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신상묵 辛相默 | |
창씨명 | 시게미쓰 구니오 重光國雄, 重光國夫, 重光邦雄 |
출생 | 1915년 8월 13일 |
전라북도 익산군 춘포면 용연리 (現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춘포면 용연리 69번지) | |
사망 | 1984년[1] 1월 29일 (향년 68세) |
서울특별시 | |
묘소 |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춘포면 천서리 안천마을 |
본관 | 영월 신씨[2] |
직업 | 군인, 경찰공무원 |
배우자 | 박금옥[3] |
자녀 | 장녀 신선희[4] 장남 신기철[5] 차남 신기남 3남 신기도[6] 4남 신기호[7] |
학력 | 대구사범학교 (졸업) 니혼대학 전문부 (법과 / 중퇴) |
주요 경력 | 일본 제국 육군 헌병 조장 제8관구 경찰청 경위 제16구 경찰서 서장 나주경찰서 서장 장성경찰서 서장 낙동강 전투경찰대 사령관 월배지구 전투경찰대 사령관 영일경찰서 서장 경상북도 경찰국 보안과장 지리산지구 전투경찰대 사령관 서남지구 전투경찰대 사령관 제주도 경찰국장 전라남도 경찰국장 치안국 경비과장 강원도 경찰국장 충청남도 경찰국장 전라북도 산업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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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는 선생 노릇을 하다가 지원병이 된 것을 무슨 출세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물은 얕은데로 흐르며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같이 일본 남자인 우리들이 폐하(일본 천황)의 군인이 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중략)...참으로 황국신민이 될 생각이 있거든 그리고 내선일체를 실행하려고 생각하거든 이 훈련소로 오시오. ...(중략)...나의 이 감격을 한 가지로 나누지 않으시렵니까. 이렇게 좋은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8]
일제강점기 헌병 출신 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영월(寧越).
그냥 먹고 살자고 친일한 수준이 아니라 일본군에 스스로 지원하여 그 악명 높은 일본 제국 육군 헌병으로서 독립운동가들을 매우 가혹하게 고문한 인간 말종이다.
2. 상세
1915년 8월 13일 전라북도 익산군(現 익산시) 춘포면 용연리 69번지에서 아버지 학보(學甫) 신공집(辛珙集, 1890 ~ 1966. 9. 8)[9]과 어머니 광산 김씨(1889 ~ 1964. 12. 22)[10] 사이에서 8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때 고향의 소학교와 대구사범학교(現 경북대학교 사범대학)를 졸업하고 일본 니혼대학 전문부 법과를 다니다가 3학년 때 중퇴했다.#[11]졸업 후 1938년 전라남도 화순군 청풍소학교에서 훈도로 근무하다가 1940년 8월 초 교사를 그만두고 육군특별지원병 제3기생으로 일본 제국 육군에 자원입대했는데 교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버리고 일본군에 장교도 아닌 하사관으로 지원한 셈이라 적지 않은 화제를 모았다. 훈련소 입소 직후 그는 『내가 지원병이 된 감상』이라는 글을 투고하면서 지원병이 된 동기를 '어떻게 하면 황국신민의 교육을 완전히 할 수 있을 것인가, 내선일체의 구현화(具現化)를 위해서는 어떠한 방책을 취하여야 할 것인가를 2년 동안이나 연구하여 오던 중, 마침내 이를 위해서는 군인정신을 체득함이 제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식청년이 솔선하여 모범을 일반인들에게 보임으로써 지원병의 수준을 높여야 된다는 결심 아래 용감하게 다른 사람을 권유하는데 앞장서서 교원복을 벗고 영예의 군문에 들어섰다'고 표현했다.#
일본 제국은 교사에 대한 대우가 극진했는데 1930년대 중반 기준으로 교사의 초봉은 조선 총독에게 사령장을 받는 판임관(判任官)과 같았다.[12] 더구나 조선인에게 병역의무는 없었으나 사범학교 졸업생은 일정 기간 근무를 마치면 예비역 육군 하사관으로 자동편입되었다. 그런 마당에 굳이 교사를 때려치고 최말단 하사관을 지원한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극도의 군국주의 국가였던 일본 제국인 만큼 박정희처럼 출세하겠다고 장교를 지원했다면 또 모를까...[13]정확한 이유야 신상묵 본인만이 알겠지만 그는 이 문서 상단에 서술된 것처럼 "무슨 출세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 일본 남자인 우리들이 폐하의 군인이 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매일신보가 주최한 좌담회에 참석해 지원 각오를 피력했고 <삼천리>에는 "나의 이 감격을 한 가지로 나누지 않으시렵니까. 이렇게 좋은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라며 지원병제를 선전하는 기고문을 싣기도 했다.
