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무공훈장 수훈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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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 bgcolor=#fff,#191919><tablecolor=#373a3c,#ddd><width=20%> 1950
더글라스 맥아더
미 육군원수 ||<width=20%> 1951
이근석
공군준장 ||<width=20%> 1951 1953중복수훈
백선엽
육군대장 ||<width=20%> 1951 1953중복수훈
정일권
육군대장 ||<width=20%> 1951
심일
육군소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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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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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이명수 육군일등상사 | 1951 김용식 육군일병 | 1951 홍재근 육군일병 | 1951 홍재근 육군일병 | 1951 김용배 육군준장 |
1951 박노규 육군준장 | 1951 김백일 육군중장 | 1951 김홍일 육군중장 | 1951 함준호 육군중장 | 1951 1953중복수훈 손원일 해군중장 |
1951 최용남 해병소장 | 1951 김성은 해병중장 | 1951 1952중복수훈 김정렬 공군중장 | 1952 이형근 육군대장 | 1951 권동찬 육군준장 |
1952 김종오 육군중장 | 1952 1953중복수훈 신현준 해병중장 | 1953 장덕창 공군중장 | 1953 최용덕 공군중장 | 1953 마크 클라크 미 육군대장 |
1953 김교수 육군대위 | 1953 김한준 육군대위 | 1953 김용배 육군대장 | 1953 민기식 육군대장 | 1953 임충식 육군대장 |
1953 한신 육군대장 | 1953 김점곤 육군소장 | 1953 이성가 육군소장 | 1953 이용문 육군소장 | 1953 1954중복수훈 임부택 육군소장 |
1953 1954중복수훈 강문봉 육군중장 | 1953 김동빈 육군중장 | 1953 김종갑 육군중장 | 1953 백인엽 육군중장 | 1953 1954중복수훈 송요찬 육군중장 |
1953 유재흥 육군중장 | 1953 최영희 육군중장 | 1953 함병선 육군중장 | 1953 최치환 총경 | 1954 김만술 육군대위 |
1954 허봉익 육군대위 | 1954 김경진 육군소령 | 1954 김웅수 육군소장 | 1954 송석하 육군소장 | 1954 엄홍섭 육군소장 |
1954 임선하 육군소장 | 1954 백재덕 육군이등상사 | 1954 최득수 육군이등상사 | 1954 김옥상 육군일병 | 1954 조재미 육군준장 |
1954 안낙규 육군중사 | 1954 박병권 육군중장 | 1954 이응준 육군중장 | 1954 이준식 육군중장 | 1954 장도영 육군중장 |
1954 최석 육군중장 | 1954 최창언 육군중장 | 1954 박옥규 해군중장 | 1954 김석범 해병중장 | 1955 김창룡 육군소장 |
1955 정긍모 해군중장 | 1956 서정학 이사관(치안국장) | 1960 미군무명용사 - | 1961 김금성 공군준장 | 1961 국군무명용사 - |
1964 박정희 대통령 | 1966 이종세 육군상사 | 1966 강재구 육군소령 | 1966 이인호 해병소령 | 1967 송서규 육군대령 |
1967 채명신 육군중장 | 1967 지덕칠 해군중사 | 1967 정경진 해병대위 | 1967 신원배 해병소위 | 1968 최규식 경무관 |
1968 이익수 육군준장 | 1968 최범섭 육군중령 | 1970 이세호 육군중장 | 1972 이무표 육군대위 | 1972 임동춘 육군대위 |
1975 찰스 B. 스미스 미육군중령 | 1980 육군대장 | 2002 장철부 육군중령 | 2006 김영옥 미 육군대령 | 2011 조달진 육군소위 |
2015 윌리엄 스피크먼 영 육군병장 | 2021 에밀 카폰 미 육군대위 | 2023 랄프 퍼켓 미 육군대령 |
<colbgcolor=#00a650><colcolor=#fff> 강재구 姜在求 | Kang Jaegu | |
출생 | 1937년 7월 26일 |
경기도 인천부 금곡정 (現 인천광역시 동구 금곡동) | |
사망 | 1965년 10월 4일 (향년 28세) |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 성동리[1] | |
학력 | 서울고등학교 (졸업 / 8회[2]) 육군보병학교 (졸업) |
