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21:23:56

송요찬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동명의 1965년생 정치인에 대한 내용은 송요찬(1965)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정부상징.svg
파일:외교부장관.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word-break: 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외무부장관 (1948~1998)
<nopad> 이승만 정부 <nopad> 허정 내각
초대
장택상
제2대
임병직
제3대
변영태
제4대
조정환
제5대
허정
<nopad> 장면 내각 <nopad> 장도영 내각 <nopad> 송요찬 내각 <nopad> 김현철 내각
제6대
정일형
제7대
김홍일
제8대
송요찬
제9대
최덕신
제10대
김용식
<nopad> 박정희 정부
제11대
정일권
제12대
이동원
제13대
정일권
제14대
최규하
제15대
김용식
<nopad> 박정희 정부 <nopad> 전두환 정부
제16대
김동조
제17대
박동진
제18대
노신영
제19대
이범석
제20대
이원경
<nopad> 전두환 정부 <nopad> 노태우 정부 <nopad> 문민정부
제21대
최광수
제22대
최호중
제23대
이상옥
제24대
한승주
<nopad> 문민정부
제25대
공로명
제26대
유종하
외교통상부장관 (1998~2013)
<nopad> 국민의 정부
제27대
박정수
제28대
홍순영
제29대
이정빈
제30대
한승수
제31대
최성홍
<nopad> 참여정부 <nopad> 이명박 정부
제32대
윤영관
제33대
반기문
제34대
송민순
제35대
유명환
제36대
김성환
외교부장관 (2013~현재)
<nopad> 박근혜 정부 <nopad> 문재인 정부 <nopad> 윤석열 정부
제37대
윤병세
제38대
강경화
제39대
정의용
제40대
박진
제41대
조태열
조선 예조판서 · 대한제국 외부대신 · 임시정부 외무부장 }}}}}}}}}
송요찬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224f 0%, #003478 20%, #003478 80%, #00224f); color:#C39335"
{{{#!wiki style="margin: 0 -10px -5px;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장도영 송요찬 박정희 김현철
}}}}}}}}}}}} ||

파일:정부상징.svg
파일:부총리 겸.svg
파일:기획재정부장관.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word-break: 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재무부장관 (1948~1994)
<nopad> 이승만 정부
초대
김도연
제2대
최순주
제3대
백두진
제4대
박희현
제5대
이중재
<nopad> 이승만 정부 <nopad> 허정 내각
제6대
김현철
제7대
인태식
제8대
김현철
제9대
송인상
제10대
윤호병
<nopad> 장면 내각 <nopad> 장도영 내각 <nopad> 송요찬 내각 <nopad> 박정희 내각
제11대
김영선
제12대
백선진
제13대
김유택
제14대
천병규
제15대
김세련
<nopad> 김현철 내각 <nopad> 박정희 정부
제16대
황종률
제17대
박동규
제18대
이정환
제19대
홍승희
제20대
김정렴
<nopad> 박정희 정부
제21대
김학렬
제22대
서봉균
제23대
황종률
제24대
남덕우
제25대
김용환
<nopad> 박정희 정부 <nopad> 전두환 정부
제26대
김원기
제27대
이승윤
제28대
나웅배
제29대
강경식
제30대
김만제
<nopad> 전두환 정부 <nopad> 노태우 정부 <nopad> 문민정부
제31대
정인용
제32대
사공일
제33대
이규성
제34대
정영의
제35대
이용만
<nopad> 문민정부
제36대
홍재형
제37대
박재윤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1961~1994)
<nopad> 송요찬 내각 <nopad> 박정희 내각 <nopad> 김현철 내각
초대
김유택
제2대
송요찬
제3대
김현철
제4대
김유택
<nopad> 김현철 내각 <nopad> 박정희 정부
제5대
유창순
제6대
원용석
제7대
김유택
제8대
장기영
<nopad> 박정희 정부
제9대
박충훈
제10대
김학렬
제11대
태완선
제12대
남덕우
<nopad> 박정희 정부 <nopad> 최규하 정부 <nopad> 전두환 정부
제13대
신현확
제14대
이한빈
제15대
김원기
제16대
신병현
<nopad> 전두환 정부
제17대
김준성
제18대
서석준
제19대
신병현
제20대
김만제
<nopad> 전두환 정부 <nopad> 노태우 정부
제21대
정인용
제22대
나웅배
제23대
조순
제24대
이승윤
<nopad> 노태우 정부 <nopad> 문민정부
제25대
최각규
제26대
이경식
제27대
정재석
제28대
홍재형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장관 (1994~1998)
<nopad> 문민정부
초대
홍재형
제2대
나웅배
제3대
한승수
제4대
강경식
제5대
임창열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재정경제부장관 (1998~2001)
<nopad> 국민의 정부
초대
이규성
제2대
강봉균
제3대
이헌재
제4대
진념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 (2001~2008)
<nopad> 국민의 정부 <nopad> 참여정부
초대
진념
제2대
전윤철
제3대
김진표
<nopad> 참여정부
제4대
이헌재
제5대
한덕수
제6대
권오규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기획예산처장관 (1999~2008)
<nopad> 국민의 정부 <nopad> 참여정부
초대
진념
제2대
전윤철
제3대
장승우
제4대
박봉흠
<nopad> 참여정부
제5대
김병일
제6대
변양균
제7대
장병완
기획재정부장관 (2008~2013)
<nopad> 이명박 정부 <nopad> 박근혜 정부
초대
강만수
제2대
윤증현
제3대
박재완
제4대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 (2013~현재)
<nopad> 박근혜 정부 <nopad> 문재인 정부
초대
현오석
제2대
최경환
제3대
유일호
제4대
김동연
<nopad> 문재인 정부 <nopad> 윤석열 정부
제5대
홍남기
제6대
추경호
제7대
최상목
임시정부 재무부장 }}}}}}}}}


