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의 1965년생 정치인에 대한 내용은 송요찬(1965)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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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3대 국방부장관 | |||
<colbgcolor=#003764><colcolor=white> 출생 | 1918년 2월 13일 | ||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매산리 | |||
사망 | 1980년 10월 18일 (향년 62세) | ||
일리노이 주 쿡 카운티 시카고 시 로욜라 대학병원 | |||
묘소 |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광평리 | ||
본관 | 여산 송씨 | ||
호 | 석호(石虎) | ||
재임기간 | 제11대 육군참모총장 | ||
1959년 8월 7일 ~ 1960년 5월 22일 | |||
제13대 국방부장관 | |||
1961년 6월 12일 ~ 1961년 7월 10일 | |||
제8대 외무부장관[1] | |||
1961년 7월 22일 ~ 1961년 10월 10일 | |||
제2대 경제기획원장 | |||
1962년 3월 2일 ~ 1962년 6월 1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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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 누나 3명, 형 1명, 여동생 3명 | ||
배우자 | 권영각(權寧珏) | ||
자녀 | 슬하 2남 2녀 | ||
학력 | 화성공립보통학교[2] (졸업) 대전중학교 (졸업) 통위부 보병학교 (졸업) 미국 육군참모대학교 (졸업) 국방대학교 (행정학 / 학사) 조지 워싱턴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 석사) | ||
경력 | 대한민국 내각수반 제13대 국방부 장관 제8대 외무부 장관 제2대 경제기획원장 | ||
군사 경력 | |||
임관 | 군사영어학교 (1기) | ||
복무 | 일본 제국 육군 | ||
1938년 ~ 1945년 8월 15일 | |||
대한민국 육군 | |||
1946년 ~ 1960년 5월 22일 | |||
최종 계급 | 중장 (대한민국 육군) | ||
최종 보직 | 육군참모총장 | ||
주요 보직 | 제9보병연대장 제10보병연대장 헌병사령관 대구방위사령관 수도사단장 남부지구경비사령관 제8보병사단장 제1야전군사령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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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제13대 국방부장관과 제8대 외무부장관, 제2대 경제기획원장을 지낸 군인, 정치인.미군으로부터 '타이거 송'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거침없는 맹장이었다. 다른 별명으로는 돌머리라는 뜻의 석두(石頭)가 있다.[3][4]
행적에 논란이 많은 인물로 제주 4.3 사건 당시 반인륜적 범죄를 자행한 학살자라는 평과 동시에 6.25 전쟁 때 맹활약한 맹장이자 4.19 혁명의 숨은 공로자라는 엇갈린 면모가 존재한다.
학살자이므로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편견이 있지만 참여정부의 보고서나 친일인명사전에서도 제외됐다.
2. 생애
2.1. 일제강점기 및 광복 직후
본관은 여산으로 1918년 2월 13일 충청남도 청양군에서 출생하여 일본군 지원병으로 입대했고 일본 육군 군조(상사)까지 진급하였다. 창씨명은 나카무라 사다오. 광복 후에는 최경록 장군의 도움을 받아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1946년 5월 1일 육군 참위(현재 계급으로 소위)로 임관하였다.임관 후 부산에서 제5연대 창설요원으로 활동하다가 그 해 9월 5일 제5연대의 일부 병력을 중심으로 강릉에 제8연대를 창설하게 되자 강릉으로 이동했는데 이후 강릉에서 대위로 진급했고 1947년 3월 1일부로 제8연대 제3대대장의 지휘를 맡게 된다.
소령 진급 후 제1연대를 거쳐 1948년 6월 11연대 부연대장으로 임명되어 제주도에서 공비 토벌 임무(제주 4.3 사건 진압 작전)를 수행 중에 제9연대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육군 중령으로 진급하였다.
