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 하루모토 진코우(東本鎭浩) |
본관 | 동래 정씨[1] |
출생 | 1927년[2] 2월 14일 |
전라북도 순창군 구암면 율북리 544번지[3] (現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율북리 통안마을[4]) | |
사망 | 1950년 10월 3일[5] (향년 23세) |
전라북도 순창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1043호 |
상훈 | 1995년 대통령표창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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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정동영 전 국회의원은 그의 5촌 당질(堂姪)이다.
2. 생애
1927년 2월 14일 전라북도 순창군 구암면 율북리(現 순창군 구림면 율북리) 통안마을 544번지에서 아버지 초운(樵雲) 정정모(鄭政謨, 1903. 9. 2 ~ 1946. 5. 20)와 어머니 연안 이씨(1900. 12. 2 ~ ?)[6] 사이의 7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전라북도 전주부 노송정(現 전주시 완산구 노송동) 525번지로 이주했다.전주공립농업학교 토목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4년 안성 등과 함께 조선어 말살, 창씨개명, 강제징용 등 일제의 식민지정책으로 인한 민족말살과 강제 수탈이 심화되는 것을 비판하면서 장차 일제의 패망과 조국독립에 대비할 것을 맹세하며 혈서동맹을 조직하여 항일학생운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전라남도 여수군에서 화약, 탄약 등 일본군의 군수물자를 실은 열차가 전주부 청수정(現 전주시 완산구 교동) 한벽당(寒碧堂) 옆 한벽터널을 통과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1945년 2월 5일 전주부 노송정에 있던 자신의 하숙집에서 이를 폭파할 계획을 수립하고 준비하던 중 동지 한 명의 밀고로 곧 일본군 헌병대에 항일학생운동의 주동자로서 체포되었다.
그는 곧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총포화약류 취체령 위반, 폭발물 취체규칙 위반 등의 혐의로 무기징역을 구형받아 부산형무소에 투옥되었고, 미결수 신분으로 손톱과 발톱을 뽑히는 등의 갖은 고문을 당하며 약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르다가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았다. 광복 이틀 후인 1945년 8월 17일, 전주지방법원에서 검사 측의 공소 취소로 인해 위 혐의들에 대해 공소가 기각되었고, 곧 불기소처분을 받아 비로소 석방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방위군에 입대하여 훈련을 받은 후 장교로 임관하였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하자 고향 순창군에 들렀다가, 그해 9월 좌익 분자들에 의해 '우익 활동을 했다'는 명목으로 연행되어 구림면사무소 창고에 구금되었다. 처형 직전, 밧줄을 풀고 인근 야산으로 도주했으나 산 중턱에서 좌익들에게 재차 붙잡혔고 결국 1950년 10월 3일 처형당했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순창군 구림면 율북리 통안마을에 안장되었다가 2002년 11월 1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3. 여담
- 2016년 7월 4일, 제20대 국회의원으로 있던 정동영이 7촌 재종질(再從姪) 정석훈(鄭碩勳, 1982. 6. 30 ~ )[7]을 운전 겸임의 7급 비서로 두고 있어 친인척 보좌진 채용 논란이 있었는데, 이때 정동영 의원이 "독립운동가의 손자로서 국가보훈처의 취업알선 대상자"라고 해명했던 이 정석훈 7급 비서가 바로 정진호의 손자이며, 정진호의 차남 정학영(鄭學泳, 1950. 5. 2 ~ )의 아들이다.
[1] 안산공파(安山公派)-정랑공파(正郞公派) 31세 진(鎭) 항렬.[2] 월간조선 뉴스룸 2004년 10월 기사에는 1926년생으로 언급되었다.[3] 동래 정씨 안산공파 원조공(願朝公) 종중의 소재지이기도 하다. 정원조(鄭願朝, 1834 ~ 1896. 6. 3)는 정진호의 증조부이며, 정동영 전 국회의원이 정원조의 장현손자이다.[4] 정동영 전 국회의원도 이 마을 출신이다.[5] 동래정씨안산공파보(2012년 간행) 567쪽에는 9월 26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돼 있다.[6] 이원수(李願秀)의 딸이다.[7] 족보명 정상훈(鄭相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