종교 | 개신교[3] |
군사 경력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1960년 ~ 1965년 | |
임관 | 육군사관학교 (16기) |
최종 계급 | 소령 (대위로 순직 후 추서) |
최종 보직 | 수도사단 제1연대 3대대 10중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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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생전 최종 계급은 대위이며 사후에 소령 계급에 추서되었다. 대한민국에서 수류탄 이야기 하면 사고 사례로 꼭 언급되는 사람이다.[4]2. 생애
1937년 7월 26일 경기도 인천부 금곡정(現 인천광역시 동구 금곡동) 54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성전기주식회사에 재직 중이었다. 1944년 인천소화동국민학교에 입학했고 1948년 창영국민학교에 전학해 1950년에 졸업했다. 1950년 인천중학교에 입학해 졸업했으며 이어 서울고등학교(8회)를 졸업하고 1956년 육군사관학교(16기)에 입교했다.1960년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육군 소위로 임관한 뒤 육군보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수도사단(맹호부대) 제1보병연대 소대장, 제1야전군사령부 산하 육군 제1하사관학교[5] 수류탄 교관을 역임하였다. 1965년 7월 2일 국무회의에서 남베트남 정부의 전투부대 지원 요청에 따라 국군 1개 사단의 월남 파병이 결정되었고 그해 8월 1일 대위로 진급한 뒤 파병에 지원해 8월 29일 수도사단 제1보병연대 제3보병대대 제10중대장에 보직되었다.
그 해 10월 4일 베트남 전쟁으로 파병을 앞두고 홍천군 북방면 성동리 성동천 부근에서 수류탄 투척 훈련을 실시했는데 부임 전 제1야전군사령부 산하 육군 제1하사관학교에서 수류탄 교관으로 근무했던 그는 누구보다 수류탄의 위력과 유의사항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날 그의 운명을 가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3. 사고
그날 오전 10시 훈련 중에 중대원인 박해천(朴海千) 이등병이 실수로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을 놓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손을 몸 뒤쪽으로 올린 상태에서 놓친터라 수류탄은 불행히도 그의 몸 뒤로 빠져 중대원들 쪽으로 굴러갔고 그 광경을 본 그는 본능적으로 몸으로 수류탄을 덮쳐 막았다. 몇 초 뒤 수류탄은 매정하게 터져 버렸고 그는 중대원 100여명의 목숨을 구하고 산화했다. 그래도 그나마 그가 살신성인한 덕에 본인 한 명을 제외하면 주위에 있던 중대원들은 5명이 가벼운 부상을 입었을 뿐 큰 사상자가 없이 무사할 수 있었다.1965년 10월 6일 동아일보 기사 사고 직후 제2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이미 숨진 상태였다.[6]3.1. 원인
채명신 장군의 베트남전 회고록을 보면 훈련장 자체도 굴곡이 심한 위험지대에 설치되어 있었으나 실전적 훈련이란 명목하에 위험지대 훈련을 강행한 것도 있다고 한다.4. 사후
1965년 10월 8일 오전 9시 30분 육군본부 광장에서 육군장이 치러졌고 태극무공훈장과 소령 계급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1965년 10월 8일 국립서울현충원 51묘역에 안장되었다.이 사례는 수류탄 투척법에 미숙하면 얼마나 큰 사고가 날 수 있는지 아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맹호부대는 부하를 아끼고 위했던 당시 대대장의 건의가 국방부의 승인을 받아 3대대의 이름을 '재구대대'로 바꾸었으며 그의 추모 기념관까지 생겼다. 재구대대는 현재까지도 남아 있다.[7] 제1보병연대 예하 3대대에서 현재는 제1기계화보병여단 예하 제133기계화보병대대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재구대대라는 별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대 마크에서 호랑이에 수류탄이 있다. 다만 호랑이+수류탄 마크는 부대마크가 아니라 전우회 마크라는 말도 있다. 그가 담당했던 10중대는 현재 제133기계화보병대대 2중대로 바뀌었는데 133대대와 같이 133대대 2중대의 별명도 재구중대이다.
