 당시 문선명의 측근이던 곽노필의 증언에 의하면, 공산주의를 신봉하던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의 한 학생이 징병을 거부하며 조선으로 도망쳐왔다가 경찰에 붙잡혔다고 한다. 그 학생이 취조 중 문선명의 이름을 언급하여 문선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고 한다. 문선명은 4개월간 경성본정경찰서에 '구류'되어 1945년 2월 석방되었다.

해방 후 1945년 10월 하순, 문선명은 고향 정주에 내려갔고, 서울에서 일하고 받은 월급으로 과일을 샀다. 그런데 뜬금없이 위조지폐를 썼다고 고발을 당했다. 그래서 정주경찰서 곽산지서에서 일주일 가량 유치되었다가 풀려났다.

2.4. 종교활동

1945년 10월 4일, 자신이 메시아라는 말을 알아줄 사람들을 찾아, 당시 한국에서 가장 신령하다고 알려진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 위치한 김백문(金百文)의 '이스라엘수도원'[28]에 들어가 6개월간 봉사생활을 한다.

이렇게 들으면 김백문은 문선명보다 대단히 위면서 나이 많아보이나, 당시 문선명은 25세, 김백문은 28세였다. 즉 당시 둘 다 20대 청년이었으며, 김백문과 3살 차이였다. 또한 둘은 해방 전에도 서울 내자동의 '새예수교회'에 같이 다니던 구면이었다.

결국 1946년 3월 초, 김백문이 문선명에게 "솔로몬왕의 영광으로 오신 분"이라며 증거했다카더라. 그러나 김백문의 신도들 중 문선명의 설교를 들으러 빠져나가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자, 김백문이 "내가 바로 성령상대주님이다.'라며 문선명을 내쳤다.

2.5. 북한에서의 활동

문선명은 이스라엘 수도원에 있는 동안 "평양의 어떤 정신 나간 할머니가 자기가 하나님의 부인이라고 한다더라"는 얘기를 들었다. 이 얘기를 듣고 문선명은 평양에 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또한 문선명은 "평양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계시도 받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수도원을 나온 문선명은 당시 소련군정의 평양으로 갔다. 당시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29]으로 불릴 정도로 기독교 뿌리가 깊은 곳이었다.[30]

문선명은 1946년 6월 6일 평양에 도착하여 재림주 타이틀을 걸고 우선 길거리 전도부터 시작했다. 그렇게 신도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그러던 중 기존 기독교 목사들이 "허호빈의 복중교와 유사한 단체의 지도자이며, 이승만의 첩자"라며 문선명을 북한 안전부에 고발했다. 그리하여 8월 11일 문선명은 안전부 내무서원에게 체포되었다. 문선명은 유동보안서에서 고문당하고 평양 대동보안서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11월 21일에 무죄로 풀려났다.

대동보안서에서 풀려난 후, 문선명은 1947년 자신이 '하나님의 부인'이라 주장하는 평양의 박을룡(朴乙龍)에게로[31] 갔다. 문선명은 박을룡의 옆집으로 이사갔고, 40일간 박을룡의 집을 왕래하며 김백문 때처럼 봉사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박을룡이 문선명을 "하나님의 종(從)의 종,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양자, 하나님의 서자, 하나님의 아들, 하늘나라의 총리대신(總理大臣), 예수님, 하나님의 대상실체"라며 총 8번을 문선명을 증거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문선명이 박을룡에게 "그럼 이제부터 나한테 경배하고, 당신이 나를 따르라"고 했다. 그러나 박을룡은 이를 거부하며, 되려 문선명에게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그렇게 문선명은 박을룡으로부터 빠져나와 다시 전도생활로 돌아갔다.

문선명은 이 평양 전도 활동 시절에 이름을 용명(龍明)에서 선명(鮮明)으로 개명하였다.

그러던 중 또 다시 83명의 기존 기독교 목사들이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하며, 부녀자의 재산을 갈취하며, 이승만의 스파이다."라며[32] 1948년 2월 22일, 또다시 평양내무서에 구금되었다. 이후 4월 7일 공판이 열려 '사회질서문란죄'로 5년형을 언도받아 평양형무소로 이감되었다.

5월 20일 흥남 덕리 특별노무자수용소로 이감되어 암모니아 비료를 만드는 일에 동원되다가, 2년 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UN군의 폭격으로 감옥이 무너져 탈출하였다. 흥남 감옥에서도 12명 가량을 전도했다고 한다. 몇몇의 옥중 제자들과 문선명은 전쟁통에도 평양에 다시 가서 신도들과 같이 남하하려 했다. 그러나 20여 명의 신도들은 문선명이 감옥을 갔다온 사이 신앙이 사라져 문선명이 보낸 편지를 그대로 반송하고 문선명을 쌩깠다. 문선명과 만나게 된 나머지 소수의 신도들은 어찌저찌 사정으로 같이 남하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김원필(金元弼)과 박정화(朴正華), 이 2명만이 문선명을 따랐다.[33] 이리하여 3명이 자전거 하나만 갖고 부산까지 같이 남하했다.

2.6. 남하 이후 통일교 설립

부산에 도착한 문선명은 흙으로 매우 아담한 토담집을 지었다. 문선명은 그 토담집 안에서 통일교 최초의 교리서인 '원리원본'을 직접 연필로 갱지에 저술하였다. 1952년 5월 10일까지 약 1년 동안 총 690여 쪽을 저술하였다. 그 후 1954년 5월 1일에 서울로 올라가 정식적으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이 단체가 바로 우리가 아는 통일교이며,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이전 명칭이다.

1955년 7월 4일, 장충동의 통일교회에 갑자기 형사 2명이 나타나 그곳에 있던 문선명을 체포해갔다. 문선명은 '병역법 위반과 불법 감금 및 간통'의 혐의로 서울중부경찰서에 구금됐다. 며칠 후 김원필, 유효원 등 문선명의 제자들도 잇따라 경찰에 체포되었다. 7월 13일 서울지검에서 문선명과 제자들은 전원 기소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9월 20일 서울지방법원에서 문선명과 제자들의 재판이 열렸다.

재판에서 '불법감금 및 간통'은 사실근거가 없어, 21일 결심공판에서 '병역법 위반 및 징발특별조치령 위반' 혐의만 인정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경찰은 문선명이 한국의 여성 신도들과 간통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그들을 심문 및 조사했으나, 여성 신도들이 극구 부인하는 마당에 증거도 잡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 간통을 했다. 문선명이 최선길과 이혼한 것이 1957년인데, 이혼 전인 1954년에 김명희라는 여성과 성관계를 하여 임신까지 시켰으니 간통이 맞다. 그러나 김명희는 경찰 조사 당시 미수교국이었던 일본에 가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경찰이 이를 조사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던 10월 4일 언도공판이 열려 문선명과 제자들은 병역 관련 죄목에서도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11월 21일 판결공판에서도 검찰공소는 기각되었다.