일본 육군 헌병으로서 창원군 진해읍(現 창원시 진해구)의 일본 해군 군용기 공장에서 근무하면서 오장(伍長, 일본군 하사)을 거쳐 조장(曹長, 일본군 상사)에 올랐다.[14] 조선인 출신 일본 육군 헌병으로 오장에서 조장까지 승진한 자는 그가 유일하다. 이때 후술할 바와 같이 항일운동을 탄압하고 항일 혐의로 체포된 피의자를 직접 고문한 혐의가 있다.
일본 제국이 패망하고 해방되자 그는 1946년에 국립경찰 양성 1기로 미군정 경찰에 지원했다.[15] 제8관구 경찰청 경위로 제8구(광주)경찰서에 근무하였으며 1947년 제16구(진도)경찰서장, 나주경찰서장, 장성경찰서장 등을 거쳐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낙동강·월배지구 전투경찰대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영일경찰서장 및 경상북도 경찰국 보안과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51년에는 경무관으로 승진하면서 지리산지구 전투경찰대 사령관에 취임하여 조선인민유격대와 전투를 벌였으며 그 공으로 1등 태극무공훈장과 금성화랑훈장을 수여받았으며 그 와중에 부인 박금옥(朴金玉)[16]이 장자 신기철(辛基哲, 1951. 2. 9 ~ 2020)을 출산하였다. 어쨌든 1953년에는 전라북도 경찰국장에 전보되었고 서남지구 전투경찰대 사령관을 겸임하였다.#
정전 협정이 체결된 후 1954년 제주도 경찰국장에 임명되어 1956년까지 역임했다.[17] 1956년 전라남도 경찰국장에 임명되었고 1957년 치안국 경비과장 및 강원도 경찰국장에 임명되었다. 1958년에는 충청남도 경찰국장에 임명되었다가 경찰직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 1959년에는 공무원으로 전직해 전라북도 산업국장(서기관)에 임명되었다.
1964년 그는 지리산 빨치산 토벌대에서 활약하던 사람들과 함께 서남흥업이라는 기업체를 만들고 그 기업체의 고문으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지리산 도벌사건[18]의 배후로 지목되어 구속되었으나 이듬해에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19] 이 사건은 국유림 내 벌채 허가를 받은 기업들이 불법으로 나무를 베어낸 사건으로, 현직 공무원도 연루되어 사회적인 파장을 불러일으켰다.[20] #
이후에는 10월 유신에 반대하다가 영장도 없이 끌려간 후 종신형을 선고받은 적도 있었다고 하며 옥살이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1984년 1월 29일 향년 6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노년기에 차남이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에 들어간 모습을 보고 죽었다. 묘는 전라북도 익산시 춘포면 천서리 안천마을에 있다. 죽기 직전까지 일말의 반성조차 없었던 쓰레기라고 볼 수 있다.
2.1. 악랄한 친일파
학인동우회 사건으로 김주석 등 고문
장장호 고문 후 병사 사건
황학명 사건, 황학명 외 9명 고문
부산세무과직원사건, 4명 고문, 2명 사망
부산부두 미곡사건, 2명 체포 고문
양태의 사건, 2명 체포 고문
김상수 사건, 4명 체포 고문
김영민 사건, 3명 체포 고문
손유회 외 1명 체포 고문 사건
부산학생 사건, 8명 체포, 그 가운데 3명 고문
무궁당 사건, 20명 체포 고문, 주도자 김한경 고문 후 병사
임종금, 대한민국 악인열전, 피플파워, 2016, 99쪽.
