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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정진태 | 제7대 나중배 | 제8대 김진영 | 제9대 김동진 | 제10대 김재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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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백선엽 | 2대 송요찬 | 3대 유재흥 | 4대 김종오 | 5대 이한림 | |
6대 박임항 | 7대 민기식 | 8대 장창국 | 9대 김계원 | 10대 서종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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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강원채 | 2대 김판규 | 3대 유학성 | 4대 전성각 | 5대 김종구 | |
6대 나동원 | 7대 이광로 | 8대 김상언 | 대리 김영규 | 9대 정진권 | |
10대 정호근 | 11대 여운건 | 12대 최평욱 | 13대 송응섭 | 14대 김정현 | |
15대 이현부 | 16대 이재달 | 17대 이유수 | 18대 양인목 | 29대 이종옥 | |
20대 김승광 | 21대 이선민 | 22대 김장수 | 23대 김병관 | 24대 김근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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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장재환 | 31대 이종섭 | 32대 이정기 | 33대 윤의철 | 34대 허강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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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8대: 동해안경비사령관(소장) ▸ 9대~현재: 제7기동군단장(중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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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병관 대장.jpg | |||
출생 | 1948년 12월 12일 ([age(1948-12-12)]세) | ||
경상남도 김해시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
1972년 ~ 2008년 | |||
재임기간 | 제19대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 ||
2006년 11월 21일 ~ 2008년 3월 28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10007c><colcolor=#fff> 배우자 | 배우자 배정희 | |
자녀 | 슬하 2남 | ||
종교 | 불교 | ||
학력 | 경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화학공학 / 중퇴) | ||
소속 정당 | |||
임관 | 육군사관학교 (28기) | ||
최종 계급 | 대장 (대한민국 육군) | ||
최종 보직 |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 ||
주요 보직 | 제1야전군사령관 제7기동군단장 합동참모본부 전력기획부장 제2보병사단장 제6포병여단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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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군인. 최종 보직은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역임했다.2. 생애
1948년 생. 경상남도 김해시에서 태어났으며, 서울 경기중학교 및 경기고등학교 졸업 후, 1967년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1]에 입학했으나, 한 학기 만에 자퇴하고 재수하여 육군사관학교를 28기 수석 입학/졸업하였다.[2] 1973년 3월부터 동년 6월까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다.2006년 11월 한미연합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취임하여 2008년 3월까지 복무 후 퇴역했다. 2013년 2월 박근혜 정부의 제44대 국방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되었으나 38일 만에 자진사퇴하였다.관련기사
현재는 자유민주당 최고위원이다.
3. 군 경력
- 대령
- 육군대학 전술담임교관
- 중장 2003년 4월 진급
- 제7기동군단장 (2003.4 ~ 2005.4)
- 대장 2005년 4월 진급
- 제1야전군사령관 (2005.4 ~ 2006.11)[4]
-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2006.11 ~ 2008.3)
- 손자병법의 대가 1세대로서[5] 군단장 시절 손자병법을 현대전으로 재해석해 집필한 '군사적 관점에서 본 손자병법 해설'을 집필했고 그것으로 7군단 사령부 장교들에게 6시간에 걸쳐 강의하기도 했다. 이 문건은 그 이후 한동안 제7기동군단 직할대 장교들이 열람할 수 있었다.
