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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4 12:17:31

장준식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長谷川俊植
우근(宇根)
본관 인동 장씨[1]
출생 1886년[2] 6월 8일
경상도 인동도호부 장곡면 성곡동
(현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읍 성곡리)[3]
사망 1964년 7월 29일
상훈 대통령표창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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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1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장준식은 1886년 6월 8일 경상도 인동도호부 장곡면 성곡동(현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읍 성곡리)에서 무과에 급제하여 종2품 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지낸 침류정(枕流亭) 장우상(張宇相)의 8대손인 아버지 장영진(張永軫)과 어머니 광주 이씨 사이의 1남 1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11대조인 만회당(晩悔堂) 장경우(張慶遇)는 병자호란 때 고향 인동에서 의병을 일으킨 바 있고 진사시에 급제하여 종9품 영릉참봉(英陵參奉)을 지냈으며, 8대조 장성(張晟)은 무과에 급제하여 정6품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그 밖에 10대조 장원(張厡)은 종6품 선교랑(宣敎郞)의 품계를, 7대조 장석겸(張錫謙)은 정5품 통덕랑(通德郞)의 품계를 가지고 있었으나, 6대조 이하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했다. 출생 이후에는 칠곡군 석적면(현 석적읍) 중리로 이주하였다.

1919년 4월 칠곡군 석적면 성곡동에서 장영조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같은 달 30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기소중지로 불기소처분을 받고 출옥하였다.# 이후 같은 사안에 대해 검사 측에서 공소하였으나 1922년 4월 4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공소 불가 처분을 받아 다시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고, 1964년 7월 29일 별세하였다.


[1] 상장군 금용(金用)계 종(宗)파 33세 식(植) 항렬.[2] 인동장씨대동보 7권 종파 1097쪽에는 1887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3] 인근의 반계리·중리와 함께 인동 장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장영조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