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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국민정당 | |
<colcolor=#4cbb17> 영문명 | <colbgcolor=#fff,#1f2023>People's Party for Reform |
등록 약칭 | 개혁당 |
창당일 | 2002년 8월 28일 |
해산일 | 2004년 9월 13일 |
주소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17-16 대성빌딩 903[3] |
당 색 | 연두색 (#4CBB17) |
2004.9.13 기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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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과거에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정당. 약칭은 개혁당, 영문 명칭은 People's Party for Reform. 성향은 사회자유주의[4]다.
2020년 창당된 열린민주당과 비슷한 포지션의 정당이었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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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문성근 등 친노 인사들이 2002년 말에 창당했고, 이때 한나라당의 개혁 성향 의원이었던 김원웅[5]이 입당해 대표직을 맡게 되면서 원내정당이 되었다. 2002년 10월 창당발기인대회를 개최하고, 11월 정식 창당되었다.[6]
정치사에 있어 개혁국민정당의 의의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당시 후단협 사태 등으로 후보 흔들기가 극심했던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후보를 당 외부에서 적극 지원한 정당이라는 것이다. 얼핏 친박연대와 비슷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그 양상은 다르다. 친박연대는 공천 학살 등의 이유로 현역 의원들이 한나라당에서 대거 탈당해 만든 정당인 반면 개혁국민정당에는 민주당 탈당파라고 부를 만한 세력이 없었으며, 재야의 노무현 지지자와 한나라당 탈당파들이 모여 이뤄진 정당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당내 의사결정 수단으로 인터넷을 적극 활용하였다는 것이다. 즉 당원의 참여와 소통을 중시하였다. 인터넷 커뮤니티들이 막 활성화되기 시작한 2002년 당시에 이는 혁신적인 발상이었으며 정당으로서는 얼리 어답터스러운 면모를 보였다. 때문에 기성정당에서는 보기 드문 '젊은 정당'이었는데, 왜냐하면 지금과는 달리 당시의 장년층은 인터넷에 익숙지 못했기 때문이다.[7]
하지만 이미 창당 때부터 민주노동당과 진보진영, 노동운동 쪽에선 개혁당은 제도권 바깥의 친노세력들이 노무현이 민주당에서 밀려나는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서 만든 피신처로 사실상 노무현 오직 한사람을 위한 정당이라는 의혹을 제기하였다.[8] 즉 노사모라는 팬클럽 형태로는 선거법상 활동이 많이 제한[9]이 되니까, 노무현 선거운동을 위해서 아예 공식적인 정당을 만든 것이며 인터넷 시대의 정치개혁, 부정부패 청산 등 유시민이 내건 명분은 그저 포장지에 불과하다는 의심이다. 이 때문에 당시 인터넷 정치커뮤니티에선 개혁당을 민주당 2중대, 민주당의 위성정당 정도로 폄하하는 사람들[10]도 많았다. 그리고 유시민이 창당 때 밝힌 "민주당과 경쟁하겠다"는 포부와는 달리 2003년 재보선에서 적극적인 선거연대를 밀고 나가자 당내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일부 있었다. 개혁당의 미래를 나는 의심한다.
노무현이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치러진 2003년 4월 24일 재보궐선거에서 개혁당은 민주당과 적극적인 선거연대에 나섰다. 민주당은 개혁당의 유시민이 출마한 고양시 덕양갑에 후보를 내지 않았고, 관심이 집중되었던 서울 양천 을에선 개혁당이 민주당 후보를 지지한 것이다.[11] 이 결과 유시민이 당선되면서 의석수를 2석으로 늘렸다.
그리고 2003년말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한 친노계가 신당(열린우리당) 창당을 추진하자 당 대표 유시민, 당 원내대표 김원웅을 비롯한 개혁당 당권파는 당을 해산하고 여기에 합류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일부 일반당원들이 격렬하게 반대하였으나, 인터넷 투표에서 해산안이 통과되고 당권파가 장악한 중앙상임위원회는 당해산을 의결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당 역사에서 인터넷 당원투표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법적 정당성, 기술적 공정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많이 나왔다.[12] 또 정당법상 해산 선언은 오직 전당대회에서만 가능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후 당해산반대파는 이용휘[13], 오정례[14] 등을 중심으로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해산이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중앙선관위에 당해산 결정에 대한 유권해석을 의뢰하였다.
