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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봉 文藝峰 [ruby(林丁元, ruby=はやし でいげん)] | 하야시 데이겐 | |
<colbgcolor=#000><colcolor=#FFF> 본명 | 문정원(文丁元) |
출생 | 1917년 1월 3일[1] |
함경남도 함흥군 함흥읍 (現 함경남도 함흥시) | |
사망 | 1999년 3월 26일 (향년 82세) |
평양시 | |
본관 | 남평 문씨 |
학력 | 함흥여자공립보통학교 (중퇴) |
다른 이름 | 임정원, 하야시 데이겐(林丁元), |
데뷔 | 1932년 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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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때부터 활동했던 배우.심영, 황철, 독은기 등처럼 일제 말에 친일 노선을 걷다가 해방 후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후, 월북해서 북한 정권에 충성했던 배우이다. 본관은 남평 문씨이지만, 창씨개명한 일본식 이름은 하야시 데이겐(林丁元; 임정원)이다. 따로 창씨개명을 했다기보다는 원래 본명이 문정원이었는데, 결혼을 하면 성씨를 남편의 성을 쓰는 일본식 제도를 따라서, 남편이었던 임선규의 성씨인 임씨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무용가 최승희와 함께 친일+친북 2관왕을 달성한 여성 예술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2. 생애
2.1. 일제강점기 시절
문예봉의 아버지 역시 배우로, 유랑극단 '연극시장'의 단장인 문수일이다. 문수일은 서당과 보통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나름 학식있는 사람으로, 9세에 5살 연상의 여자와 결혼하여 딸을 셋 낳았고, 그 중 둘째가 문예봉이다. 젊은 시절 연극에 뜻을 두며 배우가 되어 이애리수, 변기종 등과 함께 스타로 명성을 날렸고, 얼마 안 되는 가산을 털어가며 유랑극단 '연극시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생계 문제로 1931년에 '유랑극단'을 해체하고 청진형무소의 고용원(임시 사무직원)으로 일하다가 몇달 후 그만두고서 그 감옥에서 출소한 윤봉춘을 만난 후, 약간의 자금을 확보해 '연극시장'을 재건했다.문예봉은 이런 아버지에게 업혀 함께 돌아다녔으며, 5세에 아역배우로 유랑극단에서 데뷔했는데 연기하기 싫어하는 눈치만 보여도 무서운 눈총과 주먹이 날아들었다고 한다. 12살에 친모를 여의었고, 처음으로 어른 역할을 맡은게 15세 때. 그리고 남자 역할이었으며 탁월한 연기력으로 <동아일보> 및 <조선일보>에 소개됐다. 그러다 나운규의 눈에 띄어 1932년 이규환 감독의 첫 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에 출연하는 것으로 영화계에 데뷔하게 된다.
이를 시작으로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며 일약 은막의 스타로 올라선 문예봉은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유랑극단의 소녀에서 은막의 신데렐라'로 올라선 예인 것이다. 1935년 조선 최초의 유성영화 <춘향전>에 나와 인기가 상승했고, 1936년 이명우 감독의 '장화홍련전'에서 아버지 문수일과 공연하여, 당시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부녀공연기록을 남겼다.[2] 그 외에 <아리랑 고개>, <나그네>, <춘풍> 등에 나와 대중들로부터 '삼천만의 연인'으로 일컬어졌다.
후일 이규환 감독의 신작 <나그네>의 주연을 맡아 촬영을 마치고 대사의 후시녹음을 위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의 영화 팬들에게도 문예봉이 널리 알려져 열차 안에서는 사인 공세에 시달리기도 했고 도쿄에서는 당시의 톱스타 미즈타니 야에코(1905년 ~ 1979년)[3]가 그녀를 환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예봉은 일본어를 한 마디도 못했다. 벙어리 웃음만 짓다가 헤어진 문예봉은 나중에 혼자 화장실로 가서 많이 울었다고 한다. 유랑극단 포장 속에서 자라나 학교 문턱에도 못 가봤기 때문이다. 당시 여성들은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했지만. 이규환 감독은 그런 문예봉을 가엾게 여기고 그녀의 통역을 많이 도와주었다고 하며 당시 우리나라 배우들은 연기나 발성에 대해 체계적인 이론이 정립되어 있지도 않았고, 그저 화장하고 무대에 서면 배우입네 하고 자처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문예봉은 이 일본 기행에서 배우지 못한 부끄러움을 뼈저리게 느끼고, 일본어는 물론 발성, 연기 등 체계적인 지식 습득에 목을 매게 된다.