파일:대한민국 국방부 심벌.svg
파일:국방부장관.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국방부장관 (1948~현재)
<nopad> 이승만 정부
초대

이범석
제2대

신성모
제3대

이기붕
제4대

신태영
제5대

손원일
<nopad> 이승만 정부 <nopad> 허정 내각 <nopad> 장면 내각
제6대

김용우
제7대

김정렬
제8대

이종찬
제9대

현석호
제10대

권중돈
<nopad> 장면 내각 <nopad> 장도영 내각 <nopad> 송요찬 내각 <nopad> 김현철 내각
제11대

현석호
제12대

장도영
제13대

송요찬
제14대

박병권
제15대

김성은
<nopad> 박정희 정부
제16대

최영희
제17대

임충식
제18대

정래혁
제19대

유재흥
제20대

서종철
<nopad> 박정희 정부 <nopad> 최규하 정부 <nopad> 전두환 정부
제21대

노재현
제22대

주영복
제23대

윤성민
제24대

이기백
제25대

정호용
<nopad> 노태우 정부 <nopad> 문민정부
제26대

오자복
제27대

이상훈
제28대

이종구
제29대

최세창
제30대

권영해
<nopad> 문민정부 <nopad> 국민의 정부
제31대

이병태
제32대

이양호
제33대

김동진
제34대

천용택
제35대

조성태
<nopad> 국민의 정부 <nopad> 참여정부
제36대

김동신
제37대

이준
제38대

조영길
제39대

윤광웅
제40대

김장수
<nopad> 이명박 정부 <nopad> 박근혜 정부 <nopad> 문재인 정부
제41대

이상희
제42대

김태영
제43대

김관진
제44대

한민구
제45대

송영무
<nopad> 문재인 정부 <nopad> 윤석열 정부
제46대

정경두
제47대

서욱
제48대

이종섭
제49대

신원식
제50대

김용현
대한제국 군부대신 · 임시정부 군무부장
※ 관련 직위 둘러보기
}}}}}}}}}

파일:liujuncanmou_2.png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wiki style="margin:-0px -11px -5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000,#DDD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파일: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대장.svg
초대
파일: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소장.svg
이응준
제2대
파일: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소장.svg
채병덕
제3대
파일: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소장.svg
신태영
제4대
파일: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소장.svg
채병덕
제5대
파일: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중장.svg
정일권
제6대
파일: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중장.svg
이종찬
제7대
파일: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중장.svg
백선엽
제8대
파일: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중장.svg
정일권
제9대
파일: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중장.svg
이형근
제10대
백선엽
제11대
파일: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중장.svg
송요찬
제12대
파일: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중장.svg
최영희
제13대
파일: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중장.svg
최경록
제14대
파일: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중장.svg
장도영
제15대
김종오
제16대
민기식
제17대
김용배
제18대
김계원
제19대
서종철
제20대
노재현
제21대
이세호
제22대
정승화
제23대
이희성
제24대
황영시
제25대
정호용
제26대
박희도
제27대
이종구
제28대
이진삼
제29대
김진영
제30대
김동진
제31대
윤용남
제32대
도일규
제33대
김동신
제34대
길형보
제35대
김판규
제36대
남재준
제37대
김장수
제38대
박흥렬
제39대
임충빈
제40대
한민구
제41대
황의돈
제42대
김상기
제43대
조정환
제44대
권오성
제45대
김요환
제46대
장준규
제47대
김용우
제48대
서욱
제49대
남영신
제50대
박정환
제51대
박안수
}}}}}}
※ 초대~제8대: 육군총참모장 / 제9대~현재: 육군참모총장
※ 관련 직위 둘러보기
}}}}}}}}}

{{{#!wiki style="margin: -7px -10px"
{{{#!wiki style="margin:-6px 0px; display:inline-table"
<tablebordercolor=#063><tablebgcolor=#063>
파일:지상작전사령부 부대마크.svg
}}} {{{#!wiki style="margin: -5px -2px; display: inline-table;"<tablebordercolor=#063><tablebgcolor=#063>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181818,#e5e5e5
파일: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대장.svg
초대
백선엽
2대
송요찬
3대
유재흥
4대
김종오
5대
이한림
6대
박임항
7대
민기식
8대
장창국
9대
김계원
10대
서종철
11대
한신
12대
최세인
13대
이소동
14대
정승화
15대
김학원
16대
윤성민
17대
김윤호
18대
소준열
19대
정진권
20대
안필준
21대
정호근
22대
이진삼
23대
이문석
24대
조남풍
25대
이준
26대
오영우
27대
이재관
28대
김석재
29대
김판규
30대
김종환
31대
정수성
32대
김병관
33대
김태영
34대
김근태
35대
정승조
36대
박정이
37대
박성규
38대
신현돈
39대
장준규
40대
김영식
41대
박종진
지상작전사령부 통합 이전
※ 명칭 변천: 제1군사령관(초대~37대) ▸ 제1야전군사령관(37대~41대)
※ 관련 직위 둘러보기 }}}}}}}}}}}}}}}