1981년 10월 15일, 미국 뉴욕 검찰청과 미국 국세청[34]은 통일교의 헌금에 붙어야 할 소득세 162,000달러를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탈세 혐의로 당시 미국에 있던 문선명을 기소했다.# 문선명은 법원에 수차례 자진출두하여 '모든 미국의 종교인들이 소득세를 안 내는데 자신에게만 소득세를 부과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기소가 부당함을 주장했다. 그러나 1982년 5월 18일 문선명은 뉴욕 연방지방법원에서 징역 18개월과 벌금 2만5천 달러를 선고받았다. 이에 문선명은 미국 대법원 3심까지 갔으나, 모두 패소하여 그대로 형을 받게 되었다. 1984년 6월 26일 문선명은 미국 국회 상원 헌법소원위원회의 청문회에서 당당히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4년 7월 20일, 미국 코네티컷 주 댄버리의 댄버리 연방교도소에 수감되었다. 투옥 중 기독교 우파단체 Moral Marjority의 수장 Jerry Lamon Falwell 목사, 연합감리교회[35] 목사이자 미 남부기독교리더십컨퍼런스[36]의 회장인 Joseph Echols Lowery 목사, 미국침례회,[37] 미 전국교회협의회,[38] 미 전국흑인가톨릭성직자회[39] 등 미국의 40여 개 교단의 기독교 목사들이 문선명의 무죄와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제 210회 미국 독립기념일이던 1985년 7월 4일, 댄버리에서 출소하여 뉴욕 변두리의 '브루클린 하프웨이하우스'로 이감되었다. 이후 모범수로 선정되어 5개월 감형을 받아 1985년 8월 20일 석방되었다.

파일:문뉴만평.jpg
"I don't care if he's turned 'em all into moonies! Just get him out of here before he calls a mass wedding!"
해석: "그가 (이 감옥의) 모두를 통일교인으로 만들었다해도 상관없어! 그가 합동결혼식 얘기를 꺼내기 전에 어서 그를 내보내줘!"
뉴욕 포스트의 1985년 7월 5일 만평. 댄버리 교도소의 문선명을 그렸다.

파일:문선명헬기.jpg
2008년 7월 19일, 문선명과 그의 가족들 16명이 탄 헬기가 경기도 가평군의 장락산 부근에서 추락했지만 아무런 인명피해도 없었다.

2.7. 사망

2012년 8월 15일, 문선명이 폐렴과 그에 따른 합병증으로 상태가 위독하여 중환자실에 입원하였다.# 이후 8월 31일 현대의학으로는 낫기 어렵다는 진단이 나와# 결국 9월 3일 오전 1시 54분 사망하였으며 통일교 총본산격의 궁전인 천정궁의 '본향원'이라는 산소에 시신이 안치되었다. 향년 만 92세.

3. 주요 활동

파일:문선명만수대2.jpg파일:문선명만수대4.jpg파일:문선명만수대3.jpg
녹화본

마지막 사진은 윤기복 조평통 부위원장의 대답이다. 만수대의사당에서 북한 최고위 간부들 모아놓고 하나님 믿으라고 하는거 보면, 배짱만큼은 정말 두둑한 것 같다.
파일:/image/022/2012/09/03/20120903020037_0_1_20120903044802.jpg
김일성과의 만남
1990년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을 만난 바 있었고, 1991년 11월 30일 문선명이 정부의 허가 없이 북한을 방문해 여동생을 상봉한 뒤 흥남 마전 주석공관에서 김일성과 금강산 개발투자 등을 협의하려고 회담을 열었다고 한다. 이때 문선명이 북한의 국회격인 만수대의사당에서 노동당 간부를 비롯한 여러 북한 요인들을 앞에 두고서 "남쪽에 심어놓은 고정 간첩 2만 명을 전부 자수하도록 지령하라. 그러면 내가 하나님 주의로 그들의 사상을 바로잡아 민족을 위해 헌신하도록 만들겠다.", "한국전쟁은 북침이 아닌 남침이다. 전 세계 앞에 남침을 사과하라.", "주체사상을 포기하고 하나님주의를 해야 한다.", IAEA 핵협정에 조인하라.", "이산 가족 상봉시켜라." 라는 발언을 그것도 탁자를 내리치며 거의 호통조로 연설했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문선명을 친절히 안내해주던 김달현 부총리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고 다른 북한 간부들이 야유를 보내는 등 분위기가 상당히 안 좋았다고.

이에 대해 같이 갔던 박보희 세계일보 사장이 김일성과 만나는 건 물건너갔다고 체념하자 문선명은 도리어 "내가 이런 말 했다고 김일성이 안 만나겠다면 쩨쩨한 거지. 그래서 안 만나겠다면 만날 필요 없어."라고 대꾸했는데, 김일성은 김달현 부총리로부터 이 발언을 보고받자마자 껄껄 웃으며 "저런 배포를 가진 사람이라면 만나야지." 라면서 문선명과 단독 회동을 했고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친해졌다. 특히 이때 오찬도 겸했는데 김일성이 내놓은 건 언감자국수. 두 사람 다 고향이 평안도였는데[40] 언감자국수가 평안도 음식이라 서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잘 먹었다고.

그러나.. 이러한 김일성과 북한의 관용적인 태도는 문선명이 1991년 당시 약 5조 원 가량의 현금을 북한에 건네준 것 때문으로 미국 국방부 정보국 보고서에 의해 밝혀졌다. 출처 즉 문선명은 북한에 돈을 주면서 이런 저러한 사업을 제안한 것. 5조 가량의 현금이면 당시 북한의 1년 GDP의 30프로 가까운 엄청난 돈이다. 그런 돈을 준다는데 약간의 기행은 웃어 넘길 수 있었던 것. 이 금액은 김대중 정부시절 사법처리된 대북송금 금액의 5억불보다도 약 10배나 많은 것이다.

아무튼간에 1994년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국가보안법을 무시하고 남측에서 유일하게 조문을 보낸 단체 역시 통일교였다. 당시 세계일보 회장 박보희를 베이징을 거쳐 북한으로 보내려했는데 주중 북한 대사관이 조문을 안 받는다며 난색을 표하고 이를 문선명에게 보고하자 문선명은 "뭐라고? 조문을 안 받아? 내가 보내는 사람은 달라. 끝끝내 조문을 안 받는다고 하면 압록강헤엄쳐서라도 들어가 조문해!"라며 호통을 쳤다고 주장한다.

결국 주중 북한 대사가 김정일에게 이를 보고했고 김정일은 통일교 관계자들을 잘 모셔오라고 얘기해서 조문이 성사되었는데, 이 때문에 박보희는 나중에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 위기에 놓이면서 5년간 해외에서 유랑생활을 하다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겨우 입국할 수 있었다고. 아무튼 이래저래 북한과의 사이는 꽤 좋은 편이다. 젊었을 땐 철저히 반공, 승공을 주장했고 일본에서도 반공활동을 하면서 교세를 폈지만 말년에는 또 북한과 친하게 지낸 기묘한 이력인 것이다.

