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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09 18:52:52

전인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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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5대 육군특수전사령관
전인범
全仁釩 | Chun In-bum
파일:전인범장군.jpg
<colbgcolor=#010000><colcolor=#ffffff> 출생 1958년 9월 6일 ([age(1958-09-06)]세)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 서울위생병원
본관 정선 전씨
재임기간 제25대 육군특수전사령관
2013년 10월 31일 ~ 2015년 4월 14일
링크 파일:유튜브 아이콘.svg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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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10000><colcolor=#ffffff> 부모 아버지 전주화, 어머니 홍숙자
배우자 심화진
자녀 장남 전민규, 차남 전민우
학력 리라국민학교 (5회 / 졸업)
대경중학교 (16회 / 졸업)
경기고등학교 (73회 / 졸업)
육군사관학교 (37기 / 학사)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 석사[1])
경남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 박사[2])
종교 개신교
군사 경력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81년 ~ 2016년
임관 육군사관학교 (37기)
최종 계급 중장 (대한민국 육군)
최종 보직 제1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
주요 보직 육군특수전사령관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참모장
한미연합군사령부 작전참모차장
제27보병사단
합동참모본부 전작권전환추진단장
합동참모본부 전략기획차장
합동참모본부 공동작계추진단장
국방부 대미정책과장
제9보병사단 제29보병연대
병과 보병 }}}}}}}}}

1. 개요2. 주요 직위3. 생애
3.1. 가족관계3.2. 학창 시절3.3.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3.4. 위관급 장교 시절3.5. 영관급 장교 시절3.6. 장군 시절: (1) 초기3.7. 장군 시절: (2) 육군특수전사령관3.8. 장군 시절: (3) 육군특수전사령관 이후3.9. 전역3.10.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캠프 합류3.11. 근황
4. 평가5. 기타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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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군인.

서울위생병원에서 태어나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에서 성장했다. 의과학 전공의인 아버지는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기 몇 달 전이었고, 역시 미국 유학 중이었던 어머니가 먼저 한국에 와서 장충동 시댁에 살고 있었다. 리라초등학교, 대경중학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 후 육군사관학교 37기로 입교, 1981년 육사 졸업과 동시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동기로는 박찬주, 김영식, 엄기학, 신원식, 양종수, 이재수, 조보근, 고명현, 박지만 등이 있다.

어린 시절 미국에 체류하며 습득한 통역이 필요없는 유창한 영어 실력과 뛰어난 업무 추진력으로 주한미군 지휘부와 깊은 신뢰관계를 유지해 대한민국 국군의 대표적인 '미국통'으로 불렸다. 2016년 7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으며, 총 복무 기간은 1981년 4월 3일~2016년 7월 31일(전역식 7월 28일)로 35년 4개월이다. 그가 현역 시절 받은 훈장은 도합 11개로, 창군 초기 참전 군인을 제외하고 현역 중 가장 많은 훈장을 수훈한 장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2. 주요 직위

3. 생애

2021년 1월 1일 국군방송 국방TV 대담 출연 영상

3.1. 가족관계

할아버지 전항섭은 유한양행 사장이고 아버지 전주화는 한의사이다. 어머니는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이자 역시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후보(제13대 대통령 선거)였던 홍숙자 박사이다. 국방일보 기사 고모는 전혜성 예일 대학교 교수, 그 장남인 하워드 고(미국 보건복지부 보건담당 차관보)와 차남 해럴드 고(미국 국무부 법률고문)는 그에게 고종사촌형이 된다. 이처럼 본인의 집안 배경은 상류층인데도 불구하고 일선부대 지휘관 시절 병영생활 복지에 힘을 썼다는 점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그의 부인 심화진은 남편보다 1년 9개월 먼저 태어났다. 성신여학교 설립자 이숙종이 이모할머니고 부친은 성신학원 이사장 심용현으로, 2007년 성신여자대학교 총장으로 선임되어 제8~10대 총장을 역임했다. 부인과 슬하에 2남을 두었는데, 장남 전민규와 차남 전민우 두 아들 모두 육군 현역병으로 병역 의무를 이행했다. 전민규는 UN평화유지군레바논 파병부대(동명부대)에서 근무했다.

3.2. 학창 시절

7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여 어머니 홍숙자 박사와 함께 살았다. 외교관인 어머니를 따라 미국에서 5년 정도 살았는데 외톨이 신세였다고 한다. 과거 신문에 기록이 있는데, 1965년 10월에 출국하여 1970년 2월에 귀국하였다. 이때 미국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을 다룬 TV 시리즈 컴뱃(Combat!)을 보며 샌더스 중사가 기관총을 들고 전투하는 멋진 모습에 푹 빠져서 처음으로 군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12살 때 한국에 돌아와 중학교에 올라갈 즈음 외삼촌과 국군의 날 행진을 보았는데, 외삼촌에게 '군인이 되려면 육사에 가야 한다'는 말을 듣자, 본인은 장교가 있는지 부사관이 있는지 아무 것도 모르고 그때부터 막연히 육사를 가야 되겠다 생각을 해서 육사행을 꿈꾸게 되었다.

학창 시절에는 워낙 운동도 못하고 겁도 많아서 체육에서는 미, 양 정도를 받았다고 한다. 어머니 홍 박사는 그가 영어를 잊지 않도록 한국에서 AFKN을 시청하게 하고 저녁식사 때는 영어로 대화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전인범은 '리더스 다이제스트', '뉴스위크', '타임' 등을 하나하나 읽었다. 미래 미국통 군인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작용했을 영어 실력은 이때부터 완성된 셈이다.

3.3.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

육군사관학교 37기는 박정희 前 대통령의 아들인 박지만의 기수로 유명하다. 자신의 아들을 박지만과 학연을 맺게 하려는 장성급 장교들이 많아서, 통상 기수당 1, 2명에 그쳤던 고위 장성의 아들이 37기에만 10명이 넘었다. 후술된 글 중 일부는 월간조선 기사 - [집중해부] 朴志晩 同期 陸士 37期生들에서 발췌된 내용이다.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박지만과 친한 육사 37기가 약진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견도 있었다. 통상 육사 출신이 한 기수에 6~7명 정도가 중장을 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32기 7명 / 33기 6명 / 34기 7명 / 35기 8명 / 36기 6명) 8명이 중장으로 진급한 37기가 승진이 조금 잘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서 대표적인 육사 37기로 이재수 국군기무사령관, 신원식 합참 작전본부장, 조보근 국방정보본부장 등과 함께 전인범이 언론에 자주 소개되었다. 하지만 박지만은 선배들이 입교 첫 날에 "니들 중에서 육사가기 싫은데 온 사람은 당장 손들어!"할 때 유일하게 손들었을 정도로 억지로 들어왔었고, 결국 사관생도 시절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이후 육군 방공 대위로 임관 5년만에 전역한다. 이후 이재수를 뺀 다른 육사 동기들과 거의 연락도 안 하고 지냈기 때문에 육사 37기가 박지만과 박근혜 대통령 때문에 잘 나간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육사는 동기생 20명씩으로 중대를 구성하는데 박지만은 자신이 소속되었던 6중대 사람들의 모임에는 매년 참석한다고 한다. 전인범은 6중대원도 아니었고, 후일 언론사 인터뷰에서 자신은 박지만과 어느 자리에서 우연히 만나서 인사한 적은 있지만 밥 한 끼 같이 먹은 적 없는 사이라고 밝혔다. 조선일보 기사

