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훈 감독 장편 연출 작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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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e9582><colcolor=#ffffff> 화려한 휴가 (2007) May 18 | |
장르 | 시대극, 드라마 |
감독 | 김지훈 |
각본 | 나현, 박상연 |
촬영 | 이두만 |
원작 | 박상연 |
제작 | 유인택 |
주연 | 김상경, 안성기, 이요원, 이준기 |
제작사 | 기획시대 |
배급사 | CJ엔터테인먼트 |
개봉일 | 2007년 7월 25일 |
상영 시간 | 125분 (2시간 5분) |
월드 박스오피스 | $49,282,156 |
대한민국 총 관객수 | 7,307,993명 (2018년 2월 8일 기준) |
스트리밍 | ▶ | ▶ | ▶ |
상영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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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0년에 일어났던 5.18 민주화운동을 모티브로 제작한 영화. 2007년 7월 25일, 대한민국에서 개봉되었다. 제목은 당시 진압에 참여했던 육군특수전사령부 대원의 수기에서 따왔다.[1]잊혀선 안 될 대한민국의 비극적인 역사를 사람들에게 다시 환기시킨 영화이다.
2. 예고편
공식 예고편 |
3. 등장인물
[배우 명]
구분 | 표기 |
생존자 | - |
불명 | ? |
전사자 | # |
3.1. 광주 시민
강민우 (김상경 扮 ) # |
이 영화의 주인공. 하나뿐인 남동생 진우와 열심히 살아가며[2] 동생이 다니는 성당에서 우연히 마주친 신애와 사랑을 키우는 순박한 택시 기사. 어릴 적부터 자신 혼자 동생을 돌봤기 때문인지 동생인 진우를 많이 아낀다.[3] 광주에 계엄군이 들어온 후 신애가 영화를 보다 아무 죄 없이 계엄군에게 두들겨 맞을 뻔 하기도 하고,[4] 자신도 그냥 다친 사람을 태우려 하다가 계엄군에게 붙잡혀 끌려갈 뻔 하기도 했지만[5] 끝까지 친구가 죽어 시위에 나간다는 진우를 말린다. 계엄군이 행동이 옳지 않고 맞서야 한다는건 알지만 가족과 나의 안전을 위해 선뜻 나설수 없는 계엄 초기 시민들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인물, 하지만 이후 우연히 인봉을 따라서 대규모 시위에 참가하던 중, 계엄군이 물러간다는 소식을 듣고 같이 기뻐하고 애국가도 따라 부르는 순간 계엄군의 발포에 수많은 시민들이 사망하는것을 목격한다. 도망치는 군중들 속에서 진우를 찾아 같이 도망치려 하지만 진우가 다친 사람을 도우려다가 자신도 배에 총을 맞고 쓰러진다. 흥수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병원에 진우를 데려가지만 진우는 이미 죽은 후였고, 다시는 사랑하는 사람을 혼자 떠내보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이 일이 생긴 후 시민군이 결성되고, 사람들과 함께 계엄군의 보급 창고를 털어버린다.[6] 며칠 후, 도청 근처에서 시민군과 계엄군의 전투가 벌어진다. 민우가 포함된 시민군은 가족을 잃은 분노와 애국심으로 계엄군과 맞서지만 잘 훈련되고 숫자가 많은 계엄군과의 전투에서 밀린다. 그중 부상자들을 데리러 온 신애와 진철이 나타나고 부상자들을 실으려 한 진철이 총을 맞고 쓰러진 뒤 신애 혼자 남겨지자 빗발치는 총알을 피하고 신애를 대피시킨다. 결국 시민군은 흥수의 도움으로 도청을 점령한다. 그리고 최후의 전투에서 흥수의 도움으로 탈출했으나 결국 계엄군에게 적발되었다. 다만 계엄군이 바로 발포하지 않고 '투항하면 살려준다!' 라고 말해 투항할지 고민하던중 '폭도는 총을 버려라!' 라는 계엄군의 협박에 의해 위의 대사를 치고 마지막까지 한명이라도 쏘려다 그대로 열댓명 정도의 사격에 맞는다. 서서히 의식을 잃어가는중 신애의 확성기 소리가 들려[7] 희미한 웃음을 남긴채 죽는다.
해병대 군필자라고 하며, 이 경험을 살려서인지 시민군에서 전투력으로는 탑을 달린다.[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의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으며 전남도청을 지키다가 죽은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9]이 모티브라고 한다. 삭제장면들을 보면 무기를 반납하고 투항하자고 주장하는 수습위원회 회의장에 뛰어들어 천장에 총을 난사하거나, 흥수가 김 대위에게 부탁해 사복으로 변장한 군인 둘을 데려와 도청 지하에 협박용으로 설치한 폭탄을 해체하게 만들자 그만두라고 총을 겨누고 흥수가 그걸 막자 흥수에게도 총을 겨누며 말다툼하는 상당히 과격한 모습을 보여주나, 본 영화에서는 편집되면서 캐릭터의 인상이 꽤 달라졌다.[10] 여담으로 배우 김상경이 특전사로 복무했던 부대가 공교롭게도 5.18 민주화운동 당시에 투입되었던 공수부대였다고 한다.
박흥수 (안성기 扮) # |
예비역 대령. 특전사 출신으로 극중 공수부대 김상원 대위가 가끔 방문해서 '선배님'이라 부르며 존대한다. 계급은 시민군을 소집해서 연설할 때 밝혀진다. 김 대위의 방문 장면에서 스스로를 '실패한 군인'이라고 한다거나, 전 장군의 행보를 우려하는 점을 보아 부마항쟁 혹은 12.12 군사반란의 영향으로 군복을 벗은 것으로 추정된다.[12] 민우가 근무하는 택시회사 사장으로 무남독녀 신애를 끔찍히 사랑하며 신애의 아버지이다.[13] 올곧은 성품의 소유자로서, 과잉진압으로 쓰러져가는 시민들을 위해 시민군을 조직/지휘하는 데에 크게 기여한다. 그리고 중반에는 어디서 구해 왔는지[14] MG50 기관총으로 도청에 집중 사격을 가하여 주둔중인 계엄군이 일시 철수하게 만든다. 이 때 군인들은 날아드는 제압사격에 어쩌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 후퇴한다. 하지만 그 김상원 대위가 진압군으로 파견되고[15] 최후의 결전 때 민우라도 살리기 위해 먼저 보낸 뒤 도청에 남아서[16][17] 김상원 대위와 짧은 만남을 갖다가 다른 대원들의 사격에 사망한다.[18] 5.18 당시 택시 행진[19]으로 광주 시내에서 계엄군을 최초로 몰아낸 기사들이 당초 모티브가 됐다. 당시 택시기사이자 시민군 상황실장이였던 박남선도 모티브로 보인다.[20] 또한 배우 안성기는 ROTC 장교 출신이라 대본 없이도 군사용어와 무기 운용을 영화에서 척척 소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코멘터리에서, '각이 나온다'고 했다.
박흥수의 딸이며 광주보훈병원[21]에 근무하는 간호사. 따뜻한 성격의 소유자로, 항쟁 기간 동안 많은 부상자들을 돌본다.[22] 민우를 죽이려는 진압군을 엉겁결에 총으로 쏴 죽인 후 잠시 공황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마지막 날 밤, 차량을 타고 광주 시내를 돌아다니며 시민들에게 호소방송을 한다. 전옥주[23]라는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이다. 여담으로 계엄군에게 쫓겨 벌벌 떠는 장면에서 이요원은 단순한 연기가 아니라 실제로 공포에 질렸다고 한다. 모조 총이지만 총알이 날아오고 총소리가 나는 게 너무 무서웠다고 한다. 마지막 에필로그에 결혼식 장면이 나오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웃고 신애는 유일한 생존자여서 웃지 않았다. 그 이유는 살아남은 518의 피해자이자 생존자의 슬픔이었기 때문이다.
형의 사랑을 받으며 미래의 법관을 꿈꾸는 고3 모범생. 평범하게 공부하는 고등학생[24]이였으나 절친한 친구 상필이 아무런 이유 없이 진압군에게 맞아죽은 사건을 계기로 전교생을 이끌고 시위대에 가담하여 누구보다 앞장서서 시위한다.[25][26] 5월 21일 도청 앞 집단발포 때 철수한다며 페이크를 치고 총질을 해댄 진압군의 총을 맞고 숨을 거둔다. 캐스팅 목록상으로는 주연으로 분류되는데, 그런 것치고는 분량이 상당히 적은 편이다. 인물 모티브는 광주대동고등학교의 전영진이다. 희생자 중 한 명으로 항쟁 당시 사망했으며, 영화 속 진우처럼 친구의 죽음에 분노해 시위에 나섰다가[27] 5월 21일 발포 때 희생됐다.
민우의 택시회사 동료로 민우보다는 연상이다. 월남 방위[28][29] 출신에 허풍이 강하지만,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분위기 메이커다. 사건 마지막 날 시민군을 해산할 때 주변인들의 권유에 따라 집으로 돌아가지만,[30] 결국 어린 아들과 아내를 뒤로 하고 시민군에 재합류한다.[31] 이 때 밤에 집에서 몰래 나가기 전에 어린 아들을 마지막으로 안고 오열하고, 아내 역시 자는 척 하면서 흐느껴 한다. 계엄군의 공격 전에 장용대와 짧은 대화를 나누고, 전투 중 총상을 입고 김 신부에게 유언을 남긴 뒤 전사한다. 특유의 서남 방언 애드립이 그야말로 절정에 달한다. 실제로 배우 역을 맡은 박철민은 이 영화의 배경이 된 구 전남도청의 소재지인 광주광역시 동구 출신이기 때문에 서남 방언으로 대화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삭제 장면 중에 그의 분량이 많은데, 너무 유머러스함이 폭발해서 전후 장면들에서 격해진 감정과 분위기를 깨기 때문에 많이들 잘렸다고 한다.