한편 시사IN에서는 1994년 북핵위기 때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해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 낸 것이나, 2000년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던 것이나 노무현 대통령2007 남북정상회담을 열었을 때도 통일교가 훨씬 전부터 갖고있던 대북 핫라인의 도움을 받았다는 기사를 내었다.링크

2011년 김정일 사망 당시 북한에 조화를 보냈고, 2015년 8월 30일 김정은이 문선명의 3주기를 앞두고 유족들에게 애도의 메시지를 보냈다. 참고로 김정은은 문선명의 사망 당시에도 조전을 보낸 바 있다. 2019년 지금까지도 북한 고위 관료나 통일교 고위 관료가 죽으면 서로서로 죽은 당일 바로 조문을 주고 받는다. 참고로 조문에서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아시아태평양평화통일위원회'라고 칭하며, 통일교는 '세계평화합'이라고 칭한다.
파일:/image/022/2012/09/03/20120903020033_0_0_20120903044701.jpg
2002년 6월 4일 펠레와 찍은 사진. 웃기게도 1994년 김일성이 곧 죽을 거라고 예언했다며 월간조선이 대문짝만하게 보도한 무속인 심XX이 1995년 문선명이 오래 안 가 곧 죽을 것이라고 책에서 주장했는데 17년이나 걸렸다. 2003년 이라크 전쟁 후 '종교 화합'을 목적으로 '이스라엘 평화대행진'을 열었다.
파일:/image/022/2012/09/03/20120903020080_0.jpg
2005년 2월 14일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천주청평수련원(현 HJ천주천보수련원)에서 열린 '평화의 왕' 추대식. 이날 참아버님과 참어머님으로 진정한 만왕의 왕으로 즉위했다.
파일:/image/022/2012/09/03/20120903020084_0.jpg
2005년 7월 15일 '2005 피스컵코리아' 개막전에서 박근혜와. 이 사진이 후일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터진 이후 세계일보최순실 단독 인터뷰건과 엮여 통일교의 유착 의혹이 제기되었다.
파일:문선인삼.jpg
문선명의 90살 생일 때는 김정일이 생일선물로 90년근 산삼 등 선물을 보내주었다. 관련기사.
파일:문선김대.jpg
김대중 대통령이 통일교 행사에 축하 영상을 보냈다.[41]
파일:문선전두.jpg
전두환 전 대통령이 문선명 장례식장에 축하화환을 보냈다. 사진 오른쪽. 통일교에서 죽음은 천국에 가는 축하해야 될 일이기 때문에 통일교인이 죽으면 장례식장에 반드시 축하화환을 걸어야 한다. '제12대 대통령 전두환'이라고 써 있다. 2012년 당시 국회의장이던 강창희도 껴있는 걸 볼 수있다.
파일:문선이명.jpg
문선명 사망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장례식장에 축하화환이 아닌 근조화환을 보냈다. 옆의 알록달록한 축하화환과 대비된다.

4. 가족관계

슬하에 10남 7녀를 두었다. 이정도면 거의 전근대 군주나 가질법한 자녀수다. 그리고 가족관계를 보면 알겠지만 문선명 본인 뿐만 아니라 문선명의 부친인 문경유도 자녀를 엄청나게 많이 낳아서 슬하 7남 6녀를 두었다. 형제자매들도 자녀를 꽤 많이들 낳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에서도 문선명이 문경유의 자녀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자녀를 낳았다.

문선명의 자녀들도 자식을 많이 낳았다. 5명 이상 자녀를 낳은 자식이 5명이다.

그래서 자녀수는 17명, 손자녀는 모두 45명이다.[42]

전처 최선길과의 사이에서 아들이 1명 있고, 사생아 아들 2명이 있고 본처인 한학자와의 사이에서는 슬하 7남 7녀를 낳았다. 사실 전근대의 군주들도 본처와의 사이에서 그렇게 많이 낳는 경우는 드물다. 기껏해야 조지 3세(9남 6녀, 15명)나 마리아 테레지아(5남 11녀, 16명),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7남 7녀, 14명) 정도가 문선명과 비슷하거나 더 많이 낳았다. 한국사의 군주들 중에서도 문선명처럼 본처인 왕후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10명 이상 낳은 군주는 드물다는걸 생각하면 대단하다 못해 놀라울 지경이다. 참고로 역대 조선 군주 27명 중 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수가 10명 이상인 군주는 단 3명뿐이다.[43]

그러나 정작 문선명은 자식 농사만큼은 기가 막히게 못 지었다. 후계자 감이 없던 건 아니고 후계자로 세웠던 자식들이 모두 중도이탈했다.(...) 그리고 문선명 사후 몇갈래로 찢어졌다.

문선명은 40세인 1960년에 23세나 연하인 17세[44]였던 한학자와 결혼했다. 이는 완전히 키잡[45] 수준에 이 결혼은 재혼이었다. 전처 최선길과의 사이에는 아들 문성진 1명이 있다. 허나 문선명의 선교활동 몰입과 북한에 있을 때 탄압으로 인한 문선명의 로동수용소 수감이 원인이 되는 장기간의 별거 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1953년에 전처의 가족들에게서 강제로 이혼을 당했다. 이는 사실 전처의 (기독교 목사인) 오빠의 강한 압력 때문. 근데 나중에 전처 및 전처 소생의 아들도 통일교 신자가 된다. 더구나 결혼 이후 한학자를 몇 년 동안 가혹한 환경에서 고생시키는 것을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파일:문선명대가족사진.jpg
문선명의 가족사진.

문선명과 한학자 사이에는 슬하에 총 7남 7녀가 있었다. 문선명의 아들 중 장남인 문효진은 마약 논란 등 사생활에서 많은 문제를 보이면서 첫 부인 홍난숙과 이혼했는데, 홍난숙이 미국에서 문선명 가족과 통일교의 내부 문제를 고발하는 수기를 출간해 통일교가 큰 타격을 입으면서 자연스레 후계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이후 문효진은 2008년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전처 홍난숙이 미국 방송과 인터뷰한 영상을 보면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 뺨치는 충공깽이다. 해당 인터뷰 방송은 미국의 탐사 보도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CBS의 '60 Minutes'이다. 우리나라의 추적 60분이 이 방송을 벤치마킹해서 제작되었다.[46]

여담으로 문효진은 음악, 특히 헤비메탈에 재능이 있어 평생 만 곡 이상을 작곡했다는 말이 있고, 몇몇 곡은 (통일교 교리로 가득한 종교적 가사를 감안하고 듣는다면) 한국 헤비메탈 음악 사상 최고의 곡들이라고 칭송받기도 한다. 음악적 재능 하나만큼은 진짜배기였던 셈이다.실제로 상당히 좋다. 들어보자.

차남 문흥진은 20세가 되기도 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는데,[47] 자식 중 가장 정신상태가 올곧았던지라 문선명은 이 아들을 지극히 사랑하고 아껴했었다.

이후 이미 세계재단 리더로 사업경영 수완이 좋고 처가가 통일교 재단 내에서 위치가 높았던 3남인 문현진이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문현진은 문선명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하며, 통일교라는 종교 자체를 부정하여 사실상 파문당했다. 이제 사이즈 불릴 만큼 불렸으니 종교적 아이덴티티로 헛짓거리 하지 말고 재벌로 정체성을 굳히고 나가자고 하다가 불경죄를 쳐맞은 셈이다.[48] 문현진은 파문당한 뒤 통일교 재산(파크원 등)을 최대한 많이 싸들고 통일교를 박차고 나갔다. 당연히 우주황제 맥콜킹 참아버지 문선명은 대노했고 한다. 이 일은 "가족의 가치"를 교리상에서 강조하는 통일교에 꽤나 상징적인 타격을 입혔다. 그 뒤로 기존 통일교와 문현진 측이 재판으로 치고 받고 싸웠는데 문현진 측이 대부분 승소했다.