2.2. 제주 4.3 사건
해안선에서 거리가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역을 비워서 유격대를 고립시킨다는 것이 초토화 개념의 작전인데 그의 제9연대는 모든 중산간마을을 태워 버린 건 물론이고 거기 사는 주민들은 '모두 유격대를 도와주고 편의를 제공'한다고 가정하고 주민들을 대량학살한다는 계획을 골랐다.[5]중산간마을 주민들에게 소개령(疎開令)을 내렸는데 토벌대는 미처 내려오지 못한 주민들은 물론 소개령이 아직 안 내려졌거나 아직 내려받지 못한 마을에 사는 주민들까지 모조리 살해했다.[6]
초토화 작전 시기에는 중산간마을 사람이 아니라도 청년들을 재판도 없이 총살하는 게 흔했는데 중산간마을에서 해안마을로 도피해온 사람들도 청년이 없으면 '도피자 가족'이라 해서 모두 죽이기도 했다. 역시 원래부터 해안선이나 그 가까이 마을에 살던 주민들도 가족 중에서 청년이 없으면 마찬가지로 모두 죽였다.[7]
다음은 당시 토벌대로 복무한 이들의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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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9연대 군수참모로 제주에 갔습니다. 당시 인사참모는 최세인, 정보참모는 탁성록, 작전참모는 한영주였습니다. 제주에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인데, 하루는 직속 부하인 구매관 강의원(姜義遠‧육사 4기생)이 안 보이는 겁니다. 알아보니 송요찬 연대장의 지시에 의해 처형됐다는 겁니다. 난 9월 1일부로 대위 진급을 했는데 9월의 어느 날 연대장이 부르더니 다짜고짜 '너 재판장 해라. 이놈을 죽여야 돼!'라고 했습니다. 누군지도 모르고 범죄 사실도 모르는 사람에게 덮어놓고 사형 언도를 하라는 겁니다. 사관학교에서 군법회의에 대해 몇 시간 배우긴 했지만 재판을 해본 일도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요. 재판정에 나가보니 얼마나 고문을 당했는지 사람이 반쯤 죽어 있었어요. 피고인은 '제주도지사였던 박경훈'이었습니다. 도지사 관사에서 쌀 한 말을 공비에게 줬다는 게 범죄 사실이었지요. 쌀 한 말에 사람의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릴 적 시골에서 쌀 창고 열쇠는 늘 할머니가 갖고 다니던 게 기억 나 "피고가 직접 쌀을 주었느냐?"고 물었지요. 이에 당시 57~58세가량 된 박경훈 지사는 "아닙니다. 저도 구속돼 조사 받는 과정에서 알게 됐습니다. 우리 집사람 친척이 와서 굶어죽게 됐으니 도와달라고 해서 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하더군요. 아무리 도지사 관사에서 쌀이 나왔다 하지만 부인의 행위를 책임질 수는 없으므로 무죄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법무관 등 몇 사람과 평의에 들어갔지요. 어떤 사람은 "사형 집행을 하라고 하는데 한 20년 어떻습니까?"라고 했습니다. 15년을 말하는 이도 있고, 10년을 말하는 이도 있고. 고심 끝에 심판관들에게 "이건 무죄이지만 부인을 데려다 사형을 한다고 하면 곤란하니까 한 3년이 어떻겠소?"라고 제안하고 동의를 얻어 3년을 언도했습니다. 아직도 무죄인 사람에게 3년형을 언도한 것이 양심에 가책이 됩니다.
어쨌든 재판 결과를 연대장에게 보고했더니 이 공산당 같은 놈의 새끼!"라며 철모로 나를 갈기는 겁니다. 하도 맞아서 머리가 크게 부었습니다. 같이 재판에 참여했던 최세인 인사참모도 많이 맞았습니다. 그리고 헌병대장 송효순은 동기생인데 매일 술을 먹고 괴로워했습니다. 물어봐도 말은 안 하고. 그런데 들리는 이야기로는 헌병들이 사람들을 동굴에 몇 십 명씩 데려다놓고 갈긴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민한 것 같습니다. 그는 굉장히 착한 사람이거든요. 결국 손을 써서 중간에 제주를 떠났습니다. 또 한영주 작전참모는 밤낮으로 연대장에게 맞았습니다.