1여단 내에는 재구공원이라는 조그마한 공원이 있는데 부대 깊숙한 곳에 있는지라 면회하는 민간인들은 못 보고 부대 개방행사 시나 부대 방문 행사 때 잠깐 가볼 수는 있다. 장병들은 잘 안 가지만 아침 뜀걸음 코스에 포함 루트여서 전 장병이 한 번씩은 공원 앞을 지나간다. 주 용도는 그를 추모하기 위한 제사인 재구제[8]를 지내는 용도로 많이 사용한다.
사단 신병교육대에는 재구관이라는 추모관이 있는데 306보충대에서 수기사로 신병 교육을 받는 장정들이 가장 먼저 입소하는 장소로 주로 많이 쓰이고 신교대와 같은 울타리를 쓰는 기갑수색대대에 행사가 있을시에도 많이 사용한다.
그가 순직한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 성동리 성동천 부근에 그의 이름을 딴 강재구공원이 조성돼 있는데 공원 내에 건립된 '강재구소령추모비' 앞에 보면 '강재구소령 산화 장소', '산화 지점'이라는 표지판도 세워져 있다. 제11기계화보병사단 소속 장병들에게는 꽤나 알려져 있다.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제17보병사단 영내 실거리사격장의 이름도 '재구사격장'인데 아마 그의 출생지인 인천광역시에 주둔한 부대인 것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모교인 육군사관학교에서도 그가 생도 시절 소속되어 있던 생도대 2중대의 공식명칭을 재구 2중대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사람 이름을 딴 다른 부대들이 광개토1중대, 무열5중대, 문무8중대 등 역사적 위인의 호칭을 딴 것과 비교할 때 그의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다.
5. 여담
* 육군사관학교에 그의 동상이 있는데 왼손에는 수류탄을 들고 있다. 육군사관학교에서는 가입학 기간이 끝날 무렵 이 동상 앞에서 그의 희생 정신을 기리는 재구의식을 한다. 졸업식에서 생도들은 받은 꽃다발을 강재구 소령 동상에 거는데 가장 먼저 꽃다발을 거는 생도가 동기 중에서 가장 먼저 장군에 진급한다는 속설이 있다. 그래서 육사 졸업식날 동상이 꽃다발로 덮이고 심지어 올라가서 걸려있는 꽃다발을 쳐내거나 상에 올라가서 같은 과가 걸기 전에 걸리지 않게 방해하는 촌극도 발생한다. 저 동상 위가 생각보다 협소하고 미끄러워서 조심해야 한다. 실제로 떨어져서 발목이 골절된 생도가 있었다. 모교인 서울고등학교에도 그의 흉상이 학교 뒷마당에 세워져 있으며 인천창영초등학교에도 흉상이 있다
- 야전부대에서 타의 귀감이 되는 최우수 전투중대장에게 표창하는 상으로 그의 이름을 딴 재구상이 있는데 군단급에서 한 명씩 뽑아 매년 14명이 수상한다. 중대장 보직을 역임중인 대위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로 꼽히며 소령 진급에 유리하다. 재구상 수상자 중 고위직 진급자가 많다. 위승호 중장, 전인범 중장, 이철휘 대장, 강신철 대장 등.
- 사고 당시 그는 결혼 2년차에 돌을 갓 지난 외아들 강병훈(姜炳勳)을 둔 상태였다. 그의 아내 온영순(溫榮順)은 불시에 미망인이 되는 비극을 맞았으며 어려운 단칸방 살림에 모자의 생활이 위태로워졌으나 다행히 국가에서 주는 연금과 국민 성금으로 모인 돈, 각계의 도움 덕분에 경제적으로는 힘들지 않게 지내면서 남편 없이 홀로 아들을 키워낼 수 있었다. 강병훈이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82년 12월 당시 신반포 한신6차아파트에 거주하면서 강남구에 있는 영동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던 것을 보면 경제적 어려움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순직 후 박정희 대통령은 "병훈군이 적령이 되었을 때 우선적으로 육사에 입학하게 하라"고 이후락 대통령비서실장에게 지시해 두었으므로# 마음만 먹으면 육군사관학교 입학이 보장되어 있었지만 그는 대학입학 학력고사에서 340점 만점에 320점을 받고[9] 자신의 적성을 살려 1983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10] 강병훈은 서울대학교 졸업 후 일반 대기업에서 근무한 것으로 알려졌다. 방위로 병역을 마쳤는데 부선망독자(父先亡獨子,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신 외아들)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강병훈의 딸, 즉 강재구의 손녀 강수정은 야탑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2001년 7월 전쟁기념관이 주관한 '나라사랑 평화사랑' 글짓기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해 조선일보 등 매체에 소개된 적이 있다.