결국 통일교는 7남인 문형진을 종교 담당 후계자로, 4남 문국진을 기업 담당 후계자로 각각 삼았다.# 그리고 문국진은 문현진의 UCI재단과 여의도의 2조짜리 땅뙈기를 놓고 법정공방을 벌이다 패소하여 자리에서 짤렸다.#

파일:external/www.newscj.com/146990_110373_268.jpg
사진은 문선명의 7남이자 2008년 취임한 당시 통일교 세계회장 문형진(1979. 09. 26~ ). 하버드 대학교 비교종교학 석사 출신이라고 한다. 세계회장이었지만 실권은 어머니 한학자가 쥐고 있었으며 문형진 본인은 얼굴마담이라고 볼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문형진이 불교를 좋아해서 기독교 계열의 신학대학을 다닐 시절에는 자기가 다니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게 기독교 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삭발하고 승복을 입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장로교 신학대학을 다니면서 스님처럼 하고 다녔다는 얘기다. 위의 만왕의왕 즉위식 사진에서 삭발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다. 헌데 2015년 한학자에 의해 세계회장 직책에서 쫒겨났다. 문형진이 한학자의 기존 통일교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파문하겠다고 선포했는데 당연하게도 기존 통일교의 교세가 훨씬 막강했던지라 되려 문형진이 통일교 세계회장에서 짤리게 된 것이다. 후임으로는 문형진의 누나이자 문선명의 5녀인 문선진이 취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문선명의 아들들은 모두 죽거나 퇴출당했기에 통일교 입장에서는 문선명의 차남 문흥진의 죽음이 뼈아팠다. 문흥진이 살아있었다면 문흥진을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형성했을 것이기 때문.

그리고 그 문형진은 통일교 세계회장에서 보직해임 당하자 자신과 인연이 있는 통일교 원로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생츄어리 교회를 차렸는데 이 종교도 골때리는데 교리부터가 "마귀 사탄과 대적하기 위해서는 총기로 중무장해야 한다" 이다. 그래서 신도들은 전원 총기를 소지하고 있으며 문제는 실제로도 군사훈련을 한다는 점이다. 아예 자기 신도들로 사설부대를 만들어 놓았다.# 이에 대해 문형진의 어머니인 한학자는 "저 후레자식이 아버지가 남긴 명예를 먹칠하고 있다"면서 아들인 문형진을 맹비난하고 있다. 그러자 이에 발끈한 문형진은 이미 사망한 아버지와 자신과 적대관계인 어머니를 이혼시키고 뜬금없이 '강현실'이라는 다른 여성과 강제 영혼결혼을 시키는가 하면 문선명 동상을 만들어서 퍼레이드를 시키는 기행을 보이며 이미지가 더 나빠졌다.

파일:external/e7986ab936e671e11e5acc455a0a1a24d9bf1e2a931695f92b2b734edf8c1b29.jpg
2015년도 남동생 문형진이 쫓겨난 후 2019년까지 세계회장을 맡은 5녀 문선진.

4.1. 비공식 자녀

파일:성진희진경진님.png
왼쪽 위부터
최선길, 김명희, 최순화
문성진, 문희진[49], 박사무엘(문경진)
이름 생몰년 생모 배우자 슬하 자녀
문성진 1946년 ~ 최선길(1925년 ~ 2008년) 김동숙 1남 2녀
문희진 1955년 ~ 1969 김명희(1930년 ~ 2020년) 이혜신(사후 영혼결혼) 요절해서 자녀 없음
박사무엘 1966년 ~ 최순화(1936년 ~) 불명 불명

최선길(崔先吉)(1925년 음력 3월 21일 ~ 2008년 양력 11월 16일)(1944년 결혼, 1957년 이혼)과의 사이에서 낳은 1남.

- 최선길은 해주 최씨로, 평안북도 정주군 관주면(觀舟面) 관삽동(觀揷洞)의 3대째 개신교를 독실하게 믿는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오빠도 개신교 목사였다. 문선명 자서전에 따르면 문선명은 1942년 초, 기도 중 결혼할 때가 되었음을 계시받고, 중매를 잘 서는 이모에게 중매를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일본 유학을 마치고 1943년 10월에 귀국하여 12월에 맞선을 보고 약혼을 했다. 그리고 1944년 5월 4일 결혼을 했다. 결혼 당시 문선명은 24세, 최선길은 19세였다. 신혼집은 문선명이 전에 하숙을 하던 서울 흑석동의 이기봉의 하숙집이었다.

이후 문선명은 아내와 생후 2개월 된 아들을 두고 1946년 6월 월북을 한다. 이후 6.25전쟁이 터지고 피란 내려온 문선명은 최선길과 아들을 부산에서 재회한다. 최선길은 문선명에게 "그놈의 교회 관두고 지금부터라도 같이 단란하게 살자. 교회야, 가정이야?"같은 주장을 했다. 그러나 문선명한테는 교회가 우선이었고, 부산에서도 매일같이 전도생활을 했다. 최선길은 이에 우리 이혼하자고 했고, 문선명은 이를 거부했다. 그래서 최선길은 문선명의 교회에 찾아가서 자주 이혼 도장을 찍어달라고 깽판을 피웠다고 한다. 최선길이 이렇게까지 한 건 기독교인인 오빠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설상가상 문선명이 김명희라는 다른 여자를 임신시키고 일본에 보냈다는 게 알려졌고, 문선명은 할 수 없이 1957년 1월 8일 협의이혼을 했다.

최선길은 이후 통일교와 연을 끊었으나, 이후 최선길, 최선길 오빠를 비롯한 최씨 일가 전체가 통일교로 개종하였다. 참고로 최선길은 1999년 '3억 6,000만쌍 제 1차 합동결혼식'에서 구약시대의 예언자 사무엘과 영혼결혼했다. 문선명 왈 최선길이 문선명을 반대하고 이혼만 안 했다면 최선길이 참어머니가 되었을 거라고 한다.(선집 484-129) 최선길이 문선명을 반대한 건 결혼하고 몇 년 후부터이므로, 1944년의 결혼식은 참어머니가 되는 '성혼식'이 아니었던 것이다. 즉 최선길이 참어머니가 되는 성혼식은 이전부터 1960년으로 예정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김명희(金明熙)(1930년 음력 10월 23일 ~ 2020년 양력 4월 1일)(결혼 안 함)와의 사이에서 낳은 1남.

- 김명희는 평안북도 삭주군에서 1930년 음력 10월 23일에 태어났으며, 언더우드계 장로교 선교사의 양딸이었다. 1947년 남하 후 1952년 연세대학교에 입학, 재학 중 숙모 양윤신(梁允信)의 권유로 1953년 9월 서울에서 문선명을 처음 접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부산 영도에서 개최됐던 통일교 수련회에 참가하고, 1954년 1월 7일 통일교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1954년 연세대학교 3학년이던 김명희와 문선명이 관계를 가져 문선명의 아이를 임신한다. 현 부인 한학자는 고등학교 2학년 나이에 임신했다는 걸 생각하면... 김명희는 이후 연세대를 휴학하고 서울 성동구 북학동[53]의 세대문교회 등지에서 전도생활을 했다.