- 김정무(77세,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당시 제9연대 군수참모, 준장 예편, 육사2기 동기회장. 2002. 9. 25. 채록)의 증언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보고서, 235||본도의 치안을 파괴하고 양민의 안주를 위협하여 국권 침범을 기도하는 일부 불순분자에 대하여 군은 정부의 최고 지령을 봉지(奉持)하여 차등(此等) 매국적 행동에 단호 철추를 가하여 본도의 평화를 유지하며 민족의 영화와 안전의 대업을 수행할 임무를 가지고 군은 극렬자를 철저 숙청코자 하니 도민의 적극적이며 희생적인 협조를 요망하는 바이다. 군은 한라산 일대에 잠복하여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는 매국 극렬분자를 소탕하기 위하여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 종료기간 중 전도 해안선부터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此)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 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임. 단, 특수한 용무로 산악지대 통행을 필요로 하는 자는 그 청원에 의하여 군 발행 특별통행증을 교부하여 그 안전을 보증함.
- 조선일보, 1948년 10월 20일
Ibid, 264이 포고문 속에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대목들이 들어 있다. 우선 제주도의 지형상 진압대상 지역으로 설정한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외의 지점'은 한라산 등 산악지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해변을 제외한 중산간마을[8] 전부가 해당된다.
- Ibid, 2649연대는 한라산 쪽을 향해서 내륙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적으로 간주했다.
- Harold Fischgrund(81세, 미국 버지니아 주, 당시 9연대 고문관, 2001. 10. 20 채록) 증언
Ibid, 265당시 계엄령은 법적 근거도 없는 모호한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계엄사령관인 송요찬조차도 계엄령이 뭔지 몰랐으니까요. 하루는 홍순봉 경찰청장과 함께 있는데 송요찬이 찾아왔어요. 우리 세 명은 일제 때 만주군과 일본군에서 같이 복무했고, 해방 후에도 함께 경찰전문학교에 근무한 적이 있어서 서로 잘 아는 사이였지요. 송요찬은 홍순봉에게 '위에서 계엄령을 내리라고 하는데 어떡해야 하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계엄령이라면 무슨 근거가 있어야 하고 구체적 지침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송요찬도 답답한 노릇이었지요. 또 송요찬은 무식한 편이었습니다. 반면에 홍순봉은 일제경찰로서 만주에서 근무할 때 조선인 중에서는 최고직책을 얻을 정도로 실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튼 홍순봉이 계엄령이니, 포고령이니 하는 것들을 모두 대신 써주었습니다. 그런데 중산간이라고 해서 무조건 죽인다는 것은 계엄령이라고 해도 안 되지요. 일제 때 만주에선 그런 게 있긴 했습니다. 특정 지역을 설정해 무조건 발포하는 것이지요.
- 김호겸(서귀포경찰서장 역임)의 증언 (제민일보 4‧3취재반, 앞의 책, 377~378쪽)
Ibid, 280송요찬 연대장은 초토화 작전을 폈다. 거처 가능한 곳을 없애라, 또는 불태워 버리라고 했는데 이런 건 육지에서도 없었다. 초토화 작전이 상부의 지시인지 또는 연대장 독단인지는 모르겠지만, 송요찬 연대장은 일본군 출신으로서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였다.
