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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15:44:16

김만술

파일:태극무공훈장 약장.png
태극무공훈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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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태극무공훈장 부장.png
||<tablewidth=100%><table bgcolor=#fff,#191919><tablecolor=#373a3c,#ddd><width=20%>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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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육군원수 ||<width=20%>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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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대장 ||<width=20%> 1951 1953중복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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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이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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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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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채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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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지덕칠
해군중사
1967
정경진
해병대위
1967
신원배
해병소위
1968
최규식
경무관
1968
이익수
육군준장
1968
최범섭
육군중령
1970
이세호
육군중장
1972
이무표
육군대위
1972
임동춘
육군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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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B. 스미스
미육군중령
1980
전두환(취소)
육군대장
2002
장철부
육군중령
2006
김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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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조달진
육군소위
2015
윌리엄 스피크먼
영 육군병장
2021
에밀 카폰
미 육군대위
2023
랄프 퍼켓
미 육군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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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김만술
金萬述
파일:1000124100.jpg
출생 1929년 10월 28일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사망 1991년 5월 28일 (향년 61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 중앙보훈병원
학력 오사카공업전문학교
계급 대위
복무 기간 1947~1961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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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이다. 한국전쟁 당시 베티고지 전투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2. 생애

1929년 10월 28일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에서 태어났다. 일본 오사카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광복 이후 귀국하여 1947년 6월 조선경비대 병으로 입대하였고 부산 주둔 제5연대 소속 기관총 사수로 근무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육군 창군 후 제1보병사단 소속이 되었다. 그 해 10월 여순 반란 진압 작전에 참가하였고 12월에는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에 참전하여 왼쪽 가슴에 관통상을 입었다. 1949년 8월에는 동해안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하여 경상북도 청송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우측어깨와 하복부에 총상을 입고 안동 도립병원에 입원하였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직후 이등중사였던 김만술은 26일부터 의정부 전투에 참전하였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으로부터 현장에서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서울 전투당시 창동방어선, 미아리전선, 삼각산 등에서 전투를 치렀다.

이후 후퇴를 거듭하며 수원과 대전 방어전투에 참가하였고 낙동강 전선의 다부동 전투에서는 수류탄과 총검을 사용한 적과의 10여회의 공방전 끝에 300고지를 사수하였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 이후에는 대구의 팔공산 전투에 참가하였고 인천 상륙 작전이 펼쳐질 무렵 제1사단 11연대 기갑소대의 박격포 교관으로 임명되어 2주 간의 박격포 교육울 시행하였다. 또한, 당시 교육대장의 명령으로 기마대를 조직하였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얼마 안되어 해체되었다.

38선 돌파 이후 평양 전투에서 활약하였고 중공군 개입 이후 중공군과의 전투 도중 9주간의 하사관 전투교육을 위해 하사관학교로 차출되어 보내졌다.

이후 여러곳으로 전출되어 계속 전투를 하던 중 과거 공비토벌작전의 경험이 많은 연유로 호남지역의 공비토벌작전 부대로 차출되었다. 성공적으로 토벌작전을 끝낸 후 본대로 복귀하여 1사단 현지임관시험에 응시하였고, 베티고지 전투 하루 전인 7월 14일 합격판정을 받아 1사단 11연대 2대대 8중대 특무상사에서 2대대 6중대 2소대장으로 부임하였다.

7월 16일 중대장으로부터 전초기지 임무교대명령을 받고 요충지인 베티고지로 향했다. 아군 포병의 포격지원으로 1명의 경상자를 제외하고 임진강 도하에 성공해 무사히 베티고지에 도착했다. 전면 능선에 2개 분대, 다음 뒷편 우측 능선에 1개 분대를 각각 배치하였다. 17시 30분경 대대장 김봉건 중령으로부터 1개 분대를 이끌고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는 서봉을 먼저 공격했으나 매복에 빠져 2명이 전사하고 포위에 빠졌다. 하지만 수비하고 있던 소대 일부 병력이 지원해 포위망을 뚫고 귀환했다.

20시 10분 중공군 3개 대대 병력이 아군이 수비하는 중앙봉으로 공격들어왔고 이에 전방 20m까지 유인후 일제 사격명령을 내렸다. 중공군은 퇴각했고 1개중대를 다시 돌격시켰지만 수류탄으로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22시경 중공군은 기존의 파상공격 대신 병력을 여러 소대로 나누어 전투병력을 자주 교체해가며 공격을 시작했다. 적이 진지까지 돌격해 들어오자 이등중사 박종수가 호밖으로 뛰어나가 적을 총검으로 처치하자 이를 본 소대원들도 함께 백병전과 육박전을 벌이며 적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적의 수류탄 공격으로 의무병을 포함한 2명이 전사하였고 무전기가 파괴되어 중대본부와의 연락이 두절되었다.

24시경 통신병 이강로 하사를 전령으로 중대본부로 보내, 전황보고와 통신망 복구를 요청하였고 대대장은 즉시 대대통신병 4명을 파견하여 7월 16일 2시 30분경 대대지휘소와의 통신을 개통하였다.

04시경 중공군은 다시 서쪽과 서북쪽에서 소대병력으로 공격을 시작하였다. 이에 소대는 포격지원을 요청하고 호 안에서 수류탄으로 대응했다. 1시간뒤 중공군이 다시 거세게 돌격했고 자체전투력으로 대응이 불가능하다 판단해 진내사격을 요청해 공세중인 중공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6시 40분 중공군은 안개를 이용해 마지막 공세를 펼치자 수류탄 투척과 백병전을 통해 무찔러 베티고지를 사수했다. 8시 6중대 3소대와 임무를 교대하고 본대로 복귀했다.

이 전투로 중공군 피해는 전사 314명, 부상 450명, 포로 3명였고 아군피해는 전사 24명이였고 생존자는 12명이였다. 전투 후 태극무공훈장, 미군 수훈십자장을 수여받았다.

전후 육군보병학교 초군반에 입교해 수료후 기간장교, 구대장으로 복무했다. 1958년 4월 1사단 11연대로 복귀해 실탄사격훈련을 위해 트럭으로 사격장으로 이동 중 언덕아래로 굴러 떨어져 척추신경이 크게 손상되었다. 결국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고 1961년에 대위로 예편했다.

전역 후 농민들의 자녀와 고아원에 있는 학생들을 위해 1962년 6월 20일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소사리 130번지에 동양 공과 기술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는 학교의 이사장으로서 직접 교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군수사령부의 오물처리권을 양도받고 미8군으로부터 원조를 받는 등의 노력을 하였다. 그 결과 학교대지 2272평, 교사 10명, 학생 210명의 규모까지 학교를 확장하였다. 그러나 1974년, 결국 자금난의 이유로 학교는 문을 닫게 된다.

1970년대 상이군인의 부정적인 인식을 바꾸기 위해[1] 시흥에 상이용사촌을 설립해 공장일을 할 수 있도록 했다. 1977년 상이용사촌 회장이 되었고 용사촌을 문정동으로 이전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 강동구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90년 전쟁 당시 생겼던 상처가 재발했고 중앙보훈병원에 입원해 3차레 절단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생긴 패혈증으로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3. 여담



[1] 무전취식, 강매로 인해 이미지가 좋지 못했다.[2] 2000년 5월, 2012년 5월 2013년 5월, 2021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