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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31년 9월 18일 |
전라남도 구례군 | |
사망 | 2004년 1월 28일 (향년 72세)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장군제1묘역 21호 |
학력 | 전북대학교 (법학 / 학사) 미국 육군보병학교 (OBC / 수료) 서울대학교 (행정학 / 석사과정 수료) |
경력 | 한국토지개발공사 이사장 대한민국재향군인회 회장 |
군사 경력 | |
임관 | 육군사관학교 (10기)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1950년 ~ 1983년 | |
최종 계급 | 대장 (대한민국 육군) |
최종 보직 | 제1야전군사령관 |
주요 보직 |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교육관리과장 파월 수도사단 참모장 제28보병사단장 육군종합행정학교장 전투병과교육사령관 육군교육사령관 육군참모차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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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군인, 고위 관료. 1931년 전남 구례 출생. 본관은 진주 소씨이다.2. 생애
전라남도 구례군에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를 10기로 졸업하고 곧바로 소위로 임관했다. 이 해에 6.25 전쟁이 터졌는데 최전방에서 소대장, 중대장으로 임무를 수행하며 참전했고 종전 직후인 1954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육군보병학교 OBC[1]을 수료했다.1965년에는 전북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함과 동시에 연대장에 임명되었고 1967년에는 대한민국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교육관리 과장, 1968년에는 맹호부대(수도기계화보병사단) 참모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1975년 보병사단장, 1977년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차장을 거쳐 1978년에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행정학과를 수료하고 1979년에는 육군종합행정학교장에 임명됐다.
1980년 5월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투병과 교육사령관으로 시위대 진압 임무를 맡기도 했다. 1981년 육군참모차장과 1982년 제1군사령관 등을 역임한 뒤 1983년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다. 군 재직 시 월남금성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보국훈장 통일장·국선장·천수장·삼일장 등을 받았으며 1984년부터 1989년까지 한국토지개발공사(현 한국토지공사) 이사장으로 재직한 후 1988년부터 1994년까지 대한민국재향군인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2004년 1월 28일에 향년 72세로 사망했으며 유족으로는 부인 형정순과의 사이에서 낳은 2남 2녀가 있다.
5.18 민주화운동의 진압 책임자였기 때문에 1988년 청문회에 불려가기도 했다.[2]
[1] Officer Basic Course[2] 청문회에 불려갔을 때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당시의 만행에 대해 발뺌을 일삼던 일부 지휘관들과는 달리 소신껏 증언을 하며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다음은 그의 진술 내용 중 일부분을 따온 것이다. "85년 그해 제가 장세동 안기부장을 찾아가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초기진압에 과잉 이게 원인이었다. 나중에라도 광주 시민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응분의 보상을 해 줘야 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제안을 했습니다." 즉, 소준열도 학생들의 시위 진압을 군이 나서서 한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전두환에게 대항할 힘은 없었을 거란 예상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