- 제1야전군사령관 마친 후 전역 예정이었으나[6] 당시 한미연합사령관 벨 3세 대장이 그의 경력을 아까워하여 연합사 부사령관으로 적극 천거하였다.[7]
- 김병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자신의 멘토라고 했다. 관련기사 장관 청문회에서 그의 뒷자리에 앉아있는 것도 보이는데[8], 당시 합참 전략기획차장(☆)으로서 청문회 준비단에 차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4. 전역 후
4.1. 국방부 장관 후보
전역 후 2013년 국방부 장관 후보로 지명되기도 하였으나 낙마하면서 김관진 장관이 유임되었다. 이 당시 논란이 일었던 것은 '여당 최고위원 9명 가운데 7명이 반대하는 상황에서 청문회를 1달 이상 끌었으며 결국 자진 사퇴하였다. 이 비리의혹에는
- 무기중개업체인 유비엠텍[9]에서 비상근고문으로 근무하면서 K2전차의 파워팩 교체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10]
- MB 정권 시기 KMDC 주식보유 및 보유사실을 인사청문회에 숨긴 것
- 2사단장 재임시기 리베이트 문제[11]
- 부인이 가지고 있던 군수사업체 비츠로셀[12] 주식 보유 문제
- 그래도 김병관은 최전방에 병력이 너무 많이 집중되어 있는 점을 문제 삼아 군대를 과학화하여 병력을 좀 더 후방으로 두어서 전시 인적 손실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적 있다. 김병관 본인이 '요즘은 장병들 중에 외아들이 많은데 병적 손실이 심하면 이는 가족들에게도 큰 비극'이라는 언급을 하기도 했다. 김병관이 병사들을 인격적으로 사랑했다는 것을 들어 일부 보수 성향의 현역들 및 예비역들은 그의 국방부 장관 낙마를 안타깝게 본 바 있다.
4.2. 전역 후 삶
- 前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이사장
- 前 육군사관학교 총 동창회장
- 現 한미안보연구회장 사이트
[1] 1960년대 당시에는 서울대학교와 육사가 대학계 학벌 최강자의 자리를 다투고 있었다.[2] 같은 경우로 김동진 대장, 정승조 대장, 김성민 중장도 수석 입학/졸업자이다.[3] 사단장 시절 How To Make War를 번역하여 출간했다.무려 3판까지 발간한 책으로 군인들이 읽어야할 필독서 중 한권이다.[4] 중장2차 보직을 거치지 않고 대장 진급했다.그만큼 능력이 출중하다는 방증이다. 물론 인사적체도 한몫했다.[5] 김병관(1세대)~노병천(2세대)~김병주(3세대)[6] 당시 대장 2차 보직을 앞두고 육사 동기인 제3야전군사령관 김관진 대장이 합참의장, 제1야전군사령관인 김병관 대장이 육참총장으로 발탁되는것이 기정사실화되는 분위기였으나 육참차장으로 대장진급도 하지못한 상태였던 박흥렬 중장이 육참총장으로 발탁되었고 김관진 대장은 합참의장으로 김병관 대장은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이 되었다. 당시 박흥렬 중장이 차장에서 총장으로 직행한 것은 김장수 총장 하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국방개혁정책을 추진하던 DNA의 연속성 유지를 위함이었다고 알려진다.[7] 벨 사령관은 김대장을 "전술의 달인(master tactician)이자 군사전략의 예술가(operational artist)라고 극찬하였다.[8] 이종섭의 모습도 뒤에 보인다[9] 업계에서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아는 유명한 브로커 업체다. 손원일급 잠수함 사업을 비롯, 대형 외국 무기체계 도입 시마다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전직 고위 장성들이 엄청나게 많이 이 업체의 고문을 거쳐갔다. 비단 김병관 대장만은 아니다. 실력과는 별개로 국내외를 가리지 않는 인맥만은 업계 최고라고 할 만하다.[10] 뉴데일리와 조갑제닷컴 등에서는 김병관의 낙마를 종북 주장까지 하면서 안타까워한 바 있다.[11] 휘하 장교들이 리베이트를 받았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묵살. 이후 육본에서 직접 수사해서 해당 영관들을 모두 구속하고, 김병관에게도 경고조치. 당시 사단 참모장이던 조정환은 2013년 기준으로 육군참모총장에 재임중이었는데 이 의혹이 발목을 잡아 합참의장이 되지 못 했다.[12] 군용전자무기에 들어가는 전지 독점공급업체이자 군용 신형포탄 공급업체. 김병관은 포병대대장과 포병연대장 근무 경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