동네 양아치. 광주 바로 밑에 있는 화순군 출신이며, 삭제장면에 나오는 대사에 따르면, 학력은 중학교도 안 간 국졸이라고 한다.[32] 인봉의 택시에 여자친구랑 타서 똥을 묻히는 등 인봉과 한차례 푸닥거리를 하지만, 같이 시위에 참여하면서 어찌어찌 친해지고 둘이 콤비를 이루고 다닌다.[33] 인봉과 함께 대표적인 개그 캐릭터다. 참고로 인봉과 시위 현장에서 재회했을 때는 서로 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묘하게 낯이 익소?" 정도의 대사만 하다가, 물러가는 계엄군 뒤에 대고 "가서 똥이나 쳐먹어라!"라며 소리지르던 와중에 똥이라는 키워드로 서로를 기억해낸다.[34] 도청 전투에서는 총상을 입고는 무전기로 인봉에게 "처자식이 있으니 투항하라"고 하지만, 대답이 없는 인봉을 향해 울부짖다가[35] 본인의 위치가 노출되면서 계엄군의 총에 전사한다. 사망하기 전 무전기를 통해 흥수에게 고맙다고 하면서 "덕분에 양아치 장용대도 인간이란 걸 느꼈다"고 말하는 장면은 손에 꼽히는 명장면 중 하나다. 또한 결전의 날 직전 인봉과 함께 멀리 계신 부모님을 향해 큰절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인봉이 절을 하고 일어난 후에도 용대는 그대로 엎드려 있었고, 왜 그런가 가서 보니 엎드린 채 오열을 하고 있었다. 위의 인봉이 아들을 안고 오열하는 장면과 더불어 개그 캐릭터로만 보였던 이 둘의 또다른 면모를 볼 수 있는 슬픈 장면들이다.
민우 형제와 신애가 다니는 성당의 노신부. 5.18의 배경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는 해설역 같은 사람이다. 나이와 신분의 영향인지 전투와는 거리가 멀 것처럼 보였지만 "뭐해요? 나도 총 한 자루 주세요. 좋은 놈으로다가."[37]라고 말하며 자신도 전투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38] 전투에서는 죽어가는 인봉 옆에 앉아서 인봉의 유언을 들어준다. 모티브는 천주교 광주대교구 조철현 비오 몬시뇰. 실제 조철현 비오 신부는 2016년에 선종했다.
맹인 아주머니. 군인들에게 잡혀가다가 겨우 탈출한 강민우가 어쩌다 자기 집에 뛰어들게 되자, 밥을 해주고 아들의 옷을 빌려준다. 창수라는 이름의 아들이 있는데 계엄군이 미쳐날뛰기 시작한 후로 아들이 집에 들어오지 않아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나중에 아들 친구들의 도움으로 상무관에 와서 아들의 죽음을 알고 "내 아들이 어떻게 폭도냐"고 울부짖는다. 주인공을 도와준 것 외엔 스토리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 캐릭터이지만, 당시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과 폭거로 인해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슬픔을 잘 보여주는 캐릭터이다. 죽은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얜 창수 아니여. 우리 창수는 코도 오똑하고 잘생겼어. 얘는 창수 아니여."라며 현실을 부정하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나중에 도청 진압작전 직전 마지막 밤 장면에서 아들의 영정을 안고 울고 있는 모습으로 한 번 더 등장한다.
나주댁의 아들 창수는 사실 김 의사가 "피 확보되는 대로 수혈하라"고 지시한 장면에서 등장한 피투성이 환자다. 삭제장면에서 자기 죽냐고 물어보고 신애가 자신의 목걸이를 풀어서 손에 쥐어주며 "이걸 쥐고 있으면 창수 씨는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라고 말해주는데,[39] 얼굴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모를까 본 영화에서는 편집되어 그가 창수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없다.[40] 그런데 사실 이 장면이 있어도 창수라는 사실을 알기 힘들어서 삭제된 거라고 한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루즈하게 나오는 장면이라 분위기가 좀 늘어지는 느낌을 주기도 하고.
맹인 역할이라서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으며 연기해야 하는 큰 핸디캡이 붙었는데, 베테랑 배우답게 제작진들이 그녀의 연기에 많이 감탄했다고 한다. 비중이 적음에도 그 아우라가 촬영장을 압도했다고 한다. 메이킹 영상을 보면 오열 장면을 컷한 이후에서는 촬영장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나왔다.
진우의 친구이다. 하지만 공수부대인 유태웅 상병한테 이유 없이 폭행을 당해 사망한다. 유 상병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자긴 대학생이 아니라 고등학생이라며 잘못했다고 살려달라고 빌지만[41] 이에 태웅은 "잘못했으면 맞아야지 이 씨발놈아!" 라고 하며 진압봉으로 머리를 때려 죽인다.[42]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던 진우가 전교생을 선도하여 시위에 참여한 계기를 마련한 인물이다.
진우의 친구로 상필이가 세상을 떠난 후 진우와 함께 시위를 한다. 진우마저 사망하자 친구들의 복수를 하기 위해 시민군에 참여하여 싸우게 된다.[44] 중반에 용대와 같이 버스를 타고 가다가 계엄군의 버스 습격을 목격하기도 했다.[45] 최후의 전투에서 정 선생님이 자기를 구해주다가 사망하는 바람에 오열한다.
* 정 선생님(손병호): 학생들을 아끼는 고등학교 선생님이다. 학생들의 시위를 막으려고 하는데 도저히 막을 수가 없어[46] 진우와 학생들한테 치약을 발라준다.[47] 치약을 발라 최루탄 영향을 줄이는 법도 알고, 나중에 최후의 전투에서 시민군에 참여하는 점을 보면 4.19 세대이거나 6.3 세대인 것으로 보인다. 도청 항쟁에서 멘붕하여 정신을 놓고 있는 원기를 일으켜 데려가려다 총에 맞고 원기와 같이 쓰러지는데, 엎드린 자세로 쓰러져 있는 와중에도 원기의 입을 막아 아무 소리를 내지 못 하게 만드는 기지를 발휘해서 확인 사살을 위해 다가온 계엄군이 원기는 이미 죽은 것으로 착각하고 지나가도록 눈속임을 하고 자신은 계엄군에게 확인사살 당한다. 원기는 자신을 구하다 희생당한 선생님을 보며 오열한다.
안경 쓴 남자다. 대학생으로 보이며 항쟁 상황을 시민들에게 알리고 시위를 전면에서 리드하는 역할을 했다. 병조와 다른 사람의 시체에 태극기를 덮어주기도 하며 헌혈을 하기도 한다. 삭제장면에는 수습위원회에서 활동하며 무기를 반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흥수와 대립하는 장면, 마지막 결전 직전 '어머님 전상서'로 시작되는 유서를 쓰려다가 종이에 눈물만 흘리는 장면[49]도 있다. 최후의 전투에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지적장애인. 정신이 온전치 못한 탓에 상대가 얼마나 무서운 줄도 모른 채 공수부대에게 장난을 치며 까불대다가[50], 결국 심기가 거슬린 그들에게 다구리를 당해 살해당한다.[51] 모티브는 광주항쟁 최초 사망자인 김경철.[52] 그리고 그의 시신은 다음날 아침 광주역 앞에서 리어카에 실려 있는 채로 발견된다.[53]
병조의 아버지다. 민우 형제의 집 가까이에 사는 이웃이며, 아들 병조를 계엄군의 폭행으로 잃은 후 시민군에 참여한다. 최후의 전투에서 싸우다가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여담으로 형편이 좀 되는 집안이었던 듯, 집에 TV를 가지고 있었다.[54] 또한 최후의 전투에서 남긴 유언에 따르면 시민군의 보급반 소속이었는데, 이로 보아 집안의 재력을 이용해 시민군에 식량이나 의약품을 배급하는 역할도 맡았을 가능성이 있다. 여담으로 배우 유형관 씨는 45분경에 나오는 도지사 목소리도 맡았으며, 울면서 "병조야!"를 외치는 장면에서 실수로 "인봉아!"를 외치는 엄청난 NG를 내는 바람에 촬영장이 웃음바다가 된 적이 있다고 한다.
의사. 신애와 함께 시위대에 참여해서 부상을 입은 시민들을 치료한다. 응급실에 오는 사람들이 전부 죽어나가자 "어째 오는 사람마다 다 죽은 사람이냐!"라며 울분을 토해낸다. 그래서 구급차를 타고 부상당한 사람들을 직접 데리러가기로 결심한다. "같이 갈 사람 없냐"고 외치지만 돌아오는 건 무응답이었다. 이때 신애가 용감하게 같이 가자고 해서 함께 구급차를 타고 부상자를 데리러 간다. 그러나 부상당한 시민군을 구급차에 태우고 자기도 타려고 하는 순간 "이런 씨발 놈들 저 새끼들도 한패잖아''라고 분노한 태웅의 총격에 머리를 맞고 사망한다. 참고로 정인기는 그때 그사람들에서도 총 맞고 사망하는 역[55]을 맡기도 했다.
박신애 (이요원 扮) - |
강진우(姜眞祐) (이준기 扮) # |
인봉 (박철민 扮) # |
장용대 (박원상 扮) # |
김 신부 (송재호 扮) ?[36] |
나주댁 (나문희 扮) - |
나주댁의 아들 창수는 사실 김 의사가 "피 확보되는 대로 수혈하라"고 지시한 장면에서 등장한 피투성이 환자다. 삭제장면에서 자기 죽냐고 물어보고 신애가 자신의 목걸이를 풀어서 손에 쥐어주며 "이걸 쥐고 있으면 창수 씨는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라고 말해주는데,[39] 얼굴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모를까 본 영화에서는 편집되어 그가 창수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없다.[40] 그런데 사실 이 장면이 있어도 창수라는 사실을 알기 힘들어서 삭제된 거라고 한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루즈하게 나오는 장면이라 분위기가 좀 늘어지는 느낌을 주기도 하고.
맹인 역할이라서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으며 연기해야 하는 큰 핸디캡이 붙었는데, 베테랑 배우답게 제작진들이 그녀의 연기에 많이 감탄했다고 한다. 비중이 적음에도 그 아우라가 촬영장을 압도했다고 한다. 메이킹 영상을 보면 오열 장면을 컷한 이후에서는 촬영장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나왔다.
상필 (임현성 扮) # |
원기 (백봉기 扮) ?[43] |
정 선생님(오른쪽 인물) (손병호 扮) # |
이동규 (황택하[48] 扮) # |
병조 (최재환 扮) # |
병조 아버지 (유형관 扮) # |
김진철 (정인기 扮) # |
3.2. 계엄군
영화 개봉 당시에는 계엄군을 나치같이 그렸다고 일부 극우 인사들에게 비난을 받았지만, 영화가 나온지 꽤나 시간이 지난 뒤에 5.18 당시 계엄군의 영화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실제 만행들과 연쇄살인범 뺨치는 행동원리들이 밝혀지며 오히려 잔혹한 현실을 거의 그대로 그린 셈이 되었다."자네, 자전거 알지 자전거? 자전거도 보험에 들 수가 있어. 근데 항공모함은 보험에 들어주질 않아. 왜인지 아나? 군사용이거든. 군인이란 게 바로 군사용 인간 아냐? TNT? 터트리라고 해! 광주가 통째로 날아간다며? 그래 주면 우린 고맙지."