파일:태극무공훈장 약장.png
태극무공훈장 수훈자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D02E3A, #D02E3A 20%, #D02E3A 80%, #D02E3A); color: #fff"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태극무공훈장 부장.png
||<tablewidth=100%><table bgcolor=#fff,#191919><tablecolor=#373a3c,#ddd><width=20%> 1950
더글라스 맥아더
미 육군원수 ||<width=20%> 1951
이근석
공군준장 ||<width=20%> 1951 1953중복수훈
백선엽
육군대장 ||<width=20%> 1951 1953중복수훈
정일권
육군대장 ||<width=20%> 1951
심일
육군소령 ||
1951
이명수
육군일등상사
1951
김용식
육군일병
1951
홍재근
육군일병
1951
홍재근
육군일병
1951
김용배
육군준장
1951
박노규
육군준장
1951
김백일
육군중장
1951
김홍일
육군중장
1951
함준호
육군중장
1951 1953중복수훈
손원일
해군중장
1951
최용남
해병소장
1951
김성은
해병중장
1951 1952중복수훈
김정렬
공군중장
1952
이형근
육군대장
1951
권동찬
육군준장
1952
김종오
육군중장
1952 1953중복수훈
신현준
해병중장
1953
장덕창
공군중장
1953
최용덕
공군중장
1953
마크 클라크
미 육군대장
1953
김교수
육군대위
1953
김한준
육군대위
1953
김용배
육군대장
1953
민기식
육군대장
1953
임충식
육군대장
1953
한신
육군대장
1953
김점곤
육군소장
1953
이성가
육군소장
1953
이용문
육군소장
1953 1954중복수훈
임부택
육군소장
1953 1954중복수훈
강문봉
육군중장
1953
김동빈
육군중장
1953
김종갑
육군중장
1953
백인엽
육군중장
1953 1954중복수훈
송요찬
육군중장
1953
유재흥
육군중장
1953
최영희
육군중장
1953
함병선
육군중장
1953
최치환
총경
1954
김만술
육군대위
1954
허봉익
육군대위
1954
김경진
육군소령
1954
김웅수
육군소장
1954
송석하
육군소장
1954
엄홍섭
육군소장
1954
임선하
육군소장
1954
백재덕
육군이등상사
1954
최득수
육군이등상사
1954
김옥상
육군일병
1954
조재미
육군준장
1954
안낙규
육군중사
1954
박병권
육군중장
1954
이응준
육군중장
1954
이준식
육군중장
1954
장도영
육군중장
1954
최석
육군중장
1954
최창언
육군중장
1954
박옥규
해군중장
1954
김석범
해병중장
1955
김창룡
육군소장
1955
정긍모
해군중장
1956
서정학
이사관(치안국장)
1960
미군무명용사
-
1961
김금성
공군준장
1961
국군무명용사
-
1964
박정희
대통령
1966
이종세
육군상사
1966
강재구
육군소령
1966
이인호
해병소령
1967
송서규
육군대령
1967
채명신
육군중장
1967
지덕칠
해군중사
1967
정경진
해병대위
1967
신원배
해병소위
1968
최규식
경무관
1968
이익수
육군준장
1968
최범섭
육군중령
1970
이세호
육군중장
1972
이무표
육군대위
1972
임동춘
육군대위
1975
찰스 B. 스미스
미육군중령
1980
전두환(취소)
육군대장
2002
장철부
육군중령
2006
김영옥
미 육군대령
2011
조달진
육군소위
2015
윌리엄 스피크먼
영 육군병장
2021
에밀 카폰
미 육군대위
2023
랄프 퍼켓
미 육군대령
}}}}}}}}} ||
대한민국 제13대 국방부장관
대한민국 제8대 외무부장관
송요찬
宋堯讚 | Song Yo-chan
파일:Song_Yo_Chan.jpg
<colbgcolor=#003764><colcolor=white> 출생 1918년 2월 13일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매산리
사망 1980년 10월 18일 (향년 62세)
일리노이 주 쿡 카운티
시카고 시 로욜라 대학병원
묘소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광평리
본관 여산 송씨
석호(石虎)
재임기간 제11대 육군참모총장
1959년 8월 7일 ~ 1960년 5월 22일
제13대 국방부장관
1961년 6월 12일 ~ 1961년 7월 10일
제8대 외무부장관[1]
1961년 7월 22일 ~ 1961년 10월 10일
제2대 경제기획원장
1962년 3월 2일 ~ 1962년 6월 18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03764><colcolor=white> 부모 아버지 송영각, 어머니 전주 이씨
형제자매 누나 3명, 형 1명, 여동생 3명
배우자 권영각(權寧珏)
자녀 슬하 2남 2녀
학력 화성공립보통학교[2] (졸업)
대전중학교 (졸업)
통위부 보병학교 (졸업)
미국 육군참모대학교 (졸업)
국방대학교 (행정학 / 학사)
조지 워싱턴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 석사)
경력 대한민국 내각수반
제13대 국방부 장관
제8대 외무부 장관
제2대 경제기획원장
군사 경력
임관 군사영어학교 (1기)
복무 일본 제국 육군
1938년 ~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 육군
1946년 ~ 1960년 5월 22일
최종 계급 중장 (대한민국 육군)
최종 보직 육군참모총장
주요 보직 제9보병연대장
제10보병연대장
헌병사령관
대구방위사령관
수도사단장
남부지구경비사령관
제8보병사단장
제1야전군사령관
}}}}}}}}}
1. 개요2. 생애
2.1. 일제강점기광복 직후2.2. 제주 4.3 사건2.3. 제주 4.3 사건 이후 및 6.25 전쟁2.4. 전후와 4.19 혁명
3. 평가4. 여담5. 대중매체에서6. 선거 이력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제13대 국방부장관과 제8대 외무부장관, 제2대 경제기획원장을 지낸 군인, 정치인.

