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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ruby(燼滅作戰, ruby=じんめつさくせん)]일본군이 중일전쟁에서 벌인 제노사이드이자 초토화 작전으로 삼광작전(三光作戰)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일본군이 행한 조직적 전쟁범죄를 중국에서 일컫는 말이다. 직접적인 출전은 전후 중국 측에 체포된 일본군 전범의 자술서에서 나온 것으로, 중국 측에서 붙인 이름이며 일본군 측이 부르던 명칭은 진메츠(신멸) 작전이다. 현대 중국어에서 光은 동사 뒤에 붙어 모두 ~를 하여 남는 것을 없게 하다, 즉 모조리, 전부라는 뜻의 보어로 쓰인다. 예컨대 아래 나오는 殺光은 모두 죽이다라는 뜻이다.
삼광이란 다음 세 가지의 지시를 의미한다. 스케일 자체는 중일전쟁에서의 규모가 압도적이라서 주로 중일전쟁 얘기를 의미한다.
2. 상세
1939년 12월 중화민국 정부는 1939년 동계공세작전을 실행했다. 작전 자체는 큰 성과 없이 끝났으나 이것은 항일을 주도한 국민정부의 영향력 확대와 위신 상승을 가져왔고 이에 자극을 받은 공산군 지휘관 펑더화이는 이러한 여론을 만회하기 위해서 각지의 공산군을 모아서 하북 지방에 대규모 유격전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백단대전이다.[1] 이로서 공산군은 105개 단(연대) 40만 병력이 3개월 반에 걸쳐서 1,824회의 전투를 벌였고 일본군 2만, 괴뢰 정부군 5천명을 살상하고 거점 3천개를 파괴하고 철도 천여리를 파괴하고 자동차 도로 3천여리 교량 150개소를 파괴했다는 자체 발표로서 이러한 사태를 벗어나고자 했다.이에 각지의 농촌 주민들을 일본군이 관할하는 곳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공산군이나 국민당에 협조한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은 학살하고 농작물이나 마을 자체를 없애는 초토화 정책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신멸작전이다. 이로 인해 중일전쟁 기간 동안 허베이는 말 그대로 생지옥이 되었다. 역사가 히메타 미쓰요시에 의하면 이러한 초토화 작전으로 270만의 중국 민간인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 따르면 전쟁 초기의 1937년 12월 13일부터 약 2개월간 사망한 숫자가 20만명을 웃돌았으며 중일전쟁 전체 민간인 사망자 수는 최소가 1,000만, 최대 3,000만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민당군의 전사자 수가 300만 ~ 400만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제노사이드 범죄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여하튼 이로서 공산당이 통제할 수 있는 인구는 50%가 감소하고 경제도 강경하게 통제되어서 유격전을 지속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이러한 어려움은 대륙타통작전을 위해서 하북의 군대가 대부분 양쯔강 이남으로 내려가고 나서야 간신히 해결되었다.
결국 신멸작전 하에서 중국 국민에게는 잡혀 죽기 vs 싸우다 죽기라는 두 가지 선택만이 남게 되었다.
- 싸우다 죽기를 택한 이는 운이 좋으면 적과 동귀어진하든지, 아니면 최소한 총이나 포탄에 한 번에 죽을 수 있었다.
- 잡혀 죽기를 택하면 난징 대학살 항목을 보다시피 잡혀죽을 바에는 싸우다 죽는 게 100만 배 더 나은 비극이 벌어졌다. 이러다 보니 이 상황에서 잡혀 죽기를 택할 사람은 별로 없었다.
덕분에 일본군은 일본 점령지 안에서도 도시 중요 지점과 철도선 일대 정도만 간신히 장악하게 되었으며 이 작전에 맞설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수단은 청야전술 뿐인데 이는 '창광(搶光)'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빈약한 보급을 약탈로 때우는 것이 교리였던 일본군에게 상당한 압박을 줬다.
즉 요점만 간추려서 말하자면 일본군은 삼광작전으로 중국인들이 자신들에게 거역할 생각을 가지지 못하리라고 여겼지만[2]"어차피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 인간은 더 격렬하게 저항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난징 대학살이나 상하이 사변 등을 통해 일본군한테 항복해 봤자 끔찍한 죽음만이 기다린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중국인들이 전의를 상실하리라고 생각한 것은 엄청나게 잘못된 착각이었다.][3]자신들처럼 복종할 줄 알고 그랬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다소 고정관념에 기반을 둔 해석이지만 이런 해석이라도 참고하지 않는 한 지역 안정화 작전이랍시고 이런 어리석은 작전을 시행한 일본군의 사고방식이 설명되기 어려운 감이 있다.] 중국인들은 역으로 일본군에 대한 적의로 똘똘 뭉쳐서 더 맹렬히 저항하게 되었다. 오히려 중국에 소속감이 없던 소수민족들도 살기 위해서 국민당과 공산당에 합류하여 항일전선에 참가했다.
당연하지만 일본 극우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부정하고 저런 사진을 중국인끼리 싸운 것이라고 왜곡하며 일본군들이 중국인 목을 자르고 사진 찍고 군복 입은 채로 웃으며 찍은 것도 조작이라고 부정한다.