- 그와 비슷하게 베트남 전쟁 중이던 1966년 8월 11일 투이호아 전투에서 이인호(李仁鎬, 1931 ~ 1966. 8. 11)[11] 해병대 소령[12]이 1966년 8월 11일 청룡작전 중 지하진지로 추정되는 동굴탐색 과정에서 조우한 베트콩이 던진 수류탄을 몸으로 덮어서 아군을 살리고 자신을 희생해 부대가 임무를 완수하도록 한 일이 일어났다.[13]
- 육사의 화랑의식 때 연주하는 군가인 타오르는 횃불은 그의 생전 부하를 살리기 위해 수류탄 파편을 대신 맞고 희생한 살신성인 정신을 기리기 위해 작사, 작곡되었다.
- 모바일 게임 탱크제국에서 한국군의 전설 등급 장교로 등장한다.
- 그의 실화를 바탕으로 1966년 고영남 감독, 신성일, 고은아 주연의 영화 <강재구 소령>이 제작되었다. 참고로 아역배우 시절 안성기가 강재구의 어린 남동생으로 등장한다. 내용은 강소령과 아내의 연애시절부터 사고 후까지를 담고 있다. 그의 외아들 강병훈도 국민학교 시절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본 적이 있다고 한다.#
[1] 그가 순직한 장소에는 현재 그의 이름을 딴 강재구공원이 조성돼 있다.[2] 서울고등학교 8회 동기생들이 그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막한 동상이 현재 서울고등학교 경내에 있다.[3]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어머니가 권사로 있었다고 한다. #[4] 강재구 소령 외에도 수류탄 사고로 유명한 사람으로는 1970년 27사단의 차성도 중위(육군3사관학교 1기, 사고 당시 소위), 1989년 6사단의 공완택 병장(사고 당시 상병), 2004년 35사단의 김범수 대위(학군 40기 사고 당시 중위)등이 있다.[5] 통합된 육군부사관학교에 생긴 것은 1981년 10월의 일이다. 이전에는 제1야전군사령부, 제2야전군사령부, 제3야전군사령부에 각각 육군 제1하사관학교, 제2하사관학교, 제3하사관학교가 따로 있었다.[6] 이 때문인지 서울현충원묘적부에는 사망장소가 제2야전병원으로 기재돼 있다.[7] 재구대대장을 역임한 인사로는 고성균 예비역 소장(육군사관학교장 역임)이나 이승오 소장 등이 있다.[8] 1년에 한번씩 하는 추모식이다. 이 날은 사단장도 꼭 한 번씩 와서 재구공원에 있는 재구상에 예를 표하고 가기 때문에 여단 장병들이 무조건 청소한다. 근데 사람들이 많이 안 다녀서 그렇게 많이는 안 해도 되고 낙엽만 쓴다고 한다.[9] 참고로 강병훈이 치렀던 83학년도 학력고사 기준 320점은 상위 0.0897%에 해당한다.[10] 당시 서울대 자연계열에서 입학 성적이 최상위권이었던 학과는 물리학과와 전자공학과였다. 당시에는 의과대학의 인기가 없었다.[11] 경상북도 청도군 출신으로 대륜고등학교와 해군사관학교(11기)를 졸업했다.[12] 추서계급, 전사 당시 대위로, 직책은 대대 정보참모이며 베트남전 참전 초반엔 청룡부대 3대대 5중대장이다가 이후 3대대 정보참모로 변경되었다.[13] 그의 장남 이제욱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해사 40기로 임관하여 해병대 장교의 길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