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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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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주요섭
제2대

최승만
제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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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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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최일남
제6대

손세일
제7대

임순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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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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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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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심
제1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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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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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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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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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최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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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홍근
제21대

배수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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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신동아
유형 시사 월간지
창간일 1931년 11월 1일
본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 29
편집장 배수강
차장 정혜연
기자 구자홍 김지영 고재석 박세준 이현준
사이트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2. 성향3. 역사4. 논란 및 사건사고5. 여담6. 역대 편집담당자
6.1. 역대 주간6.2. 역대 편집장

[clearfix]

1. 개요

파일:신동아창간호.jpg
신동아 창간호

동아일보사에서 1931년 11월 창간하여 발행하고 있는 시사 월간지로, 국내 종합지 중 가장 긴 역사([age(1931-11-01)]주년)를 가지고 있다.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인해 강제 폐간되었다가 1964년 9월에 복간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2023년 8월 기준으로 통권 767호를 돌파한 장수잡지이다.[1]

제작은 동아일보사 출판국 신동아팀에서 담당하는데, 서울 충정로에 있는 사옥에서 출판된다. 매월 18일 60,000부씩 발행된다고 한다.

2. 성향

모지()가 동아일보에서 해당 달마다 실린 기사의 내용을 연제하여 일부 수정하여 연재할 만큼 기본적으로는 보수주의에 중점을 두고 있지만 약간 더 집중되어 있을 뿐 상당히 다양한 시각의 글들이 실리며, 비판, 폭로성 기사의 경우 여야, 좌우를 가리지 않고 성역없이 다 까는 경향이 있다. 당장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는 컨텐츠 소개 문구부터 다음과 같다.
균형잡힌 정론 지향
신문과 방송 보도의 미진함을 커버하고 깊이있는 해설로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현안을 날카롭게 분석하여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정론을 추구합니다. 또한 기획 발굴 탐사보도를 통해 독자 여러분 들의 불만과 아쉬움을 해결해 드립니다.
월간조선이나 한겨레21처럼 좌우의 대척점에 있는 매체들보다는 상대적으로 중도에 더 가까운 입장을 표방한다고 볼 수 있다. 굳이 따져보자면 중도보수 기반이지만 미묘하게 좌우로 좀 더 치우친 기사가 소수 함께 등장한다고 볼 수 있겠다.

예를 들면 대표적인 진보 논객 중 한 명인 김호기 연세대 교수의 글[2]이 연재된 적이 있으며, 현재는 진중권의 논평이 실리기도 하고, 심지어 김용옥이 칼럼을 연재할 때 동아일보 사주 일가를 까대는 글을 썼을 때도 그대로 올렸다. 그것도 사주가 직접 지시해서 무수정으로 게재했다고 김용옥 자신이 다른 글에서 고백했다.

2020년대 들어서는 모지와 성향이 좀 더 유사해졌다는 평이 있다. 아무래도 개딸로 대표되는 팬덤 정치 문제라던지 이재명 대표를 위시한 방탄 국회 문제 등 더불어민주당을 비판할 건덕지가 많아진 탓인 듯 하다.[3]

3. 역사

조선민족의 전도(前途)의 대경륜(大經綸)을 제시하는 전람회(展覽會)요, 토의장(討議場)이요, 온양소(溫讓所)
쉬운 해석 : 조선민족이 앞으로 나아갈 길의 큰 계획과 포부를 제시하는 전람회며 토의장이자 따뜻함과 겸손의 장소

송진우의 신동아 창간사

1931년 11월 동아일보의 자매지로 창간했다. 당시의 사장은 송진우, 편집 겸 발행인은 양원모, 제작 총괄은 설의식, 주간은 주요섭이었다.

원래는 이름을 "월간동아"로 하려다가 설의식이 "신동아"로 정했다. 설의식의 창간호 편집후기를 보면 당시엔 시사만 다루는게 아니라 종합 잡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 잡지의 편집 대강에 망라주의를 취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학술, 문예 등 각 방면을 통하여 시사 평론으로부터 과학, 운동, 연예, 취미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나 간에 우리의 지식과 견문을 넓히고 실익과 취미를 도울만한 것이면 모두 취하기로 하였습니다."

