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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5 23:35:34

이근석

파일:대한민국 공군 마크.svg
대한민국 공군 창설 간부 7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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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덕 김정렬 김영환 박범집 이근석 장덕창 이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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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렬
2대
이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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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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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승배
※ 초대의 당시 직함은 육군항공사관학교장이었으며, 2대 이근석 교장부터 공군사관학교장으로 직함이 변경됨
※ 초대~26대, 39대 : 소장 또는 소장 이하 / 27대~현임 : 중장
※ 관련 직위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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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태극무공훈장 약장.png
태극무공훈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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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태극무공훈장 부장.png
||<tablewidth=100%><table bgcolor=#fff,#191919><tablecolor=#373a3c,#ddd><width=20%> 1950
더글라스 맥아더
미 육군원수 ||<width=20%> 1951
이근석
공군준장 ||<width=20%> 1951 1953중복수훈
백선엽
육군대장 ||<width=20%> 1951 1953중복수훈
정일권
육군대장 ||<width=20%> 1951
심일
육군소령 ||
1951
이명수
육군일등상사
1951
김용식
육군일병
1951
홍재근
육군일병
1951
홍재근
육군일병
1951
김용배
육군준장
1951
박노규
육군준장
1951
김백일
육군중장
1951
김홍일
육군중장
1951
함준호
육군중장
1951 1953중복수훈
손원일
해군중장
1951
최용남
해병소장
1951
김성은
해병중장
1951 1952중복수훈
김정렬
공군중장
1952
이형근
육군대장
1951
권동찬
육군준장
1952
김종오
육군중장
1952 1953중복수훈
신현준
해병중장
1953
장덕창
공군중장
1953
최용덕
공군중장
1953
마크 클라크
미 육군대장
1953
김교수
육군대위
1953
김한준
육군대위
1953
김용배
육군대장
1953
민기식
육군대장
1953
임충식
육군대장
1953
한신
육군대장
1953
김점곤
육군소장
1953
이성가
육군소장
1953
이용문
육군소장
1953 1954중복수훈
임부택
육군소장
1953 1954중복수훈
강문봉
육군중장
1953
김동빈
육군중장
1953
김종갑
육군중장
1953
백인엽
육군중장
1953 1954중복수훈
송요찬
육군중장
1953
유재흥
육군중장
1953
최영희
육군중장
1953
함병선
육군중장
1953
최치환
총경
1954
김만술
육군대위
1954
허봉익
육군대위
1954
김경진
육군소령
1954
김웅수
육군소장
1954
송석하
육군소장
1954
엄홍섭
육군소장
1954
임선하
육군소장
1954
백재덕
육군이등상사
1954
최득수
육군이등상사
1954
김옥상
육군일병
1954
조재미
육군준장
1954
안낙규
육군중사
1954
박병권
육군중장
1954
이응준
육군중장
1954
이준식
육군중장
1954
장도영
육군중장
1954
최석
육군중장
1954
최창언
육군중장
1954
박옥규
해군중장
1954
김석범
해병중장
1955
김창룡
육군소장
1955
정긍모
해군중장
1956
서정학
이사관(치안국장)
1960
미군무명용사
-
1961
김금성
공군준장
1961
국군무명용사
-
1964
박정희
대통령
1966
이종세
육군상사
1966
강재구
육군소령
1966
이인호
해병소령
1967
송서규
육군대령
1967
채명신
육군중장
1967
지덕칠
해군중사
1967
정경진
해병대위
1967
신원배
해병소위
1968
최규식
경무관
1968
이익수
육군준장
1968
최범섭
육군중령
1970
이세호
육군중장
1972
이무표
육군대위
1972
임동춘
육군대위
1975
찰스 B. 스미스
미육군중령
1980
전두환(취소)
육군대장
2002
장철부
육군중령
2006
김영옥
미 육군대령
2011
조달진
육군소위
2021
에밀 카폰
미 육군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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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根晳
1917년 1월 17일 ~ 1950년 7월 4일 (향년 33세)

1. 개요2. 생애3. 전사에 대한 이야기4. 기타

1. 개요

대한민국군인. 창씨명은 아오키 모토미츠(青木根晳).

2. 생애

1917년 1월 17일 평안남도 평원군 청산면 구원리(現 평안남도 평원군 운봉리)에서 태어났다.

