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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19:29:13

신불출

구로다 규이치에서 넘어옴
신불출
申不出 | Shin Bul-ch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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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신흥식[1]
창씨개명 에하라 노하라
江原野原[2]
출생 1907년[3][4]
서울 or 경기도 개성시
사망 1969년 7월 12일(향년 62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직업 만담가, 연극인, 독립운동가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
3.1. 드라마 야인시대3.2. 그 외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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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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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신불출, 나품신, 신일선, 성광현
"만담은 웅변(연설)도 강연도 아니고 재담도 아니고 그렇다고 말장난은 더더욱 아니올시다. 말의 예술인 만담에는 사람의 가슴을 찌를 만한 그 어떤 진실이 필요하외다."

일제강점기 유명한 만담가이자, 연극인, 독립운동가. 일본식 이름은 구로다 규이치(玄田牛一)[5] 혹은 에하라 노하라(江原野原). 창씨개명 때 에헤라 놓아라 투로 일본에 항의하기 위해 일부러 엉터리로 지은 이름이다.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도 창씨개명할 때 구로다 규이치(玄田牛一)로 이름을 정한 일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2. 생애

북한에서 공개한 자료에 의하면 1907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북한 선전자료에 따르면, "천성적으로 영민하고 말재주가 뛰어나 자기가 보고들은 이야기를 신통하게 재현해내어 사람들을 웃기곤하였다. 일제가 살판치는 당대 사회에 대한 울분과 항거의 감정을 가지게 된 그는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으로 이름을 신불출로 고치고 혼자서 사회를 풍자조소하는 만담창작공연활동을 벌려나갔다."라고 되어 있다.

예명인 불출은 ‘이렇게 일본 세상인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세상에 나지 말았어야 했다’라는 의미의 불출(不出). 데뷔 초기에 실수가 많아서, 삶에 고난이 많다는 의미의 단어를 딴 신난다(申難多)라는 예명도 있었다. 불출이란 이름도 난다와 같은 의미에서 팔불출의 패러디[6]로 그래서 나왔다는 소수설도 있다.

조선 말기 명창 재담가 박춘재의 공연을 보고는 만담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가난한 집안사정으로 간신히 중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대 일본유학을 가서 연극을 배웠다. 친일 연극 활동으로 일제에 협력한 배우 심영과 달리 일제강점기에 풍자극으로 고초를 많이 겪은 케이스다. "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이므로 우리는 (倭)를 없애버려야 한다"[7]라는 드립이 대표적. 주로 SP판에 녹음한 만담 음반으로 대중적 명성을 얻었다. 1930년대 "노들강변"이란 유행곡을 작사해 인기를 끌기도 했다. 1930년대 말에는 아예 대놓고, 도조 히데키, 히틀러, 무솔리니를 풍자한 <망둥이 3형제>를 발표해 금지처분을 받기도 했다. 좌익 계열 만담가로 활약하였고, 해방 이후에는 조선영화동맹에 가담하였다.
태극기 중앙의 붉은빛은 공산주의이고, 파란색은 파쇼이며, 그 주변의 4괘는 소련, 미국, 중국, 영국의 4개 연합국입니다. 이 국기를 만들 때부터 우리 민족은 남북이 갈리고 숙명적으로 4개국의 신탁통치를 받게 되어 있었죠.…[8] 우리 속담에 ‘큰 코 다친다’는 말이 있는데 코가 더 큰 미국이 결국 쫓겨나게 될 겁니다.

1946년 6월 10일부터 3일간 조선영화동맹과 예술통신사가 주관한 6.10 만세 운동 20주년 기념주간 행사에서 태극기의 4괘를 강대국으로 묘사하면서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만담을 하다가 반탁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그 결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이후 신불출은 치안 교란, 연합군 비방 등으로 미군정에게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고, 20,000원[9]벌금 부과와 함께 징역 1년을 선고받아 복역하게 된다.