미군으로부터 '타이거 송'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거침없는 맹장이었다. 다른 별명으로는 돌머리라는 뜻의 석두(石頭)가 있다.[3][4]

행적에 논란이 많은 인물로 제주 4.3 사건 당시 반인륜적 범죄를 자행한 학살자라는 평과 동시에 6.25 전쟁 때 맹활약한 맹장이자 4.19 혁명의 숨은 공로자라는 엇갈린 면모가 존재한다.

2. 생애

2.1. 일제강점기광복 직후

본관은 여산으로 1918년 2월 13일 충청남도 청양군에서 출생하여 일본군 지원병으로 입대했고 일본 육군 군조(상사)까지 진급하였다. 창씨명은 나카무라 사다오. 광복 후에는 최경록 장군의 도움을 받아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1946년 5월 1일 육군 참위(현재 계급으로 소위)로 임관하였다.

임관 후 부산에서 제5연대 창설요원으로 활동하다가 그 해 9월 5일 제5연대의 일부 병력을 중심으로 강릉에 제8연대를 창설하게 되자 강릉으로 이동했는데 이후 강릉에서 대위로 진급했고 1947년 3월 1일부로 제8연대 제3대대장의 지휘를 맡게 된다.

소령 진급 후 제1연대를 거쳐 1948년 6월 11연대 부연대장으로 임명되어 제주도에서 공비 토벌 임무(제주 4.3 사건 진압 작전)를 수행 중에 제9연대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육군 중령으로 진급하였다.

2.2. 제주 4.3 사건

해안선에서 거리가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역을 비워서 유격대를 고립시킨다는 것이 초토화 개념의 작전인데 그의 제9연대는 모든 중산간마을을 태워 버린 건 물론이고 거기 사는 주민들은 '모두 유격대를 도와주고 편의를 제공'한다고 가정하고 주민들을 대량학살한다는 계획을 골랐다.[5]

중산간마을 주민들에게 소개령(疎開令)을 내렸는데 토벌대는 미처 내려오지 못한 주민들은 물론 소개령이 아직 안 내려졌거나 아직 내려받지 못한 마을에 사는 주민들까지 모조리 살해했다.[6]

초토화 작전 시기에는 중산간마을 사람이 아니라도 청년들을 재판도 없이 총살하는 게 흔했는데 중산간마을에서 해안마을로 도피해온 사람들도 청년이 없으면 '도피자 가족'이라 해서 모두 죽이기도 했다. 역시 원래부터 해안선이나 그 가까이 마을에 살던 주민들도 가족 중에서 청년이 없으면 마찬가지로 모두 죽였다.[7]

다음은 당시 토벌대로 복무한 이들의 증언이다.
[ 펼치기 · 접기 ]
||난 9연대 군수참모로 제주에 갔습니다. 당시 인사참모는 최세인, 정보참모는 탁성록, 작전참모는 한영주였습니다. 제주에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인데, 하루는 직속 부하인 구매관 강의원(姜義遠‧육사 4기생)이 안 보이는 겁니다. 알아보니 송요찬 연대장의 지시에 의해 처형됐다는 겁니다. 난 9월 1일부로 대위 진급을 했는데 9월의 어느 날 연대장이 부르더니 다짜고짜 '너 재판장 해라. 이놈을 죽여야 돼!'라고 했습니다. 누군지도 모르고 범죄 사실도 모르는 사람에게 덮어놓고 사형 언도를 하라는 겁니다. 사관학교에서 군법회의에 대해 몇 시간 배우긴 했지만 재판을 해본 일도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요. 재판정에 나가보니 얼마나 고문을 당했는지 사람이 반쯤 죽어 있었어요. 피고인은 '제주도지사였던 박경훈'이었습니다. 도지사 관사에서 쌀 한 말을 공비에게 줬다는 게 범죄 사실이었지요. 쌀 한 말에 사람의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릴 적 시골에서 쌀 창고 열쇠는 늘 할머니가 갖고 다니던 게 기억 나 "피고가 직접 쌀을 주었느냐?"고 물었지요. 이에 당시 57~58세가량 된 박경훈 지사는 "아닙니다. 저도 구속돼 조사 받는 과정에서 알게 됐습니다. 우리 집사람 친척이 와서 굶어죽게 됐으니 도와달라고 해서 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하더군요. 아무리 도지사 관사에서 쌀이 나왔다 하지만 부인의 행위를 책임질 수는 없으므로 무죄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법무관 등 몇 사람과 평의에 들어갔지요. 어떤 사람은 "사형 집행을 하라고 하는데 한 20년 어떻습니까?"라고 했습니다. 15년을 말하는 이도 있고, 10년을 말하는 이도 있고. 고심 끝에 심판관들에게 "이건 무죄이지만 부인을 데려다 사형을 한다고 하면 곤란하니까 한 3년이 어떻겠소?"라고 제안하고 동의를 얻어 3년을 언도했습니다. 아직도 무죄인 사람에게 3년형을 언도한 것이 양심에 가책이 됩니다.