전인범의 어머니인 홍숙자 박사는 외교관이어서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통역을 맡았던 경험이 있다. 홍 박사는 전인범에게 '지만이 잘 챙겨줘라'라고 했지만 박지만은 무소불위의 권력자의 아들로 육군사관학교장정승화 육군 중장이 직접 챙겨주는 특별한 생도이며, 박지만과 친해져 보려고 입학한 장성 아들이 10명에 달하는 상태라 다가갈 수 없는 상태였다. 전인범 스스로도 박지만 생도 주변에는 워낙 사람이 많아 가까이 갈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박지만 때문에 재미있는 일화가 많은데, 육사 4학년이던 1980년 7월 8일 미스 유니버스 선발대회를 국내에서 치렀다. 이때 이들을 환영하는 만찬회가 열렸는데 박지만 덕분에 육사의 키 크고 잘생긴 생도들을 차출해서 미스 유니버스 각국 대표들의 파트너로 만찬회를 참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위의 일화처럼 박지만에 대한 수없이 쏟아지는 군부의 과도한 관심 때문에 선배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연대책임으로 육사 37기를 마구 굴렸다고 한다. 그 바람에 정신이 없어 37기들은 후배들을 거의 통제하지 못했는데, 이때 대표적으로 나서서 후배들을 교육한 사람이 전인범이다. 그 당시 별명이 '잔인범'(殘仁犯)이라고 38기 이하 후배들은 기억한다.

'잔인범'이 탄생한데 대해서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1학년 시절 하도 심하게 기합을 주던 선배가 있었다고 한다. 전인범은 어느날 우연히 그와 함께 기합을 받았는데 그 선배는 원산폭격을 5분도 못 견뎠다. 알고보니 그 선배는 귀여움만 받았지 기합을 안 받아 봤다고 한다. 이때 전인범 생도는 고통을 겪어보지 않으면 불합리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전인범은 당시 육사 37기 중 입학 성적이 뒤에서 두번째였다고 한다(368명 중 367등). 그래서 4년제 육사 첫기수인 11기 전두환 이래로 꼴찌가 장성이 된다는 육사의 법칙은 전인범을 통해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전두환도 육사 11기 입학 당시 충원합격으로 겨우 입교했으나 가장 먼저 준장에 진급. 반면에 당시 졸업 성적 10등까지는 육사 교수 요원이 됨). 정확히는 한국 육사의 원형인 미국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에서부터 있던 유서 깊은 농담이다. 공부 못하는 생도에게 훈육관이 "이놈 이거 이러다 별 달겠어"하는 식.

3.4. 위관급 장교 시절

중위 시절 당시 25세의 젊은 나이에 이 계급 최초로 당시 제1군단군단장이던 이기백 중장전속부관(참모장교)에 보임되었는데, 뒤에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밝혀지길, 당시 행정착오로 인해서 중위로 진급한 지 1달밖에 안 된 자신을 이기백 장군이 고참인 줄 알고 뽑았다고 밝혔다. 그래도 성실히 일을 잘 했기에 이기백 중장은 그를 신뢰했고, 이후 육군참모차장, 대장 진급 후 제2야전군사령관을 거쳐 합동참모의장까지 3년 동안 늘 전속부관으로 데리고 다녔다. 지금은 합참의장의 부관을 소령 계급이 맡고 있기 때문에 당시 중위였던 전인범이 이례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전속부관' 문서에도 나오지만 계급별로 부관으로 뽑히는 위치가 다르다.

1983년 10월 8일 전두환 대통령이 버마를 포함해 6개국 순방에 나설 때 당시 합참의장이던 이기백 대장이 수행했고, 따라서 전속부관인 전인범 중위도 동행했다. 그리고 다음 날 북한 공작원에 의해 벌어진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당시 현장에 있다가 중상을 입은 이기백 장군을 긴급 후송해 생명을 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 499화(2021년 7월 11일 방영) 요약 영상

위 영상에서 밝힌 바로는 당시 전속부관이던 전인범 중위는 상관의 지시로 사진을 찍기 위해서 필름과 배터리를 많이 준비했는데, 당시 양곤의 날씨로 인해 배터리가 방전되어 교체하러 잠시 주차장에 들렸다가 돌아본 순간 폭발이 난 것이다. 회고에 따르면 굉음 후에 화약 냄새가 나서 폭발인 줄 알았고 추가 공격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발이 안 떨어졌지만, 군인으로서의 사명감 때문에 들어가서 직속상관을 구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입고 있던 정복을 벗어서 현장에 있던 넉가래를 이용해 임시 들것을 만들고 주변에 있던 한국인 차를 냅다 잡아타고 피를 철철 흘리는 이기백 장군을 병원으로 데려갔다. 시설이 낙후된 데다가 테러 당일이 일요일이어서 당직근무자밖에 없어 응급실은 아비규환이었다고 한다. 다행히 장군을 침대에 눕힐 수 있었고 전인범 중위가 영어로 의료진에게 테러 사실과 합참의장의 상태를 의사들에게 설명했다고 한다.

이기백 장군은 온몸에 박힌 파편 제거수술을 받고 붕대로 칭칭 감겨 있던 상태에서, 의식이 돌아오자 첫 마디가 "각하 괜찮으시냐? 지금 몇 시냐? 밥은 먹었냐?"였다고 한다. 전인범은 이를 통해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상관과 부하를 챙기고 위하는 이가 진짜 군인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아수라장인 상황 속에서 직속상관이던 이기백 장군을 구한 공로를 중위로서는 받기 어려운 보국훈장 광복장을 수훈하였다. 2013. 10. 9. 전인범 소장 전화 인터뷰 전인범 중장이 2024년 출간한 자서전 《보통장군 전인범》 83페이지에서 이때 본인의 훈장 수훈에 관하여 회고한 바에 따르면, 당시 400명의 장군이 육군본부 대회의실에 모여 MBC 기자가 찍은 아웅산 테러 영상을 단체 관람했는데 황영시 육군참모총장이 "보시오! 민간인들은 다 도망갔지만 군인은 현장으로 뛰어들지 않소!"라고 그를 띄워주었다고 한다. 전두환 대통령도 그 영상을 보고는 "저놈 덕분에 이기백이 살았구만. 누구야?!"라고 물었고 주변에서 "부관입니다."라고 답하자 "저 녀석, 훈장 줘."라고 지시하여 그는 동기생 중 처음으로 훈장을 받게 되었다고.