이런 가운데 개혁당 소속 국회의원인 유시민, 김원웅과 당지도부는 이미 개혁당은 해산해서 사라진 정당이라면서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또한 아직 해산이 법적으로 정당한지에 대한 최종판단이 나오기도 전에 당권파가 개혁당의 모든 자산과 자료를 가져가버리면서 비대위쪽에서 격렬하게 반발하였다. 이때 유시민을 비롯한 해산파는 인터넷 권한을 내놓지 않고 당원명부를 모조리 가져갔으며, 또 개혁당 DB를 유출, 이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기사 기사2
한편 중앙선관위는 "개혁당 해산은 정당법의 절차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무효"라는 유권해석을 내놓았다. 정당법에 따르면 당해산은 오직 전당대회에서만 가능하며 당대회의 하부기관인 중앙상임위원회 의결로는 법적 정당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자 유시민과 개혁당 해산파들은 어차피 개혁당은 이제 실체가 없는 당이라면서 비대위쪽에 집단 탈당계를 내고, 그 뒤로는 개혁당 비대위를 무시해버렸다.
개혁당 해산선언은 무효라는 선관위의 공식적인 유권해석을 받아냈지만,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 속에서 이 뉴스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대다수의 언론들은 개혁당 해산무효 소식보다는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미래 즉 다가오는 17대 총선만을 크게 다루었던 것이다.
인터넷의 각종 커뮤니티와 게시판에서는 개혁당 해산무효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갑론을박이 오고 갔지만, 탄핵세력에 맞서서 민주개혁세력이 대동단결해야 한다는 논리에 수적으로 파묻혀 버렸다.
개혁당 비대위는 법적 실체는 확인받았지만, 당권파가 모든 물적,인적 자산을 가지고 나가버린 상태에서 코앞에 닥친 17대 총선을 준비할 수가 없었다. 결국 17대 총선에 참여하지 못하고 비대위와 대략 300여명의 잔류 당원들이 투표일을 앞두고 민주노동당 지지를 선언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선거후인 2004년 9월에 선거법상의 정당 존속 조건[15]을 채우지 못해서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이후 대다수의 당직자 및 당원은 민주노동당으로 흡수되었다.
이러한 역사 때문에 개혁당 잔류파였던 이들은 유시민을 정당파괴범이라면서 극도로 혐오하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간에 마무리 과정에서 유시민과 당권파가 절차적 정당성과 소통을 무시하고, "이젠 내 알바 아니다"라는 식의 무책임한 모습을 보인건 사실이기 때문이다.[16]
3. 역대 지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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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 의장 ▶ | }}}}}}}}}}}}}}} |
[1] 김원웅 등.[2] 이용휘, 이은영 등.[3] 사무실이 있던 해당 빌딩은 2018년에 철거됐으며, 이후 DS라르오피스텔이 들어섰다.[4] 주류 세력은 사회자유주의에 가까우나 내부적으로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당원들도 있었다고 하며, 유시민이 당의 강령을 쓰며 독일 사회민주당의 강령을 참조했다고 밝힌 적도 있었다.#[5] 노무현과 함께 한때 민주당의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활동을 했었던 인물.