어쨌든 재판 결과를 연대장에게 보고했더니 이 공산당 같은 놈의 새끼!"라며 철모로 나를 갈기는 겁니다. 하도 맞아서 머리가 크게 부었습니다. 같이 재판에 참여했던 최세인 인사참모도 많이 맞았습니다. 그리고 헌병대장 송효순은 동기생인데 매일 술을 먹고 괴로워했습니다. 물어봐도 말은 안 하고. 그런데 들리는 이야기로는 헌병들이 사람들을 동굴에 몇 십 명씩 데려다놓고 갈긴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민한 것 같습니다. 그는 굉장히 착한 사람이거든요. 결국 손을 써서 중간에 제주를 떠났습니다. 또 한영주 작전참모는 밤낮으로 연대장에게 맞았습니다.

- 김정무(77세,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당시 제9연대 군수참모, 준장 예편, 육사2기 동기회장. 2002. 9. 25. 채록)의 증언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보고서, 235||
본도의 치안을 파괴하고 양민의 안주를 위협하여 국권 침범을 기도하는 일부 불순분자에 대하여 군은 정부의 최고 지령을 봉지(奉持)하여 차등(此等) 매국적 행동에 단호 철추를 가하여 본도의 평화를 유지하며 민족의 영화와 안전의 대업을 수행할 임무를 가지고 군은 극렬자를 철저 숙청코자 하니 도민의 적극적이며 희생적인 협조를 요망하는 바이다. 군은 한라산 일대에 잠복하여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는 매국 극렬분자를 소탕하기 위하여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 종료기간 중 전도 해안선부터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此)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 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임. 단, 특수한 용무로 산악지대 통행을 필요로 하는 자는 그 청원에 의하여 군 발행 특별통행증을 교부하여 그 안전을 보증함.

- 조선일보, 1948년 10월 20일
Ibid, 264
이 포고문 속에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대목들이 들어 있다. 우선 제주도의 지형상 진압대상 지역으로 설정한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외의 지점'은 한라산 등 산악지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해변을 제외한 중산간마을[8] 전부가 해당된다.

- Ibid, 264
9연대는 한라산 쪽을 향해서 내륙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적으로 간주했다.

- Harold Fischgrund(81세, 미국 버지니아 주, 당시 9연대 고문관, 2001. 10. 20 채록) 증언
Ibid, 265
당시 계엄령은 법적 근거도 없는 모호한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계엄사령관인 송요찬조차도 계엄령이 뭔지 몰랐으니까요. 하루는 홍순봉 경찰청장과 함께 있는데 송요찬이 찾아왔어요. 우리 세 명은 일제만주군일본군에서 같이 복무했고, 해방 후에도 함께 경찰전문학교에 근무한 적이 있어서 서로 잘 아는 사이였지요. 송요찬은 홍순봉에게 '위에서 계엄령을 내리라고 하는데 어떡해야 하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계엄령이라면 무슨 근거가 있어야 하고 구체적 지침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송요찬도 답답한 노릇이었지요. 또 송요찬은 무식한 편이었습니다. 반면에 홍순봉은 일제경찰로서 만주에서 근무할 때 조선인 중에서는 최고직책을 얻을 정도로 실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튼 홍순봉이 계엄령이니, 포고령이니 하는 것들을 모두 대신 써주었습니다. 그런데 중산간이라고 해서 무조건 죽인다는 것은 계엄령이라고 해도 안 되지요. 일제 때 만주에선 그런 게 있긴 했습니다. 특정 지역을 설정해 무조건 발포하는 것이지요.

- 김호겸(서귀포경찰서장 역임)의 증언 (제민일보 4‧3취재반, 앞의 책, 377~378쪽)
Ibid, 280
송요찬 연대장은 초토화 작전을 폈다. 거처 가능한 곳을 없애라, 또는 불태워 버리라고 했는데 이런 건 육지에서도 없었다. 초토화 작전이 상부의 지시인지 또는 연대장 독단인지는 모르겠지만, 송요찬 연대장은 일본군 출신으로서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였다.

- 윤태준, 73세, 서울시 동대문구 전농동, 당시 제9연대 보급과 선임하사, 중령 예편, 2001. 5. 2. 채록 증언
Ibid, 294

위의 증언들에서 확인 가능하듯이 그는 제주 4.3 사건 당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학살을 저지른 주범 중 하나다.[9]

산악지역을 근거지로 유격전을 하는 무장부대를 상대로 할때 해당 지역의 민간인 마을을 모두 비우고 물자를 불태워서 게릴라부대의 보급을 끊는다는 초토화 작전(청야 전술)은 기본적으로 상당히 유용한 방법이지만 이때 민간인들은 모두 후방지역으로 이동시켜서 게릴라부대와 차단하는 것이 정석이지 무차별 학살하는 것은 명백한 전쟁범죄이며 오히려 민심이 게릴라 부대로 향하게 만들어 주는 짓이다.[10]

2.3. 제주 4.3 사건 이후 및 6.25 전쟁

제11연대의 제주도 평정작전 임무를 인수받아 수행하던 중 1949년 2월 제9연대 수도여단(여단장 이준식 대령)에 배속되어 서울특별시로 이동하였으며 같은 해 6월 강릉에 주둔하고 있는 제6사단 제10연대장으로 전보되었다.