그리고 그는 당시 두부(頭部)에 중상을 입고 쓰러진 이기백 장군의 두발이 길어서 피와 머리카락이 응고되어 정확한 상처 부위를 찾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회고했는데, 당시 사건을 경험삼아 후에 제27보병사단사단장으로 근무할 당시(2009.11.~2011.11.) "전시 혹은 훈련 중에 두부에 상처가 생기면 두발이 짧아야 상흔을 쉽게 찾을 수 있어 치료를 빨리하는 것이 가능하다."라면서 사단 전 장병에게 마치 모히칸 스타일 같은 짧은 헤어 스타일을 지시해 전 간부가 주 1회 이발을 하느라 바쁘게 지냈다고 한다. 이 당시 장병들의 머리를 부대 이름을 따서 '이기자 컷'이라고 불렸는데, 옆·뒷머리를 싹 밀고 앞머리가 6㎜인 것이 표준이었다. 여담으로 여기에 감명받아 똑같이 따라한 그의 특전사령관 시절 예하 지휘관이 있었는데 바로 최초의 비육군사관학교(학군사관) 출신 육군참모총장남영신 대장으로 제3보병사단장 시절 일명 '백골컷'이라는 헤어 스타일을 그대로 시행했다.

이후 중대장 시절에는 우수 전투중대장에게만 주는 재구상을 받기도 했다. 중대장을 모두 마친 이후 참모 보직으로 제30보병사단 작전처 작전장교가 되었다. 이 시기에 어머니 홍숙자 박사가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3.5. 영관급 장교 시절

파일:전인범육군소령.jpg
소령 시절엔 육군대학을 마친 후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전속부관, 육군특수전사령부 작전처 연합작전계획장교 및 작전장교, 육군참모총장실 정책과 정책장교 및 군사외교협력장교를 지냈다.
파일:전인범육군중령.jpg
제22보병사단 제55보병연대 제3대대장을 마치고 동사단에서 인사참모와 작전참모를 역임했으며, 이후 한미연합군사령부 작전참모부 연습처에서 근무한 바 있다.
파일:attachment/jib2.jpg
노무현 대통령이 2005년 7월 11일 오전, 청와대에서 이라크 다국적군사령부 선거지원과장 전인범 대령에게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2003년 제9보병사단 제29보병연대연대장에 이어 2004년 이라크 다국적군사령부(MNF-I) 선거지원과장으로 근무했을 당시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업무의 주역으로 외국군(미국, 영국, 호주, 루마니아)을 지휘·감독하여 이라크 민주주의 탄생에 기여했다. 이때 국제선거관리위원회에서 승인받은 투표용지를 중국 등으로부터 수송기로 받아 이라크 전역의 5,800개 투표소에 분배하고 직원들 봉급을 비롯해 비용을 전달하는 일을 했다. 서울신문 기사 이라크 평화정착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화랑무공훈장을, 대한민국 군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연방정부로부터 동성훈장(Bronze Star Medal)을 받았다.

2005년에는 국방부 국제협력관실 대미(對美)정책과장을 역임했는데, 이 직위는 국방부의 대미정책과 현안을 담당하는 주요 요직으로 한미동맹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통적으로 군내 최고의 미국통 대령이 맡는 자리이며 육군사관학교 44기 김현종 중장, 45기 허태근 준장, 48기 김성민 중장, 50기 최병옥 소장, 51기 곽태신 준장 등이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육군 내에서 전략통으로 꼽히는 군인들 대부분이 졸업 석차가 높은 엘리트여서 이 직위 역임자 중 육사 수석이 유의미하게 많다. 김현종, 김성민, 곽태신이 육사 수석졸업자이다.

3.6. 장군 시절: (1) 초기

파일:attachment/jib6.jpg
2007년 7월 1일 대한민국 육군준장으로 진급 후 당시 합동참모의장 김관진 육군 대장과 함께

2006년 준장 진급자 선발 후 합동참모본부에서 근무하며 공동작계추진단장, 전략기획부 차장, 전작권전환추진단장 등 전략분야 직위를 거쳤다. 2007년 7월 국제 테러단체인 탈레반에 의한 아프간 한국인 납치 사건이 발생했을 때 우리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한 카불 군사협조단장으로 급파, 적극적인 인질 구출작전으로 사건 발생 43일 만에 21명의 인질을 구출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연합뉴스 기사 이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구출된 인질들은 기자회견장에서 "전인범 단장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전인범 군사협조단장은 아프가니스탄 국제안보지원군(ISAF)에 파견되어 협조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미국 육군대학원 유학시절 가깝게 지냈던 독일군, 미군의 지휘관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ISAF는 전인범 장군이 요청하는 모든 정보를 넘겨주고 지휘통제실도 자유롭게 출입하게 해주었으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육군특수전사령부국가정보원 전술요원들을 침투시킬 헬기까지 차출해서 대기시켜줬다고 한다. 이때 ISAF 지휘관들이 너무 많은 자료를 스스럼없이 공유해 전인범 장군이 '이걸 나에게 줘도 되냐'고 오히려 물어볼 정도였으며 정보 공유 문제로 나중에 징계를 당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전인범이 괜히 미국통이 아닌 것이다.

2009년 11월 소장으로 진급해 제27보병사단사단장에 임명되었다. 재임기간 동안 사단 예하 모든 부대와 일선 장병들이 전투적 사고와 호전적 공세 기질을 갖춘 최정예 전투형 부대가 될 수 있도록 지도력을 발휘했다. 또한 이를 통해 지금 당장 싸울 수 있는 거점 전비태세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렸다. 당시 제27보병사단 장병들은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일화를 소개하며 그를 참군인으로 평가했다. #

위에서 언급된 이기자 컷도 이 시절 존재하였다. 이기자 컷이란 이름이 공식 명칭은 아니었지만 '이기자 컷'이라는 단어가 이기자부대 전역자들에 의해 인터넷상으로 워낙 유명해져서 이 명칭이 마치 공식 명칭처럼 되었다. 리그베다위키 시절에 작성된 이 문서의 초창기 버전은 이기자 부대 사단장 시절의 전인범을 다루면서 시작되었고, 이때의 이기자 컷으로 전인범 자체가 유명해졌으며 당시 수많은 미담과 소탈한 면모를 과시하였다. 인터넷에 이기자부대 전인범이라고 치면 많은 미담들이 쏟아진다. 그가 사단장을 이임한 뒤 후임은 탈모로 고통을 받고 있어서 그런지 다소 완화되었으나 육군특수전사령관 시절 직속 부하였던 남영신 당시 제7공수특전여단장이 이후 소장으로 진급해 김운용 후임으로 제3보병사단장에 부임하자마자 전설의 백골 컷을 그대로 탄생시켰다고 한다.
파일:external/pds21.egloos.com/a0000639_53030772d207f.jpg
제27보병사단장 시절 제설작전에 직접 넉가래를 들고 진두지휘하는 무시무시한 짤방으로 인지도를 높였다. 겪어본 블로거들의 말로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평가.

