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표 朴鍾杓 | |
<colbgcolor=#000><colcolor=#fff> 창씨명 | 아라이 겐기치 新井源吉 |
출생 | 1921년 |
부산특별시 초량동 | |
사망 | 미상 |
학력 | 동래중학교 (졸업) 동경고등학원 (졸업) 동경 삼기영어학교 (졸업) |
주요 경력 | 부산일보 기자 대구 헌병대 헌병 보조원 마산경찰서 경비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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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의 헌병 출신 친일반민족행위자이자 대한민국의 경찰공무원.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들에게 고문을 자행했으며, 해방 이후 3.15 부정선거에 반대하는 시위대에게 무차별 발포를 내리는 악질적인 행보를 보였던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2. 생애
부산특별시 초량동에서 태어난 그는 23살 때 신상묵의 밑에서 헌병 보조원으로 일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잔혹하게 고문했다. 이 때문에 그는 일제강점기 때 악명높은 헌병 보조원으로 유명하였고, 그 명성에 걸맞게 독립운동가 4명을 죽였다.해방 이후 박종표는 친일 행적들로 인해 반민법 제4조 6항 위반 혐의로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1] 이때 그는 "일본 헌병에 지원한것은 일본의 강제징용, 징집을 피하려 했던것을 뿐이다. 과거의 오류는 3천만 동포 앞에서 깨끗이 씻고 법에 의한 정당한 처분을 받고 평생을 회개하며 살겠다."고 말하였고, 결국 반민특위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2][3]
이후 마산경찰서에서 근무하게 됐다. 십여년 후인 1960년 마산에서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는데 당시 경비 주임이였던 박종표는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했고, 이 과정에서 김주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고 사망하자 바다에 직접 유기하는 잔인하고 끔찍한 짓까지 저질렀다. 이 일로 그는 국회에서 직접 증언을 하였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7년 만에 사면받아 출소한 후 부산에서 식당을 열었고 1994년까지 운영했다.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 만약 살아 있다면 나이가 102~103세이기에 지금까지 살아있을 가능성은 낮다. 2023년 102세 기준 1921년생의 생존율은 0.1~0.2%밖에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