그는 제10연대장 재직 시 '양양 돌입 사건'[11]을 주도해 7월 24일 해임되었으나 군사재판은 면했다. 이후 육군보병학교 학생감과 제5사단 제15연대장을 거쳐 1949년 4월 최영희 대령 후임으로 헌병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좌천되었던 그를 살린 것은 전쟁이었다. 헌병사령관이었던 그는 전쟁 발발 당시 적의 공세에 밀려 대한민국 국군한강 이남으로 후퇴하자 헌병들을 진두지휘, 낙오병을 수습하여 국군을 재편성하는 데 기여하였지만 이 과정에서도 정부의 지시에 따라 보도연맹원, 좌익사범, 장기형 기결수, 미결수, 심지어 형기가 얼마 남지 않은 사람까지 모조리 골령골로 끌고 가서 처형함으로써 더 많은 학살을 수행했다. KBS대전 6.25 UHD 특별기획 골령골, 묻혀버린 진실 2부 '감춰진 이름들'

1950년 8월 10일 대구방위사령관에 임명되어 임시수도인 대구를 지키는 데 전력을 다했다. 그 해 9월 1일 백인엽 대령[12]의 후임으로 수도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여기서 그는 안강-기계 전투와 뒤이어 벌어진 영천 전투에서 북한군의 경주 침투를 저지해 후방의 안전을 확보하고 1군단이 반격작전에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는데 그 전공으로 9월 20일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수도사단은 이후 북진작전에서 회양, 신고산, 원산 점령에 이어 함흥, 흥남을 거쳐 (연해주-만주) 국경 인근까지 진출하는 등 맹활약하는데 이러한 수도사단의 활약은 그의 지휘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러나 소만 국경을 목전에 두고 그의 수도사단중공군의 남하로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된다. 1950년 12월 18일 흥남에서 묵호항으로 상륙한 수도사단은 1951년 1월 27일 다시 강릉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주로 동해안을 중심으로 한 동부전선에서 활약하다가 중공군 5월 공세 당시 백선엽 소장의 명을 받고 적의 좌측 돌파구에 해당하는 대관령을 점령해 적의 강릉 진출 기도를 봉쇄하는 등의 활약을 했다.[13]

월비산 전투를 승리로 이끈 후 1951년 11월 15일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토벌을 위해 편성된 백야전전투사령부(사령관 백선엽 소장)에 배속되어 작전을 실시했다. 이듬해 1952년에는 새로 재편된 제2군단(역시 사령관 백선엽 소장)에 배속되어 춘천 북방으로 이동해 수도고지 전투 등을 수행했다. 1952년 7월 8일 육군 소장으로 진급한 그는 수도사단의 지휘권을 이용문 장군에게 인계하고 전라북도 남원에 주둔하고 있던 남부지구경비사령부의 초대 사령관으로 영전했다. 그러나 1952년 10월 8일 다시 수도사단장으로 전보되어 지형능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 무렵 그는 도미 유학 대기 중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로 전황이 아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금성의 동남방의 방어를 담당하던 제8보병사단의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금성천 이북까지 진출해 최후의 대공세였던 1953년 7월 13일 공산 측의 공세를 물리치고 휴전선의 확정에 전략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국군이 확보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2.4. 전후와 4.19 혁명

미 지휘참모 대학, 3군단장, 육군 중장 진급, 제1야전군사령관(1957년)을 거쳐 1959년 2월 백선엽 대장의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임무를 수행하다가 4.19 혁명 때는 이승만 대통령이 내린 비상계엄 지시에 따라 군 병력을 서울 시내에 진주시키기는 했지만 절대 무력 사용을 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려 4.19 혁명 성공에 도움을 주었다. 설송웅 등의 증언에 의하면 4월 26일 하야 성명 발표 직전 경무대에서 학생 및 시민대표 5인[14]의 이승만 면담을 직접 주선하여 사실상 이승만의 하야에도 직간접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15][16]

하지만 4.19 직후 김종필 등 젊은 장교들의 정군 운동에 따라 1960년 5월 23일 사임하고 14여 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정군 운동의 주역들은 함께 예편되었다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키면서 야심을 드러낸다. 5.16 군사정변 이후 장도영이 체포되자 그는 후임 국방부장관이 되었다. 이후 내각수반에 임명되자 국방부장관직을 사임하고 외무부장관으로 이임하여 내각수반 겸 외무부장관이 되었다가 내각수반직은 유지한 채 다시 경제기획원장[17]으로 이임해 내각수반 겸 경제기획원장이 되었다. 경제기획원장을 재임하던 중 증권파동이 일어나 책임자 추궁과 체포를 강력히 주장했으나 중앙정보부의 공작인 줄 몰랐던 탓에 정권과 천병규 당시 재무부장관에게 무시를 당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그는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에게 사직서를 제출하고 야인으로 돌아갔다.