게다가 제27보병사단장 재직 중 차성도 중위 사건을 재발굴해 그를 기리는 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신동아 기사 차성도 중위는 1970년 제27보병사단의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중 부하가 안전핀을 뺀 수류탄을 놓치자 몸으로 수류탄을 덮쳐 부하를 구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를 당시에는 불미스러운 사고라고 덮어버려서 이후로는 소수를 제외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한편 재구상의 기원인 강재구 대위 역시 부하가 놓친 수류탄을 덮쳐 폭사하였지만, 당시 대대장박경석이고, 사단장 역시 참군인 채명신 소장이었다. 그리고 강재구 사건은 사고가 아니라 '살신성인'이라는 박경석 대대장의 주장이 채명신 사단장에게 받아들여져 채명신 사단장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재구상 재정에, 아예 부대 이름을 재구대대로 개명시켰다. 요약하면 지휘관이 누구냐에 따라서 숨겨야할 사고가 되는지, 국민적 영웅이 되는지 결정되는 것이다. 게다가 전인범은 중대장 시절 재구상을 받은 사람이였고 차성도 중위 사건을 재조사해 그를 영웅으로 만드는 길을 선택했다. 이후 제27보병사단 주관으로 관련 사료들을 발굴, 보전하면서 '차성도 중위 추모제'를 열고 차성도상을 제정했으며, 제27보병사단의 창고를 1년에 걸쳐 개조하여 사단 역사관도 만들었다.

2011년 5월 13일에는 한미 유대를 공고히 하고 연합작전 태세를 발전시킨 공과 한미 우호관계 증진 노력을 인정받아 미국이 외국군에게 주는 최고등급 훈장인 공로훈장(Legion of Merit)을 수훈하였다. 미국으로부터 이 상을 받은 다른 외국인은 장제스 대만 총통, 영국 국왕 조지 6세, 소련군 원수 게오르기 주코프 소련 국방장관, 샤를 드 골 프랑스 대통령, 육군 대장 김용배 육참총장, 해병대 중장 김성은 국방부장관, 육군 대장 김관진 국방부장관 겸 국가안보실장, 육군 대장 정승조 합참의장 등이 있다. 다만 공로훈장(Legion of Merit)은 최고사령관(Chief Commander)-사령관(Commander)-장교(Officer)-레지온네어(Legionnaire)으로 구분되며, 앞서 나온 인물들 중 장제스나 조지6세, 드 골 같은 국가원수는 최고사령관 등급으로, 타국 장성에게는 사령관급, 고위 장교에게는 장교급등으로 구분될 수 있다.

2011년 11월에는 2년간의 사단장직을 마치고 한미연합군사령부 작전참모부 차장으로 영전했다. 한미연합군사령부 작전참모차장은 한·미군의 핵심 보직으로 미군의 소장이 작전참모부장을 맡고 대한민국 국군 소장인 차장이 한미연합 작전 실무를 담당한다. 이 기간 동안 북한의 핵실험미사일 발사 위협 상황에서 한미연합군사령부 작전참모차장 임무를 탁월히 수행했다는 평이다. 아시아투데이 기사

한미연합군사령부 근무 시절인 당시 2007년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었다가 탈레반의 자살폭탄 테러로 전사한 윤장호 하사를 기리는 나무가 미국 육군제8군 부대에 있었는데, 그 나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인범은 그 나무를 교체하도록 건의하고 그가 사단장을 역임했던 이기자부대 역사관 안에 윤장호 하사를 소개하는 코너를 만들었다. 전인범은 상술한 '차성도 중위', '윤장호 하사'처럼 그와는 전혀 관계 없는 사람들도 호국의 영웅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기리는데 두팔을 걷고 나섰다. 이후 전인범의 전역식 당시 유일하게 축사를 해준 사람이 군번도 계급도 공로 인정도 없이 싸웠던 한국유격군총연합회 이진복 부회장이라는 점은 이러한 전인범 장군의 행적과 연관이 있다.

2013년 4월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제16대 한국군 수석대표에 임명됨과 동시에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참모장·지상구성군사령부 참모장 직을 겸직하게 되었다.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는 유엔군사령관 지침에 따라 평시 정전협정 유지 및 관리를 기본 업무로 수행한다. 특히 북한의 정전협정 위반사례가 발생하면 유엔군사령부 회원국 연락단을 포함한 다국적 특별조사팀을 구성해 조사한다.

3.7. 장군 시절: (2) 육군특수전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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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중장 진급과 함께 육군특수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가 특전사령관에 취임하면서 다음과 같은 여러 변화들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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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범 중장이 특전사령관에 부임한 뒤 특전사 베레모는 이렇게 바뀌었다. 특전사 베레모의 모표도 그동안 장교계급장만 달고 특전휘장을 달지 않던 것에서 특전휘장 아래에 계급장을 달도록 바꾸었다. 특수작전 훈련을 이수하지 않은 인원은 베레모에 특전휘장을 달지 못하도록 했다. 또 기존의 특전병들이 특전부사관과 휘장을 공유하던 것을 특전병 전용 휘장을 달도록 바꿨다. 전인범 장군 자신도 육군특수전사령관이긴 하나 해당 특수전 훈련 미이수자였으므로 특전휘장을 재직기간 동안 달지 않았다. 장경석 장군이 후임으로 온 뒤 전인범 장군의 정책 중 상당수가 과거로 환원되었으나, 이 복제 규정만큼은 유지되었고 장경석 장군 본인도 재직기간 내내 베레모에 계급장만 달았다.

육군특전사령관 취임 1년차에 접어들면서 부대의 장비 구입을 위한 예산 확보, 새로운 장비의 개발, 부대원들의 여건 개선 노력 등 특전사의 전투력 강화와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 서울신문 기사 이 기사에 의하면 특전사에 근무하다가 전역해 현재는 보안 관련 업계에 종사하며 후배들에게 자문활동을 해주고 있는 한 예비역 중사는 "지금과 같은 사령관이 있었다면 전역 안 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리고 장기복무자들에게 불필요하게 반복적이고 지나친 육체적 소모와 부상을 가져오던 기존의 정기적인 천리행군을 자대배치 전에 특수전교육단에서 한 번만 하고 이후에 자대에 가서는 하지 않는 것으로 바꾸었다. 천리행군의 방식도 바뀌었는데, 마치 지옥주처럼 7일간 잠을 안 자는 무박으로 강행군을 하고 중도 포기자는 모두 퇴교시키는 일종의 살아남기식 자격 훈련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전인범 사령관이 물러나고 후임 사령관인 장경석 장군이 부임한 이후론 전처럼 자대에서도 천리행군을 계속 하고 있다. 이것 외에도 전인범 사령관 시절 바뀌었던 사항들이 후임 사령관 교체 후 대부분 이전으로 되돌아갔다.