외모로만 보면 청순하고 가녀린 외모로 '3천만의 연인'이란 별명을 얻을 만큼 당시 최고의 여배우로 인기가 많았고, 어린 시절부터 연극 무대에서 단련된 연기도 흠 잡을 데가 없었지만 억양이 방언 중에서도 유독 억세고 거친 함경도 사투리인 데다가 까랑까랑한 목소리여서 좀 깬다는 의견도 있었다.[4]
사실 무성영화 → 초기 유성영화로 가는 시기에는 별로 문제가 아닌 것이지만.[5] 1933년 극작가 임선규[6]와 결혼했는데,[7] 이 임선규란 사람은 아버지 문수일의 유랑극단에서 대본 집필과 연출을 맡았던 사람으로, 후일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8], '청춘일기', '그들의 일생' 등 일련의 신파극으로 큰 인기를 얻은 사람이다. 조선연극사에서 신파극으로 큰 획을 그은 이이긴 하지만 동학당, 빙화 등에서는 이념적 모습 역시 비춘다.[9] 문예봉에게는 여러 지식 습득을 도와준 선생님과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참고로 이때 임선규와 같이 살던 곳은 현재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의 세광골드타운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2019년 <말모이> 개봉 당시 가 본 결과, 옛 집터 표지판이 있었다. 1936년에는 남편을 따라 이규환 감독이 주도한 영화사 '성봉영화원'에도 참여했다.
게다가 1934년과 1937년에 각각 아이를 낳았는데, 남편도 폐결핵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고[10] 수입도 그저 그런 처지였다. 문예봉은 항상 치마저고리 차림에 아이들을 데리고 촬영장에 나타나는 등,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아이들을 키워냈다. 그러한 모습이 매우 당당한 신여성으로 비추어졌다고 한다.
2.2. 태평양 전쟁 시기 친일 부역
임선규는 총독부의 '조선연극문화협회'에 가입하여 이른바 국민연극의 희곡을 집필했고, 문예봉은 1938년 친일성향 영화 <군용열차>에 나온 뒤 이듬해 '조선영화인협회'에 들어가 허영 감독의 <그대와 나> 등의 일제의 침략 전쟁 및 민족 말살 정책 찬양 및 지원병 선동 영화에 출연했다. 이 경력으로 두 사람 다 2008년에 친일인명사전에도 등록되었다.2.3. 해방 이후
그러다가 1945년, 해방을 맞은 후 이 부부는 좌익과 우익의 대립 상황 속에서 비슷한 이력을 지닌 연극계 선배들을 따라 좌익 극단에 참가했고, 특히 문예봉 본인은 조선영화건설본부 및 조선영화동맹에서 활동했다가 1946년 조선영화동맹 중앙집행위원이 됐다.해방과 함께 당시 서울에는 '혁명극장', '해방극장', '인민예술극장', '청포도', '낙랑극회', '1.5 극장', '조선예술극장' 등 10여개의 좌익 극장이 생겨났는데, 문예봉 부부는 이런 극장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1946년 말, 미군정이 조선공산당을 불법화하고, 정치선전극의 상연을 금지하자 활동공간을 잃은 좌익계 문화예술인들은 대거 월북하게 된다. 1948년 초 문예봉ㆍ임선규 부부도 이북으로 따라갔다.
2.4. 월북 이후의 행적
월북 후 그녀는 북조선국립영화촬영소에 들어가 전속 배우가 됐고, 북한은 인기배우 문예봉을 최대한 활용하려 했다. 북한 선전물에 따르면 1948년 8월 22일에 김일성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각종 극영화와 선전영화에서 연이어 주연을 맡았다. 한때 북한에서는 '영화는 문예봉, 무용은 최승희, 연극은 김선초(월북 여배우)'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북한 최초의 극영화 내 고향(1949, 강홍식 감독)에 출연한 것을 시작으로 1954년 빨찌산처녀, 1963년 다시 찾은 이름, 1966년 성장의 길 등에서 출연하였으며 이 중 빨치산 처녀는 북한영화 초기의 김일성 우상화에 이용된 영화로서, 남한 내 빨치산들의 게릴라전을 영웅적으로 묘사한 영화로 평가된다. 1952년에 북한에서 최초로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다. 이러한 이름값이 문예봉으로 하여금 당시에 가장 '중요한' 영화에 출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된다.그러나 1960년대 중반에 문화계에 가해진 대대적인 숙청에 휘말려서 남편 임선규와 함께 종적을 감추었다.[11] 북한에서 마지막으로 임선규를 만나본 대남공작원이 전하는 바로는 당에서 임선규에게 사회적-사실적-혁명적인 글을 쓰지 못한다고 비판이 너무 강해서 북한의 메인스트림에서 점점 밀려나다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절필했다고 한다. 후일 그는 1970년 결핵환자 수용소에서 숨을 거뒀다.[12] 문예봉 본인도 안주협동농장으로 쫓겨났다는 설이 있다. 1965년 북한의 영화잡지 '조선영화'에서 기고한 수필이 화근이었다고 하는데, 이 수필에서 그녀는 과거 동료이자 자신의 영화 데뷔작에서 연기 스승이었던 나운규에게 지나치게 존경과 찬사를 표현했는데, 북한에서는 김일성 부자 외의 타인에 대한 인간적인 찬탄 및 찬양이 금기시되어 있는데, 나운규에게 대한 찬사가 정도를 지나쳤다는 이야기가 있다.[13] 그러나 이미 문예봉은 전후에 남로당 계열이 숙청되면서 여러번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김일성이 '빨찌산 처녀'를 관람하고 칭찬하면서 위치가 확고해진 것이며 1969년에 조선예술영화촬영소를 나왔다는 일설이 있고 이후 다른 예술단에 있다가 1976년에 완전히 은퇴하였다는 일설도 있다.