복역 후인 1947년[11] 월북해 남한의 이승만 정권을 비난하는 만담을 했다. “나라 판 돈 꿀떡, 하는 짓은 개떡, 동포들이 미워하니 먹을 것은 양(洋)떡, 나자빠질때는 모두 벌떡벌떡” 하는 식으로 이승만은 대놓고 신불출의 주된 조롱거리가 되었다. 6.25 전쟁 때는 대남 선무방송에도 참여하였다.

1955년 8월 13일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민족예술발전을 위한 사업에서 특출한 공훈을 세운 예술인"으로 선정되어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다.[12] 이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를 거쳤고, 1957년 10월엔 로력훈장을 받았다. 1961년에는 신불출 만담연구소를 만들어 소장에 취임하였다.
"모란봉에 올라 돌을 던지니 장에 맞더라. 두번째도 장, 세번째도 장, 간장 · 고추장 · 청국장을 빼면 무슨 장(長)이 남나?"

하지만 신불출은 8월 종파사건이 일어난 뒤에도 위의 발언처럼 북한의 경직된 관료체제('장'이라는 직책을 가진 이가 너무 많은 북한의 관료체제)를 은근하게 디스하고, 대본을 사전검열하는 것을 대단히 불편하게 여겨서 특별히 무검열을 할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고 한다. 탈북자인 김영순[13]의 말에 따르면 정치적인 이유[14]1962년숙청을 당하여 요덕수용소를 거쳐 1976년경에 사망했다고 한다. 김영순이 그를 본 것은 죽기 직전인 1972년으로 그 참혹한 수용소에서도 만담으로 동료 수감자들에게 즐거움을 주었을 정도였지만, 결국 영양실조아사했다. 그 외에도 수감 당시에 납북 어부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만담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같은 시대를 지낸 정상진 전 북한문화선전상 제1부상의 증언도 비슷하다.

그러나 북한에서 숙청된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 그러하듯 확실히 검증되진 않았다. 일례로 김정일과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김영주도 오랫동안 "숙청 후 탄광행" 설이 있었지만 단순히 한직으로 물러났을 뿐 2021년 12월까지 살아 있었다. 100세를 넘겼을 정도로 장수했다. 또한 남파간첩으로 활동하다 1970년에 체포된 김진계는 자신의 수기에서 1962년에 최승희와 함께 체포되어 협동농장에서 노동을 하다가 2년 후에 복권되었다고 말했다.[15] 조선중앙방송위원회 극작가 출신 탈북자 장해성 역시 신불출이 복권되었으나 뇌출혈로 쓰러져 활동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다만 복귀와 사망 시점에 대해서는 1970년대초로 기억하고 있다. #

실제로 김정일이 선전선동 분야를 장악한 후에 최승희, 한설야, 심영 등 숙청 예술인들이 대거 복권되었는데, 신불출 역시 복권되어 1995년,《신불출만담집》이 출간되었고, 조선중앙통신 2011년 6월 30일자 기사 <만담재사 신불출>이란 기사가 게재되었다. 북한에서 밝힌 자료에 따르면 1967년에 뇌출혈로 쓰러져 은퇴하여 연로보장을 받으며 살며 《조선희극사》를 집필하던 도중인 1969년 7월 12일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북한에서 이미 복권된 신불출이 김일성, 김정일의 배려로 장수했다고 주장했으면 주장했지 요절했다고 주장할 이유는 없으므로 북한에서 밝힌 기일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3. 대중매체에서

3.1. 드라마 야인시대

2002년에 방영된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선 희극인 김종국이 신불출 역을 맡았다. 자세한 내용은 신불출(야인시대) 참조. 정작 배우 본인은 신불출과는 극과 극으로, 유오성[16]과 함께 대표적인 보수 성향 연예인이다.[17][18]

3.2. 그 외 작품

# 지식채널e에 그를 다룬 회차가 있다.

2013년, 매카시즘으로 인해 미국에서 추방당한 찰리 채플린이 꿈속에서 검열없는 나라를 찾아다니던 중 우연히 미군정기 한반도에 들렀다가 신불출을 만난다는 내용의 희곡 '레드 채플린'이 발표되었다.