장장호 고문 후 병사 사건
황학명 사건, 황학명 외 9명 고문
부산세무과직원사건, 4명 고문, 2명 사망
부산부두 미곡사건, 2명 체포 고문
양태의 사건, 2명 체포 고문
김상수 사건, 4명 체포 고문
김영민 사건, 3명 체포 고문
손유회 외 1명 체포 고문 사건
부산학생 사건, 8명 체포, 그 가운데 3명 고문
무궁당 사건, 20명 체포 고문, 주도자 김한경 고문 후 병사
임종금, 대한민국 악인열전, 피플파워, 2016, 99쪽.
위의 인용문은 경남일보 기자 임종금이 집필한 저서 <대한민국 악인열전>에 나오는 내용으로, 1949년 3월 반민특위 조사기록에 나온 신상묵과 박종표[21]의 고문 사건 기록이다.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창씨개명한 일본 이름 시게미쓰 구니오(重光國雄)를 사용했으며 조직의 배후를 대라며 수십일 동안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고 한다. 고문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고문은 굉장히 잔인했다고 하며 그의 고문 때문에 죽은 독립운동가만 해도 무려 4명이나 된다. 자세한 것은 다음 링크를 참고할 것. #
본디 그의 이력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에 경찰을 지냈다는 정도로 알려졌지만 2004년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개정을 둘러싸고 진상 규명에 적극적인 입장의 열린우리당과 반대하는 입장[22]의 한나라당이 대치하던 중 조선일보에 의해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이었던 신기남의 아버지가 그임이 드러나면서 자세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처음 폭로가 나왔을 때 신기남은 그가 일제강점기에 교사로만 재직했다고 발뺌했다.[23] 하지만 동아일보에 고문 피해자인 김장룡, 차익환의 인터뷰가 나오자 파장은 커졌고 신기남은 열린우리당 의장직을 사퇴했다. 신기남뿐 아니라 이미경 열린우리당 의원의 아버지도 일제강점기 일본 육군 헌병 오장으로 복무한 사실이 폭로되었고 신기남처럼 친일청산 강경론자였던 김희선 역시 만주국 공안국 특무경찰이었던 것이 확인되는 등 기세 좋게 한나라당을 몰아붙이던 당시 열린우리당은 자충수를 둔 셈이었다. 어쨌든 당시 개정안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 2005년에 통과되기는 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 부문에 그가 포함되었으며 2009년 11월 최종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3. 가족
열린우리당 출신 국회의원인 차남 신기남이 아버지인 그의 친일 행적 때문에 많이 비판받았는데 자기 부친의 행적도 모르고 부정하다가 친일 단죄를 주장했기 때문에 더더욱 욕을 먹었다.[24] 2020년 손자인 신인선이 미스터트롯에 출연했을 때 준수한 실력임에도 많이 비판받은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더구나 신인선은 이런 문제가 언급되었을 때 "모든 루머와 잘못된 사실들을 사실이 아니라고 밝히기 위해 나왔다"며 모호하게 해명했으며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달린 조부의 행적을 묻는 댓글을 삭제하는 행동을 보였다. #장녀 신선희는 80년대 유명한 무대미술가에 2006년~2008년 국립극장장을 역임했지만 2006년 8월 4일 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의 친일 행적은 '조작 모함'이며 '동생인 신기남 의원 입지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 같다'고 주장했다. #