문선명 왈 김명희는 신약시대 마리아의 입장으로서,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갔듯이, 김명희도 아들 문희진과 일본으로 가서 일본을 개척하고 승리해서 한국으로 돌아와야 문선명과 결혼할 수 있었다고 한다.(선집 037권-055쪽) 문선명은 김명희에게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오면 결혼할 것을 약속했다. 그래서 당시 임신 8개월이던 김명희는 문선명의 명으로 1955년 6월 24일 연세대 동창생이기도 한 오승택(吳昇澤)[54]이라는 보조인과 함께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갔다. 출발 전 김명희는 문선명과 함께 샐비어 꽃이 피어있는 공원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김명희는 밀항에 성공하여 나가사키현 와카마쓰(若松)에 도착했다. 그러고는 도쿄로 향했다. 그녀는 도쿄도 메구로구 오오카야마(大岡山)의 사쿠라소(さくら荘)에서 8월 17일 문희진을[55] 낳았다. 김명희는[56] 아직 수교도 되지 않은 나라의 불법체류자였기 때문에 의사도 부르지 못하고 혼자 거처에서 문희진을 낳았다. 몇 개월 후 김명희는 문선명에게 선교사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래서 문선명은 최봉춘이라는[57] 사람을 일본에 선교사로 밀항시켰다. 이 최봉춘이 바로 통일교 최초의 정식 해외 선교사이다. 그러나 최초로 통일교 선교를 위해 해외로 간 사람은 바로 김명희이다. 그러나 최봉춘이 김명희의 요청으로 파견되었다는 것을 아는 신도는 드물다. 최봉춘은 1958년 7월부터 지속적으로 밀항을 시도했으나 계속 실패하였다. 그러던 중 김명희와 그의 아들은 1958년 7~8월 경 불법체류자라는 사실을 들켜 나가사키의 오무라(大村) 입국자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시모노세키항을 거쳐 부산 다대포항을 통해 1959년 4월 1일 한국에 강제로 돌려보내졌다. 또한 그러던 중 최봉춘은 밀항에 성공하여 1959년 4월 하순 일본에 도착한다. 결국 그렇게 둘은 만나지 못했다. 문선명이 준 사명에 실패한 김명희는 문선명과 결혼할 수 없었다고 한다. 최봉춘은 어찌 됐던 선교를 하러 왔으니 일본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그렇게 1959년 10월 2일 최봉춘은 도쿄 신주쿠에서 일본 통일교를 발족했다. 김명희는 이후로 독신생활을 했으며, 1999년 '3억6천만쌍 제 1차 합동결혼식' 때에 소크라테스영혼결혼식을 하였다. 참고로 문선명의 결혼, 즉 성혼식은 전부터 문선명이 40세가 되는 1960년으로 예정하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명희와 결혼할 수 없게 되자 문선명은 1년 남짓한 시간 안에 신붓감을 새로 찾아야 했다. 그것이 한학자이다.

최순화(崔淳華)[59](Annie Choi)(1936년~)(결혼 안 함)와의 사이에서 낳은 1남.
- 최성모(崔聖模) • 이득삼(李得三) 슬하의 딸. 최성모는 문선명의 전처 '최선길'의 삼촌이자[60] 신동아그룹의 창업주이다. 결국 최순화는 최선길의 사촌동생이 된다. 그녀의 남동생은 신동아그룹대한생명의 前 총수이자 63빌딩을 건설한 최순영(崔淳永). 언니는 최순실(崔淳實).[61] 1955년 당시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 1학년이던 최순화는 통일교인이란 이유로 이화여대에서 퇴학당했다. 이후 다른 대학교로 편입 및 졸업한 것으로 알려졌다.[62] 박사무엘 왈 문선명은 1964년에 서울 청파동 교회에서 최순화와 비공개 결혼식을 했으며, 본래 1967년 즈음 최순화와 성혼식을 하여 최순화를 참어머니로 세울 계획이었다고 한다. 1965년 당시 미국 워싱턴 D.C의 조지타운 대학교 대학원에서 유학 중이던 최순화는 워싱턴 D.C에서 문선명과 성관계를 가져 박사무엘을 임신했다. 최순화는 비록 임신까지 했으나 한학자에 대한 동정심이 들어 "이미 자식을 넷이나 낳은 한학자를 어떻게 버릴 수가 있냐. 한학자의 가능성을 믿어달라."며 스스로 '참어머니' 자리에 오르길 거부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모두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박사무엘이 문선명의 혼외자식이란 것은 사실로 보인다.###

4.2. 공식 자녀

1960년 결혼한 한학자(韓鶴子, 1943년 2월 10일 ~)와의 사이에서 낳은 7남 7녀
- 청주 한씨로, 한승운(韓承運)과 홍순애(洪順愛)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3곳의 초등학교를 옮겨 다녔으며,[63] 선정중학교를 다니고, 서울시 중구 중림동에 있던 '성요셉간호학교'[64]에 재학 중 문선명과 결혼했다.

1959년 4월 1일 신부 후보였던 김명희가 일본에서의 사명 실패로 한국에 돌아오자, 문선명은 새로운 신부 후보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최 모씨와 윤정혜(尹貞惠)를 신부 후보로 세웠다. 같은 해 7월 20일부터 8월 31일까지 경기도 화성군 매송면 야목리의 야목교회에서, 문선명은 윤정혜를 위해 《제2회 전국 전도사수련회》를 열었다. 이후 윤정혜가 유력한 신부 후보자 한 명으로 좁혀졌다.(참부모님 생애와 섭리 2권 1-6-1, p.116)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문선명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겠다는 맹세를 못했다. 이는 즉 윤정혜가 문선명의 신부가 될 수 있는 책임에 실패한 것이다.

그리하여 윤정혜를 대체할 신부 후보자를 찾았으니, 그게 현 부인 한학자이다. 1960년 2월 26일 문선명은 한학자와 만나 9시간 동안 신부의 자질과 소양이 있는지 여러 질문으로 테스트했다. 이후 한학자에게 "그대에게 훌륭한 선생을 한 분 소개해주겠다."라며 최원복(崔元福)에게 신부수업을 받을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한학자는 2월 26일부터 3월 27일까지 신부수업을 받았다. 이후 문선명은 한학자를 신부로 최종 확정했다. 그리고 3월 27일(음력 3월 1일) 가약식(약혼식)과 4월 11일(음력 3월 16일) 성혼식(결혼식)을 치러 드디어 문선명의 아내가 된 것이다.
이름 생몰년 배우자 슬하 자녀
문예진 1961년 ~ 홍진휘(이혼) 3남 1녀
문효진 1962년 ~ 2008년 홍난숙(이혼)
문연아(재혼)
5남 6녀
문혜진 1964년 ~ 1964년 생후 8일째 사망
라영신(사후 영혼결혼)
없음
문인진 1965년 ~ 박진성(이혼)
벤 로렌첸(재혼)
5남 1녀
문흥진 1966년 ~ 1984년 요절해서 미혼
문훈숙(사후 영혼결혼)
없음[65]
문은진 1967년 ~ 박진헌(이혼)[66]
로드니 젠킨스(재혼)
2녀
문현진 1969년 ~ 곽전숙 4남 5녀
문국진 1970년 ~ 유순주(이혼)
박지예(재혼)
5남 3녀
문권진 1975년 ~ 전화연 없음
문선진 1976년 ~ 박인섭 없음
문영진 1978년 ~ 1999년 유화정(이혼)
진지예(사후 영혼결혼)
1녀
문형진 1979년 ~ 이연아 4남 1녀
문연진 1981년 ~ 얀 도브 자녀여부 불명
문정진 1982년 ~[67] 조셉 몰리카 1녀