특전사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하며 스스로 말하기를 "세종시에 달려가서 관료들 만나 빌고, 울고, 협박도 했어요"라고 할 정도. 그 결과 강하 수당이 15년 만에 50,000원에서 70,000원으로 40% 인상되었다. 전투력을 올리면서도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기회를 많이 보장해줘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한달에 250㎞를 뛰면 휴가 하루를 주는 제도도 만들었다. 또한 예전엔 사제 택티컬 장비 (비인가 장비)의 사용 가능 여부가 각 대대의 대대장의 마인드 성향에 따라 저마다 달랐었는데, 전인범 사령관은 모든 예하 부대에 사제 장비의 사용을 정식으로 허용하였다. 물론 이 방침 역시 후임 특전사령관이 부임하면서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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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한미연합방위체계 구축과 한미동맹 강화, 상호 유대관계 증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으로부터 공로훈장을 다시 한 번 수훈하였다. 이로서 그는 한미 양국으로부터 총 8개의 훈장을 받아 대한민국 현역 장성급 장교들 중 최다 훈장 수상 기록을 세웠다. 연합뉴스 기사

2014년 4월 1일 특전사 연병장에서 12.12 군사반란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보호하려다 반란군의 총탄에 순국한 故 김오랑 중령에 대한 훈장 전수식을 열고 그의 유족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김해뉴스 기사 전인범 사령관은 통상적인 전수식과는 달리 김오랑 중령에게 전수되는 훈장이 주인공이 되게 하는 행사를 준비했다고 아래와 같이 밝혔다. #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특히 군인이라면 가슴이 뭉클하죠. 제가 축사를 한 게 아니라 그 행사 전체를 준비했습니다. '아, 나한테 이런 기회가 와서 다행이다' 생각을 했는데, 우리나라에는 훈장을 돋보이게 전수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임석상관 입장, 국기에 대한 경례, 묵념, 인사말, 끝 이렇게 하잖아요. 저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서 고민하다가 우리 부대에 있는 모든 지휘관을 서울로 올라오게 했어요. 저 지방에 있는 지휘관들도 다 올라오게 한다는 겁니다. 그게 굉장히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 다음에 훈장을 통상적으로는 임석상관, 특전사령관이 들어올 때 사람들이 일어나게 되어 있거든요. 그렇게 안 하고 훈장이 들어오도록 했어요. 모든 사람이 그 훈장을 바라보게 하고, 이렇게 걸어오지 않고 북을 치는 동안 한 발 한 발 들어오게 했어요. 거리가 30m밖에 안 됐지만 1분 30초 동안 훈장을 들고 있는 특전부대원이 들어오고 훈장을 놓고 훈장이 주인공이 되도록 하는 그런 행사를 해서 보는 사람들도 그랬고, 특히 그 유가족분들께서 상당히 만족하셔서 저로서도 기분이 좋았고, 또 김오랑 선배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2014년 9월 그가 지시한 특전사 포로 체험 훈련 중 제13공수특전여단 훈련사망사고로 2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당한 사건에 대한 처벌이 서면경고를 받는 데 그쳐 비난 여론이 있었다.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 등 인권활동가들의 주장에 따르면 전인범 특전사령관이 영화 <브라보 투 제로>를 특전사 사령부 참모들에게 보여주며 "이런 훈련과정이 왜 한국에는 없느냐"라며 훈련 수행을 지시해서 졸속으로 시행된 훈련이라고 주장하였다. 전인범은 2017년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 사고에 대해 해명하길, 훈련 준비를 위해 군인 정신에 부합되는 영화 중 하나인 <브라보 투 제로>를 교보재로 하여 특전사 휘하 여단장과 훈련 관계자를 한 자리에 모두 모아 영화의 장면, 장면마다 그가 직접 설명했다고 밝혔다. '자, 봐라 우리로 치면 격리지역 활동인데 (영화에서 보면 영국 특수부대는) 저렇게 한다, 우리는 이렇게 해야 한다', 그리고 '저기 보면 낙하산으로 침투하지 않고 헬기로 침투한다. 그런데 조종사와 승무원 훈련이 아주 잘 돼 있다', '우리는 중대장이 제일 먼저 뛰어내리는데, 저기는 중대장이 제일 나중에 뛰어내린다' 등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영화 속 사격기술이 절묘해서 이후 영국 무관까지 불러서 물어보기도 하는 등 오랜 과정을 거쳐 준비한 훈련이었다고 변론했다. 오마이뉴스 기사

문제의 훈련은 5인 1조를 기반으로 실시됐으며, 사고 발생 30분 전에 훈련을 받던 하사가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교관은 훈련의 일부로 여겨 중단하지 않았다. 질식 증세가 나타난 인원을 충청북도 청주시의 성모병원으로 후송하였으나 하사 2명이 숨졌고 1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화려한 수훈과 커리어, 인맥에도 불구하고 대장으로 진급하지 못하고 중장에서 예편했다는 주장과, 이리저리 튀는 편인 전인범 장군을 탐탁찮게 보던 장성들이 이걸 기회로 대장 진급을 막아버린 것이란 주장이 있다. 당시 육군의 입장은, 전인범 당시 특전사령관은 도의적 지휘책임은 있으나 법적 책임은 없다는 것이다. 2016년 10월 장성 인사에서 당시 2차 지휘책임이 있던 13공수특전여단장 정재학 준장이 소장으로 진급해 50사단장으로 영전한 것은 육군의 이러한 판단에서다.