초기 신동아 제작의 주역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로 잘 알려진 주요섭이었다. 그는 중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석사를 한 사람이었다. 그는 신동아 복간 기념 1964년 8월 22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원고 부족, 총독부 검열 등 어려운 일이 많았다. 실명 외에 용악산인(龍岳山人), 양두식(梁斗植), 멍텅구리 등 가명 필명으로 마구 쓸 밖에 없었는데 한번은 양두식 선생이 어떤 분이냐고 문의가 와서 모두 웃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들이다. 원고를 모아놓고도 고생이었다. 원고 검열이어서 손을 나누어 복사하고 한편으로 조판, 한편으론 검열을 진행시켰다. 신문사에서 하는 거라 보아 준다는 것이 자그만치 한달이나 걸리곤 했다. 그만두라는 이야기와 같았다. 총독부의 눈을 속이려고 투고의 자구를 요리조리 수정하느라 모두 땀을 빼기도 하고. 자유천지 미국에서 돌아온 직후여서 더 했겠지만 부자유스럽기가 감옥 같았다. #

신동아는 신문잡지 시대를 연 주역이었고, 평균적으로 1만부 내외로 팔렸는데 일제강점기 당시 보통 잡지들이 2,3천부 정도 팔렸음을 고려하면 굉장히 많이 팔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아일보와 마찬가지로 신동아도 검열을 많이 당했는데 일제의 검열에 대해 당시 신동아 기자였던 고형곤은 이렇게 회고했다.
신동아의 원고 검열은 우리말에 능한 니시무라라는 일본인이 맡고 있었다. 부부 사이가 좋지 않은 이였다. 그래서 마누라의 바가지가 다음날엔 아무 죄 없는 신동아에 수많은 자국을 남겨도 어쩔 수 없는 억울한 시대였다. 하루저녁에 새 원고를 만들어 메우는 일은 예사였다. #

1936년 동아일보에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한 일장기 말소사건이 터졌는데 이 때 신동아도 남승룡 선수의 일장기를 지우고 실었던 것이 발각되어 총독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었다.당시 통권은 59호였다.'민족의 지성' 신동아 600호의 언론사적 의미

1964년 9월에 통권 60호로 복간되었다.

1968년 12월호에 차관업체들의 실태와 정권이 자신들이 혜택을 준 업체들로부터 자금을 공급받고 있다는 의혹을 파헤친 "차관"이라는 기사를 실었다가 해당 기자들과 신동아 부장 손세일 등이 중앙정보부에 잡혀간 사건이 발생했다. 언론계는 당연히 반발했으나 정권의 계속되는 탄압으로 신동아 부장인 손세일과 주필 천관우는 물론이고 동아일보 사주 가문인 김상만마저 발행인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1987년에는 이른바 신동아 사태가 터졌다.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한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박정희이 사건을 사전에 전혀 몰랐으며 모두 자신이 했다, 김대중을 납치한 배가 일본을 출발한 후 대통령에게 알리니까 대단히 화를 냈다, 처음부터 김대중을 한국에 연행할 계획이었지 죽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라는 인터뷰를 1987년 10월 호에 실을 예정이었는데 전두환 정권이 삭제를 지시하며 국가안전기획부가 인쇄소를 점거하고 물리력으로 인쇄를 막았다. 이에 신동아 간부들과 기자들이 삭제를 거부하고 철야농성을 벌이는 등 대립했고, 판이 커지면서 국회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추궁이 이어지자 결국 정부는 기사 게재는 언론사의 자율에 맡긴다고 밝히며 백기를 들었다. 이 1987년 10월호는 무려 40만 1000부가 팔렸다.# 근데 이 기사를 전두환 정권이 왜 싫어한거지? 전두환 입장에서는 박정희가 납치한 것이어야 했던건가?

2003년 9~10월에 걸쳐서 현대자동차그룹이 당시 정신적 여당이자 진보 정당인 개혁국민정당 지구당위원장들에게는 유럽여행 비용을, 보수단체 국민행동본부에게는 언더머니를 주는 양다리걸치기를 했던 것을 폭로하기도 했다.