자녀 중 6명이 이혼, 1명이 간통, 1명이 마약 중독, 1명이 자살(추정), 4명이 어머니 한학자와 완전히 연을 끊었고 누구는 아예 증오하는 수준이다. 또한 3명이 통일교인이 아닌 상대와 연애 결혼했으며, 후계자는 0명으로 없다.

이와 같이 참된 가정을 이루라는 교리를 교주 가정부터가 실천하지 못한 점은 통일교의 주요 비판점이자 많은 신도들이 떠난 이유다. 사실 종교인부터가 교리를 안 지키고 타락하는 문제는 개독교땡중처럼 다른 종교들도 갖고 있는 문제이긴 하다.

장녀 문예진과 한학자는 나이 차이가 17년인데 문예진과 6남인 문영진은 18년 차이, 그리고 막내인 문정진과는 22년 차이가 난다.[88]

문선명 부부가 나중에 낳은 자녀일수록 미국에서 쭉 생활한 경우가 많다보니 한국말을 잘 못하는 경우가 많고, 문선명은 영어를 잘 못해 아버지와 자식간에 의사소통 자체가 안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6녀 문연진(영어 이름 Kat Moon)은 2006년 미국 서바이벌 프로그램 Survival of the Richest에 출연하여 스스로 문 총재의 딸이라며 재산이 수십 억 달러라고 밝혔다.[89] 다소 냉소적인 표정의 그는 첫 회에서 탈락했다. 이 프로그램은 너무 돈이 많아 한 번도 일해 본 적이 없는 일곱 명의 재벌 2세들과 가난한 청년 노동자들 일곱 명이 한 지붕 아래서 합숙하며 한 팀을 이뤄 힘든 일에 도전하는 내용이다. 우승 상금은 20만 달러이다. 그런데도 나오는 건 이유가 있다. 재벌 2세는 자기 명성을 높이러, 청년 노동자들은 상금을 받으러 나오는 것이다. 명성이란 돈 주고 사올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1981년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뉴욕대에서 신문방송학과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려는 포부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리드 온'이라는 영화에서 다이앤 역으로 출연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IMDB에서도 그런 영화는 찾을 수 없었다. 조선일보 기사, 가정연합 홈페이지