<신동아> 2016년 5월호 225페이지에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 관련하여 그의 이름이 언급된다. "드라마에서처럼 부하를 아끼는 사령관도 실재한다. 전인범 사령관이 그런 사례이다. 보급품 확충, 수당인상, 사제품 허용, 간결한 훈시 등 여러 면에서 부하들을 꼼꼼하게 챙겼다. 국회의원들을 초대해 특공무술 시범을 한 적이 있는데, 그날 식사시간에 전 사령관이 의원들에게 전투식량을 건네보이며 '우리 애들이 이런 대우 받을 애들 아니다, 더 잘 먹여야 훈련도 더 잘할 수 있다.'고 호소했다. 그 후로 정말 전투식량이 좋아졌다. 군에 그런 분이 많으면 나도 유시진 대위 같은 군인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부사관 출신 A씨)라는 글이 실려 있다. 이를 볼 때 일선 특전사 대원들에게 상당한 신망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3.8. 장군 시절: (3) 육군특수전사령관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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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원들에게 제5공수특전여단 동사사고 교육 중인 제1야전군 부사령관 전인범 중장 국방일보 기사

2015년 4월 14일 특수전사령관 임기를 마치고 2차 보직으로 제1야전군 부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 특전사령관 이임사에서 그는 "우리는 야수의 본능을 잃어가는 동물원의 사자가 아닌 초원을 질주하며 천하를 호령하는 용맹함을 간직한 대한민국 육군의 대표부대 특전사 검은 베레 용사들"이라며 "누구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안 되면 되게 하라'는 투철한 사명감으로 도전하고 노력하는 정신이 바로 특전정신이다. 우리들 특전용사에게 결코 불가능은 없다."고 강조했다. 뉴시스 기사 전인범 25대 특전사령관 이임사 영상

그렇게 한직에 있다가 2015년 10월 장성 인사에서 육사 동기인 김영식, 박찬주, 엄기학이 대장 진급에 성공하고 각각 1, 2, 3군사령관으로 영전하면서 그는 사실상 대장 진급에 실패하게 된다. 이후 2016년 상반기 장성 인사에서 2군단장직을 수행하던 고현수 중장이 제1야전군 부사령관으로 보직 이동함에 따라 전인범 중장은 육군본부 정책연구관으로 이동하였다. 정책연구관은 장성이 계급정년 혹은 연령정년이 남아있으나 보직은 이미 끝마쳤을 때 가는 전역대기직이다.

3.9.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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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28일 경기도 이천시 육군특수전사령부 연병장에서 전역식을 갖고 36년 동안의 군 생활을 명예롭게 마감했다. 이날 보국훈장 국선장과 함께 빈센트 브룩스 주한미군 사령관으로부터 미국 특수작전사령부 훈장(USSOCOM Medal)도 수여받았다. 수훈은 5월이었지만 훈장수여식은 이 날 했다. 해당 훈장은 한국군 출신에게는 처음 수여된 것이다. 전역식에는 정호용, 이기백, 김동진, 김태영국방부 장관도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었다.

전역 직전 한국군사학회 부회장으로 영입되었다. 다만 해당 단체에는 이미 10명 이상의 부회장직이 존재하므로 일종의 명예직에 가깝다. 2016년 10월부터는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 동아시아정책연구센터 방문연구원, 존스 홉킨스 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해를 넘긴 2017년 1월 23일에는 미국의 북한전문 매체 'NK 뉴스'를 통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공개 편지를 발표하여 눈길을 끌었다. 관련 국내보도 NK뉴스 원문 NK뉴스 번역문

3.10.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캠프 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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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4일 경희대 평화의 전당에서 개최된 문재인 前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북콘서트 '대한민국이 묻는다' 행사에서 안보자문위원 합류 소식을 전하는 전인범 前 특전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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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4일 더불어민주당의 유력 대선주자인 문재인 前 대표의 북 콘서트에 참여했다. 그리고 이날 콘서트 진행을 맡은 고민정 아나운서와 함께 인재 영입 대상으로 확정됐다. 본인 스스로도 페이스북에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선 경선 캠프 안보자문위원으로 활동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 나중에 동아일보 기사를 통해 밝혀진 바로는 문재인은 전인범을 영입하기 위해 그를 10번이나 만나며 공을 들였고, 전인범이 무슨 쓴소리를 해도 납작 엎드리며 "도와 달라"고 읍소했다고.
“페북친구 5000명중 현재까지 28명이 이탈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충분히 분노하시는 마음을 이해합니다.
제가 이번 결심의 결정적 이유는
지난번 특전사에 갔는데 그간 추진했던 많은 사업들이 원점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특히, 7만원짜리 특수작전칼(서바이벌 칼)을 부결시켰다는 얘기를 듣고 조용히 살수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정치 안합니다.
듣기 좋은 얘기만 하지 않을겁니다.
그러나, 해군, 특공, 헌병특경, 해병대와 육군 수색대, 공군 SAR, 정보사 여단 그리고 특전부대와 일반병이 자기 자신과 나라를 지키는데 필요로 하는 기본장비를 구비하도록 노력할 겁니다.”

2017년 2월 5일 전인범 장군이 문재인 후보를 돕기로 한 배경에 대해선 본인의 페이스북을 통해 "지난번 특전사에 갔는데 그간 추진했던 많은 사업이 원점으로 돌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고, 특히 '람보 칼'로 불리는 개당 7만 원의 특수작전용 서바이벌 칼의 도입이 부결되었다는 소식에 "조용히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아시아경제 기사 이에 당시 육군 측은 "특수작전 칼을 당초 개당 7만 원에 구매하려 했지만, 더 나은 15만 원짜리로 구매하기로 했다."고 반박했다. 또한 18억 5,000만 원의 관련 예산이 이미 통과되어 2017년을 시작으로, 2022년까지 보급될 것이라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다만 이에 대해선 평가가 나뉘는데, 한국군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는 다목적을 광적으로 선호하는 현상이 이번에도 발휘되었다. 특수전용 칼이면 그냥 쑤실 때 쓰게 튼튼하기만 하면 되는건데, 신형 특전사 칼을 손잡이 속에 성냥개비, 낚시줄 따위를 넣어 요술방망이처럼 쓰라는 용도로 채택하였다. 또한 기존의 특전사 칼에 철조망 절단 기능이 있지만 너무 비효율적이고 내구성이 약해 그냥 내구도 좋은 칼이나 주라고 했던 특전사 내부의 의견이 전혀 반영이 안되어 또 다목적 칼에 내구성 약함 + 철조망 절단 기능까지 넣어놨다. 외국 특수부대가 바보라서 철조망 절단기를 따로 들고 다니는게 아니다. 특전사 역시 기존의 철조망 절단 기능 대검이 있음에도 절단기를 따로 들고 다녔다. 대검으로 자르는 것과 절단기는 효용성 면에서 비교가 안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목적이다 보니 칼 자체의 내구도는 떨어지면서 가격만 몇배로 비싸다. 반면 전인범 장군이 추천한 거버사의 LMF 모델 칼은 저렴하기라도 하다. 아무 기능도 없어 튼튼하고 작다는 것도 장점.