- 윤태준, 73세, 서울시 동대문구 전농동, 당시 제9연대 보급과 선임하사, 중령 예편, 2001. 5. 2. 채록 증언
Ibid, 294
위의 증언들에서 확인 가능하듯이 그는 제주 4.3 사건 당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학살을 저지른 주범 중 하나다.[9]
산악지역을 근거지로 유격전을 하는 무장부대를 상대로 할때 해당 지역의 민간인 마을을 모두 비우고 물자를 불태워서 게릴라부대의 보급을 끊는다는 초토화 작전(청야 전술)은 기본적으로 상당히 유용한 방법이지만 이때 민간인들은 모두 후방지역으로 이동시켜서 게릴라부대와 차단하는 것이 정석이지 무차별 학살하는 것은 명백한 전쟁범죄이며 오히려 민심이 게릴라 부대로 향하게 만들어 주는 짓이다.[10]
2.3. 제주 4.3 사건 이후 및 6.25 전쟁
제11연대의 제주도 평정작전 임무를 인수받아 수행하던 중 1949년 2월 제9연대 수도여단(여단장 이준식 대령)에 배속되어 서울특별시로 이동하였으며 같은 해 6월 강릉에 주둔하고 있는 제6사단 제10연대장으로 전보되었다.그는 제10연대장 재직 시 '양양 돌입 사건'[11]을 주도해 7월 24일 해임되었으나 군사재판은 면했다. 이후 육군보병학교 학생감과 제5사단 제15연대장을 거쳐 1949년 4월 최영희 대령 후임으로 헌병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좌천되었던 그를 살린 것은 전쟁이었다. 헌병사령관이었던 그는 전쟁 발발 당시 적의 공세에 밀려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자 헌병들을 진두지휘, 낙오병을 수습하여 국군을 재편성하는 데 기여하였지만 이 과정에서도 정부의 지시에 따라 보도연맹원, 좌익사범, 장기형 기결수, 미결수, 심지어 형기가 얼마 남지 않은 사람까지 모조리 골령골로 끌고 가서 처형함으로써 더 많은 학살을 수행했다. KBS대전 6.25 UHD 특별기획 골령골, 묻혀버린 진실 2부 '감춰진 이름들'
1950년 8월 10일 대구방위사령관에 임명되어 임시수도인 대구를 지키는 데 전력을 다했다. 그 해 9월 1일 백인엽 대령[12]의 후임으로 수도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여기서 그는 안강-기계 전투와 뒤이어 벌어진 영천 전투에서 북한군의 경주 침투를 저지해 후방의 안전을 확보하고 1군단이 반격작전에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는데 그 전공으로 9월 20일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수도사단은 이후 북진작전에서 회양, 신고산, 원산 점령에 이어 함흥, 흥남을 거쳐 소만(연해주-만주) 국경 인근까지 진출하는 등 맹활약하는데 이러한 수도사단의 활약은 그의 지휘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러나 소만 국경을 목전에 두고 그의 수도사단은 중공군의 남하로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된다. 1950년 12월 18일 흥남에서 묵호항으로 상륙한 수도사단은 1951년 1월 27일 다시 강릉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주로 동해안을 중심으로 한 동부전선에서 활약하다가 중공군 5월 공세 당시 백선엽 소장의 명을 받고 적의 좌측 돌파구에 해당하는 대관령을 점령해 적의 강릉 진출 기도를 봉쇄하는 등의 활약을 했다.[13]
월비산 전투를 승리로 이끈 후 1951년 11월 15일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토벌을 위해 편성된 백야전전투사령부(사령관 백선엽 소장)에 배속되어 작전을 실시했다. 이듬해 1952년에는 새로 재편된 제2군단(역시 사령관 백선엽 소장)에 배속되어 춘천 북방으로 이동해 수도고지 전투 등을 수행했다. 1952년 7월 8일 육군 소장으로 진급한 그는 수도사단의 지휘권을 이용문 장군에게 인계하고 전라북도 남원에 주둔하고 있던 남부지구경비사령부의 초대 사령관으로 영전했다. 그러나 1952년 10월 8일 다시 수도사단장으로 전보되어 지형능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 무렵 그는 도미 유학 대기 중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로 전황이 아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금성의 동남방의 방어를 담당하던 제8보병사단의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금성천 이북까지 진출해 최후의 대공세였던 1953년 7월 13일 공산 측의 공세를 물리치고 휴전선의 확정에 전략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국군이 확보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2.4. 전후와 4.19 혁명