2004년 노무현 정권의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신기남, 이미경 등이 친일진상규명특별법 개정안을 통과시킬 것을 주도하며 정치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그들의 타겟은 당연히 야당인 한나라당이었다. 그런데 신기남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이 일부 언론에서 제기한 아버지의 친일 의혹에 대해 가짜뉴스 타령하며 부인하자 신동아가 2004년 9월호에서 신기남의 아버지가 일본군 헌병 오장이었다는 것을 탐사보도를 통해 상세히 특종보도하였고 신기남은 결국 사실을 인정했다. 거기다 이미경, 김희선 등의 아버지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밝혀지면서 열린우리당은 내로남불 소리만 듣게되었다.# 이 보도는 한국기자상을 수상했다.

2007년 6월호와 7월호에 최태민[4]의 비리 내용을 담은 "최태민 보고서"를 보도했는데[5] 검찰이 보도 경위를 파악하기 위해 해당 기자 2명의 이메일을 보려고 동아일보 전산실을 압수수색하려 했으나 동아일보 기자들이 언론자유와 취재원 보호를 이유로 반발하면서 압수수색을 무산시켰다. 이후 자료 임의제출 형식으로 일단락되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실제 운동권 출신 인사들이 직접 운동권의 실체에 대해서 밝히고 문재인 정권이 보이는 각종 이상행보와 위선의 사상적 기반과 원인에 대해 분석하는 글들을 많이 싣고 있다. 그 외에도 586세대에 대해서 파헤치는 기획물들이 인기가 많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모두까기 성향은 여전해서 ‘윤석열 대통령은 큰 그릇’, ‘외교정책 동의 못해도 기다릴 때’ 같은 기사가 실리는 한편, ‘윤석열 정부의 민생 분야 점수는 D학점’, ‘술 마실 때는 통 큰 사람, 정치는 통 크게 못 했다’ 같은 기사도 함께 실렸다. 여당야당도 문제점을 나란히 비판하는 중이다.

4. 논란 및 사건사고

5. 여담

6. 역대 편집담당자

6.1. 역대 주간

6.2. 역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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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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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주요섭
제2대

최승만
제3대

권오철
제4대

이종구
제5대

최일남
제6대

손세일
제7대

임순묵
제8대

이준우
제9대

이정윤
제10대

김종심
제11대

김대곤
제12대

전준우
제13대

황의봉
제14대

유영을
제15대

이형삼
제16대

송문홍
제17대

이인철
제18대

김현미
제19대

최영철
제20대

송홍근
제21대

배수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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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직제개편 이전까진 호칭이 '부장'이었다.

[1] 물론 종이매체가 사양길에 접어든 현재는 소위 메이저 언론사에 꼽히는 동아일보가 자본력을 바탕으로 멱살잡고 끌고가서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현재 잡지 시장은 크게 위축되어 과거 유명했던 잡지들 상당수가 폐간되었다.[2] 주로 2010년대 초중반에 실렸는데 박정희노무현을 비교하면서 노무현을 추켜세우고 박정희를 상대적으로 부정적으로 묘사한 글, 리영희를 고평가하는 글, 이명박 까는 글 등 별의별 글이 다 실렸다.[3] 이것은 같은 민주당 내 비명계에서도 지적되던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이런 글이 실렸다고 우편향된 것도 아닌 게, 2023년 7월호에서는 문재인 정부 청년비서관 박성민더불어민주당 소속 김관영 전북도지사 인터뷰를 했다. 김관영 인터뷰의 경우, 도지사에 당선되자마자 일부 인사에 여당 몫을 만들어 도지사 스스로 ‘여당과의 협치’를 시도한다는 자부심이 있다는 발언을 한 것을 실은 걸 감안해보면 과거의 동아일보스러운 개혁적인 성향도 함께 보이는 듯 하다.[4] 최순실의 아버지인 그 최태민이다.[5] [철저검증]박근혜 X파일 & 히든카드, [단독취재]'전두환 안기부', 박근혜 약혼설과 재산 의혹 수사했다[6] 관련 내용은 작성자인 신동아 차장 조성식 기자의 저서 <대한민국 주먹을 말하다> 편 바다이야기 항목 앞부분에 간결하지만 자세히 나온다.[7] 이후 동아일보 편집국장, 출판국장,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