문재인 캠프 안보자문위원으로 합류한 직후인 2월 6일의 한 토론회에 참석하여 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에 관해, "기존 한미 합의를 존중하고, 중국의 경제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두 가지 선언이 전제된 상태에서 논의해야 한다"고 밝혀 사실상 배치 찬성 견해를 밝혔다. YTN 기사 아울러 국방 현안에 대해 문재인 후보와 견해가 다른 점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이야기할 것이라고도 했다.
“지금도 (5.18 민주화운동 당시) 발포 명령을 누가 내렸는지 아무도 모르잖나. 특전사가 살인마처럼 비춰지는 건 바뀌었으면 한다”
“그러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이 감옥에도 가고 그런 것 아닌가”
“하여튼 저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발포를) 지시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문재인 캠프에 합류한 이후인 2017년 2월 9일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 밝힌 상기의 발언을 정치권에서 문제삼기 시작했고, 한겨레 기사 이에 대해 호남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국민의당
“이러한 일방적 발언은 국가적 민주화운동과 희생을 모욕하는 망언... 전 장군은 민주화운동에 희생되신 분들과 유족들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겼다. 호남에서 지지를 호소하면서 정작 반5.18적 사고방식을 지닌 인사를 안보자문역으로 영입한 문재인 전 대표에게 제 정신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고 공격했다. 오마이뉴스 기사 이러자 호남이 지지기반인 더불어민주당에서는 호남 지지율이 11%나 떨어져, 민주당 의원들도 뒤늦게 비판을 하게 되었고 당내에서도 영입을 철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위와 같은 전인범의 5.18에 대한 견해에 우파 언론인임에도 5.18을 반공적 민주화운동으로 높이 평가하는 조갑제는 "여러 번의 국가적 수사와 조사에서 광주 사태 초기엔 상급 지휘부의 발포 명령 자체가 없었으며 현장 상황이 워낙 급하여 자위적 차원의 대응발포로 비극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확정되었다. 물론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의 발포 명령은 없었다"며 전인범의 발언을 옹호하였다. 뉴데일리 기사

결국 정치권에서 5.18 발언과 부인인 심화진 성신여대 총장이 학교 공금 횡령 혐의로 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 받은 것까지 싸잡아 공격하며 논란이 불거지자, 2017년 2월 10일 미국으로 떠나 연수 활동을 재개하겠다고 밝혔다. # 당시 언론에선 그가 문재인 캠프를 하차했다고 말했으나 캠프 관계자들은 그가 자숙 차원에서 도미한 것이며, 안보 자문은 계속 할 것이라고 말했다. 뉴시스 기사

도미 후에도 안보 자문을 계속하다 2020년, 문재인을 지지한지 3년 만에 지지를 철회했음을 밝혔다. 동아일보 기사 이유는 남북관계 진전에 욕심이 앞서 미군을 환대하지 않고 육사의 사기를 지나치게 꺾었으며, 국군을 '훈련 안 하는 군대'로 만들어 쓸모없는 조직으로 전락시켰다는 것이다.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2019년 탈북 선원 강제 북송 사건에서 강원도 삼척의 앞바다로 탈북해 온 북한 선원 2명을 강제로 북한으로 돌려보낸 조치를 용납할 수 없어서라고. 그 2명이 어떤 범죄를 저질렀건 간에 탈북을 한 이상 대한민국 국민이므로 처벌을 받아도 한국 법정에서 물어야지, 그들을 북으로 돌려보내버린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 그 요지. 전인범의 자서전 《보통장군 전인범》 358페이지에서 문재인에 대하여 "그래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인간적인 사람이라고는 생각한다. 다만, 지도자로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만큼은 할 줄 알았지만 내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고 평했다.

3.11. 근황

전역 이후 개인 사무실을 운영하며 유튜브, 페이스북 등을 통해 팬들과 밀덕들을 대상으로 활발히 소통하고 있으며, 국내 및 해외 등지에서 한미외교 연구, 안보 강연 등의 활동도 이어가고 있다. 또한 동물자유연대 이사로 동물권 보호활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2018년 6월에는 국회의원회관에서 특수작전 전술 및 장비 현대화를 위한 세미나를 주최하여 많은 호응을 얻기도 하였다. 파이낸셜뉴스 기사 당시 세미나 참석자 다수는 휴가 등을 얻어 참석한 국군 장병 및 안보 관련 종사자였고, 다수의 밀덕들도 자리를 차지했다. 당초 100명 미만의 규모로 세미나를 준비했는데, 150여명 이상이 참석했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2018년 자유총연맹 부총재에 임명되었고, 미국 사회에 우방으로서 한국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2018년 12월에는 조지아주 보훈청장과 면담하며 미국으로 귀화한 한국군 베트남전 참전용사가 미 정부로부터 유공자 인정될 수 있도록 배려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미주중앙일보 기사

2019년 하반기 플래툰 컨벤션 2일차에 깜짝 등장했었다. 인터뷰나 기타 특별한 활동 없이 구경만 하다 갔는데 마스크를 쓰고 와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냥 구경 온 평범한 아저씨인줄 알았다고. 이후에 개최된 플래툰 컨벤션에도 자주 방문하고 있어 참가자들이 함께 영상이나 사진을 찍어서 공개하는 일이 있다.

2021년 1월 본인의 유튜브 영상으로 모병제 및 군인 월급에 대한 의견을 밝혔으며 크게 4가지 이유(1. 인구감소 문제라면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복무확대(남여징병제(여성징병제) 포함)하면 됨, 2. 군 정예화를 위해선 모병제로 인력획득 어려움, 3. 청년일자리 창출 문제는 군은 목숨을 담보로 안보를 책임지는 조직이라 다른 조직들과 성격이 다름, 4. 병영부조리 척결 문제는 징병제 하 병영부조리는 해결될지 몰라도 모병제 하 병영부조리가 새로 생길 것)를 들며 모병제에 대해 반대, 결국은 징모혼합제가 가장 낫다고 말했다. 군인 월급(정확히 이야기하면 병의 월급)의 경우는 하루종일 부대에서 복무하므로 최저임금 수준까지 월급을 올리는 게 아깝다 생각하진 않으나 현실적으로 많은 제약이 있는데, 스웨덴, 이스라엘, 싱가폴 같이 기본 월급은 적어도 야외훈련시 상당한 수당지급이랄지 전투병과 비전투병 간 월급차를 크게 두는 식으로 하는 게 좋겠다고 밝혔다. #

2021년 신동아 2월호에 게재된 인터뷰 기사에서 2017년 19대 대통령 선거 당시 "전작권 전환을 무리하게 서두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문재인 캠프에 동참했다고 밝혔다. 그 때문인지 현재 제동이 걸린 전작권 전환에 대해서도 "지금으로서는 늦춰지는 게 차라리 다행"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인터뷰 기사

2021년 5월 대한민국 국군 자가격리 장병 부실 식사 제공 논란에 대해서 유튜브 영상을 올렸는데, 병영내 휴대전화 사용은 군 전투력 향상 차원에서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다만 군인들이 음란물, 도박 사이트에 접속하거나 선의가 포함된 일들이 왜곡되는 상황이 있다고 말했다. 또는 여론에 따라 병사들의 복지에 관련된 군납업체를 외부 업체로 바꾸게 되었을 경우 국방비 지출이 늘고 질은 오히려 떨어지는 경우가 생긴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여론은 대체로 호의적.
2021년 6월 한미연합사단 창설 6주년 기념식에 초청받았고 축하 연설을 했다.