미 지휘참모 대학, 3군단장, 육군 중장 진급, 제1야전군사령관(1957년)을 거쳐 1959년 2월 백선엽 대장의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임무를 수행하다가 4.19 혁명 때는 이승만 대통령이 내린 비상계엄 지시에 따라 군 병력을 서울 시내에 진주시키기는 했지만 절대 무력 사용을 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려 4.19 혁명 성공에 도움을 주었다. 설송웅 등의 증언에 의하면 4월 26일 하야 성명 발표 직전 경무대에서 학생 및 시민대표 5인[14]의 이승만 면담을 직접 주선하여 사실상 이승만의 하야에도 직간접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15][16]하지만 4.19 직후 김종필 등 젊은 장교들의 정군 운동에 따라 1960년 5월 23일 사임하고 14여 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정군 운동의 주역들은 함께 예편되었다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키면서 야심을 드러낸다. 5.16 군사정변 이후 장도영이 체포되자 그는 후임 국방부장관이 되었다. 이후 내각수반에 임명되자 국방부장관직을 사임하고 외무부장관으로 이임하여 내각수반 겸 외무부장관이 되었다가 내각수반직은 유지한 채 다시 경제기획원장[17]으로 이임해 내각수반 겸 경제기획원장이 되었다. 경제기획원장을 재임하던 중 증권파동이 일어나 책임자 추궁과 체포를 강력히 주장했으나 중앙정보부의 공작인 줄 몰랐던 탓에 정권과 천병규 당시 재무부장관에게 무시를 당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그는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에게 사직서를 제출하고 야인으로 돌아갔다.
문제는 정권의 민정 이양 선언 후 각 정당이 정치 활동을 재개하는 시점에서 그는 다른 사람도 아닌 유진산에게 붙어 박정희의 대권 출마를 강력히 비난하면서 역린을 건드렸다는 것이다. 군사정권의 실세였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군사정권을 반대하는 야권 인사가 된 것이다. 이 사건 때문에 혁명동지들은 이후락 당시 공보실장에게 찍혀 나락으로 갈 뻔했다. 이후 인천제철 사장, 국정자문위원 등을 역임하다가 1980년 10월 18일에 미국 시카고 로욜라 대학병원에서 신장병으로 사망했다.
3. 평가
제주 4.3 사건의 학살자이자 6.25 전쟁의 영웅이며 4.19 혁명의 협력자. 창군 초기 제주 4.3 사건 때까지는 일본군 물이 그대로 들어있어서 일본군이 중국에서 한 짓을 제주도민들에게 그대로 했으나 6.25 전쟁 시기에는 선진 군대인 미군과 함께하게 되자 특유의 저돌적인 성향은 유지하면서 작전에 눈을 떠서 국군의 맹장으로 활약했으며 4.19 혁명 시기에 이르면 돌머리 장군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정치에도 눈을 뜬 모습을 보이며 시민 학살을 저지하고 이승만 하야에 협력한다. 어지럽던 광복~1960년대 한국사에서 명과 암을 동시에 지닌 생을 살아간 인물인데 2020년대 대한민국에서는 종합적으로 평가받지 못하고 각기 진영 논리에 따라 특정 부분만 내세워 평가하고 있다.[18]4. 여담