문제는 정권의 민정 이양 선언 후 각 정당이 정치 활동을 재개하는 시점에서 그는 다른 사람도 아닌 유진산에게 붙어 박정희의 대권 출마를 강력히 비난하면서 역린을 건드렸다는 것이다. 군사정권의 실세였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군사정권을 반대하는 야권 인사가 된 것이다. 이 사건 때문에 혁명동지들은 이후락 당시 공보실장에게 찍혀 나락으로 갈 뻔했다. 이후 인천제철 사장, 국정자문위원 등을 역임하다가 1980년 10월 18일에 미국 시카고 로욜라 대학병원에서 신장병으로 사망했다.

3. 평가

제주 4.3 사건의 학살자이자 6.25 전쟁의 영웅이며 4.19 혁명의 협력자. 창군 초기 제주 4.3 사건 때까지는 일본군 물이 그대로 들어있어서 일본군이 중국에서 한 짓제주도민들에게 그대로 했으나 6.25 전쟁 시기에는 선진 군대인 미군과 함께하게 되자 특유의 저돌적인 성향은 유지하면서 작전에 눈을 떠서 국군의 맹장으로 활약했으며 4.19 혁명 시기에 이르면 돌머리 장군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정치에도 눈을 뜬 모습을 보이며 시민 학살을 저지하고 이승만 하야에 협력한다. 어지럽던 광복~1960년대 한국사에서 명과 암을 동시에 지닌 생을 살아간 인물인데 2020년대 대한민국에서는 종합적으로 평가받지 못하고 각기 진영 논리에 따라 특정 부분만 내세워 평가하고 있다.[18]

4. 여담

5. 대중매체에서

6.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63 제5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파일:자유민주당1963.png
후보 사퇴
역대 선거 벽보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파일:5대대선 송요찬.jpg
5대 대선 }}}}}}}}}
역대 후보 이력
[ 펼치기 · 접기 ]
----
파일:대한민국 투표 도장 문양(흰색 테두리).svg 제5대 대통령 선거 후보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005BA6,#FFC224> 기호 정당 이름 비고
1 신흥당 장이석
2 자유민주당 송요찬 사퇴
3 민주공화당 박정희 당선
4 추풍회 오재영
5 민정당 윤보선
6 국민의당 허정 사퇴
7 정민회 변영태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

7. 둘러보기

제주 4·3 사건
{{{#!wiki style="color:#FFF; margin: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colbgcolor=#000><colcolor=#fff> 전개 배경 · 전개 · 진상규명운동
관련 인물
및 단체
<colbgcolor=#000000><colcolor=#fff> 무장대 남로당 제주도당 · 김달삼 · 이덕구
토벌대 <colbgcolor=#000><colcolor=#fff> 온건 김익렬 · 유재흥 · 문형순 · 임관호
강경 군경 · 서북청년회 · 대한청년단 · 조병옥 · 이승만 · 박진경 · 송요찬 · 함병선 · 탁성록 · 최난수
피해자 제주도민 · 김시범 · 이도종 · 이경선 · 무명천 할머니 · 제주 출신 재일교포 · 4.3 수형자 · 보도연맹원
예술가 현기영 · 김석범 · 강요배 · 오멸 · 이산하 · 김동리
기타 제주 4.3 연구소 · 문화에서의 4.3 · 학계에서의 4.3 · 제주 4.3 유적지 · 제주 4.3 길
유사 사건 방데 전쟁(프랑스) · 2.28 사건(대만) · 목호의 난 · 대구 10.1 사건 · 여수·순천 10.19 사건
}}}}}}}}} ||

양민학살과 관련된 대한민국 제1공화국 군인들
김종원 김창룡 송요찬 최덕신 탁성록

{{{#!wiki style="border-top: 0px none; border-left: 10px solid #000; border-right: 10px solid #000; text-align: center; margin: -6px -11px; padding: 7px; min-height: 34px"
{{{#!wiki style="margin: 0 -16px -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word-break: keep-all"
직위 명단
외무부장관 <colbgcolor=#ffffff,#1f2024><colcolor=#000> 김홍일송요찬최덕신김용식
내무부장관 한신박경원
재무부장관 백선진김유택천병규김세련황종률
법무부장관 고원증조병일장영순민복기
국방부장관 장도영송요찬박병권김성은
문교부장관 문희석김상협박일경이종우
건설부장관 박기석신태환박임항조성근
농림부장관 장경순류병현
상공부장관 정래혁유창순박충훈김훈
보건사회부장관 장덕승정희섭
교통부장관 김광옥박춘식김윤기
체신부장관 배덕진김장훈
공보부장관 심흥선오재경이원우임성희
내각사무처장 김병삼이석제 }}}
}}}}}}}}}


대한민국 계엄사령관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word-break: 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비상계엄
경비계엄
1회