4. 창작물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 나온 친일 경찰 스즈키의 모델이 신상묵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고등계 경찰로 독립운동가들을 악랄하게 고문하고 해방 후에 다시 경찰로 컴백, 전쟁 때 빨치산 토벌에 나선 것 등등 비슷한 면이 많아서일 듯하다. 하지만 여명의 눈동자는 신상묵의 행적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이전에 나온 작품이라, 신상묵보다는 친일악덕 경찰의 대명사로 통하던 노덕술로 보는 경우가 많다. 부연하자면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대한민국 경찰의 초기 간부들은 대부분 신상묵, 노덕술과 비슷한 부류들이다.5. 같이 보기
[1] 2004년 8월 25일 한겨레21 기사.[2] 부원군파(府院君派) 29세 ○묵(默) 항렬.(족보)[3] 밀양 박씨로 1924년 5월 15일생.[4] 辛仙姬.[5] 辛基哲. 트로트 가수 출신이다.[6] 辛基道.[7] 辛基豪.[8] 잡지 《삼천리》 1941년 1월호에 <지원병 일기>를 기고하면서 일본군에 참여하라고 선동하는 글 중 일부. 삼천리 잡지 소개.[9] 부원군파 28세손 '''○집(集) 항렬.(족보)[10] 김영길(金永吉)의 딸이다.[11] 우연히도 악질 친일경찰 김태석도 니혼대학 법과를 다니다 3학년 때 중퇴했다. 다만 이쪽은 야간대학이었다.[12] 보통 전문학교를 나와 총독부 기수가 되거나 일반문관시험에 합격한 정식 관료가 판임관이거나 판임관 대우였으니 현대 대한민국으로 치면 7급 공무원 정도로 초임 교사를 대우해줬다고 보면 된다.[13] 박정희는 "요오시 토벌이다~"라는 낭설과는 달리 만주군 장교 시절 독립운동가를 잡아 고문하거나 밀고한 적은 없다. 소속 부대가 항일 활동을 하던 팔로군을 토벌한 적은 있지만 이때도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다.[14] 사실 신상묵이 해방 전 육군 헌병 조장을 지냈다는 것은 1960년 3월 국회공론사에서 편찬한 대한민국행정간부전모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당시 정치인이나 관료들 가운데 알 만한 사람들은 으레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된다.[15] 일제강점기에 민중을 가장 가까이에서 악랄하게 착취하던 것은 말단 경찰들과 육군 헌병이었는데 이들은 해방 후 적지 않게 다시 경찰에 투신했고 일본군 경력자라도 별다른 전투 경험도 없이 끽해야 위관급으로 채워진 대한민국 국군과 달리 친일파 소굴로 손가락질받았다. 실제로 6.25 전쟁 직전까지 경찰과 국군은 서로 앙숙이었으며 상호간 총격전(!!!)도 빈번했다.[16] 본관은 밀양 박씨며 1924년 5월 15일에 태어났다.[17] 6.25 전쟁 때 지리산 전투경찰대 사령관이었고 1954년 제주도 경찰국장을 역임한 경력 때문인지 지리산과 한라산에는 신상묵의 기념비가 남아 있다.[18] 토벌이 아니라 도벌이다. 盜伐. 국유림의 나무를 몰래 베어내 멋대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19]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산하에 도벌에 참여했던 38명 중 33명이 유죄가 선고되었으나 지리산 도벌사건의 몸통이었던 신상묵은 무죄를 선고받았다.[20] 이 사건의 여파로 1967년 국립공원 제도가 시행되어 지리산이 제1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21] 신상묵의 헌병보였다.[22] 당시 한나라당이 마냥 반대한 건 아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환수에 관한 특별법안이 통과될 때는 찬성하였다.[23] 일단 신상묵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악행을 아들에게 전혀 말해주지 않았으며 어릴 때 일가 친척 누구한테인가 '일본군에도 간 적이 있다'는 한마디를 어릴 때 들었던 게 전부였다고 한다.[24] 신기남은 16대 국회에서부터 김희선 의원과 함께 '민족정기를 바로세우는 모임'에 참여했으며 "아버지 전력을 상세히 알았다면 친일진상규명 활동에 내가 앞장서왔겠느냐"라고 반문할 정도로 친일 청산 강경론자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