5. 학위 및 수상

파일:문선명브라질상.jpg

6. 여담

7. 관련 문서



[1] 음력 1월 6일[2] 흔히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행정구역이 바뀐 1949년 ~ 1952년 시기의 주소이다. 태어난 기준으로는 덕달면 덕성동이다.[3] 1914년 부군면 통폐합으로 평안북도 정주군 덕달면(德達面) 이리(二里)가 덕달면 덕성동(德星洞)으로 개편 → 1939년 달면, 이면(伊彦面), 아이포면(阿耳浦面)이 덕언면(德彦面)으로 합병 → 1945년 광복 직후 신설된 덕흥리(德興里)에 덕성동 지역이 포함 → 1949년 덕흥리가 덕산리(德山里)와 상사리(上思里)로 분리 → 1952년 군면리 대폐합으로 원봉리(圓峰里)가 덕산리, 상사리, 강서리(江西里)를 흡수, 이 폐지되어 정주군 원봉리로 개편 → 1994년 정주시로 승격[4] 음력 7월 17일. 통일교 교리 상 문선명의 기일은 음력으로 챙긴다.[5] 기세조(起世祖) 문익(文翼)으로부터 49세손.[6] 문익점의 3남 의안공(毅安公) 문중실(文中實)로부터 24세손.[7] 증조 대는 정(禎)○, 조부 대는 ○국(國), 아버지 대는 경(慶)○, 문선명 대는 용(龍)○, 문선명 자녀 대는 ○진(進), 손주 대는 신(信)○ 자 돌림이다. 희한한 건 친손주뿐만 아니라 외손주까지도 신(信)자 돌림을 쓴다. 문선명의 원래 이름은 돌림자를 따라 문용명이었으나 이후 개명함.[8] 그중에서 한학자 소생의 자녀는 7남 7녀다.[9] 문선명이 2006년 6월 16일에 스스로 정한 제호(帝號)이다.# 문선명 에는 만승군황까지만 적혔다.# (자칭) 천주평화통일왕국 황제로서의 칭호이다. 대외적으로 알리지 않아서 그렇지 교리 상 문선명은 전 우주와 사후세계까지 다스리는 황제다.[10] 문선명의 신장은 밝혀진 바 없으나, 유명인들과 찍은 사진들을 볼 때 키가 175cm인 고르바초프보다 크고, 179cm인 아이젠하워보다 작으므로 177cm정도로 추정된다. 김일성과 같이 서 있는 사진을 보면 문선명이 더 크다. 말년 김일성의 키는 173cm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11] 공업고등학교가 아니라 지금의 전문대학과 비슷한 준학사 과정이다.[12] 유튜브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문선명 관련 내용의 댓글에는 "옛날에 미국에서 한국인이라고 하면 문선명 아냐고 물어봤었다."라는 썰이 꽤 있다.[13] 문선명 때문에 Moonie, Moonies, Moonism 같은 단어들이 옥스포드 등 영영사전에 정식 등재되었다. 이 세 단어는 통일교 내에서 만든 게 아니라, 미국 사람들이 통일교를 조롱하는 멸칭으로 만든 단어가 굳어진 것이다. 여담 항목에 나오지만, 이 때문에 반기은 초기에 문선명 친척이냐는 오해를 받았다. 이 때문은 아니겠지만 실제로 반기문은 통일교 관련단체의 위원장급 직책을 맡은 적도 있고, 자주 연설도 하며 관계를 지속해 나가고 있다.[14] 양력 2월 25일.[15] 문선명은 이후 특주부가 대체 뭔지 골똘히 생각하다가 '특별한 아내의 주인으로서 예수님 앞에 신부의 책임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결하라'는 사명을 자신이 받은 것이라고 깨달았다고 한다.[16] 문형청의 덕흥동 몰음마을 서당 → 김창제와 정신택의 덕성동 장산박촌 서당 → 박기호의 상사리 문촌 서당. 문촌 서당에는 중간에 문형청이 들어와 가르쳤다.[17] 현재 초등학교에 해당된다.[18] 일본은 교육과정 상 3월에 졸업하고 4월에 입학하는지라 3월 25일 졸업도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선 3월 초에 졸업, 4월 초에 입학이 일반적이다.[19] 현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고등학교[20] 하나님의 성회,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그 오순절교회다. 한국에는 럼시, 펄선 등에 의해 오순절 성령운동이 처음 전파되었고, 일제시대에는 위축된 상태였다. 현대 한국의 오순절 교단은 해방 이후에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다.[21] 참고로 새예수교회는 백남주, 이용도, 이호빈 등이 세운 이단이다. 통일교 말로는 동쪽 남성계 신령교단.[22] 이스라엘수도원을 세운 한국 이단의 중시조급 인물이다. 문선명의 통일교, 유재열의 장막성전과 그 후신(?)인 이만희의 신천지 등 국내에서 발생한 기독교 이단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23] 일본의 항복 이전에 출판된 공문서는 대부분 가타카나로 쓰여 있는데, 이 문서는 특이하게 히라가나로 쓰여 있다.[24] 한국명 강인서(姜麟瑞)[25] 아무개라는 뜻. 김모씨 할 때의 모()이다.[26] 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도쓰카마치(東京都 新宿区 戸塚町). 와세다대학 근처에 있다.[27] 현 서울중부경찰서. 당시 경기도 경찰부는 서울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문선명이 잡혀들어간 경찰서가 경성본정경찰서였다는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그 경찰서가 세종로 총독부 청사 앞쪽에 있었다는 증언을 볼 때, 총독부 청사 앞에 있던 경찰서는 주위에 경성본정경찰서밖에 없었다.[28]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섭절리(현 율곡리)가 본부였으며, 상도동은 두번째로 생긴 집회소였다. 참고로 이스라엘수도원은 세번째 집회소를 채 만들지 못하고 망했다. 지금도 극소수의 신도들이 모여 이스라엘수도원을 추종하고 있다. 파주가 본부라지만, 당시 김백문은 상도동에 주로 있었다.[29] 여담으로 대구는 동방의 모스크바였다. 정교회가 흥해서 그런 게 아니라, 공산주의 색이 가장 짙어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 #[30] 당연히 지금은 북한의 종교 탄압으로 인해 거의 없어졌다.[31] 그녀의 이름은 을룡, 월령, 월례, 운녀, 운내, 태영 등 자료 상 차이가 많다. 통일교 일본어 서적에는 朴乙龍이라는 한자로 표기한다.(原理に関するみ言の証) 통일교에서는 주로 박을룡으로, 기독교에서는 주로 박태영으로 불린다.# 1890년생. 당시 57세. 남편은 청주 한씨로, 슬하에 10남매가 있었으며, 그 중 박을룡이 25세 때 평양에서 낳은 '한인하'가 있다. 그 한인하가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의 아내이다. 즉 박을룡은 박흥식의 장모인 것이다.[32] 이와 달리 통일교를 탈퇴한 초기 신자 박정화(朴正華)는 문선명이 평양에서 유부녀 김종화(金鍾和)와 결혼식을 올리고 동거하다가 남편 정명선(鄭明先)에게 신고당하여 내무서에 잡혀간 거라고 주장했다.# 근데 이후에 박정화가 허구였다고 밝힌 건 함정.#[33] 다른 북한 신도들도 같이 남하했다는 서술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지승도, 옥세현 등 북한 신도들은 남하 이후 문선명과 부산 등에서 재회한 것이다.[34]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한푼이라도 내지 못하면 얄짤없다.[35] United Methodist Church. UMC.[36] 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 SCLC.[37] American Baptist Churches USA. ABCUSA.[38]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NCC.[39] National Black Catholic Clergy Caucus.[40] 김일성은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문선명은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출신이다.[41] 아마도 햇볕정책 추진을 위한 대북접촉 과정에서 통일교의 도움을 받은 것이 인연이 된 걸로 보인다.[42] 사생아 아들이 낳은 손자녀들까지 포함하면 48명. 6녀 문연진과 사생아 박사무엘의 자녀 여부가 밝혀지지 않았기에 이들이 자녀가 있다면 손자녀가 더 늘어난다.[43] 태종 이방원, 세종대왕, 효종.[44] 국내법상 혼인은 만 18세 이상만 가능하다. 하지만 꽤 최근까지(2006년) 여자는 16세부터 결혼이 가능했다. 남녀차별이라 하여 개정된 것.[45] 실제 자서전을 보면 완벽한 키잡이다.[46] 위 영상 도입부에 나오는 문효진의 욕설영상이 사용된 소리매드존재한다.[47] 뒤에 타고있던 절친 2명을 살리고 자신을 희생했다.[48] 통일교가 위세를 불릴 수 있었던 원동력이 종교적 아이덴티티였던 만큼 이를 부정하자는 것은 어떤 결과를 불러올 지 알 수 없는 매우 위험한 주장이기 때문에 그가 축출당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49] 아버지 문선명(좌), 문희진(우)[50] 36가정 김원필(金元弼)-정달옥(鄭達玉) 가정의 딸.