모티브는 당시 잔혹한 진압을 일삼았던 특전사 11여단의 여단장 최웅 준장이지만, 실제 최웅 준장은 혼자서 저런 식으로 잔혹한 진압을 주도한 게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에 따르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인물 자체는 당연히 모티브만 따온 가공의 인물이다. 과격하고 포악한 성품을 가지고 있으며 광주에 매우 잔혹한 진압 작전을 펼쳐서 광주 사람들이 봉기하게 만든다. 흥수와는 동기이며, 김 대위의 말에 의하면 진급을 위해 부정한 짓을 저지른 적도 있었다.[57] "광주 사람들을 다 죽일 작정이냐"고 항의하는 흥수에게 "자네도 빨갱이 물이 들었냐"고 독설을 하고, 유화책을 제시하는 김 대위를 다른 장교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폭행하며 욕을 하는 등[58] 사실상 이 영화의 최종 보스라고 봐야 한다. "광주 사람들이 궁지에 몰리면 다이너마이트로 자폭하여 자네 새끼들도 다 죽을 것"이란 흥수의 마지막 경고에 위와 같은 대사를 한다. 이 장면 이후 등장은 없다.
최순기 준장의 상관으로 특전사령관이다.[60] 최 준장과 달리 이미 진압 가능 수위를 넘어선 것 아니냐며 잔혹한 진압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제지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즉, 계급은 최순기보다 높은 소장임에도 한 집단을 이끄는 리더의 모습보다는 주변의 말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는 인물이다. 막판에는 최순기가 "진압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며 계속 설득하자 도청에 공수부대 투입을 명령한다. 모델은 당시 전남북 계엄사령관이었던 윤흥정이라고 하나 전라도 계엄사령관이 아닌 특전사령관으로 묘사함으로써 윤흥정보다는 정호용이라고 봐야 하는 캐릭터로 묘사되었다. 배역 이름도 정 소장으로 되어있다.
흥수가 아끼는 후배 군인. 광주에 계엄군으로 내려와서 유화책을 제시하지만 최 준장에게 뺨만 맞는다.[63] 흥수와 최 준장의 면담을 여러차례 마련했지만,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마지막 도청 전투에서 흥수와 마주치지만 차마 쏘지 못하고, 다른 공수부대원들의 총에 쓰러진 흥수를 보며 오열한다. 전투 중 어떻게 되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마지막 결혼식 장면에서는 군인 중에서 유일하게 등장한다.[64] 그런데 결혼식 장면의 사진에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상징하는 신애 외에 웃고 있는 대부분의 인물이 사망자인데, 김 대위 또한 사진에서 웃고 있다. 김 대위가 극 초반부터 광주 사태 진압에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 당시 투입된 계엄군 중 PTSD로 인해 지금까지도 정신질환을 앓고 있거나 자살한 사람이 많다는 점들을 감안하면, 김 대위가 사태 이후 죄의식에 괴로워하다가 자살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단 웃고 있는 인물들 중에 생존자도 소수 섞여 있는 걸 보면 불확실하다. 모티프는 광주 진압을 거부한 정웅 당시 제31보병사단 단장이다.실제 5.18 당시 대부분의 실제 계엄군 병사들을 대표하는 캐릭터이자 계엄군의 잔혹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외모부터 은근히 무서운데다 진압 작전에 유난히 적극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다. 진압 과정에서 진압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횡포를 부리고[66] 이때 잘못했다고 비는 상필에게 잘못했으면 맞으라고 잔인하게 때려 죽여버렸다. 잡아가던 시민이 계속 울자 유 상병 바로 옆에 있는 군인이 와서 "씨발놈이! 이 개새끼야! 울어? 이 씨발놈이!"라고 협박을 하며 진압봉으로 머리를 후려갈기는 등 잔인한 싸이코패스급 면모를 보여준다. 도청 앞 발포 사건 직전에도 옆의 일병이[67] 인봉에게 놀림을 당하자 다른 계엄군도 다 웃는데, 혼자서 굳은 표정으로 그 일병의 헬멧을 치며 "정신 차리라"고 면박을 주기도 한다. 도청 발포 후에는 살려달리고 애걸하는 생존자를 향해 "개새끼..."라고 하며 쏴죽여버린다.[68] 이후 시민군과 총격전 중에 부상자를 도우러 구급차 한 대가 오는데 구급차에 탄 진철을 보고 "이런 씨발놈들. 저 새끼들도 한패잖아."라면서 가차없이 쏴죽여버린다. 이 역을 맡은 배우 김철기는 극중 설정과는 달리 경기도 부천시 출신이다.정성호 소장(가장 왼쪽인물)[59] (박용수 扮) |
김상원 대위 (엄효섭[61][62] 扮) |
배일수 중령 (이얼 扮) |
- 고은섭[69] 일병(명규): 계엄군의 말단 병사 중 한 명으로 유 상병에게 "해가 왼쪽에서 뜨고 있습니다. 우린 지금 남쪽으로 가고 있습니다."라고 알려준 인물[70]. 계엄군 중 한 명으로서 명령 때문에 광주 시민들의 진압에 나서기도 했지만 정작 작품 곳곳에서 보이는 등의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인물. 최초로 계엄군이 광주시민들에게 발포하기 전에 인봉에게 섹드립을 당했다.[71]
4. 평가
4.1. 긍정적 평가
- 다소 예술적이고 다소 극단적인 연출 방식이 함께 사용되었던 영화 <꽃잎>과는 달리 <화려한 휴가>는 더욱 직접적으로 광주 민주화 운동의 경과를 다루었다. 영화 <택시운전사>가 흥행하기 이전에 대중적으로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의 참상과 의의를 알리는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이 영화를 통해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일반인 학살이 심각했다는 것을 처음 접하게 된 경우도 많다고 한다.
-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들은 실제로 광주 민주화 운동 생존자의 증언을 듣기도 하였고 #, 관련 기사나 다큐멘터리를 연구하였다고 한다. 덕분에 1980년도 광주 세트장의 재현도가 뛰어나며 대체적으로 소품이나 의상 재현도 훌륭하다. 그리고 방언 관련해서는 비판적인 평이 많기는 하지만 감독이 대구광역시 출신이기 때문에 서남 방언에 대해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한다.
- 광주 민주화 운동을 이념적이고 정치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일반인 시민의 입장에서 잘 표현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실제로 광주 학살 당시 주요 피해자는 정치 이념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인물들이었다. 또한 이러한 점을 강조하며 당시 전두환 정권의 폭동적 시위진압이 얼마나 심각하고 비합리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 어느정도 각색이 있기는 하지만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하는 등장인물이 많다. 김상경이 연기한 강민우는 윤상원을 모티브로 하였으며, 이요원이 연기한 캐릭터는 박신애는 실제로 전남도청에서 호소방송을 했던 전옥주를 나타낸다. 군인에 의해 장애인이 희생되는 사건이나 군인이 민간인 버스를 습격한 사건도 실제 사건이며, 사실적인 표현을 위해 실제 광주 민주화 운동을 촬영한 사진의 구도를 연출에 활용하기도 했다.
- 5.18 민주화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노래인 <임을 위한 행진곡>이 엔딩에 나오는데, 체코 필하모닉 교향악단의 연주로 더욱 깊고 애잔한 분위기를 내어 호평을 받았다. # 또한 음악과 함께 나오는 주인공 강민우 (김상경)과 박신애 (이요원)의 영혼 결혼식을 사진으로 표현한 엔딩 장면도 매우 인상깊다.[72] 실제로 임을 위하 행진곡은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결식을 위해서 작곡된 노래이다.
4.2. 부정적 평가
- 5.18의 원인과 경과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다는 평이 있다. 영화 안에서 김 신부(송재호)나 박흥수의 대사를 통해 설명되긴 하지만, 충분하다고 보긴 힘들다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당시 광주 시민들의 시점으로 제작된 영화이며, 2시간 남짓한 시간에 집중해야 하는 한계도 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73] 실제로도 광주시민들에게는 정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사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배경설명으로 부산항에 미합중국 해군 항모가 온다길래 미국이 본인들을 도우러 온 줄 알고 기뻐한 시민들과, 그런 거 없다고 말하는 박흥수의 대사가 있긴 했으나 대사 한 줄 씩이었다.[74]
-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을 담아내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원래는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으나 삭제되었으며 이는 감독이 온건파였던 분들도 항쟁에 참여한 민주화 투사들인데 그분들의 정신을 훼손하는 것 같고,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아 없앤 것이라고 한다.
- 이후에도 서술되지만 영화 심의 문제 때문인지 계엄군의 학살이나 폭력 행위는 비교적 축소되어 묘사되었으며 오히려 시민군의 활동이 더욱 과격하게 표현되었다는 비판이 있다. 실제로 시민군이 기관총 등을 이용하여 치열한 시가전을 벌인 적은 없었다.
- 인봉(박철민)의 아내가 동남 방언을 사용하는데, 광주광역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라는 점에서 부자연스럽다는 평이 많다. [75] 김지훈 감독의 전작 목포는 항구다에서는 비교적 서남 방언이 잘 묘사되는데 이 영화에서는 주요 등장인물이 방언을 제대로 쓰지 않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5. 흥행
흥행에 성공하여 최종 누적 관객은 730만 7,993명을 동원해 2007년 개봉한 한국 영화 중 D-WAR에 이은 흥행 2위를 기록했다. 2007년 광주광역시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다. 덕분에 2007년은 여러 의미로 한국 영화 역사상 가장 뜨거운 한 해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그러나 제작사는 이만한 흥행 대박에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큰 수익을 거두지 못하였다. 제작사의 채권 문제로 꼬여서 김상경은 7년이 지난 2014년까지도 출연료를 지급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제작사가 아예 휴업 상태라 소송 걸기도 안 좋아서 사실상 포기 상태인 듯 하다. #
6. 기타
- 진압군과 시민군 사이의 교전 장면이 너무 과장되었다는 반론도 있었다. 정확히는 과장과 축소 모두 나타난다. 일단 교전 장면의 연출이 지극히 부실하였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총 몇 발만 쏘고 만다. 시민군 측의 교전 장면이 과장된 것 역시 사실이다. 시민군이 총기로 무장하고 저항하기 시작한 뒤에도, 양상은 어디까지나 계엄군에 의한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지, 대등한 상태에서 양쪽이 '치열한 교전'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 사망자수는 공식으로 시민165명(+시신이 발견되지 않아 행방불명자 처리된 65명)[76], 군인 23명, 경찰 4명인데, 군인 희생자 23명 중 13명은 무전 주파수가 달라 향토사단, 광주 상무대 소속 교도대들과 "오인 교전"을 벌인 끝에[77] 죽은 경우이다. 그리고 숨진 시민들이 전부 시민군이었던 것이 아니라, 우연히 지나가다가 혹은 그 자리에 있다가 폭력을 당해 희생된 사람이 많았다. 장애인, 어린이, 청소년 등. 심지어 임신부가 조준사격을 당해 사망한 끔찍한 일도 있었다. 자료만 놓고 봐도 '치열한 교전' 은 절대 아니다. 정작 실제 사건을 경험한 광주 시민들은 "영화보다 더 끔찍하고 잔인했다"는 평이 우세. 광주 학살 항목을 보면 왜 그런지 알 수 있다.