3. 주동자는 누구인가?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1940년 일본군 육군 제1군 참모장으로 있던 다나카 류키치(田中隆吉)가 내린 "적의 근거지를 섬멸소탕하여 적에게 있어 장래 생존할 능력을 뿌리 뽑아라(敵根拠地ヲ 燼滅掃蕩シ敵ヲシテ将来生存スル能ハザルニ至ラシム)"로 밝히고 있으며 레퍼런스는 일본 역사학자 카사하라 토쿠시(笠原十九司)의 일본군의 치안전과 삼광작전(日本軍の治安戦と三光作戦)을 들고 있다. 이 다나카 류키치란 인물은 정작 나무위키의 일본군/인물 항목엔 전범이 아닌 평범한 인물로 간단하게 서술되어 있는데 실제론 상해 사변, 쑤이위안 사건 등에 관여했으며, 종전 후 예비군 신분으로 쇼와 덴노의 전쟁 책임을 줄이기 위한 목적으로 검사 측 증인에 서서 상관과 동료의 전쟁범죄를 폭로한 인물이다. 다만 자살을 시도하면서 "일본 군벌의 일원으로서 전쟁 중에 죽어야 할 운명을 염치 없이 살아남아 내 의지를 거슬렀으니, 그저 면목이 없다[4]", "과거를 돌이켜보면 나 또한 분명 유력한 전범 중 하나이며, 특히 북지나, 만주에서의 행적이 그렇다. 용서받아 편히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5]"라는 서필을 남긴 것으로 보아 전범으로서의 자각은 있었던 걸로 보인다.이와는 달리 중국어 위키백과와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공통적으로 1941년 7월 타다 하야오의 후신으로 북지나 방면군 사령관이 된 일본군 위안부 고안자이기도 한 오카무라 야스지(岡村 寧次)를 주범으로 보고 있다.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삼광 작전과 오카무라의 페이지에서 각각 대본영으로부터의 명령 575번 신멸작전이 오카무라에게 하달됐다는 이야기와[6] 오카무라가 구상한 신멸 작전이 명령 575번으로 승인[7]됐다는 식으로 서술이 갈리고 있다.
중국어 위키백과에서는 오카무라가 주동자이긴 하지만 작전의 초기 단계는 타다 하야오로부터 나왔다는 주장이 서술되어 있는데 정작 타다 하야오 항목은 전쟁 확장에 반대하고 장제스와의 평화 협상을 주장했다고 서술되어 있다.[8]
위와 같이 워낙 서술이 따로 노는 탓에 아직도 누가 신멸을 주도했는지 확인이 안 된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런 만행이 지역 사령관의 독단 같은 게 아니라 대본영이라는 수뇌부의 승인 아래 이뤄진 것이므로 수뇌부 자체에 엄중한 전쟁범죄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4. 여담
1954년 중국의 전범관리소에서 돌아온 전범들은 중귀련(중국 귀환자 연락회)이라는 단체를 만들었고 이를 통해 양심 고백을 했으며 1957년 자신들의 행적을 적은 15명의 수기를 엮어 책을 냈는데 그 제목이 바로 <삼광>이다.시기적으로 서로 다른 지역에서 근무한 일본군들의 수기집이지만 그 중 하나를 쓴 혼다 요시오 소좌의 글 제목이 '삼광 : 살광, 소광, 약광'이다. 그는 1941년 63사단 대대장으로 복무했으며 삼광 작전을 벌인 것을 고백하는 내용이다. 당연히 일본의 우익들은 삼광이란 없다며 발광하였는데 일부는 출판사인 고분샤에까지 쳐들어왔다. 그 유명한 츠지 마사노부는 '일부러 나쁜 것을 드러내는 노악 취미'라며 출판금지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출판사를 옮기고 책 제목도 <침략 : 중국에서 일본 전범의 고백>으로 수정했는데 나름 잘 팔려 21쇄까지 찍었다.
그러다 중귀련은 다시 1982년 8월 앞서 <삼광>에 실리지 않았던 수기 15편을 모아 <신편 삼광>을 출간하여 25만 부를 팔았다. 즉, 일본의 우익들에게는 그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도 게거품 물고 쓰러질만한 도발적인 제목이지만 양심을 고백하여 인간이 되기로 한 자들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진실된 제목인 것이다.
5. 자료 관련 외부 링크
중국어 위키백과영어 위키백과일본어 위키백과6. 같이 보기
[1] 여기서 단은 한 개 연대를 의미한다.[2]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게[3] 이에 관해서는 강자에게 복종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던 일본인 입장에서 작전을 수립하면서 무자비한 무력행사를 통해 자신들이 압도적인 강자임을 보여주면 중국인들도 당연히[4] 日本の軍閥の一員として大東亜戦争中に死すべき身を今日迄生き長らへたるは小生の素志に反し、何とも申し訳なし。[5] 既往を顧みれば我も亦確かに有力なる戦犯の一人なり。殊に 北支 、 満州 においてしかり。免れて晏如たること能はず。[6] In December 1941, Okamura received Imperial General Headquarters Order Number 575 authorizing the implementation of the Three Alls Policy in north China, aimed primarily at breaking the Chinese Red Army.[7] The approval of the policy was given by Imperial General Headquarters Order Number 575 on 3 December 1941. Okamura's strategy involved burning down villages, confiscating grain and mobilizing peasants to construct collective hamlets.[8] 1937年7月的七七事变令侵华战争开始。可是比起蔣中正政府,多田駿更重视苏联的威脅。因此,与参谋本部作战部长石原莞尔少将、陆军军务科长的柴山兼四郎上佐一样反對扩大戰爭。1937年末,发现了跟蔣中正议和的机会,开展以德国中間人的和平工作(陶德曼调停)。1938年1月15日大本營连络会议上作为参谋本部次长出席。 对主张「陶德曼调停中止」方面(近衞文麿首相、广田弘毅外务大臣、杉山元陆军大臣、米内光政海军大臣),政府及参谋本部方面不主张继续和平工作。多田只有多田一个人主张了跟蒋介石的和平谈判继续。但是政府方面不屈服。次日,近卫首相宣言「不以蔣中正为谈判对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