비상

김백일
2회

비상

송요찬
3회

비상

정일권
4회

경비

정일권
5회

비상

정일권
6회

경비

정일권이종찬
7회

비상

이종찬
8회

비상

이종찬백선엽
9회

경비

송요찬
10회

비상

송요찬
11회

경비

송요찬최영희
12회

비상

장도영
13회

경비

장도영김종오
14회

비상

민기식
15회

비상

노재현
16회

비상

박찬긍
17회

비상

정승화이희성
18회

비상

박안수
}}}}}}}}} ||



[1] 내각수반 겸직 (1961년 7월 3일 ~ 1962년 6월 15일).[2] 지금의 화성초등학교.[3] 나중에 이를 알게 된 송요찬은 "내가 석두(石頭)면, 그놈들은 철두(鐵頭)"라고 말했다는 후문이 있다. 사람들이 자신을 '송석두' 장군이라 불러 실제로 이름이 '송석두'라고 아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루는 한 병사에게 "너 내 이름을 아느냐"라고 묻지 그 병사가 "네! 송석두 장군입니다!"라고 대답했고 그 말을 들은 송요찬 장군이 웃으며 "내가 석두면 너는 철두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4] 드라마 제2공화국에서는 머리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고지식하다는 의미로 석두라고 설명했다. 작 중 홍종철 중령 역의 탤런트 주현이 박정희 역의 이진수와 석두라고 이야기한다.[5] 1차 출처: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1097, April 1, 1949. 2차 출처: 4.3 진상조사서 449쪽.[6] 출처 4.3 진상조사서 378쪽~391쪽.[7] 출처: 4.3 진상조사서 391쪽~400쪽.[8] 제주의 마을은 '해변마을'과 '중산간마을'로 나뉜다. 「제주도개발특별법」 제2조에 따르면, 행정에서 중산간이란 '표고 200m 등고선에서 표고 600m 등고선 사이의 지역'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통상 해변에서 약 5km 이상 떨어진 지역의 마을을 '중산간마을'이라고 부른다. 5km 미만 지역의 마을이라 하더라도 해변을 따라 형성된 일주도로변의 마을보다 산 쪽에 위치해 있으면 보통 '중산간마을'이라 한다.[9] 그런데 2016년 11월 충남 청양군에서 송요찬의 생가, 동상, 비석 등을 복원 및 정비하는 선양사업을 추진하면서 논란이 되었다. 이에 4.3 단체들의 항의가 이어졌고 충남도청에서도 이 사업에 대한 행정적, 재정적 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선양사업이 철회되었다. 아직도 제주 4.3 사건의 인지도가 낮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10] 이것은 일본군이 중일전쟁 중에 행했던 신멸작전을 보면 알 수 있다.[11] 1949년 동해안에 배치된 한국군 제6사단 10연대가 북한 제38여단의 계속된 도발에 1949년 7월 4일 단독 북진해서 당시 북한 땅이었던 삼팔선 이북의 양양(정확히는 양양 남부 일부)으로 돌입하고 양양남대천 이남의 80고지와 더 북쪽의 기사문리(현 양양군 현북면)라는 곳까지 점령한 사건이다. 북한군은 일시 후퇴하는 척하면서도 술수를 부렸다. 바로 그물로 가린 어선에 위장한 병력들을 태워 남하, 그대로 국군의 후방을 기습 공격한 것. 이를 잘 물리쳤으면 좋았겠으나 한국군은 1개 중대 규모의 피해를 입는 대패를 맛보고 철수했다. 북한에서는 제2차 고산봉 전투라고 부른다.[12] 백선엽의 동생으로 인천대학교인천전문대학 등이 포함된 선인학원 이사장이었다. 망나니+막장으로 유명하다.#[13] 사실 송요찬은 백선엽 장군의 명령을 쌩까고 장시간 부대를 대기시켰다가 자칫 대관령 점령을 말아먹고 국군과 UN군의 전체 작전에 커다란 차질을 가져올 뻔했다. 참다못한 백선엽 장군이 직접 찾아가서 항명죄로 파면시키려고 하자 그제야 겁먹고 부대를 움직였다.#1, #2[14] 허정은 회고록에서 어떻게 뽑은 대표인지 모르겠다며 아마 송요찬 장군이 동원한 사람들로 추측했다.[15] 허정 과도내각이 수립되자 송요찬은 국방부장관 하마평에 올랐는데 4월 26일 당시 시민대표 5인이 "송요찬에게 권력을 넘겨라."라고 이승만에게 말한 탓으로 허정 총리가 극구 반대하는 바람에 거부당했다. 결국 국방부장관은 이종찬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돌아갔다.[16] 김정렬 장군의 회고록인 <항공의 경종>에서는 4.19 당시 계엄령에 따라서 부대 동원시에 송요찬의 직할이 되는 위수부대 견제를 위하여서 1군사령관 유재흥에게 별도의 부대동원을 요청하였다라는 것과 이후에도 혼란한 한국사회 안정을 위해서 미국으로부터 과도정부의 수반으로 올린다라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에 국방장관이던 김정렬 앞에서는 아니라고는 하였지만, 내심 기뻐하는 것 같았다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오해일 수는 있지만 내심 야심이 있었던 사람일 수 있다.[17] 당시에는 장관급이기는 했으나 국무위원은 아니어서 경제기획원'장관'이 아니라 경제기획원장으로 불렸다. 경제기획원장이 국무위원이 된 건 박정희 정부가 정식으로 출범한 후로, 이때에야 비로소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이 되었다.[18] 생전 명과 암이 극단적인 데다 진영논리에 따라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것은 김원봉, 백선엽과도 유사하다.[19] 반면에 같은 군사영어학교를 나온 백선엽은 영어를 매우 잘해서 아이젠하워 앞에서 20분간 통역 없이 매끄럽게 브리핑을 잘 끝마쳤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게 같은 군사영어학교 나왔어도 송요찬은 조선지원병으로 부사관 출신이고 백선엽은 봉천군관학교 수석 졸업한 만주군 장교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