여하튼 그 이후 1980년대가 되어서야 간신히 복귀해서 다시 영화활동을 했다. 복귀작은 1980년작인 영화 춘향전으로 이몽룡의 모친 역할로 출연했다.[14], 이후에는 80년대 남북 적십자 회담때 남측 대표를 환영했다. 1982년에는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15] 김정일에 의해 납북됐던 최은희는 문예봉의 팬이었는데 납북 이후 김정일의 주선으로 막 숙청당했다가, 복권된 문예봉을 다른 월북 배우들과 만나 본다. 70세를 넘은 고령에도 고운 얼굴이었다고 하며 실제로 월북배우 최예선, 엄미화, 남궁연[16], 김연실, 김선영[17], 유경애[18], 문정복[19] 그리고 최은희와 찍은 기념사진에서도 오십대인 최은희보다 갸름하고 고운 얼굴이다. 그리고 1991년에 남북 고위급 회담차 평양을 방문한 정원식 총리 대표단과도 만나 "꼭 통일이 되어서 수령님을 가운데 모시고 같이 춤을 추고 싶다"라고 발언한 바가 있다.참고
협동농장으로 쫓겨났던 경험 때문인지 그 이후 김일성, 김정일 부자에게 충성을 다 바쳤다. 탈북에 성공한 신상옥, 최은희 부부를 배신자라 비난하는 인터뷰를 했고, 김일성이 죽었을 때 김일성의 무덤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진이 찍혔는데 이 사진으로 남한에선 안 좋은 의미로 화제가 되었다. 김씨부자에게 충성을 바친 공로로 평생 부귀영화를 누렸으며[20] 문예봉의 팔순잔치에는 김정일이 직접 생일상을 하사했을 정도였다고 한다.[21] 1997년, 김정일이 하사한 팔순 생일상을 받았으며, 회고록《영화와 함께 70년》을 집필하던 중 1999년 3월 26일 4시에 8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김정일이 애도를 표하며 화환을 보내주었는데 조선중앙통신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김정일총비서께서 고 문예봉의 령전에 화환(평양 3월 27일발 조선중앙통신) 위대한 김정일령도자께서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인민배우 문예봉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시하여 27일 고인의 령전에 화환을 보내시였다.문예봉은 해방후 50여년간 배우생활을 하면서 조선의 첫 예술영화 <내 고향>의 녀주인공으로부터 시작하여 <빨찌산 처녀>,<성장의 길에서>,<춘향전>,<은비녀>를 비롯한 수십편의 예술영화들에 출연하였으며 신인들을 훌륭한 배우로 키워냄으로써 주체의 문학예술발전에 공헌하였다.그는 오랜 병환끝에 주체88(1999)년 3월 26일 4시에82살을 일기로 서거하였다.(끝) |
이후 애국렬사릉에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배우, 인민배우 문예봉 녀사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1998년, MBC가 입수한 비디오에서 밝힌 바로는 동생이 남한에 남아있었다고 한다. 본인의 인터뷰 모습(1:06 부터)
유튜브에 문예봉이 주연한 1936년작 영화 "미몽"이 공개되어 있다. # 문예봉이 출연한 기타 북한 영화들도 유튜브에서 검색해 볼 수 있다.
참고로 대한민국의 원로 여배우인 문미봉(1932~ )과 문예봉을 헛갈리는 경우도 있는데 전혀 다른 인물이며 혈연관계도 없다. 문미봉은 한국에서만 연기자로 활동했다.