- 현대사의 비극임에도, 일부에서는 여전히 예민한 이슈인 탓에 개봉 전/상영 중에 걸쳐 이런저런 논란이 많았다. 모 단체에서는 영화의 왜곡을 들어 소송을 준비한다는 기사들도 나왔다. 관련된 후속 기사들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는 그냥 별일 없이 끝난 듯.
-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스태프들이 엑스트라로 참여하기도 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극장 씬. 김상경 뒤에 앉아 있는 사람은 이준기의 매니저였다고 한다. 그 외에 매니저들이 참여한 장면이 여럿이다. 또 시민군 교육 장면에서 폼잡고 앉아 있다가 흥수에게 "선글라스를 벗으라"며 한 소리 듣자 바로 꼬리 내리고 벗는 사람의 정체는 까메오 출연한 감독이다.
- 실제 자료 사진들을 구도에 많이 활용했다. 예를 들어 18일 전남대 정문 앞에서 군인들이 학생들에게 달려드는 장면, 관이 안치된 상무관 장면 등.
- 호남 지방에서는 상영 중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 특히 중, 장년 층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으며, 작중에서 본 사건을 광주 '폭동'이라고 부르는 언플 왜곡보도[78]가 나오는 장면이 나올 때에는 욕설이 나오기도 했다고. 반면 주인공 민우가 계엄군에게 잡혔다가 탈출하는 씬[79]에서는 극장에서 노인 관객들로부터 박수 갈채와 "잘 한다!"하는 환호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독재 권력에 의한 일방적인 폭력으로 200여명의 사망자와 3천 명 이상의 부상자가 나온 이 사건을 (개봉 당시 기준)불과 27년 전 직접 경험한 이들의 이런 반응은 절대 지나친 것이 아니다. "그 때의 잔혹함을 영화가 다 담아내지 못했다" 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참상을 직접적으로 겪었던 당시의 중, 장년층 세대들이 노년의 나이일지언정 아직 대다수가 생존해 있던 시기일 뿐 아니라 당시 고등학생, 대학생 세대들이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이 커갈 무렵이기에 자녀들 손잡고 보러 온 부모님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80]
- 영화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도 만들어졌다.
- 영화가 한창 상영되던 당시에 군대에서 이 영화를 휴가 기간에는 보지 말 것과 이미 본 사람들의 수를 파악하는 행위가 곳곳에서 있었다.[81] 그리고 이미 영화를 본 사람들은 따로 정신교육을 받았다. 군은 또한 "지휘관급 10여명에게만 총기를 지급하였으며, 영화의 총기 발포 사실은 허위"라는 내용의 특별
허위정신교육자료를 일선 부대에 배포하였다.[82][83] 차라리 이렇게 관람을 강제로 금지하는 것보다는 당시 유연한 판단을 보여준 육군 제31보병사단장이었던 정웅 장군[84]을 재조명하는게 더 나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 <화려한 휴가>를 촬영한 세트장은 광주광역시의 광주과학기술원 뒷편의 공터에 있었다(정확히는 '은혜학교' 뒷편).[85] 한동안에는 80년대 당시의 5.18 세트를 잘 재현해 놓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일부 파손되었을 때에도 복구/재개장 하는 등 관리가 잘 되는 듯 싶더니, 어느새 방치된 상태로 버려졌고, 태풍 피해로 인해 세트장 일부가 파손되었을 때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두어 폐허처럼 버려졌다. 결국은 광주과학기술원의 부지를 넓히거나 확장으로 인하여 오래 전에 폐쇄하였다. 다만 해당 부지가 첨단과학단지 부지에 있었던 만큼, 추후 다른 용도로 쓰여야 될 부지이기는 하였다. 2017년 현재 이 부지 일부분에 광주과학기술원이 확장하였고, 광주 외국인 학교[86]가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나머지 부분은 아직 공터로 남아있다. 그러나, 영화나 드라마를 찍은 뒤 한 번 쓰고 버려지는 세트장에 대한 인식이 다시 제고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운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촬영에 쓰인 차량들[87]은 안면도의 백사장에 버려진 것으로 보인다. #[88]
- 세트가 아닌 실제 장소에서 찍은 장면은 대부분 군산시, 전주시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80년 당시의 풍경이 남아 있는 곳을 찾기 힘들었다고. 예외적으로 상무관[89]과 도청 장면[90]은 실내 장면이고 해서 실제 장소에서 찍었다. 제작진들의 감회가 남달랐다고. 실제로 옛날에 이곳에서 극중 인물들과 유사한 대화를 나누고 고민들을 하고 했을 테니까 말이다. 김상경이 코멘터리에서 실제 그분들이 하늘에서 보고 있다면 '어, 이 사람들 우리가 했던 거 하네?'하면서 웃기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라고 말하기도 했다.
- 인봉 역으로 출연했던 박철민은 실제로도 광주광역시 출신이며 5.18 민주화운동을 눈앞에서 지켜보고 경험한 간접적 피해자다. 5.18 당시 박철민은 중학생이었고 광주 모 학교의 선생님이던 그의 아버지가 길거리에서 계엄군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 이 영화가 개봉하고 10년 뒤인 2017년 8월, 5.18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삼은 영화 <택시운전사>가 개봉하여 흥행에 성공하였다.
- 연출이나 일부 재현에서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있으나 이와 별개로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루었다는 이유로 근거 없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극우 성향 네티즌들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왜곡/무장폭동설을 거론하며 이 영화가 역사 왜곡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며 일베저장소와 같은 일부 커뮤니티에서는 아예 김상경이 사망하는 마지막 장면을 따와서 광주 학살의 피해자들을 조롱하는데 쓰는 경우도 있다.
- 2017년에 이명박 정부 때 작성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공개되었는데, 이 영화에 출연했다는 이유로 이준기를 비롯한 여러 배우가 명단에 올랐다. 특히 이준기는 군입대후 연예사병으로 혹사를 받았다는 의혹이 있다.
- 이 영화가 개봉된 시기가 대선이 얼마 남지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몇몇 정치인들이 이 영화를 관람하기도 했다. 심지어 박근혜가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장면이 9시 뉴스를 타기도 했다.
- 홍콩 민주화 운동, 미얀마 민주화 운동,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으로 인해 택시운전사, 1987와 함께 재조명을 받았다.
- 등장인물 거의 전원이 사망해서 제목과 엔딩이 매우 역설적이다.[93]
7. 탐구
각종 차량/장비/화기, 공수부대 장병들의 칼같은 충정훈련 동작 등 디테일이 상당히 뛰어난 수준이다. 다만 2007년도에 처음으로 광주항쟁을 다룬 영화인지라 재현 관련에선 미흡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는데 현장 지휘관이었던 육군종합행정학교장(소장)의 계급장은 무궁화 받침이 달린 것이 달린 반면, 공수여단장(준장)의 계급장은 받침이 없는 구형이 부착되어 있고 작중 등장하는 공수부대원들의 헬멧도 시위 진압용 방석망이 달린 리프패턴 무늬가 아닌 일반 충정무늬 헬멧을 착용하고 있다.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에는 없던 하이 베스타가 구급차로 등장하는[94] 등 일부 오류가 보인다.또한, 박신애가 근무하던 병원이 광주보훈병원이고 앰뷸런스에도 '보훈병원'이 쓰여 있는데, 광주보훈병원은 5.18 당시에는 있지도 않았고, 1984년에 개원하였다.
극중 인봉에게서 엉터리 영화 추천을 받은 강민우가 강진우, 박신애와 1980년 5월 18일 낮의 광주시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데, 이주일이 주연으로 나온 '뭔가 보여드리겠읍니다'이다. 다만 이 영화는 5.18 다음 달인 6월 6일에 나왔다.
5월 21일 도청 집단발포 장면이 사실과는 다소 다르게 연출되었다. 12시 정오까지 계엄군이 철수한다는 방송에 시민들이 도청 앞에 운집한 것 까지는 같으나, 실제로는 12시가 넘었음에도 계엄군은 철수하지 않았고 1시에 애국가가 울려퍼지며 시민들이 제자리에서 애국가 제창을 하려고 할 때 계엄군의 집단발포가 벌어졌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12시가 되자마자 계엄군이 약속을 어기고 발포한 것으로 묘사되는데, 예상치 못한 계엄군의 발포라는 사건의 비극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평론가 김경욱은 저서 <나쁜 세상의 영화사회학>에서 이 부분을 신랄하게 깠다.[95][96]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약속 시간이 지나도록 철수를 하지 않다가 집단발포를 했다는 것은 그대로 재현했으나 애국가 제창을 기다리다 총격을 당한 것이 아니라 버스와 시민이 군인들을 향해 전진하다 총격을 당했다고 잘못 묘사되었다.
극중 흥수가 시민군에게 각종 군사 장비의 사용법을 교육하는 부분에서, 이 때 M18 연막탄도 언급된다. 인봉이 실수로 이 연막탄의 핀을 뽑는 바람에 연막탄이 격발하여 현장이 온통 하얀 연막으로 어수선해지는 장면이 나온다. (이 영화에서 몇 안 되는 개그씬[97]) 하지만 M18은 빨강, 초록, 노랑, 보라색 연막만 있고 백색은 없다. 연막탄의 일반적인 이미지인 백린연막탄에 집중하다 생긴 오류로 추정. 사족으로 일반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백린연막탄의 백색 연기는 맹독성이라 조금만 흡입해도 아주 해롭다.
