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신군부가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광주교도소를 습격했다고 왜곡한 사건. 전남합수단에서 작성한 광주교도소 습격기도사건에는 당시 광주교도소에서 복역하던 류락진의 처 신애덕과 동생 류영선이 시위에 가담해 교도소를 습격하여 복역 중이었던 류락진을 구출하도록 선동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더욱이 류영선은 시위 군중과 함께 교도소를 습격하다가 총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1]이 때문에 광주 교도소 습격 사건은 한때 극우 세력에서 무장폭동을 운운하며 왜곡하기 위한 근거 중 하나로 사용되었고 역사에 무지한 일부 국민들도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으로 알고 있던 경우가 더러 있었다. 하지만 진상은 완전히 달랐다.
2. 진상
21일 08:50 교도소에 폭도 50여명 접근, 회유권고로 자진 철수
21일 09:05 교도소 뒷산에 난동자 1백여 명 버스 1대에 승차, 교도소에 접근. 20-30여 명 출동하여 해산시킴.
21일 10:22 교도소 전방 5백 미터 주유소에 군용트럭 3대, 버스 1대, 트럭 1대에 분승한 1백 50여 명의 시위대 차량 주유 후 주유소 앞 선회, 지휘관의 해산 권유로 서방 쪽으로 사라짐.
31사단 전투상보
21일 09:05 교도소 뒷산에 난동자 1백여 명 버스 1대에 승차, 교도소에 접근. 20-30여 명 출동하여 해산시킴.
21일 10:22 교도소 전방 5백 미터 주유소에 군용트럭 3대, 버스 1대, 트럭 1대에 분승한 1백 50여 명의 시위대 차량 주유 후 주유소 앞 선회, 지휘관의 해산 권유로 서방 쪽으로 사라짐.
31사단 전투상보
21일 19:30 무장폭도 교도소 기습, 장갑차 등 차량 9대로 와서 총격. 수비병력 교전 끝에 격퇴. 군인 4명 부상, 차량 1/4 1대, 1/2 5대, 장갑차 1대, 1/2 소방차 1대, M1 3정, 실탄 112발, 카빈 28정, LMG 실탄 39발, 생포 1명, 부상 8명.
전투병과교육사령부 작전일지
류락진이 광주교도소에 복역한 것과 류영선이 총상으로 사망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신애덕은 합수부에 가서 시위 주동자로 예비검속했던 딸 류소영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또한 류영선은 소재를 모르는 조카 류소영을 찾으려다 계엄군의 과격 진압을 보고 시위대에 합류했다가 5.21. 전남도청 앞 발포로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 사망했다. 류영선이 사망한 후 그의 유족은 차례로 전남합수단에 불려가 '류영선이 류낙진을 구하기 위해 시민군을 선동하고 교도소를 습격했다'는 혐의와 관련하여 심문을 받았다. 한마디로 교도소 습격 기록은 같은 날, 먼저 앞선 시각에 전남도청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계엄군의 총격에 사망했다는 시위 주동자가 되살아났다가 광주교도소를 습격해 계엄군의 총격을 맞고 다시 사망했다는 누가 보더라도 계엄군 측에서 날조한 기록이라는 것이다.전투병과교육사령부 작전일지
당시 전남합수단에 근무했던 505 보안부대 공과수사관 출신은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와 한 면담 조사에서 그 같은 일이 있으며 류소영이 시집가기 전까지 605 보안부대에서 감시했다고 진술했다.[2]
요약하면 시위를 벌이던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것도 모자라 그 피해자의 가족들을 심문해서 일어나지도 않은 교도소 습격 사건의 가해자로 둔갑시킨 사건이다. 일부 극우 세력은 류영선의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그 외 시민군들이 광주 교도소를 습격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라고 주장하지만 애초에 광주 교도소는 계엄군과 시민이 '충돌'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였다.
2.1. 교도소 근처에서 시위와 전투가 많았던 이유
교도소 앞 300m 전방까지 시위대가 진출한 경우는 있다. 하지만 이걸로 습격했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300m 전방은 바로 인터체인지로 연결되는 도로이기 때문이다.광주교도소는 담양군, 곡성군, 여수시, 순천시 쪽으로 빠져나가는 국도와 호남고속도로 광주 동부인터체인지가 연결되는 길목이어서 앞, 좌, 우는 물론 두 쪽으로 국도와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달리는 교통로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교통 요충지다. 당초 동명동에 자리잡았던 광주교도소가 1960년대에 추진된 개발과 동시에 광주광역시에 의해 문흥동으로 이전해올 때는 담양, 곡성, 순천, 여수 방면으로 향하는 겨우 2차선 비포장 국도만 오른쪽으로 뻗어 있었다.
시민군은 광주 항쟁의 도내 확산을 위해 차량을 이용하여 이 교도소 앞과 옆길을 거쳐 고속도로 인터체인지와 국도로 진입하려고 했는데 여기에 공수부대가 총격을 가한 것이다. 시민군이 대응 사격을 했지만 구식 카빈이나 M1 소총으로는 당시 제식이었던 M16A1 소총이나 각종 분대지원화기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이같은 교전을 놓고 계엄군 측은 폭도들이 사상범을 수용하고 있는 교도소를 습격했기 때문에 부득이 교전이 벌어졌다고 발표했다.[3]
2.2. 증언들
교무과장으로 근무했던 김근재는 이렇게 증언한 바 있다.제가 당시 광주교도소 교무과장으로 재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교도소 주변에서 총격 사건이 몇 번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시민군이나 학생들이 교도소를 습격했다는 사실은 전연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4]
대한민국 육군 제31보병사단장과 정웅 장군과 제20기계화보병사단장 박준병 장군도 증언하길 "광주교도소를 21일 오후 2시 이전의 제31사단이나 23일 오후 7시 이후의 제20사단 병력이 경비하고 있을 때는 습격을 받은 사실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5]3. 기타
전두환은 이후 전투경찰과 유사한 부대인 전투교도대를 만들도록 지시했으며,이는 1981년 교정시설경비교도대의 창설로 이어졌다.1980년 5월 21일을 기준으로 호남고속도로 광주 구간은 국방장관령 군사작전지역이라는 이유로 전면 봉쇄되었다. 이를 계기로 국방부 장관의 허가 없이 무단으로 넘어오는 자에 대해서 이유를 막론하고 사살하거나 체포하였다.
그러나 계엄군은 이런 중요한 사실을 경고 방송이나 계도 활동 등을 통하여 제대로 알리려는 노력은 일절 하지 않았으며 교도소에 주둔했던 제3공수특전여단은 이걸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냥 교도소 근처에서 보이는 민간인들을 그냥 보이는 대로 무차별로 난사하여 죽였다. 이로 인해 아무것도 모르는 민간인들이 지나가다 많이 희생되기도 했다. 고영태의 아버지[6]도 이때 살해됐다. 심지어 당시 5살이었던 소녀가 하반신마비라는 중상을 입기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 광주와 전남을 제외한 타 지역에서는 5.18의 실상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알리기 위해 민주화 운동 참가자들이 서울 상경 작전 등을 통해서 5.18의 실상을 전국 방방곡곡에 알리려고 했던 것이다. 동시에 전국 각지의 청년들의 지원과 봉기를 통해서 신군부 와해 작전으로 연계하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