영화 '동주'의 제작자인 신연식 감독은 '동주'를 시작으로 20세기 한국 예술인들의 삶을 영화화한 '예술인 프로젝트'를 장기간 진행할 계획인데, 3편으로 신불출의 젊은 시절을 영화화한다고 한다.


[1] 대한민국에선 신영일 혹은 신홍식으로 기록되어 있고, 북한에선 신상학으로 기록되어 있다.[2] 후술하겠지만 일본에 항의하려는 뜻으로 에헤라 놓아라를 일부러 엉터리로 적은 이름이다. 본래는 칙쇼를 파자한 이름을 냈으나 당연히 퇴짜를 맞았다.[3] 한국일보ㆍ인문학협동조합, "세상 움직이는 ‘말’의 힘을 믿은 불세출의 만담가", 「한국일보」, 2016.2.28.[4] 송광호, "[CULTURE] 만담가 ‘신불출’을 아시나요?", 「주간동아」 2009.5.20.[5] 玄(검을 현)과 田(밭 전)을 합치면 畜(가축 축)이 되고, 牛(소 우)와 一(한 일)을 합치면 生(날 생)자가 된다. 당시에 보편적인 쓰기방법이던 세로쓰기로 보면 확연히 보인다. 즉, 일본의 욕설인 '칙쇼(畜生)'를 파자한 것이다. 당연히 퇴짜맞았다.[6] 이 때문인지 야인시대에서 자기 이름인 불출을 가지고 개그를 치는 모습이 나온다. 정확히 말하면 첫 만담 공연에서 신불출이 일부러 관객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묻자 관객 중 한 명이 "신불출이요!"라고 대답하자 "뭐라고요? 팔불출이라고요?" 라고 응답해서 관객들을 폭소하게 만들었다.[7] 조사 "왜"와 한자 "왜(倭, 즉 일본.)"를 이용한 말장난.[8] 이렇게 태극기를 놓고 찬탁하는 모습은 야인시대에도 나왔다.[9] 당시 하급 공무원의 연봉이 약 5,000원 정도였다.[10] 야인시대에서는 다리병신으로 만든다.[11] 홍명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는 의견, 가해자 김두한은 별다른 처벌이 없었던 것에 반해 자신은 피해자인데도 오히려 처벌을 받은 남한의 현실에 대단히 실망하여 월북을 택했다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후자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김두한이 테러 자체를 저지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이상 의미가 없을 것이다.[12] 최승희황철은 이때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13] 최승희의 제자, 성혜림의 동기.[14] 남로당 잔당.[15] 김진계 구술, 김응교 정리, 조국 - 어느 북조선 인민의 수기 (하), 현장문학사, 1990, 50쪽.[16] 작은형이 유상범국민의힘 국회의원.[17] 그래서 보수계열 정당 유세에 나오자 "신불출이 왜 거기서 나와?" 반응이었다. 허나 연예인이 때론 정치적 성향과 무관한 역을 맡거나 때론 풍자를 위해 반대되는 역을 자처하여 맡기도 하며 특히 야인시대는 반공적 작품이라 본인에게 맞았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신불출은 적극적이진 않았어도 독립운동가로써 볼 만한 확실한 이력과 김씨 일가에 붙지 않은 비교적 온건적 좌익 성향을 띤 인물이기에 1부에서의 선역으로써 보여줄 수 있는 임팩트와 2부에서 악역으로써 무너지는 모습 전부 연기가 가능하므로 배우 입장에서 좋게 봤을 가능성이 크다.[18] 여담으로 희극인 김종국과 정치적 반대 성향인 문성근 역시 본인과 대척점에 서있는 보수계열 정치인이나 보수언론 사주 역 등 자신의 반대되는 역을 자처하여 맡을 정도다. 심지어는 영화 1987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탄압했던 안기부장 장세동 역할까지 했을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