- 군사영어학교를 나왔지만 영어는 다소 미숙했던 것으로 보인다. 6.25 전쟁 시절 미군과 협조할 일이 있을 때 통역관을 대동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서울을 방문했는데 당시 수도사단장이었던 그가 그의 앞에서 브리핑을 할 기회가 있었다. 처음에는 영어가 미숙해서 통역관을 대동하려고 했지만 밴 플리트가 "아이젠하워는 직접 리허설을 듣고 싶어한다."며 통역 없이 스스로 브리핑을 하라고 지시했다. 그도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했지만 실제 아이젠하워 앞에서 브리핑을 할 때는 "Me, Song Yo Chan, commanding Capital ROK division. We are here Capital ROK division..... Capital ROK division....(나를, 송요찬, ROK 수도 사단을 이끌고 있다. 우리는 여기 있습니다 ROK 수도 사단.... ROK 수도 사단....)" 정도의 자기소개 정도밖에 하지 못했다고 하며 "We want fight. we go.(우리는 싸움을 원한다. 우리는 간다.)"라고 하면서 지휘봉을 지도에 있는 압록강까지 쭉 밀어올리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브리핑을 마쳤다. 영어가 좀 미숙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이젠하워는 송요찬에게 직접 악수를 청하면서 "이 부대의 사기와 관련하여 들어본 것 중 가장 훌륭한 브리핑이었다."면서 그를 칭찬해주었고 통역 없이 브리핑하라고 지시한 밴 플리트도 만족스러워했다.[19]
- 전쟁 중 사단장 시절 6포병단장 윤승국 중령에게 아군의 피해가 크니 적군에게 포사격 1만 발을 하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아무리 많이 쏴야 시간상 3000발이 한계라 어쩔 줄 모르고 울상인 단장을 보고 포병단 S4요원이었던 최갑석 대위가 밤새 포를 쏜 뒤 기록지를 적당히 가라로 만들어 단장 대신 보고해 무사히 넘긴 일화가 있다. 이때 기록지를 가져올 건 생각 못 했는지 수고했다며 자기도 폿소리 때문에 밤새 잠을 못 잤다고 했다 한다. 그는 부대 내에서 석두(石頭)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그가 어느 날 평복 차림으로 예하 부대를 돌면서 진지를 지키고 있는 병사들에게 "사단장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사단장 얼굴을 알 리 없는 병사들은 소문대로 "석두래요, 돌대가리요"라 했다. 그러자 송사단장이 "누가 그러더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장교들이 그렇게 부르더라"는 대답이 나왔다. 그러자 그는 "그놈들은 모두 철두(鐵頭)야. 뭘 모르니 쇳덩어리라니까"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 2017년 그의 고향인 청양군에서 그를 위한 선양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송요찬 장군 선양사업 범군민 추진위원회’를 공식 출범시켰는데 이 소식을 들은 4.3 유족회가 청양군청을 방문해 항의해 해당 사업은 백지화됐다.
5. 대중매체에서
6.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63 | 제5대 대통령 선거 | 대한민국 | | 후보 사퇴 |
역대 선거 벽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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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각수반 겸직 (1961년 7월 3일 ~ 1962년 6월 15일).[2] 지금의 화성초등학교.[3] 나중에 이를 알게 된 송요찬은 "내가 석두(石頭)면, 그놈들은 철두(鐵頭)"라고 말했다는 후문이 있다. 사람들이 자신을 '송석두' 장군이라 불러 실제로 이름이 '송석두'라고 아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루는 한 병사에게 "너 내 이름을 아느냐"라고 묻지 그 병사가 "네! 송석두 장군입니다!"라고 대답했고 그 말을 들은 송요찬 장군이 웃으며 "내가 석두면 너는 철두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4] 드라마 제2공화국에서는 머리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고지식하다는 의미로 석두라고 설명했다. 작 중 홍종철 중령 역의 탤런트 주현이 박정희 역의 이진수와 석두라고 이야기한다.[5] 1차 출처: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1097, April 1, 1949. 