1933년 평양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이듬해인 1934년 일본 쿠마가야(熊谷)비행학교에 소년비행병 2기생으로 입교해 그곳에서 비행술을 배운 뒤 같은 해 졸업하였다. 그를 담당한 교관은 그가 조종술에 대단히 뛰어났다고 평했다고 한다. 이후 제64비행전대 요시오카(吉岡) 전투비행부대에 배속되었고, Ki-27 전투조종사로서 참전하여 첫 출격에서 격추를 기록하였으며 그때부터 관동군 부대에 배속되어 근무하였다. 만주에서 근무하면서 국민혁명군 소속 전투기 18대를 격추시키는 등의 활약을 하였다. 이후 제77비행전대 소속으로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전출되었으며 영국 공군을 상대로 5대를 추가로 격추시키는 기록을 세우게 되지만 1941년 12월 25일에 영국 공군 제67비행대대 소속의 브루스터 버팔로에게 격추되어 영국군포로가 되었고 이후 4년간 포로생활을 했다.[1]

8.15 광복 후 귀국하여 김정렬·최용덕·장덕창·이영무·박범집·김영환과 함께 공군 창설 7인 간부의 일원으로 항공부대의 창설에 기여하였다.[2] 그러나 미 군정은 그들의 경력을 인정하지 않아 조선경비대 보병학교에서 기초군사교육을 받아야 했다. 1948년 5월 5일에는 경기도 고양군 수색 소재 조선경비대 제1여단 사령부 내에 항공부대의 모체인 항공기지부대가 편성되어 통위부에 편입되었다. 이근석은 5월 14일 육군 소위임관하여 육군항공총감부에 배속. 7월 9일에 항공기지부대 초대 부대장이었던 백인엽 소령이 제4여단으로 전출되고 후임부대장으로 최용덕 대위가 부임되자 이근석은 군수참모로 업무를 수행하였다. 1949년 10월 1일공군육군으로부터 독립하여 나오자 제2대 공군사관학교 교장으로 부임해 1950년 5월 1일까지 역임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비행단장에 보임되어 당시 보유중이던 10대의 건국호(T-6)를 3개 편대로 편성, 직접 지휘하여 조선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하려고 시도하였다. 조선인민군의 공격 방향을 고려하여 3개 편대를 경기도 개성부(現 개성시파주군 임진면(現 파주시 문산읍) 방면과 양주군 의정부읍(現 의정부시)·양주군 이담면(現 동두천시포천군(現 포천시) 방면, 강원도 춘천시 방면으로 출격시켜 조선인민군을 정찰하는 정보획득·위협비행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단순 정찰로 적의 남하를 저지할 수 없음을 인지한 이근석 대령은 건국기 육군 병기창에서 제조한 15kg의 국산 폭탄을 싣고 저고도로 비행하며 적진에 투하하는 작전을 지시하여 직접 폭격을 하기도 하였다. 한국 공군의 공중폭격은 당시 한국 공군이 보유하고 있던 폭탄 274개 전량을 소모할 정도로 긴박하게 전개되었다.

한편 1949년 창설된 조선인민군 공군은 개전 당시 이미 항공기 200여 대와 2,200명의 병력을 갖추어 질적, 양적으로 한국 공군을 압도하고 있었고, 제대로 된 방공망도 구성되지 않은 남한 상공을 유유히 비행하여 개전 당일 서울특별시 상공에 진입, 전란에 대한 회의 중이던 국회의사당에 기총소사를 가하고 돌아가는 등 육군보다 한 발 앞선 위협으로 남한 사회의 혼을 빼놓고 있었다. 정부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미국에 군사원조를 요청하게 되었고, 예상 밖의 북한 남침에 놀란 주일미군사령부는 서둘러 원조를 결정하고 조종사들을 보내줄 것을 한국에 요청했다. 당시 한국 공군의 조종사는 교육 중이던 인원을 제외하고 64명이었으나, 훈련 없이 전투기를 조종할 수 있는 인원은 그 중에서도 극소수였다.

이근석은 한국 공군 조종사를 대표하여 전투기 인수단장으로 김영환·김신·장성환 중령, 강호륜·박희동 대위, 김성룡·정영진·이상수·장동출 중위 등 9명과 함께 일본 이타즈케 기지로 갔다. 당시 미 극동 공군이 보유한 P-80(F-80) 슈팅스타같은 제트전투기들은 2차 대전 프롭기만을 몰아본 국군 조종사들에게 당장 주어지기는 무리였고, 더구나 최신예 전투기들인 만큼 막 전쟁이 일어난 신생 국가의 공군에 이 전투기들이 공여될 리도 없었다. 결국 미 극동 공군이 보유하고 있던 또다른 기종인 2차대전 프롭기 F-51 머스탱이 한국 공군에 인도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머스탱들은 일선에서 물러나 예비 물자로 비축되거나 신예 제트전투기들의 훈련시 표적을 견인하는 용도 정도로만 쓰이고 있던 상황이어서 긴급한 재정비가 필요했다. 6월 27일 일본에 도착한 이근석 대령 일행은 T-6 연습기 2대로 유지비행을 실시한 후 정비를 마친 일부 F-51 전투기로 연습비행을 하려 했으나 기상상황으로 인해 지상교육만을 받았다.

