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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31 22:35:26

이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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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길용(독립운동가).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파하(波荷) 또는 월강(月江)
출생 1899년 음력 8월 15일[1]
경상남도 창원부
(현 경상남도 창원시)
사망 1950년 8월 이후 (향년 51세 이상)
북한
학력 사립 인천영화학교[2] (졸업)
배재학당 (졸업)
도시샤대학 예과 (2학년 / 중퇴)
용산 철도종사원교습소 (강습과 / 수료)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3. 평가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언론인.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이길용은 1899년 음력 8월 15일 경상남도 창원부(현 창원시)에서 상업에 종사하던 아버지 이치상(李致相)[3]과 어머니 이복순(李福順)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아버지와 함께 경기도 부평군 동소정면 마분리 신촌(현 인천광역시 부평구 부개동 새말)으로 이주하였으며, 부내면 산곡리(현 부평구 산곡동와 우각리(동구 창영동)에 거주하기도 했다.

사립 인천영화학교(현 영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경성부 배재학당을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을 가 도시샤대학 예과에 입학하여 1년을 수료했으나 집안 사정이 어려워져서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고 1918년 귀국했다.

귀국 후 용산 철도종사원교습소 6개월 강습과정을 수료하였으며, 조선총독부 철도국에 취직하여 1920년 대전역 개찰계에서 근무하던 중 같은 해 4월 3.1 운동 1주년을 기념하는 만세운동에 가담, 기미독립선언서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보내오는 항일 격문 등의 기밀문서를 철도로 수송하고 '3.1 운동 1주년 축하 포고문'을 대전군 춘일정(현 대전광역시 동구 중동)에 거주하는 동지 최성운(崔聖云)에게 20장을 주었고, 대전 시장의 한부(韓富)에게 100장을 주고 대전 시내에 살포하였다.[4] 그러나 이것이 곧 발각되는 바람에 체포되어 그해 12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 처벌령 위반 및 출판법 위반,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1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200일을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1년 6월 출옥 후 동아일보송진우 사장을 만났고 송진우의 권유로 같은 해 9월 21일 동아일보 대전지국에 입사해 체육부 기자·통신원으로 활동했고, 1922년 7월 30일에는 대전지국 총무 겸 기자로 발령받았다. 한편, 그 이전인 1920년에는 인천에 거주하는 배재학당 재학·졸업생이 모여 창립한 인배회(仁培會)에서 활동하였으며, 1922년에는 대전철우회(大田鐵友會)를 창립하고 총무에 취임하였다.

이때 체육계에도 투신하여 1923년부터 전조선여자정구대회를 주관·운영하는 일에 앞장섰고 한때는 심판을 보기도 하는 등 여자정구 육성에 진력하였으며, 그해 6월 23에는 동아일보 대전지국에서 인천지국으로 전근했다. 1924년 4월에는 조선청년총동맹 창립대회에서 집행위원에 취임하였으며, 같은 해 9월에는 인천제물포청년회장으로 있으면서 지방청년강습회를 열었으며 이우구락부(以友俱樂部) 평의원, 인천영화학우회 간사 등 여러 사회활동에 참여했다.#

그 사이 상경하여 경기도 경성부 평동(현 종로구 평동)과 명륜동 등지에 살았다. 1924년 11월 조선체육회 실무위원이 되었으며, 1925년 제1회 전조선축구선수권대회 임원, 전조선중학교 농구선수권대회 위원 등을 지냈다. 1924년 조선일보로 이적했다가 1927년 송진우의 간곡한 부름을 받고 동아일보로 다시 돌아와 체육 발전에 헌신하였으며, 다른 신문사 기자들과 뜻을 모아 1927년 8월 서울 영금정(令今亭)에서 조선운동기자단(朝鮮運動記者團)을 조직하여 운동경기의 전문화에 기여하였다.# 1930년부터는 새 체육용어 보급 활동을 시작하기도 했다.

한편,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그는 1932년 8월 1932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출전한 김은배(金恩培)와 권태하(權泰夏)가 들어오는 순간을 찍은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렸다. 이때는 일제가 의식하지 못해 넘어갔으나 이후 1936년 8월 1936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획득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를 삭제했고 이일로 총독부에 의해 언론탄압을 받았다. 이것이 일장기 말소사건이다.

이 일로 이길용은 두 번째로 투옥되었고 동아일보는 8월 29일부터 무기정간 조치를 당했으며, 신동아는 폐간되었다. 이길용과 함께 총 8명의 기자가 경기도경찰부에 체포되었고 이 중 주모자로 지목된 이길용과 신낙균 등 5명은 40여일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이후 언론기관에 일절 참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강제로 서명한 뒤에 석방되었으며, 동시에 9월 25일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당했다.

이후 이길용은 창씨개명을 거부하다가 재차 세 번째로 투옥되었고, 반일 발언을 했다는 것으로 인해 네 번째의 옥고를 치른 후 1945년 8.15 광복 며칠 전 형기를 마치고 출옥했다.

해방 후 그는 조선체육동지회 결성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일제에 의해 사라진 조선체육회를 재건하는 데에 진력하였는데, 이는 대한체육회의 전신이 되었다. 그리하여 재건된 조선체육회에서 상무이사로 선임되었고, 1949년 10월 대한체육회 공로상을 수여받았으며 그해 체육사 정리에도 앞장서서 체육연감과 대한체육사의 발간에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또 역기연맹과 씨름협회 발기에도 참여하였다. 광복 후 동아일보가 복간되자 사업부장으로 복직하였다.#

한편,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후 서울특별시 고문, 이화여자대학교 이사, 국민당 중앙당 상임위원, 한국민주당 조직부 차장·집행위원 등의 정치·사회활동을 하기도 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지인들이 피난을 권했는데도 '민족에 죄 지은게 없다'며 거부하고,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의 자택에 체류하다가 그해 7월 17일경 자택 인근 길 위에서 납북되면서 그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다.

1991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3. 평가

이길용은 한국 최초의 체육전문 기자라 할만한 인물이었고 단순히 기자로서 뿐만 아니라 체육계 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일제 치하 조선체육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세웠다. 또한 한국 체육의 역사를 정리해 한국 체육의 전통을 전수해준 인물이기도 하다.

이길용의 공을 기리기 위해 한국체육기자연맹은 1989년부터 스포츠 취재기자들을 위한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다.

그의 셋째 아들인 이태영(1941 ~ )도 1961년 경향신문에 입사한 것을 시작으로 1998년 중앙일보에서 은퇴할 때까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체육기자로 활동하였다. 그 또한 1977년 체육훈장 맹호장, 2007년 대한민국 체육상(공로)을 수상할 정도로 한국 체육계에 큰 기여를 했으며, 현재 대한체육회 고문, 대한언론인회 감사 등을 역임하고 있다.


[1] 양력 9월 19일[2]영화초등학교.[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왜정시대인물사료에는 李致으로 등재되어 있다.[4] 당시 충청남도 대전군 외남면 대동리(현 대전광역시 동구 대동)에 거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