3. 출연작 목록
3.1. 영화
- 월북 이전
- 임자 없는 나룻배 (1932)
- 아리랑 고개 (1935)
- 춘풍 (1935)
- 춘향전 (1935)
- 미몽 (1936) - 애순 역
- 그 후의 이도령 (1936)
- 무지개 (1936)
- 장화홍련전 (1936)
- 인생항로 (1937)
- 나그네 (1937)
- 군용열차 (1938) - 김영심 역
- 애련송(환무곡) (1939)
- 새출발 (1939)
- 수업료 (1940) - 어머니 역
- 수선화 (1940)
- 집없는 천사 (1941)
- 그대와 나(君と僕) (1941)
- 창공(원제: 돌쇠) (1941)
- 지원병 (1941)
- 산개지 (1942)
- 젊은 모습(원제: 若き姿) (1943)
- 조선해협 (1943)
- 우르러라 창공(원제: 仰げ大空) (1943)
- 태양의 아이들 (1944)
- 월북 이후
- 내고향 (1949)
- 용광로 (1950)
- 빨치산 처녀 (1954)
- 춘향전 (1958)
- 다시 찾은 이름 (1963)
- 성장의 길에서 (1966)
- 금강산 처녀 (1969)
- 춘향전(후편) (1980)
- 우리 웃집 문제 (1980) - 봉녀 역
- 두 선장 (1982) - 정실 어머니 역
- 우리는 모두 한가정 (1983) - 봉녀 역
- 돌아오지 않은 밀사 (1984)
- 생명수 (1985) - 대성 어머니 역
- 은비녀 (1985)
- 봄날의 눈석이 (1986)
- 위대한 품 (1986) - 안창호 어머니 역
- 광주는 부른다 (1986) - 문익상의 처 역
- 민족의 태양 2부 (1988) - 전라도집 역
- 심장에 남는 사람 (1989) - 남혜 어머니 역
- 효녀 (1991)
- 새 (1992) - 최씨 역
- 우리 새 세대 (1996) - 할머니 역
- 먼 후날의 나의 모습 (1997) - 할머니 역
3.2. 연극
- 부자와 양반 (1931) - 새서방 역
4. 엇갈리는 평가
문예봉에 대한 자료가 이렇게 갈팡질팡인 것은 그녀가 월북 후 철저히 북한 노선을 걸었기 때문에 남한에서 오랫동안 금기시되어왔기 때문이다. 이미 북한이 만든 최초의 극영화에서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고, 김일성에게 갖은 격찬을 다 받았으며, 실제로 같은 월북 영화인인 강홍식[22]의 불우한 최후와는 달리 비해 중간에 잠시 영화활동을 접은 시기 빼고는 전체적으로 잘 살았다.[23] 설상가상으로 2000년대 친일 과거사 청산 열풍 탓에 그녀의 친일 행적이 밝혀짐에 따라 남한 측에서 문예봉을 연구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고, 2019년에 영화사 전문가 한상언이 쓴 논문 <해금할 수 없는 것을 해금하기>에 따르면 강홍식 외 다른 월북 영화인들처럼 일제강점기 때 찍은 필름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1988~1989년 월북 문화예술인 복권 때도 논외 취급을 받았다고도 한다.또한 북한 영화 상당수는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인 데다, 북한이 개방되지 않는 한 실질적으로 구할 수 있는 자료가 없어서 카더라만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북한 연구에 있어서 북한 영화는 비인기 분야[24]라서 정도가 더하다.
5. 대중매체에서
- 1984년 KBS1 6.25 연속기획 9탄 <함정>에선 배우 한은진이 연기했다.
- 1986년 MBC 다큐멘타리 드라마 <북으로 간 여배우(신봉승 극본, 김종학 연출)>에선 배우 권재희가 연기했다.
- 2001년 KBS 주말연속극 <동양극장>에선 배우 정선경이 연기했는데, 임선규(권해효 분)가 주인공 황철(이재룡 분)의 막역지우로 주연 중 한명이었기에 스토리상 비중은 적어도 이래저래 등장은 많이 했다. 문예봉의 함경도 억양을 재현했다.
- 2003년 SBS 대하드라마 <야인시대>에서도 등장하나 배우는 미상이며, 캐릭터로서의 내용은 문예봉(야인시대) 항목 참고.
- 2019년 영화 <말모이>에선 주인공 김판수가 팬이라는 내용이 언급된다.
6. 참고/관련 자료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항목
-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항목
- 문예봉전(월북 영화인 이야기 1권) - 한상언 저. 한상언영화연구소. 2019.