2023년 7월 전 세계에 122개 지부, 회원 15만명을 가진 미국 육군협회(AUSA) 석좌위원(Senior Fellow)으로 위촉됐다. 미국인이 아닌 사람이 미국 육군협회 석좌위원이 된 것은 전인범이 처음이다. 매일경제 기사 미국 육군협회는 매년 워싱턴과 하와이에서 두 차례 큰 회의를 여는데 그가 하와이 회의 때 강연자로 여러 차례 참석했더니 협회에서 석좌위원이 돼달라고 요청이 와서 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27명의 석좌위원 중 15명이 장성 출신이고, 나머지는 주임원사나 선임부사관 출신, 자치단체장의 부인들도 있었는데 미국인이 아닌 사람은 본인밖에 없었다고. 신동아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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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회고록 《보통장군 전인범》을 출간했다. 서울경제 기사 이 책은 출간한 지 한 달도 안 돼 1쇄 3000부가 완판되어 2쇄에 들어갔으며, 원래는 2023년 말 책이 나올 수 있었지만 2024년 4월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자칫 선거 출마로 오해받을 수 있어 총선 후로 출간을 미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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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10일 전인범 장군의 출판기념회전쟁기념관 이병영홀에서 열렸다. #

개인 유튜브 채널을 통해 육군사관학교의 이전을 반대한다고 밝히며, 그 이유로 "생도들은 수도와 같이 크고 외국인도 많이 접할 수 있는 곳에 있어야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들었다. 이에 대해 반대하는 이들은 "그 말대로면 진해청주에 있는 해군사관학교공군사관학교는 지방에 있지만 해군, 공군 장교들이 딱히 육군 장교들보다 시야가 좁지 않다"고 반박했다. 또한 해당 영상에서 일본방위대학교도쿄에 있는 것을 사례로 들었는데, 이는 틀린 것으로 방위대는 요코스카시에 있으며 도쿄에 있던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폐교된 일본육군사관학교로 現 이치가야방위성 부지에 있었다. 이를 누군가 댓글로 지적했고 전인범 장군은 지적한 이에게 감사를 표하는 댓글을 남기며 자신의 오류를 수용했다.

4. 평가

군인 시절, 과거 한미연합군사령관을 지낸 미국 육군 대장 커티스 스캐퍼로티 장군은 그를 일컬어 ‘가장 절친’이라고 언급하기도 했을 정도로 미군들의 신뢰를 받으며 강력한 한·미 군사동맹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미군 인사들과 두터운 인맥으로 인해 복무 당시 우리 군의 대표적인 '미국통'으로 분류되었다. 아시아투데이 기사 조선일보 군사전문기자 유용원은 그를 '군내에서 영어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라고 기사에서 언급하였다. 조선일보 기사 동아일보 논설위원 송평인은 그가 대위였을 때 본 적이 있는데, 유창한 영어로 한미 군사훈련을 조율하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행동과 자세 하나하나에 자신감이 넘쳤다고 호평했다. 동아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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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구성이 뛰어난 군용 슬리퍼인 속칭 아다만티움 슬리퍼가 만들어지게 한 주인공이다. 제27보병사단장 시절, 내구성이 약했던 군용 슬리퍼를 꽤 고품질의 슬리퍼로 교체해 '국방부의 역작' 소리가 나오도록 하는 등 사병들 입장에선 빡세지만 좋은 사단장이라는 평을 얻었다. 이때 슬리퍼는 내구성이 뛰어나서 병사들 사이에서는 통칭 "아다만티움 슬리퍼" 또는 "국방부 마지막 양심"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당연히 호평일색이다. "전투화보다 더 오래갑니다.", "6년째 내리쓰는데 부서지지를 않습니다.", "천리행군은 이걸 신고 해야 한다.", "군생활 7년 하면서 가장 슬펐던 일은 훈련소 때 보급받은 초록색 무적슬리퍼를 3년차 도난당했을 때다" 하는 반응.

2015년 하반기 군 수뇌부 인사가 야전 경력 위주의 인사가 이뤄졌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 가운데 신원식, 이재수 장군은 박지만 EG그룹 회장과의 친분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전인범 중장을 배제한 것은 부적절하다는 주장도 있다. 뉴스1 기사 이러한 결과를 불러온 이유로 그가 야전보다 ‘미국통’ 이미지가 더 강했던 것 외에 지나치게 강직한 성격이 지목되기도 했다. 국민일보 기사 주간동아 기사

2009년 11월 그의 27사단장 취임식 때 부인 심화진이 총장으로 재임 중인 성신여자대학교의 직원들이 동원됐음이 논란이 되었다. 대법원은 2017년 2월 9일 전인범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성신여대 조모 교수에 대한 상고심에서 조 교수의 의혹 제기가 일부 사실이라고 본 항소심 판결이 정당하다고 판시했다. 앞선 2016년 11월 항소심 재판부는 "원심은 고소인(전인범)의 사단장 취임식에 성신여대 학생이 동원된 사실이 없는 점 및 위 보도에는 강제로 직원과 학생을 동원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피고인(조 교수)은 어떻게 직원과 학생을 강제로 동원했다는 것인지 전혀 밝히고 있지 못한 점 등의 이유를 들어 이 부분 제보 내용 및 보도 내용이 허위라고 판단하였으나,머니투데이 기사 - 전인범 예비역 중장 명예훼손한 성신여대 교수 벌금형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정에 비추어 보면 이 부분 피고인의 제보 내용 및 언론 보도 내용은 그 중요한 부분에 있어 객관적 사실에 합치된다고 할 것이고, 따라서 검사 제출 증거들만으로는 위 내용이 허위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결문에서 밝혔다. 프레시안 기사 한편 부인 심화진 성신여대 총장이 학교 공금 횡령 혐의로 재판 중일 때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심 총장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우리 집사람이 비리가 있었다면 제가 어떻게 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라고 자문한 뒤 "권총으로 쏴 죽였을 것"이라고 자답해 일부 네티즌들에게 비판 받았다. 후일 심 총장에게 1심에서 징역형이 선고되자 "무죄를 확신해서 경솔한 표현을 했다"며 해명했다. 연합뉴스 기사

5. 기타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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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석사 학위 논문: 한미군사동맹의 구조적 변화에 대한 연구(1994-2004) (2006)[2] 박사 학위 논문: 美 닉슨·부시('01.1~'09.1) 행정부 시기 주한미군 감축결정 비교연구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