시민군이 결성된 뒤 고등학생인 원기가 시민군에 가담하여 무기 들고 계엄군과 싸우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실제 5.18 민주화운동 당시에는 신원 확인을 해서 고등학생 같은 미성년자나 군대를 갔다오지 않은 군미필자에게는 무기를 일절 나눠주지 않았다고 한다. 당장 계엄군의 발포 이후 박흥수가 시민군을 만들기 위해 시민들을 모았을 때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을 앞줄로 모이게 하는 장면이 있었다.시민군의 행적을 누락시켰다는 의견이 있었다. 광주문화방송과 KBS광주방송총국, 세무서 건물 등을 방화한다던가[98]. 다만 이 부분은 앞서 서술했듯이 당시 계엄군의 만행이 너무 막장적이었고 계엄군에게 가족과 지인들을 잃은 광주 시민들이 매우 많아 시민군들 역시 눈이 뒤집힐 수 밖에 없던 상황이었다.[99]
특전사 병력이 광주로 이동할 때 영화상에서는 C-123 수송기 편대를 이용한 것으로 나온다. 이는 순서가 바뀐 것인데 광주에 처음 도착한 특전사 병력인 7공수여단 병력은 수송기가 아닌 기차를 통해 5월 17일에 광주로 이동했다. 이후 신군부는 광주에 병력 증파 결정을 내리고 11공수여단 병력을 증원했다. 이 11공수여단이 C-123 수송기를 타고 성남비행장(서울공항)에서 광주로 이동했다.
그리고 수송기에서 유태웅 상병이 지휘관에게 '북으로 침투하는 겁니까?'라고 질문했다가 '극비 사항이므로 도착하면 알게 될 것'이라는 답을 듣고, 그 다음에 햇빛 방향을 보고 옆의 후임이[100] '해가 왼쪽에서 뜨고 있다. 우리는 지금 남쪽으로 가고 있다'라는 말을 하자 의아하게 여긴다.[101] 즉, 투입 직전까지도 자신들이 어디로 투입되는지, 아니 시위 진압을 위해 투입되는 것조차 모르는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당시의 특전사 병력은 혹독한 충정훈련, 즉 시위 진압 훈련을 하고 있었으므로, 자신들이 가는 곳이 광주임을 모를 수는 있어도, 시위 진압 임무를 위해 투입됨은 모를 수가 없다.
마지막 장면에서 배우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나오는데, 알다시피 5월은 늦봄 내지는 여름의 초입으로, 입김이 나올 정도로 기온이 낮은 시기가 아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사진들만 봐도 모두 반팔이나 얇은 긴팔이 보인다. 무엇보다 광주는 강원도 산간 지역도 아닌 남부 지역으로, 항쟁 기간에 대단히 더웠다고 했다.[102] 촬영을 겨울철에 진행해서 입김이 나온 것을 미처 편집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특전사령관을 맡고 있던 정호용이 너무 진압에 소극적이며 유연하고 부드러워보이기까지 하는 캐릭터로 나와 오류로 보이게 표현되었다. 배우 박용수가 연기한 캐릭터로 작중 여단장으로 보이는 민주화 운동 총책임자인 최순기 준장과 논의하는 장면에서 잠깐 나오는데[103] 이름이 언급되지는 않고 이름표도 점퍼를 입고 있어서 보이지 않지만 노란색 특전사 베레모를 쓴 특전사 장교이자 원스타인 준장의 상관으로써 계급이 소장 계급이고 당시 특전사령관은 중장이 아니라 소장이었으며 영화 배역 이름도 정 소장으로 되어있는만큼 정호용임은 분명하다. 위에는 모티브가 된 캐릭터가 당시 전남지역 계엄사령관 윤흥정이라고 나와있지만 배역 이름도 그렇고 복장을 비롯한 여러 정황상 윤흥정보다는 정호용이라고 봐야 훨씬 정확하다. 그런데 정호용이 진압을 위해 매우 과격하고 적극적이었다는 직접적 증거는 없지만 정호용은 전두환과 노태우의 육사 11기 동기이자 친구이고 하나회의 핵심 멤버 중 한 사람으로써 당시 공수부대들의 총지휘관인 특전사령관을 맡고 있던만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의 주요 책임자 중 하나인데 현장을 시찰하면서 진압에 적극적이면 적극적이었지 소극적이고 조심스러웠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104] 그런데 작중 정호용은 수하인 최 준장에게 이미 진압 수위를 넘어선 것 아니냐면서 유연하고 소극적인데다 별로 내키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주며 부드럽고 차분하게 말하고 오히려 아래의 준장이 폭도들 진압하는 데에 진압 가능 수위가 따로 있겠냐며 상관인 사령관보다 더욱 진압에 적극적이고 감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물론 작중 공수부대의 책임 지휘관으로써 메인 빌런에 가까운 캐릭터는 최순기 준장이지만 특전사령관인 정호용이 그런 캐릭터로 나온 것은 오류일 확률이 높다. 그런 캐릭터로 표현하기 위해 정호용 대신 윤흥정으로 표현하고자 했다면 복장을 특전사령관이 아닌 계엄분소장으로 묘사하고 최순기 준장과의 관계도 다르게 표현했어야 한다.[105]
7.1. 시내에서 시가전과 기관총 여부
사람들의 편견과 다른데 시위대는 시내에서 시가전이나 기관총 사격 같은 과격운동을 하지 않았다.「사례 38)오후 4시 43분, 전남대학교병원 12층 옥상에서 젊은 사람 3~4명이 무엇인가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었다. 도청 옥상의 공수부대원들이 혹시 발포라도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인지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한참동안 부산하게 움직이던 이들 사이로 LMG(기관총) 총신이 나타났다. 그것도 1대가 아니라 2대였다. 대규모 예비군훈련장이나 대대급 이상의 무기고에서 탈취해 왔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도청과 그 인근 옥상에 있는 계엄군을 겨냥해 가설했음이 분명했다.
위 38의 사례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기관총의 가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시민군이 적중률이 낮은 장난감 같은 M1이나 카빈소총으로 무장한 것과는 달리 중장비인 자동화기로 무장함으로써 도청옥상에 있는 공수부대가 위협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제 게릴라로 변신한 시민군과 본격적인 총격전 또는 시가전을 벌이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질 총격전은 시민의 피해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곳에 기관총이 설치된 후 공수부대가 금방 철수한 탓도 있었지만 시민군은 이 기관총을 한 발도 발사하지 않았다.」
김영택, 5.18 광주민중항쟁 연구, 서울: 국민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5, 185쪽
「(기관총 사격이 있었다는 일부 주장에 대해 - 필자) 이 시간 도청 안에서 현장상황을 정확하게 목격했던 본 연구자로서는 이 기록에 상당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계엄군의 발포 때문에 옥상에는 없었지만 도청 안에서 기관총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면서 설치과정까지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한국일보 이상문 중방일보 황영철 기자로부터 LMG 발사는 전연 없었다. 또한 금남로 관광호텔 앞이나 충장로에서 계엄군과 시민군 간의 교전은 전연 없었다. 또한 소수의 시민군이 대응발사는 있었으되 어디에서도 교전의 상황은 없었던 것으로 안다.' 'LMG를 발사할 수 있는 경험자를 찾기만 했을 뿐 실제로 발사는 없었다는 증언을 들었다. 또한 도청을 바로 내려다보거나 전남대학교병원을 건너다 볼 수 있는 전일빌딩 8층에 자리 잡은 전일방송국에서 종일 자리를 지키며 상황을 주시했던 당시 마삼열 전일방송국장은 같은 날 전남대병원에 LMG를 가설하는 광경은 나도 보았으나 발포사실은 없었고 금남로 관광호텔 앞의 계엄군과 시민군 간의 교전은 터무니 없는 일이다라고 증언했다.」
김영택, 5.18 광주민중항쟁 연구, 서울: 국민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5, 185쪽
「시민군이 광주로 돌아와 전열조차 갖추지 못한 채 공수부대의 무차별 사격에 대응해 발사하고 나섰다. 시가전이나 교전이라기보다는 목표지점도 없는 대응발사였다.」
김영택, 5.18 광주민중항쟁 연구, 서울: 국민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5, 182쪽
「당시 도청에서 취재하고 있던 본 연구자는 교전현장을 목격하지 못했고 함께 있었던 군 경 도청 관계자와 동료기자들로부터도 전연 듣지 못했다. 그리고 연구자는 다른 일행(도청 직원 및 기자)과 함께 오후 5시 24분, 계엄군의 철수에 앞서 도청 뒷담을 넘어 동국여관 골목으로 빠져나간 후 본사 사회부 소석 김충근 기자와 함께 충장로 입구를 거쳐 황금동 쪽으로 이동했었다. 연구자 일행은 시가전의 위험은 전연 의식하지 않고 빌딩 옥상에 있는 계엄군 발포의 표적이 되지 않으려는데 신경을 곤두세웠었다.」
김영택, 5.18 광주민중항쟁 연구, 서울: 국민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5, 183쪽
군사 마이너 갤러리
김정한 박사의 1980 대중 봉기의 민주주의(소명출판, 2013)도 유사한 내용이 있다.위 38의 사례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기관총의 가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시민군이 적중률이 낮은 장난감 같은 M1이나 카빈소총으로 무장한 것과는 달리 중장비인 자동화기로 무장함으로써 도청옥상에 있는 공수부대가 위협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제 게릴라로 변신한 시민군과 본격적인 총격전 또는 시가전을 벌이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질 총격전은 시민의 피해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곳에 기관총이 설치된 후 공수부대가 금방 철수한 탓도 있었지만 시민군은 이 기관총을 한 발도 발사하지 않았다.」
김영택, 5.18 광주민중항쟁 연구, 서울: 국민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5, 185쪽
「(기관총 사격이 있었다는 일부 주장에 대해 - 필자) 이 시간 도청 안에서 현장상황을 정확하게 목격했던 본 연구자로서는 이 기록에 상당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계엄군의 발포 때문에 옥상에는 없었지만 도청 안에서 기관총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면서 설치과정까지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한국일보 이상문 중방일보 황영철 기자로부터 LMG 발사는 전연 없었다. 또한 금남로 관광호텔 앞이나 충장로에서 계엄군과 시민군 간의 교전은 전연 없었다. 또한 소수의 시민군이 대응발사는 있었으되 어디에서도 교전의 상황은 없었던 것으로 안다.' 'LMG를 발사할 수 있는 경험자를 찾기만 했을 뿐 실제로 발사는 없었다는 증언을 들었다. 또한 도청을 바로 내려다보거나 전남대학교병원을 건너다 볼 수 있는 전일빌딩 8층에 자리 잡은 전일방송국에서 종일 자리를 지키며 상황을 주시했던 당시 마삼열 전일방송국장은 같은 날 전남대병원에 LMG를 가설하는 광경은 나도 보았으나 발포사실은 없었고 금남로 관광호텔 앞의 계엄군과 시민군 간의 교전은 터무니 없는 일이다라고 증언했다.」
김영택, 5.18 광주민중항쟁 연구, 서울: 국민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5, 185쪽
「시민군이 광주로 돌아와 전열조차 갖추지 못한 채 공수부대의 무차별 사격에 대응해 발사하고 나섰다. 시가전이나 교전이라기보다는 목표지점도 없는 대응발사였다.」
김영택, 5.18 광주민중항쟁 연구, 서울: 국민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5, 182쪽
「당시 도청에서 취재하고 있던 본 연구자는 교전현장을 목격하지 못했고 함께 있었던 군 경 도청 관계자와 동료기자들로부터도 전연 듣지 못했다. 그리고 연구자는 다른 일행(도청 직원 및 기자)과 함께 오후 5시 24분, 계엄군의 철수에 앞서 도청 뒷담을 넘어 동국여관 골목으로 빠져나간 후 본사 사회부 소석 김충근 기자와 함께 충장로 입구를 거쳐 황금동 쪽으로 이동했었다. 연구자 일행은 시가전의 위험은 전연 의식하지 않고 빌딩 옥상에 있는 계엄군 발포의 표적이 되지 않으려는데 신경을 곤두세웠었다.」
김영택, 5.18 광주민중항쟁 연구, 서울: 국민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5, 183쪽
군사 마이너 갤러리
보다시피 영화에서처럼 시민군과 계엄군간의 치열한 총격전이나, 50구경 기관총에 의해 계엄군이 철수하는일은 없었다. 또한 시위대가 설치한것은 LMG로, 30구경 기관총혹은 7.62mm 기관총으로 추정된다.
