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김신재 金信哉 | |
출생 | 1919년 3월 31일 |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의주군 | |
사망 | 1998년 3월 31일 (향년 79세) |
미국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배우자 | 최인규(1936 결혼, 1950 납북 행방 불명) |
데뷔 | 1937년 영화 '심청' |
활동 시기 | 1937년 – 198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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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여성 원로 배우.
2. 생애
1919년 3월 31일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태어났다.일찍 만주로 이주하여 단둥의 안동현고등여학교를 다녔다. 18세에 학업을 중단하고 신의주 신연극장에서 극장 사무원으로 일하다가 당시 영화 녹음기사로 일하던 최인규와 만나 결혼하면서 배우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남편 최인규의 권유로 1937년 심청에 단역으로 출연해 스크린에 데뷔한 이후 1938년 《도생록》, 1939년 《애련송》 등에 출연했다. 나중에 남편 최인규가 영화 녹음기사에서 영화 감독으로 데뷔한 뒤로는 최인규가 감독한 영화에 자주 출연했는데 이중에는 1944년 《태양의 아이들》, 1945년 《사랑의 맹세》와 《신풍의 아들들》 등이 있다. 문예봉, 김소영 등과 함께 식민지 조선 영화계의 대표적 여배우로 활동했다.
1940년부터 강제로 진행된 유명인사에 대한 창씨개명 정책의 영향으로 일본식 이름 星信載로 개명했다.
6.25 전쟁에서 남편 최인규 감독이 납북되고 1.4 후퇴 때 부산으로 내려와 산유화라는 다방을 운영해 생계를 겨우 이어가며 힘겨운 시절을 보냈다. 산유화 다방은 전쟁 당시 부산으로 모여든 문화 예술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1950년부터 1970년대까지 많은 영화에서 조연으로 활약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1954년 《탁류》, 1956년 《포화 속의 십자가》와 《단종애사》, 1957년 《인생화보》, 1961년 황성옛터, 1968년 《폭풍의 사나이》, 1970년 《마님》, 1978년 《족보》, 1979년 《장마》, 《소나기》 등이 있다. 1980년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가 마지막 은퇴 작품이었는데 이 작품으로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고, 1980년대 말에 문화부장관 공로상을 받았다.
50년 동안 많은 영화 작품에서 젊었을 적에는 선량한 이미지로 청초하고 가녀리거나, 귀엽고 선한 여아이나 초등학교 여성 교사의 연기를 했고, 나이가 든 이후에는 자비롭고 고운 어머니 역할을 꾸준히 기복없이 연기를 계속 해 사람들에게 크게 사랑과 관심을 받아 만년소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역작으로 평가되는 영화 장마에서의 억척 할머니 연기는 예외적인 경우에 속했다.
1983년에 딸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를 했으며 1998년 3월 31일 미국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에서 자신의 생일날에 향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한국 최초의 여성 감독 박남옥이 김신재의 팬이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서로 친하게 지냈다고.
3. 수상
- 제19회 대종상영화제 여우조연상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