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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1 02:05:25

이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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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

1. 개요2. 활동3. 작품

1. 개요

대한민국시인. 본명은 이상백. 운동권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시인이다.

2. 활동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 /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 백두산에서 / 한라산에서 / 지리산에서 / 무등산에서 / 그리고 피어린 한반도의 산하 곳곳에서 /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싸우다 / 장렬히 산화한 모든 혁명전사들에게 / 이 시를 바친다!
장편서사시 <한라산>(1987)의 첫 부분

1960년 경상북도 영일군 죽장면(현 포항시 북구 죽장면)에서 태어나 경남중학교혜광고등학교를 다녔다. 학창시절부터 사회과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문학도 잘해서 고교시절 전국 고교 문학상을 휩쓸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1979년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

1982년 '이륭'이라는 필명으로 <시운동>에 연작시 <존재의 놀이>를 써서 등단하였다. 하지만 그는 문학 외에도 운동권에서 학생운동을 하며 유인물을 주로 작성하는 활동을 하여서 수배와 구속에 시달려야 했다.

1987년 3월「녹두비평」이라는 잡지에 제주 4.3 사건을 정면으로 다룬 <한라산>이라는 장편서사시를 발표했다가 필화를 겪었다. 그는 4.3을 접하면서 4.3 피해자 증언을 채록한 자료집 <제주도 피의 투쟁사>[1]를 출판사를 통해 비밀리에 접하고 이를 토대로 시를 썼다. 하지만 상당히 전위적이고 강력한 표현[2] 때문에 그는 결국 1년 6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3][4] 결국 이 일로 그는 10여년 동안 절필한다.

절필의 기간 동안 그는 재야 민주단체와 시민단체에서 활동했고 각 단체들에서 발행하는 기관지와 문학지에서 편집 일을 하며 사회운동을 계속했다. 그리고 절필 11년 만인 1998년 계간지 <문학동네>에 시 4편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복귀하여 다시 문학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024년 9월 10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그가 1987년에 겪은 한라산 필화사건이 인권 침해였음을 인정했다.

3. 작품



[1] 사실 이 책은 좌익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김봉현이라는 사람이 쓴 것이었다. 사실 4.3에 대한 탄압이 극심했던지라 이런 자료들을 접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2] 시에서 드러나는 반미적 표현과 빨치산을 미화하는 듯한 표현들로 인해 진보적 성향의 작가와 평론가들도 그를 위해 증언하는 것을 주저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산하는 '진보의 기회주의자'라는 표현을 쓰며 그들에게 섭섭함을 나타냈다.[3] 한편 그는 "문학에서 표현의 자유반공 이데올로기와의 마지노선은 어디까지인가"를 고민하다가 "던지자"고 결론을 내리고는 항소이유서김일성 장군의 노래(...) 1,2절을 그대로 적어냈다고 한다. 그러자 변호사는 물론이고 법원검찰마저 발칵 뒤집어져, 당시 담당 검사였던 황교안"영원히 콩밥 먹게 해주겠다"며 길길이 날뛰었다고 한다.[4] 국내에서는 외면받았지만 국외에서는 이산하에 대한 구명운동이 있었다. 대표적인 관련 인사가 미국 펜클럽 회장이자 <타인의 고통>의 저자인 수전 손택 여사였다. 그녀는 1988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를 투옥시킨 노태우 정부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