사실 50구경 기관총의 화력 때문에 계엄군이 밀렸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다. 계엄군이 투입한 병력 중에는 M113 장갑차도 있었는데, 해당 장갑차는 공용화기로 동일한 기관총을 장비했기에 화력에 밀린듯한 묘사는 현실성이 떨어진다.
또한 5월의 사회과학을 비롯한 각종 서적에서도 시민군은 계엄군을 선제공격 하기보다는 시민들을 공격하는 계엄군에게 위협사격을 하는 쪽이었다. 즉, 시민군의 총격전은 창작된 셈이다.
이를 "어쩔 수 없는 영화적 허용"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비판적인 측은 "계엄군의 범죄는 (심의상 이유로) 순화되고, 시민군의 공격성은 과장되었다"는 점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8. 관련 문서
[1] 흔히 '화려한 휴가'라는 단어 자체가 실제 작전의 이름인 것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있어서 이름이 같은 드라마도 있으나, 공식적으로 이러한 작전명은 없었다고 한다. #[2] 부모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서 남동생 진우와 살고 있었다.[3] 덤으로 사장인 흥수에게 신임도 많이 받는 듯 하다. 5.18이 일어나기 이전에 택시 영업을 하면서 할머니가 길에 홀로 있는 것을 발견하고 태워다 드린 후에 자신의 사비로 사납금을 채우는 모습도 보여주는 등 모범 사원으로 인정도 받고 있었다. 나중에 흥수가 네가 잘못한 일도 아닌데 왜 사비를 쓰냐고 안타까워하며 할머니의 아들이 돈을 보내 왔다고 봉투와 상여금으로 상당한 액수인 2만원까지 주는 모습도 있다. 여담으로 7~80년대의 택시 기사는 의외로 수입이 괜찮은 직종에 속한다.[4] 다행히 민우가 계엄군을 때려눕히고 신애를 구해준다. 그녀가 두들겨 맞을 뻔했던 찰나에 바로 날아차기로 계엄군을 날려 버린 후 흙이 가득 든 화분을 들어 그의 머리를 강타해 버린다. 바로 계엄군이 기절해 버리자 화가 풀리지 않은 채 의자를 들어 마무리로 내려치려고 하였으나 "안 돼요! 민우 씨..!" 라며 신애가 말리자 비로소 그만둔다. 아이러니한 것은 계엄군은 방탄모를 쓰고 있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화분을 머리에 맞자 기절한 것인데 방탄모가 화분의 충격을 보호하지 못한 것은 의외라고 볼 수 있다.[5] 계엄군이 우는 다른 시민을 폭행하자 분노에 차서 계엄군을 발로 차는 패기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계엄군들이 당황한 사이에 트럭에서 다리 밑으로 뛰어내려서 겨우 탈출한 후 나주댁을 만난다.[6] 군용 차랑을 타고 돌진하여 벽을 무너뜨려 버린다. 이후 분노에 찬 사람들이 환호하며 무기를 나르고 있었고, 보급 창고를 지키던 군인들은 시민들에게 제압당한 채 쪼그려 앉은 자세로 기합을 받았다.[7] 이부분은 애매한게, 민우가 총에 맞고 누워있는 그 장면에서 신애가 방송하는 소리가 한 5초정도 나오고 그다음에 신애가 지프차 위에서 방송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지프차의 위치는 도청과는 좀 멀어보이는 집터여서 이걸 화면전환의 신호로 넣은건지 진짜 들려서 웃은건지가 의문이다.[8] 다른 사람들이 M1 개런드, 반자동인 M1 카빈 소총으로 무장할 때 M16 소총을 챙기는 모습을 보여준다.[9] 은행원이었다가 사직한 후 야학 교사로 활동했다.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대안언론인 투사회보를 만들어 제 기능을 상실한 언론 대신 소식을 알렸으며, 시민군 대변인을 맡아 외신 기자들과 간담회를 가지는 등 광주의 실상을 알리고자 노력하다가 27일 도청 진압 때 사망했다. 1982년, 같은 학교 후배이자 1979년에 사망한 노동운동가 박기순과 영혼결혼식을 올렸다. 영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결혼식 장면은 이 영혼결혼식에서 따온 듯. 또한 결혼식 장면의 배경음악이자 광주 민주화운동의 상징 격인 '임을 위한 행진곡'은 본래 윤상원과 박기순에 대한 헌정곡이다.[10] 전자는 감독이 시민군 내부에도 갈등이 필요하다고 처음에는 생각했는데, 모니터링을 하면서 보니 온건파였던 분들도 항쟁에 참여한 민주화 투사들인데 그들의 정신을 훼손하는 것 같고,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아 없앴다고 한다. 후자는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영화인데 픽션이 너무 많은 부분을 차지하면 픽션에 의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훼손, 불편한 진실공방이 일어날까봐 안 될 것 같아서라고 한다.[11] 이 말을 하기 전에 "저는 공수특전단 예비역 대령 박흥수올시다!" 라고 자신을 먼저 소개한다.[12] 그러나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사이에는 5개월 정도의 시간밖에 없는데, 5개월은 군복 벗고 바로 택시회사 차려서 자리를 잡기에는 현실적으로 모자라는 시간이다. 12.12 군사반란 이전에 군복을 벗은 것이 아니라면 오류다. 군인으로 있는 동안 별들과 접촉이 많은 대령 특성상 전두환이 조만간 일을 벌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황상 12.12 이전에 일찍 군복을 벗고 택시회사를 차린 듯 하다. 그동안 모은 군인의 월급, 예편하면서 받은 퇴직금에 다달이 나오는 군인 연금을 합쳐서 택시 회사를 창업한 것으로 보이며, 민우의 성실성을 보고 바로 채용할 정도로 크게 신임하고 있었다.[13] 아내는 영화 장면에서는 안 보였고 일찍 사별했다.[14] 시민군이 무기고를 터는 장면을 잘 보면 인봉과 용대가 이걸 꺼내다가 둘이 가지고 놀며 신기해하고 흥수가 한구석에서 그걸 보고 있다. DVD에 실린 삭제장면에서는 그 와중에 둘보고 따라오라고 해서 건물 옥상에 들고 올라가는 장면이 나온다. 두 사람이 흥수를 돕고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여담으로 이 과정에서 인봉과 용대가 더욱 친해지게 된다. 총이 무거워서 낑낑대다가 잠시 계단에 앉아 쉬던 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친해지게 된다. 최후반부에서 나오는 둘의 고향 이야기도 원래는 여기서 처음 언급되었다. 복선이 되는 장면이었다.[15] 김상원 대위는 끝까지 진압에 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초반 작전 브리핑에서 강경진압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을 피력했다가 최순기 준장에게 싸대기를 맞는 장면도 있다.[16] 탈출하기 위해 도청을 빠져나오는 장면을 자세히 보면 민우는 절박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흥수는 애써 무표정을 유지한다. 처음부터 민우만 내보내고 본인은 남아서 싸울 생각이었음을 암시하는 복선.[17] 이때 민우는 작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흥수를 대장님이 아닌 아버님이라고 부른다. 이를 봐서 계엄군만 오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민우를 사윗감으로 점찍고 결혼시키려고 마음을 먹었던 듯 하다.[18] 이때 민우를 내보내기 위해 도청에 쳐들어온 계엄군 4~5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보이기도 한다. 전직 군인이라는 솜씨가 결코 녹슬지 않은 모양. 계엄군을 사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하나는 민우와 같이 도청 꼭대기층으로 같이 올라갈 때 마주친 2명을 민우와 같이 사살, 두 번째 장면은 민우에게 도청을 나간뒤 숨으라고 조언해 줄때 인기척이 들리자 들어온 계엄군 3명을 마찬가지로 그와 같이 M16 소총을 연사해서 사살한 뒤 민우를 도청 뒤뜰로 내보내 준다.[19] 대학생 일부가 택시를 타고 도망가려 했는데, 계엄군들이 그 택시 기사를 끌어내어 폭행해 죽이자, 격분한 지역 택시 기사들이 다음날 시내 도로를 점령해(도로가 온통 택시로 뒤덮혔었다 한다) 수개 도로에 걸쳐 밀어내기에 나섰다. 군인들의 사격으로 택시 몇 대가 불탔지만 계속 밀어붙여 결국 계엄군이 시 외곽으로로 철수하게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지금도 5월이 되면 망월동 묘역에 참배 오는 택시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고 한다.[20] 참고로 박남선은 아직 살아 있다. 겪은 게 있는 만큼 그도 민주당 지지자였지만 2022년 이후 현재의 민주당의 모습은 자신이 지지하던 민주당이 아니라며 실망감을 표했고, 2022년 대선에서 윤석열을 지지했다.[21] 실제로 광주보훈병원은 1987년에 설립됐다. 80년 저 당시에는 적십자병원, 전남대병원, 조선대병원, 기독병원에서 부상자들을 치료했다. 심지어 진압군 측이었던 7공수의 군의관 몇몇과 국군광주통합병원의 군의관들 또한 자신들의 불이익을 각오하고 민간인 부상자들을 치료했다는 기록도 있다.[22] 극중 계엄군에게 폭행당해 부상을 당한 민우를 치료하는 장면이 나오는 데, 민우는 신애를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거짓말을 한다. 자신은 해병대 출신이라 공수놈들에게는 두들겨 맞지 않는다고.[23] 5. 18 당시 계엄군에게 붙잡힌 후에 받은 고문의 후유증에 평생 시달렸다. 