2차 출처: 4.3 진상조사서 449쪽.[6] 출처 4.3 진상조사서 378쪽~391쪽.[7] 출처: 4.3 진상조사서 391쪽~400쪽.[8] 제주의 마을은 '해변마을'과 '중산간마을'로 나뉜다. 「제주도개발특별법」 제2조에 따르면, 행정에서 중산간이란 '표고 200m 등고선에서 표고 600m 등고선 사이의 지역'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통상 해변에서 약 5km 이상 떨어진 지역의 마을을 '중산간마을'이라고 부른다. 5km 미만 지역의 마을이라 하더라도 해변을 따라 형성된 일주도로변의 마을보다 산 쪽에 위치해 있으면 보통 '중산간마을'이라 한다.[9] 그런데 2016년 11월 충남 청양군에서 송요찬의 생가, 동상, 비석 등을 복원 및 정비하는 선양사업을 추진하면서 논란이 되었다. 이에 4.3 단체들의 항의가 이어졌고 충남도청에서도 이 사업에 대한 행정적, 재정적 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선양사업이 철회되었다. 아직도 제주 4.3 사건의 인지도가 낮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10] 이것은 일본군이 중일전쟁 중에 행했던 신멸작전을 보면 알 수 있다.[11] 1949년 동해안에 배치된 한국군 제6사단 10연대가 북한 제38여단의 계속된 도발에 1949년 7월 4일 단독 북진해서 당시 북한 땅이었던 삼팔선 이북의 양양(정확히는 양양 남부 일부)으로 돌입하고 양양남대천 이남의 80고지와 더 북쪽의 기사문리(현 양양군 현북면)라는 곳까지 점령한 사건이다. 북한군은 일시 후퇴하는 척하면서도 술수를 부렸다. 바로 그물로 가린 어선에 위장한 병력들을 태워 남하, 그대로 국군의 후방을 기습 공격한 것. 이를 잘 물리쳤으면 좋았겠으나 한국군은 1개 중대 규모의 피해를 입는 대패를 맛보고 철수했다. 북한에서는 제2차 고산봉 전투라고 부른다.[12] 백선엽의 동생으로 인천대학교와 인천전문대학 등이 포함된 선인학원 이사장이었다. 망나니+막장으로 유명하다.#[13] 사실 송요찬은 백선엽 장군의 명령을 쌩까고 장시간 부대를 대기시켰다가 자칫 대관령 점령을 말아먹고 국군과 UN군의 전체 작전에 커다란 차질을 가져올 뻔했다. 참다못한 백선엽 장군이 직접 찾아가서 항명죄로 파면시키려고 하자 그제야 겁먹고 부대를 움직였다.#1, #2[14] 허정은 회고록에서 어떻게 뽑은 대표인지 모르겠다며 아마 송요찬 장군이 동원한 사람들로 추측했다.[15] 허정 과도내각이 수립되자 송요찬은 국방부장관 하마평에 올랐는데 4월 26일 당시 시민대표 5인이 "송요찬에게 권력을 넘겨라."라고 이승만에게 말한 탓으로 허정 총리가 극구 반대하는 바람에 거부당했다. 결국 국방부장관은 이종찬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돌아갔다.[16] 김정렬 장군의 회고록인 <항공의 경종>에서는 4.19 당시 계엄령에 따라서 부대 동원시에 송요찬의 직할이 되는 위수부대 견제를 위하여서 1군사령관 유재흥에게 별도의 부대동원을 요청하였다라는 것과 이후에도 혼란한 한국사회 안정을 위해서 미국으로부터 과도정부의 수반으로 올린다라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에 국방장관이던 김정렬 앞에서는 아니라고는 하였지만, 내심 기뻐하는 것 같았다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오해일 수는 있지만 내심 야심이 있었던 사람일 수 있다.[17] 당시에는 장관급이기는 했으나 국무위원은 아니어서 경제기획원'장관'이 아니라 경제기획원장으로 불렸다. 경제기획원장이 국무위원이 된 건 박정희 정부가 정식으로 출범한 후로, 이때에야 비로소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이 되었다.[18] 생전 명과 암이 극단적인 데다 진영논리에 따라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것은 김원봉, 백선엽과도 유사하다.[19] 반면에 같은 군사영어학교를 나온 백선엽은 영어를 매우 잘해서 아이젠하워 앞에서 20분간 통역 없이 매끄럽게 브리핑을 잘 끝마쳤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게 같은 군사영어학교 나왔어도 송요찬은 조선지원병으로 부사관 출신이고 백선엽은 봉천군관학교 수석 졸업한 만주군 장교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