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을 지지하며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한 노무현, 김정길 등과는 달리 3김 청산을 내세워 신한국당과의 합당에 참여했고 이후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대전 대덕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하지만 3김 청산 이외에는 완전히 민주당계 정당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진보적인 모습을 보여서 한나라당 지도부와는 거의 앙숙이 된 지경이었고, 특히 2001년 김용갑 한나라당 의원이 본회의장에서 민주당을 향해 조선로동당 2중대라고 비난하자 이를 시대착오적인 발언이라고 맞받아치면서 설전을 펼치기까지 했다. 결국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과 자민련의 일부 의원들이 한나라당에 입당하는 와중에 거꾸로 한나라당을 탈당해 개혁당에 가는 역주행 행보를 보였다. 당시 조선일보 만평에서는 이회창을 비롯한 한나라당 지도부가 앓던 이가 저절로 빠진 기분을 느끼며 김원웅 의원 탈당식을 성대하게 열어주는 내용이 있었을 정도(...).[6] 창당발기인대회에는 노무현 당시 후보가 직접 참석했다. 이 때 문성근의 발기인 연설을 들으며 노무현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는데, 이 장면은 대선 광고 <노무현의 눈물> 에 삽입되기도 했다.[7] 이러한 인터넷상의 여론은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는게 큰 영향을 미쳤다. 훗날 국민참여당이 창당됐을 때 대다수의 인원이 개혁국민정당에 몸 담았던 인물들이라 온라인 당원게시판이 활성화되기도 했다. 심지어 서로의 이름은 모르고 닉네임으로만 아는 경우도 많아 지역위원회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서로를 닉네임으로 불렀다고 한다.[8] 실제 후단협의 노무현 흔들기가 심각해지자 친노그룹 사이에서는 노무현 1인 혹은 노무현과 친노계 전부가 민주당을 탈당해서 개혁당으로 가는 방법이 검토된 적이 있다. 2002년 여름 노무현이 유시민을 따로 불러 "유 작가가 구명보트를 준비해주세요. 지금 타고 있는 배가 난파선이 됐을 때 옮겨탈 수 있는 구명보트가 하나 정도는 있어야 되지 않겠어요?"라며 신당 창당을 제안했다고 한다.[9] 노사모는 지지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스스로 돈을 내가면서 활동하는 단체지만 굳이 따지자면 선거법상의 사조직에 해당된다. 수십년동안 기성 정치인들이 선거때만 되면 온갖 명목의 사조직을 선거에 동원하면서 선거판을 혼탁하게 해왔기 때문에 선거법에는 사조직의 활동에 대한 제한이 상당히 많이 있다.[10] 특히 민주노동당 관계자들이 이런 모습을 많이 보였다.[11] 하지만 민주당 내에서는 고양 덕양 갑 무공천을 두고 많은 반발이 있었다.[12] 인터넷과 모바일을 활용한 당원투표의 공정성, 정당성 문제는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대리투표, 중복투표, 개표조작 등의 문제를 어떻게 방지하냐는 것인데 이런 문제로 인터넷 투표는 항상 심각한 후유증을 낳았다. 가장 대표적인게 통진당 부정경선 사건.[13] 이후에 한국의미래를준비하는당, 한나라당, 자유선진당, 미래희망연대, 친박연합 등의 여러 당을 돌아다니면서 활동하다가 한나라당(2012년)에 합류하기도 했다. 이후 개혁국민정당과 이름이 비슷한 개혁국민신당을 창당하고 19대 대선에서 문재인을 지지했으나 2017년 말에 갑자기 당명을 친박연대로 바꾸고 친박으로 돌아섰다.[14] 전 전북여성운동연합위원장, 제5대/제6대(1995년, 1998년 지방선거) 전주시의회 시의원(송천2동, 전미동/무소속→새정치국민회의). 1967년생으로 첫 당선 당시 만 27세였으나 모친의 건강문제로 잠시 정계에서 멀어졌다가 훗날 창조한국당에 참여하여 비례대표 5번을 받았지만 비례대표 지지율 저조로 당선에 실패하였다. 이후 20대 총선과 함께 치러진 전북도의회 재보궐 선거에서 전주 완산의 제2선거구에 국민의당 후보로(정동영 전 장관과 함께 입당) 출마하였으나 이도영 후보에게 밀려 경선에서 떨어졌다. 선거 결과는 이도영 후보의 당선.[15] 과거의 지구당 제도가 시도당 제도로 개편되면서 5개 이상의 시도당을 유지해야 존속할 수 있다.[16] 이런 것들이 쌓여서 열성적인 개혁/진보 유권자들 사이에 유시민안티가 형성되었고, 이들이 끝내 유시민의 정치행보에 발목을 잡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