결혼 이후 경북 지역에서 거주했고, 2021년 2월 16일 향년 7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24] 촬영 시 광주제일고등학교의 협조를 얻었다고 한다. 영화에 엑스트라로 등장한 고등학생들은 대부분 광주제일고등학교의 학생들이다.[25] 친구들과 함께 수적으로 계엄군을 몰아붙여서 두들겨 팬 듯하다. 작중 대사에서도 "그 자식들, 쪽수로 밀어붙이니까 금방 꼬리 내리던데?" 라고 자신만만해 하는 모습이 그 증거.[26] 그 와중에 자신의 친구들, 그리고 상필의 부고일 학교로 가서 그의 책상에 놓여진 한 송이의 하얀색 국화꽃과, 흐느껴 우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고 "상필아...!" 라고 이를 악물며 분노하는 모습이 압권이다. 이후 전교생들과 3학년 친구들을 모조리 동원하여 시위를 나가려던 찰나 선생들이 교문을 막는걸 보고 "비켜주십시오. 선생님, 상필이가 죽었습니다." 라고 비장하게 말한다.(그리고 진우의 말을 들은 여자 선생님 2명은 끝내 아래로 고개를 숙이며 흐느껴 우는 모습이 인상적.) 그러나 담임 선생은 진우를 아끼는 마음에 "지금 나가면 개죽음밖에 안돼!" 라고 마음에도 없는 일갈을 한다. 하지만 며칠 후 다시 시위를 나가려고 하는 학생들을 보고 "말리지 않을 테니 이리 와 봐." 라고 말하며 눈가에 치약을 발라주는 등 진정으로 학생을 아끼는 참된 스승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이후로는 진우는 교내에서 싸움을 잘하는 학생 혹은 무술 유단자인 학생, 교내에서 독종으로 소문난 학생 등을 모아서 시위를 나간 후 계엄군을 쪽수로 밀어붙여서 박살을 낸 듯 하다.[27] 말리는 부모에게 "조국이 나를 부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기어이 뛰쳐나갔다고 한다.[28] 흥수가 시민군을 조직할 때 "이 중에 군필자가 있냐"고 묻는데, 이 때 '나 월남 갔다 왔다'고 허풍을 친다.(자신이 직접 친 건 아니고 이전에 주변 사람들한테 말했는지 용대가 말했다. 삭제장면에서 평소에 어떻게 뻥을 치고 다녔는지 상세히 나온다) 그러자 흥수가 '방위도 월남에 가나?'라고 면박을 준다.[29] 제대로 군대를 안 갔다온 영향인지, 박흥수가 시민군한테 무기를 설명해주던 장면에서 연막탄의 안전핀을 아무 생각 없이 뽑았다가 연막이 터져서 사람들 모여 있던 곳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사고 한번 거하게 쳤다. 연막탄이었기에 망정이지, 수류탄이었다면 인명피해가 났을 것이다.[30] 자신은 남겠다고 고집했지만 주변사람들의 만류로 인해 결국 슬퍼하면서 떠난다.[31] 시민군이 자발적으로 무기를 회수하고 해산하려 한 일이 실제로 있었다.[32]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호칭이 바뀐 것은 5.18 민주화운동이 끝나고 한참 뒤인 1996년부터이다. 따라서 영화에서도 초졸이 아닌 국졸이라고 표현했다.[33] 삭제장면을 보면 원래는 둘이 같이 다니는 장면이 더 많았지만, 영화의 진중한 분위기를 깰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장면이 삭제되었다.[34] 이 키워드는 나중에 또 나온다. 원기랑 같이 버스를 타고 가다가 똥이 급해서 버스를 세우고 자기는 볼일을 보지만, 갑자기 계엄군이 와서 버스에 총격을 하여 운전사와 승객들이 죽는 걸 원기랑 같이 볼 수밖에 없었다. 충격이 엄청났는지, 이후 시민군에 돌아와서는 넋이 나간 목소리로 한탄한다.[35] 이때 인봉도 총에 맞아서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36] 전사하는 장면은 안나왔으나, 사진 구도에서 전사하지 않은 인물들도 많이 나오는 걸로 보아 생존했을 가능성도 있고, 실제 모티브가 된 조철현 신부가 2016년까지 생존했다는 걸 보면 생존했을 가능성이 높다.[37] 실제 모델인 조비오 신부 역시 훗날 진상을 밝히는 자리에서 자신이 성직자지만 그 당시에 총이 있었으면 쏘고 싶었다고 회고했다.[38] 사용법을 아는 것으로 보아 작중에서 드러나진 않았지만 군종 신부 출신일 가능성도 있다.[39] 하지만 이후 전개를 보면 결국 사망했다. 사인은 과다출혈로 보인다.[40] 나중에 민우와 신애의 결혼식 장면에서는 갈색의 정장을 입고 멀쩡한 모습으로 어머니와 함께 등장한다.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어머니에게는 고급 한복을 맞춰드리고 자기 자신 또한 격식을 차리고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옆에는 마찬가지로 검은색 정장을 입은 이동규가 웃으며 등장한다. 이 장면은 윤상원과 그의 대학 후배 여성의 영혼 결혼식을 촬영한 모습으로 죽은 사람들도 전원 자신의 아내 및 아들(마찬가지로 죽은 의사는 자신의 병원 간호사와 함께 등장.), 여자친구와 함께 등장한다. 계엄군 대위인 김상원도 등장하는데 5.18만 아니었으면 예편하고 흥수의 택시 회사에 취업한 모습으로 나온 듯 하다. 김상원 대위는 계엄군 측 인물이지만 시민군 진압 작전에 끝까지 회의를 갖고 있었고, 극중 초반에 김상원 대위가 휴가를 나오면서 흥수의 집에 방문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차를 대접받으며 제 자리도 하나 마련해 주셔야 합니다 라고 얘기하는 것으로 보아 군문에 미련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41] 위의 사진처럼 이때 상필이 교련복을 입고 있었는데, 실제로 당시 전투경찰들 사이에선 시위대 중에 교련복 입고 있는 사람들은 극렬분자라는 선입견이 존재해서 체포대상 1순위였다고 한다.[42] 부상에 취약한 부위인 후두부를 엄청나게 세게 강타했다.[43] 총에 맞기는 맞았으나 후에 정선생님이랑 쓰러졌을 때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린 걸로 봐선 생존했을 수 있으나 계엄군들이 많은 건물 안에서 탈출할 확률은 낮다.[44] 이건 오류다. 당시에 미성년자들은 물론 군미필자들에게는 무기를 나눠주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방위로 갔다온 인봉도 처음에는 면박 받았는데, 미성년자에 고등학생인 원기가 총 들고 있다는 게 말이 안 된다. 극적 허용으로 보면 된다. 다만 최종전에서 사망자 중 1명이 죽기 직전에 광주일고 3학년 3반 한민재라고 신원을 밝히는데, 이를 들은 민우가 이 새끼 대학생이라고 거짓말했다며 한탄하는 장면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나이를 속였을수도 있다. 원기와 한민재 2명 다 작중 고3이니만큼 성인이 머지 않은 시점이기도 했고.[45] 원기는 용대가 똥 쌀 때 주변을 경계하느라 둘은 살아남았지만, 덕분에 버스 운전사와 승객들이 총에 맞아 죽는 걸 직접 목격하면서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46] 처음에 제자 중 한 명인 상필이 죽었을 때는 다른 교사들과 같이 교문을 막고 학생들에게 돌아가라고 했다. 그럼에도 강진우가 말리지 말라고 하자 그의 뺨을 치면서까지 막으려고 했다. 제자들의 마음에는 공감하고 있었지만, 섣불리 시위에 참여했다가 계엄군에게 학살당할까봐 막은 것이다.[47] 눈 밑에 치약을 바르면 최루탄의 가스를 조금 막아준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촬영에서는 배우들의 편의를 위해서인지 로션을 썼다고 한다.[48] 자이언트에서 유찬성을 맡은 배우다. 대조영에서 모개 역을 맡기도 했다.[49] 안경을 벗고 있는 이유가 이거였다.[50] 처음 계엄군을 봤을 때도 낌새가 보였지만 이땐 다행히 아버지가 옆에 있어서 급히 아들의 손을 붙잡고 도망친 덕에 벗어날 수 있었다.[51] 그것도 진압봉으로 후려갈기고 군화발로 복부를 걷어찬 다음 여러 명이 모여서 발로 밟아 전신을 부숴버렸다.[52] 실제 김경철은 청각장애인이었다.[53] 실제로 1980년 5월 20일 아침에 있었던 일이다.[54] 평화로웠던 시절을 다루는 일상 파트에서, 당시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전설의 고향>을 보러 그의 집에 찾아온 마을 사람들에게 시청료를 징수하는 장면이 있다. 사람들도 이웃인만큼 기꺼이 시청료를 냈다. 거의 50원이나 100원씩 시청료를 냈는데 당시 동네 사람들도 형편이 좋은듯 그 정도의 돈은 무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인봉이 조금이라도 늦게 나오면 시청료를 깎아달라는 넉살을 부리자 "으이구 쪼잔한 놈!" 이라며 가볍게 웃으며 핀잔을 주고 그 요청을 받아들이는 면을 볼 때 온 동네 사람들이 친근하고 평화롭게 살아온 듯 하다.[55] 한석규(주 과장)에게 죽는 청와대 경호처장(작중 이름은 신 처장(대본 상 이름은 신영훈))[56] 여담으로 권태원은 이 연기 때문에 한동안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에는 가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의 출생지는 극중 설정과는 달리 경상북도 울진군 출신이다. 옛날에는 악역 역할을 맡았던 배우가 사람들에게 욕설 내지는 심한 폭행을 당하거나 극단적인 경우에는 심지어 맞아죽는 일도 흔했다고 한다.[57] 지금도 고급 장교는 진급이 어려워 별의별 짓들을 다 해야 하는데 부패의 끝을 달리던 군사정부 당시에는 진급을 위해서 부정한 짓을 하는 것은 아주 흔했다.[58] 당시 군대가 엄청나게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무자비한 준장이 대위를 그 정도 폭행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특히 특전사는 해병대 못지 않게 각종 똥군기가 극심한 부대 중 하나이다.