[51] 1,800가정 구니토키 아키히코(国時昭彦) 가정의 딸[52] 오오츠카 가츠미(大塚克己) 가정의 아들.[53] 현 중구 신당동[54] 일본에 가기 전 성화청년회(통일교 청년조직) 사업부장을 맡고 있었던 통일교 신자이다. 안창성(安昌成)(36가정) 당시 성화청년회 회장의 처남이기도 하다. 1970년에 박상래(朴商來)의 권유로 통일교를 떠나, 김백문의 '이스라엘수도원'의 서울 성북구 정릉3동의 '청수교회'(淸水敎會)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승택은 1975년 청수교회를 떠났다. 박상래 또한 1982년 8월 17일 탈퇴했다. 박상래도 본래 1954년 통일교에 입교했었다가 1957년 이스라엘수도원으로 개종했던 것이다.[55] 일본이름은 나카무라 다케노부(中村竹信)[56] 일본이름은 나카무라 요시에(中村好江)[57] 일본 이름은 니시카와 마사루(西川勝)[58] 72가정 이제희(李濟熙)-김인애(金仁愛) 가정의 딸.[59] 崔淳花, 崔順華 등으로 표기한 블로그 글도 있으나, 집안 돌림자가 淳 자이기에 崔淳華가 옳은 것으로 보인다.[60] 참부모님 생애와 섭리 1 p.410[61] 최순실게이트의 최순실이 아닌 동명이인.[62] 이화여대에서 퇴학당한 여학생들의 사진을 보면 최순화가 있다. 일본어로 된 통일교 서적에는 崔淳嬅라고 적혀있다.#[63] 서울 용산구 효창동 효창초등학교 → 제주 서귀포시 효돈동 효돈초등학교 → 강원도 춘천시 약사동 봉의(鳳儀)초등학교[64]가톨릭대학교 간호대학의 전신.[65] 문흥진 사망 후 문훈숙이 2명의 자녀를 입양함.[66] 문은진은 아래의 홍난숙과 비슷하게 남편으로부터의 가정폭력을 견디다 못해 이혼했으며, 이로 인해 부모인 문선명과 한학자로부터 의절당했다.[67] 당장 친남매 중 맏이인 큰언니 문예진과도 21살이나 차이가 나고, 이복 남매들까지 더하면 이복남매들 중 맏이 문성진과 36살이나 차이가 난다. 문성진의 자식들(문정진의 조카들)보다도 나이가 어리다.[68] 36가정 홍성표(洪性杓)-유길자(柳吉子) 가정의 아들[69] 1,800가정인 한국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 모두 독일에서 가정연합 목회 활동을 하고 있다.[70] 36가정 홍성표(洪性杓)-유길자(柳吉子) 가정의 딸.[71] 777가정 최윤기-김순희 가정의 딸. 본래 최연아였으나 성을 바꿈.[72] 교통사고로 사망[73] 3남, 4남, 7남은 원조 가정연합에 반기를 들어 따로 분파를 만들었으며, 그 외 자녀들은 일찍 죽었거나 후계에 관심이 없다. 5녀 문선진이 가정연합 세계회장을 맡은 적이 있으나, 현재 물러난 상태이며 자녀도 없어 후계를 잇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그 외 자녀들도 후계에 관심 없이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장남 문효진이 음악인의 길을 걷고 마약 중독에 가정폭력으로 이혼까지 하며 가정연합에 말썽을 부린 사람이지만, 그래도 죽을 때까지 원조 가정연합에 반기를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문효진의 자녀들이 한학자 사후에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자세한 내용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역사 참고.[74] 이리야마 세이키(入山聖基) 가정의 딸. 이리야마 세이키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일본본부 전도교육부장임.[75] 나씨가 아닌 라씨다. 72가정 라임열(羅林烈)-김정탄 가정의 아들.[76] 36가정 박보희(朴普熙)-윤기숙(尹基淑) 가정의 아들.[77] 36가정 박보희(朴普熙)-윤기숙(尹基淑) 가정의 딸. 박훈숙이었으나 성을 바꿈.[78] 보통 영혼결혼이라 하면 양쪽 다 사망한 상태에서 결혼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문훈숙은 살아있는 상태에서 죽은 문흥진과 결혼했고 현재도 살아있다.[79] 36가정 박종구(朴鐘九)-최금순(崔金順) 가정의 아들.[80] 36가정 곽정환(郭錠煥)-윤정은(尹貞恩) 가정의 딸.[81] 430가정 유정옥(劉正玉)-조명원(趙明元) 가정의 딸.[82] 430가정 박정현(朴正鉉)-양반임 가정의 딸. 2003년 미스코리아 선(善)에 당선되었던 인물이다.[83] 1,800가정 전인승(全寅昇)-김옥기(金玉基) 가정의 딸.[84] 430가정 박중현(朴重眩)-최현숙(崔賢淑)가정의 아들.[85] 서울대 음대 성악과를 졸업했다. 간혹 보이는 유화연(柳和延)이라는 자료는 틀린 정보이다. 1800가정 유종소-이상난 가정의 딸.[86] 1,800가정 진성배(秦聖培)-김성임 가정의 딸. 진성배는 현 효정학술원장 겸 통일사상연구원장.[87] 777가정 이승대-주은정 가정의 딸.[88] 특히 문정진은 문선명의 나이 61세에 얻었다. 사실 남자는 나이와 상관없이 임신이 가능하다고 한다. 비슷한 나이에 얻은 유퉁, 이창하만 봐도 그렇다.[89] 하지만 실제 수십 억 달러의 재력가라면 대한민국에서도 손꼽히는 재력가이기에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2018년 현재 10억 달러(1조 이상)의 자산을 보유하고있는 한국인이 30명이다. 또한 실제 10억 달러 이상의 자산가라면 경제지에서도 이름이 올랐을 것이며 포브스나 블룸버그 같은 출판사에서 뽑는 빌리어네어 순위에 이름이 등재되어 있어야 한다. 물론 자기 아버지인 문선명의 재산을 자기 재산이라고 말했다면 일단 말은 된다. 문선명의 재산은 실제로 수십 억 달러 수준은 된다. 그래서 오 인천 같은 짓거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90] '국립라플라타대학'과는 다른 대학이다. 아르헨티나에는 '동명이인' 대학이 많은데 같은 이름에 그냥 그 이름만 쓰는 대학과 그 이름 끝에 '가톨릭'을 추가하는 대학이 있다. 참고로 아르헨티나에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와 부에노스아이레스 가톨릭대학교는 이름은 비슷해 보여도 학교의 급은 넘사벽인데 그냥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는 노벨상만 4명을 낸 엄청난 명문대인 반면, 부에노스아이레스 가톨릭대학교는 그에 한참이나 못미치는 대학교이다.[91] 실제로 존재했던 대학원인지는 모르겠으나, 통일교 측은 문선명이 이 대학원으로부터 명예 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존재했다 하더라도 전혀 유명하지 않은 대학원이다. 문선명은 이 밖에도 존재 유무가 불분명한 대학에서 받은 학위가 몇몇 있다.[92] 문선명이 설립한 대학교이다. 이 문서에 나열된 학위 목록을 보면 알겠지만 국내에서 문선명에게 학위를 준 대학교는 문선명이 세운 선문대학교 말고는 없다.[93] 실제로 선문대는 통일교재단에서 운영하는 대학교이다. 그리고 문선명이 설립했다.[94] 실제 반기문은 통일교 산하 단체 씽크탱크2020의 회장을 맡고, 통일교 주최 선학평화상 특별상도 받고, 자주 통일교 행사에 참석해 왔다. 문선명도 생전에 반기문에 대하여 문씨 드립을 쳤다.[95] 문재인 대통령은 가톨릭 신자이다. 그리고 문씨라도 Mun으로 쓰면 전혀 문제없다. 다만 문재인 대통령은 Mun으로 쓰지 않는다.[96] 다만 거꾸로 국내에서도 이런 케이스는 있다. '이토'성을 가진 일본인이 이토 히로부미 후손 아니냐고 놀림을 받는다던지.[97] 스마일게이트 창업자. 재산이[98] 대한민국 3대 발레단 중 하나. 나머지 둘은 대한민국국립발레단, 서울발레시어터[99] 대한민국 3대 예고 중 하나. 나머지 둘은 서울예고, 계원예고.[100] 문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괴작을 넘어 할리우드 진출한 한국영화의 수치다. 로런스 올리비에를 구해줬다는 이 항목의 서술 역시 오! 인천!의 맥락을 안다면 실소를 금할 수 없는 내용.[101] 덕분에 구단주로의 문선명을 까는 축구팬은 거의 없다. 아쉬운 게 있다면 최고의 팀을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마케팅 면에서는 소홀해 팬층을 확장하지 못했다는 정도를 들 수 있다.[102] 1995년, 솅겐조약 가입국이라면 모두 문선명을 입국금지하기로 결의함.## 그래서 이후 솅겐조약에 가입하는 나라들은 모두 문선명을 입국금지했었다. 그 중 네덜란드는 2005년에 문선명의 입국을 허용. 2007년 솅겐조약 가입국들이 문선명의 입국금지를 해제한 것은 문선명을 좋게 봐서가 아니라, 통일교가 입국금지 조치에 대해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에 위헌소송을 걸어 승소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제한 것이다. 위에 서술한 네덜란드를 제외하고 위의 14개국이 문선명의 입국을 금지했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