[1] 음력 1916년 12월 10일[2] 이 시기 미국의 감독 조제프 폰 스턴버그 (이름이 그래서 그렇지, 일종의 예명이였으며 14살에 미국에 이민 온 후 미국에서 경력을 시작해 영화를 만든 미국 감독이였다. 딱 한 편 독일에서 영화를 만들긴 했는데 그게 마를렌 디트리히를 발굴한 푸른 천사.)가 한국을 방문하여 문예봉을 조선의 마를렌 디트리히라며 격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article|default #[3]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1939년생 배우가 뜬다.[4] 이 때문인지 당대의 유명인들은 한 번 쯤은 음반을 녹음했는데, 그녀만은 음반을 녹음하지 않았다.[5] 일본에서 후시 녹음 작업 당시, 일본인 녹음 기사가 문예봉의 투가리 깨지는 목소리를 듣고 매우 당황했다고 한다.[6] 내가 고자라니의 영향으로 님을 이 사람이 썼다고 알려졌지만 님의 작가는 박영호다.[7] 당시 17세였고 첫 아이를 알았을 때 18세였다. 요즘이라면 결혼 자체를 못 할 나이지만 당시에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면 결혼하는 게 흔한 일이었다.[8] 홍도야 울지 마라가 이 희곡의 주제곡이다.[9] 타의적, 자의적 친일 요소가 들어있다.[10] 당시에는 항생제가 없어서 결핵은 상당히 위험한 질병이었다.[11] 역시 일제시대부터 유명한 배우였다가 내각 문화상까지 하였던 박영신도 숙청되어 실종되었다.[12] 임선규의 최후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사망 연도도 분명치 않으나 친일인명사전에는 1968년 사망했다고 나와 있고 1970년을 전후로 사망했다고 추정된다.[13] 김정일은 1960년대 당시 조선로동당 중앙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면서, '구시대(봉건의 잔재가 남아있는) 작가, 예술인들의 철저한 소탕'을 활동 목표로 규정했고, 이 과정에서 문예봉은 복고주의와 감상주의, 허무주의를 비롯해서 숙청대상인 다른 문화예술인들과 맞물려 숙청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이런 예술인들을 상당수 복권해준 것 역시 김정일이었다.[14] 월매로 출연한 배우는 월북배우 김선영이었다.[15]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숙청돼서 쫓겨났었기 때문에 같이 월북했던 다른 배우들에 비해 인민배우 칭호가 늦었다.[16] 1922년생, 경기도 출신으로 월북 이후 배우활동을 하지 않고 인민군에 복무했으며 조선로동당 중앙간부학교까지 졸업했다. 북한에서는 1970년에 데뷔했고 1982년 인민배우가 되었다.[17] 1914년생, 충청도 출신으로 6·25전쟁 중인 1950년 월북하여 1977년 인민배우가 되었다. 1995년 사망했다.[18] 1920년생, 강원도 출신으로 해방 후 좌익극단에서 활동하다가 월북했다. 다른 월북배우들보다도 대접이 좋았는데, 문예봉이 인민배우가 되기도 전인 1980년 김일성훈장을 받았고 1993년 로력영웅까지 되었다. 남한에 여동생들이 있으며 2007년 사망했다.[19] 평안북도 출신으로, 남한에 아들인 양택조를 남겨둔 채 남편 황철과 월북하였다. 1984년 인민배우가 되었고 1990년 사망했다.[20] 여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남한에서 아리랑에 출연하였던 원로 여배우 신일선이 불우한 말년을 보낸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어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한다는 소식을 들은 북한이 선전에 써먹을 목적으로 문예봉을 잘 대해준 것이다.[21] 문예봉 외에 월북 여가수 왕수복도 팔순잔치에서 김정일의 생일상을 받았다.[22] 아내는 눈물의 여왕이라 불린 배우 전옥, 딸은 최무룡의 전처인 배우 강효실로, 외손자가 바로 최민수이다.[23] 사실 수용소에 가지 않은것만 해도 '낡은 사상, 잔재 청산'에 걸려든것 치곤 굉장히 좋은 취급을 받은것이다.[24] 어쩌면 북한 영화계의 전형적 특징이라서도 있다. 북한에서 하는 선전 연극/영화는 대부분 수령님의 은덕으로 경제 발전에 부국 강병하니 모든 일이 만사형통이라 형식에서 적당히 여러 부분으로 형식만 바꾸는 정도이고 지도자 바뀌면 바뀐 지도자의 은덕도 찬양하자 식인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