[59] 작중 시민군이 폭약을 계엄군 지휘부로 보내는 장면에서 명찰이 잠시 등장한다.[60] 최순기 준장의 상관으로써 노란색 특전사 베레모를 쓰고 있는 소장이라면 특전사령관이 분명하다. 당시 특전사령관은 중장이 아니라 소장이었으므로 특전사 복장을 한 투스타 소장은 특전사령관 한 사람 밖에 없었다.[61] 이 당시까지만 해도 엄효섭은 무명이었으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2년 뒤 출연한 선덕여왕의 염종 역이다. 참고로 엄효섭은 극중 설정과는 달리 인천광역시 출신이다.[62] 여담으로 엄효섭은 우연의 일치지만 5년 후 학교 2013에서 동명의 박흥수 캐릭터와 또다시 엮이게 된다. 관계는 선생님과 학생. 엄효섭은 학년부장 교사역할을 맡았다.[63] 삭제 장면 중에는 배 중령이 목숨을 내던지며 싸우는 광주 시민들을 보고 '이 새끼들 완전히 미쳤구만!'이라고 하자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라고 대답하며 대놓고 항명하는 장면도 있다. 그러나 대사가 너무 오버인 것 같아서 삭제되었다고 한다.[64] 여태까지 군복을 입고 등장한 것과는 다르게 결혼식 장면에는 양복을 점잖게 입고 등장한다.[65] 촬영 당시에는 무명으로 영화 개봉 당시 KBS1의 TV소설 그대의 풍경에 출연중이었다. 이 영화 이후로 사극에 주로 출연하게 되며 훗날 무신에서 김경손 역에 이어 광개토태왕에서 사갈현 역으로 출연해서 이름을 알리게 된다. 또한 김철기의 첫 영화 출연작이지만 2년 뒤 개봉한 돌멩이의 꿈 외에는 영화 출연이 없다.[66] 전 과정에서 극장 안에서 시민 한 명을 반죽음상태로 파괴해버렸는데, 이 역을 맡은 배우는 신창수. 1971년생으로 최민식과 함께 루시에 출연했으며 무술감독도 맡고 있다.[67] 광주 출격 당시 유 상병에게 해가 왼쪽에서 뜨고 있으니 우리는 지금 남쪽으로 가고 있다고 알려준 고은섭 일병이다.[68] 위 사진에서 보이는 모습이 바로 이 장면이다.[69] 군복에 이름이 새겨져 있으나 확실치 않다.[70] 수송기 기준으로 해가 뜨는 방향만으로 어디를 향한지 안 것이다. 북으로 간다면 수송기 기체의 오른쪽 창문에서 해가 떠야하는데, 왼쪽 창문에서 뜬다는 것만으로 남쪽으로 가는 걸 눈치챈 것이다.[71] 인봉이 일병에게 여자친구 있냐고 물으면서 좋은 여자 소개시켜주겠다고 하다가 "볼록한 남대문 좀 보소! 군복 찢어지겠다!"라고 섹드립을 치자 듣고 있던 시민들은 물론이고 계엄군조차도 웃어버렸고, 일병은 자신의 거기가 진짜로 그런지 쳐다보는 등의 조금 훈훈한 면을 보이다가 유태웅 상병이 머리를 치면서 정신 차리라고 했고 결국에는 역사대로 애국가가 울리자 계엄군과 함께 시민들을 향해서 사격했다. 다만 전투 경험이 부족한 것인지 사격할 때 모습을 보면 조준사격이 아닌 지향사격 자세로 사격하고 있다.[72] 사망한 강민우는 미소를 짓고 있고 생존자 박신애는 슬픈 표정을 하고 있다.[73] 제목이 뜨기 전에 짤막한 배경설명이 자막으로 나오긴 한다.[74] 실제 미국인 관람객들이 이 부분에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75] 더군다나 인봉의 아내 역할을 맡은 배우 황영희 역시 전남 목포시 출신이다.[76] 당시만 해도 주민등록이 되어있지 않은 미등록자들이 많았던 시대상을 감안할 때, 비공식적으로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갑제 조선일보 기자가 꼼꼼히 희생자규모를 파악하면서 미처 살피지 못했던 부분도 바로 이 주민미등록자들의 존재.[77] 나주 남평 효천역과 광주 말바우 시장에서 이뤄졌다.[78] 실제 그 당시 방영되었던 뉴스 영상이다. 그러나 리포터 목소리는 성우비를 아끼기 위해 김 대위 역의 엄효섭이 맡았다고 한다.[79]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그 장면. 하필 그때 스턴트맨이 다리에서 쥐가 나는 바람에 큰일 날 뻔하는 등, 고생을 많이 한 장면이라고 한다.[80] 부모님들 뿐 아니라 당시의 참상을 부모에게 똑똑히 전해 들으며 자란 어느 정도 머리 큰 아이들도 크게 공감하고 울분을 느꼈다는 후기가 많다.[81] 영화 개봉 무렵은 아직 군의 부조리에 관하여 크게 이슈가 된 사건들 이전인지라 더욱 거리낌 없이 위와 같은 행위가 진행되었을 것이다.[82] 이 지시가 일부 부대에만 내려진 건지 아니면 육/해/공군본부나 국방부에서 내려온 건지는 확인이 필요할 듯 하다. 몇몇 부대에서는 이런 지시 사항을 받은 적이 없는 부대도 있던지라.[83] 2007년 개봉 당시 3X사단 정비대에서는 H모 준위에 의해 이러한 지시사항이 병사들에게 확실하게 하달되었다.[84] 현장에서 시위 학생 및 시민들의 얘기를 경청하여 상황을 파악한 후, 자리를 이탈. 명령권자인 사단장 부재 등의 사유로 31사단은 시민들과 별다른 충돌 없이 복귀할 수 있었다. 공수부대에게도 행동을 자제하라고 명령했으나 이들이 명령에 따르지 않아 않아 제지에 실패했다. 8년 후 광주 시민의 지지를 얻어 국회의원으로 선출된다.(91.5%의 압도적인 득표율이었다고 한다.)[85] 물론 촬영할 당시에도 전남도청 건물과 금남로는 온전히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시대인 만큼 어느덧 금남로도 그 때와는 많이 달라졌기 때문에 재현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소재를 다뤘던 드라마 제5공화국은 촬영 당시의 금남로에서 그대로 촬영했다. 응?[86] 참고로 이 학교의 설립자가 다름아닌 로버트 할리이다![87] 포니, 복사 트럭, 피아트 장갑차, 새한 버스, 군용 록스타 등[88] 그나마 포니는 2012년경 누군가가 리스토어를 위해 인수하였으나 나머지 차들의 행방은 불명이다.[89] 해방 기간 동안 희생자들의 관을 안치했던 곳[90] TV에서 왜곡 보도가 나오는 부분부터 시작해 김 신부가 뉴욕타임스를 들고 오고 미국 얘기를 나누는 장면[91] 공교롭게도 복무했던 부대가 5.18 민주화운동을 진압했던 부대였다고 한다[92] 실제로 김상경은 극중에서 진압군의 충에 맞아 사망한다.[93] 강민우와 박신애의 결혼식 사진 장면에서, 하객들도 강민우도 웃고 기뻐하는 가운데 박신애는 죽은 사람처럼 계속 무표정이다. 다만 그녀 주변에서 미소짓는 이들은 이전에 전부 사망했음을 고려하면, 브레히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처럼 유일하게 살아남은 박신애의 고통을 표현하는 장면일수도 있다. 게다가 사진이 찍힌 세상이 저승이라면, 저승에서 살아있는 자는 이승에선 죽은 자다.[94] 시대를 생각하면 코티나 AMB 왜건이나 1세대 봉고, 현대 HD1000이 등장해야 정상이다. 사실 그것마저도 단종된 데다가 이미 거의 또는 전부 폐기되어 해외에서도 구하기 힘들기는 했으니 하이 베스타가 HD1000 역으로 나왔다 생각하는 게 나을지도.[95] "당시 시민들은 계엄군의 집단 발포를 차마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실낱같은 희망에서 완전한 절망으로 이동하는 12시에서 1시까지, 짧지만 한평생 같았을 한 시간 동안 희망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화려한 휴가」는 그 한 시간을 생략하면서, 시민들의 분노와 투쟁, 긴장과 공포, 희생과 슬픔을 코미디로 치환해버린다. (33쪽)[96] 그러나 이 평처럼 영화가 광주 시민들의 정신을 코미디로 만들어 버렸다고 비난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극적인 연출을 위해 오류를 저지른 부분이 아쉬운 것은 맞다.[97] 그러나 다시 생각해본다면 굉장히 위험할 수 있는 장면이다. 인봉이 들고 있던 게 수류탄이었다고 생각해보라. 손 쓸 틈도 없이 전원 몰살이다. 뭐 웃겨보이긴 하겠지만 옆에 있던 용대나 병조 아버지가 인봉을 보고 경악한 건 다 이유가 있다.[98] 1980년 당시 MBC, KBS가 전남 광주시(참고로 광주직할시는 1986년 11월에 승격)에서 일어난 실상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고 광주 시민을 폭도로 취급하는 왜곡 보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분노한 시민들이 공격했다. 그리고 세무서는 그들이 꼬박꼬박 낸 세금을 잔인한 폭정에 쓰는 것에 분노와 항거하는 차원으로 공격했다.[99] 자세한 전, 후 관계에 대한 자세한 서술은 5.18 민주화운동 참고.[100] 전남도청 광장에서 섹드립놀림 받다가 유태웅에게 한 대 맞는 그 일병이다.[101] 일병이 말한 것은 타고 있는 수송기 기준으로 말한 것이다. 북쪽으로 간다면 비행기 정면을 기준으로 오른쪽 창문에 일출이 있어야 하는데, 왼쪽에 뜨고 있다는 것은 남쪽으로 향한 것을 눈치챈 것이다.[102] 안치된 시신들이 초여름 날씨로 인해 부패하는 냄새를 막기 위해 상무관에서는 양초를 많이 피웠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도 이 부분이 언급되었고, 초반부 주인공 동호의 주 업무가 상무관의 양초를 교체하는 일이었다.[103] 상술된 등장인물 파트의 계엄군 설명 장면에서 사진으로 나와있다.[104] 그 때문에 훗날 재판을 받으면서 민주화 운동 진압에 대한 책임의 대가를 어느 정도 치르게 된다.[105] 우선 같은 소장이어도 특전사 군인이면 당시 특전사령관이 소장인만큼 반드시 특전사령관 캐릭터가 되므로 복장을 특전사 군인 복장이 아닌 일반 보병 사단장 복장으로 하고 최순기 준장이 폭도들을 확실히 진압해야 하는데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고 반쯤 대드는 식으로 항의하게 하는 등 묘사를 전혀 다르게 했어야 하며 작중에서는 누가 봐도 윤흥정 소장이 아닌 정호용 특전사령관으로 보이게끔 나와 재현이 이상해보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