인수단은 그렇게 미국에게 10대의 P-51 머스탱(F-51)을 인수하여 1950년 7월 2일에 돌아왔으며, 7월 3일[3] 세 차례 출격하여 임무를 수행했다. 이것이 한국 공군에서 최초로 전투기가 출격한 작전이었다. 대령 이근석을 편대장으로 김영환·김신·장성환 등의 편대출격(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영등포동·노량진동 방면)과 대위 박희동을 편대장으로 강호륜·김성룡·이상수의 편대출격(시흥군 방면), 대위 박희동을 편대장으로 장동출·정영진의 편대출격(영등포동 방면)이었다. 이때의 임무는 제3보병사단 이응준의 요청에 의한 대지 공격이었으며, 무장은 기총만 탑재하여 이루어 졌다. 목표지점에 비행중 충주 북방에서 이동 중인 적 기동부대에 공격을 퍼부어 상당한 피해를 입히고, 적정을 정찰한 뒤 대구 공군기지로 귀환하였다. 이 날 연료집적소 한 곳과 탄약집적소 한 곳 전소, 탱크 2대, 차량 2대를 파괴하였으며, 적병사살 약 35명 등의 전과를 거두었다.

다음날인 7월 4일, 육군으로부터 시흥군 안양읍(現 안양시) 지역에 남하하고 있던 조선인민군 기갑부대를 공격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이근석은 김영환·박희동·강호륜 등을 이끌고 편대를 구성하여 출격했고 이 기갑부대를 급강하 공격하던 중 경기도 시흥군 상공에서 적탄에 피격되어 추락해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1951년 9월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되었고 공군 준장으로 1계급 특진되었다. 유해는 1957년 4월 28일 국립서울현충원 제1장군 묘역에 이장되었다.

대구 K2 기지 정문을 들어서면 이근석 준장의 흉상이 있으며, 매년 이 곳에서 지역 보훈청장 및 기지 내 장군 및 장병들이 참가하는 추모식을 거행한다. 또한 정문 바로 옆 면회장의 명칭도 "이근석관"이며, 1층 면회실 벽에 F-51과 다른 조종사들과 함께 새겨진 부조 작품도 존재한다.[4]

3. 전사에 대한 이야기

그의 전사에 대한 이야기에는 다소 논란이 있다.
그중 하나는 지상공격 도중에 대공포에 피탄되자 그대로 조선인민군에게 충돌했다는 것인데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5] 주로 공군에서 주장하는 내용이다.
이어 2번기와 3번기의 공격이 계속됐고, 적의 탱크들은 화염에 휩싸인 채 오도 가도 못했다. 편대의 1차 공격을 끝내고 나머지 탱크에 재차 공격을 가하기 위해 이근석 대령은 급강하를 시작하며 로켓탄을 발사했다.

적 탱크를 폭파하고 기수를 올리려는 순간 난사하는 적의 포탄 중 한 발이 그가 조종하는 전투기의 엔진에 명중했다. 순식간에 기체는 붉은 화염으로 휩싸였고 도저히 수습할 길이 없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이근석 편대장은 정신을 가다듬고 푸른 하늘로 마지막 상승을 시도했다. 그는 지상의 적정을 살핀 후 뒤따르는 편대기에게 "3번기 도로 좌방 탄약차량 공격, 건투를 빈다"라고 강한 어조의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이와 동시에 그의 불붙은 기체는 하늘에 반원을 그리며 적 탱크를 향해 돌진해갔다. 이어 지상에서는 화산이 폭발하는 듯한 폭음이 진동했다.

또 다른 하나는 표적고착, 즉 지상 공격 도중에 고도를 회복하는 데 실패하고 지상에 충돌했다는 것이다. 비록 이근석 대령이 경험이 많은 조종사였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비행은 Ki-27로 했었는데[6] P-51은 Ki-27보다 훨씬 무겁고 조종특성이 다른 기체이다. 일례로 Ki-27은 지상 공격 시 강하고도가 1,400피트만 되어도 충분히 회복이 기능했지만 P-51은 최소한 2,000피트는 필요했다. 게다가 기종을 전환하는 일인 만큼 당연히 충분한 시간을 두고 훈련을 받아야 했지만 상황이 워낙 다급하다 보니 이근석 대령은 제대로 기종 전환 훈련도 받지 않은 상태로 출격한 상태였다.[7] 이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김정렬 장군은 한국 공군 조종사들의 출격을 중지시키고 미 공군 고문단에게 조종사의 훈련을 요청하게 되었다.

4. 기타

바우트-원이라는 만화에 나오는 이윤석 대령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다.

[1] 낙하산이 나무에 걸려서 매달려 있다가 잡혔다고 한다.[2] 군번 50003[3] 이날은 조종사의 날이기도 한데 다름아닌 이 첫 출격을 기리기 위해서라고 한다.[4] 이 부조 작품은 2000년대 초에 병사 6명이서 2개월간의 노력 끝에 완성시켰다고 한다.[5] 원문은 여기서 볼 수 있다.[6] 버펄로에 격추될 때 탑승한 기체도 Ki-27이었다.[7] 이·착륙 훈련만 간신히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