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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3-9대 국회의원 유진산 柳珍山 | Yu Chin-san | |
<colbgcolor=#dc352a><colcolor=#ffffff> 출생 | 1905년 10월 18일 |
전라북도 진산군 (現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 |
사망 | 1974년 4월 28일 (향년 68세) |
서울특별시 성동구 사근동 한양대학교의료원 | |
본관 | 문화 류씨 |
호 | 옥계(玉溪)[1] |
부모 | 아버지 유경덕, 어머니 김경하 |
자녀 | 아들 유한열 포함 4명 |
학력 | 경성고등보통학교 (제적)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 와세다대학 법학부 (정치경제학 / 3년 중퇴) |
최종 당적 | [[신민당(1967년)|]] |
의원 선수 | 7 |
의원 대수 | 3, 4, 5, 6, 7, 8, 9 |
경력 | 민주당 원내총무 민주당 상임고문 신민당 총재 신민당 대표최고위원 신민당 명예고문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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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 본명은 유영필(柳永弼)이었으나 그가 태어난 진산군(珍山郡)의 이름을 따서 유진산으로 개명하였다.박정희 정권하 야당 내에서 윤보선, 김영삼, 김대중의 선명야당론에 대조되는 중도통합론의 거두로 "정치란 정적과의 대화, 조정, 타협에 있다."는 말이 그의 정치 행적을 대변한다. 지나친 권모술수로 오해를 불러 1964년과 1971년에 2번의 진산 파동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정적들에 의해 '왕사쿠라'라는 별명이 항상 따라다녔다. 신민당 총재로 군림하여 유신 반대투쟁에 나서려던 시기에 예기치 못하게 병사했다. 그의 직계 정치 세력은 '진산계'라 불렀으며 이들은 유진산 생전 신민당 내 최대 파벌을 이뤄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이전까지 야당의 주류를 도맡았다.
2. 생애
1905년 10월 18일 전라북도 진산군(현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2]에서 아버지 유경덕(柳敬德)과 어머니 김경하(金敬夏)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경성부에서 경성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1919년 3.1 운동 때 독립만세 벽보사건으로 학교를 자퇴 이후 보성고등보통학교로 편입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를 다니다가 3학년 때 중퇴하였다. 1942년 만주로 망명, 충칭(重慶)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락원이 되었으나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강제송환되었다.
8.15 광복 후에는 청년운동[3]을 시작으로 정치에 투신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서울특별시 마포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김상돈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전라북도 금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대한여자국민당 임영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유진산은 제3대 국회부터 제9대 국회까지 내리 입성하면서 야당의 중진으로 활약하였다. 그가 몸담았던 정당은 민주당, 신민당, 민정당, 민중당, 신민당 등이었다. 정치적 계보는 조병옥, 윤보선, 김도연, 김의택, 이민우, 김영삼 등과 같이 민주당 구파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전라북도 금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대한여자국민당 임영신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후 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전라북도 금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자유당 오승근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전라북도 금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자유당 김귀복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후 탈당하고 신민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제5대 국회의원 자격이 정지되었고, 정치규제까지 받았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 제3번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에 구파 중심 정당인 민정당으로 정계에 복귀한 후, 구 민주당 세력들의 야권 통합 및 단일후보 문제로 혼란스러운 와중에 전직 대통령 출신이자 같은 구파 출신인 윤보선을 동년 9월 12일 민정당의 대선 후보 재추대 및 당대표로 만드는 데 크게 일조했고, 그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 대선 직후에 다가온 6대 총선에서도 민정당 기획위원장이었는데 본래 자신의 지역구인 금산을 포기하고 전국구 3번으로 입후보해서 논란이 일었지만 윤보선 등 주류의 해명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 1964년 10월 8일 의원총회에서 유진산과 윤보선. 이날 진산은 제명당했다. |
1964년 8월 2일, 민정당이 필사적으로 저지하려 했던 '언론윤리위법안'이 국회에서 예상을 뚫고 통과되자, 그 이유로 민주공화당 출신 김진만 국회부의장과 유진산이 모종의 묵계를 맺었기 때문이란 소문이 퍼졌었다. 정해영 의원[4]의 비판을 시작으로, 평소 진산에 대한 불신과 견제의식을 느낀 윤보선 대표마저 그를 비판함으로써 당의 내홍은 겉잡을 수 없이 커졌다. 결국 '진산 같은 사람하곤 당을 같이 할 수 없다.' 며 당원들에게 자신과 진산 중 양자택일할 것까지 요구한 윤보선의 강공으로 1964년 10월 8일 유진산은 18표 차이로 민정당에서 제명당하는데, 이를 1차 진산 파동이라 한다.
그러나 이 싸움은 법정까지 가서 야권에 깊은 상처만 남게 했고, 결과적으로 유진산은 우여곡절 끝에 이후 민중당에서 당원 자격을 회복한 반면에, 윤보선의 위신은 추락하고 만다.
그 결과인지 1965년 민정당과 신파 중심 정당이었던 민주당의 야권 통합으로 탄생한 민중당의 전당대회에선 민정당 당수였던 윤보선과 민주당 당수였던 박순천[5]이 맞붙었는데, 민정당 출신인 진산계가 박순천을 지지하면서 민주당이 당원 수에서 열세임에도, 그녀가 당대표로 당선된다.
동년, 유진산이 주류인 정당답게 '한일기본조약 비준동의안'이 민주공화당만으로 통과된 사건에 대해 다소 지지부진한 대처를 취하자, 가뜩이나 열불난 윤보선 등 강경파들은 탈당 후, 선명야당을 내건 신한당을 창당해 야권은 다시 분열기로 접어들었다.
1967년 6대 대선이 다가오자, 대선 후보는 신한당의 윤보선, 당수는 민중당의 유진오를 골자로 하는 조율로 신민당을 탄생시켰다. 뒤이은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자신의 고향이자 텃밭인 금산군을 등지고 신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갑 지역구에 출마하였고, 본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윤조영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 40대 기수들과 진산. 좌측부터 DJ 유진산 고흥문 이철승 YS |
1970년 1월, 3선 개헌으로 충격을 받은 유진오의 뇌졸중으로 공석이 된 신민당의 대표 자리에 이재형, 정일형을 누르고 2차 투표 끝에 유진산이 당선됐다. 노회하고 타협적인 유진산을, 박정희와 중정은 앞으로 있을 7대 대선의 야권후보로 선출되도록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제 1야당 대표 신분으론 드물게 동남아 순방을 시켜주고, 직후에는 박정희-유진산 영수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힌다던가? 중정이 유진산 자택을 서너차례 들렸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김영삼을 시작으로 혈기왕성한 40대 기수론이 터져나왔다. 진산은 이를 구상유취(口尙乳臭)라고 괄시했지만 사태가 커지자 범 진산계에서도 경선 사퇴 여론이 불거졌고, 결국 후보지명권을 대가로 받고, 경선을 포기했다.[6]
△ 진산 파동에 분노한 당원들 |
1971년 5월 6일, 제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후보자 등록 마감 직전, 진산이 대표 권한으로 자신의 지역구였던 영등포구 갑을 돌연 포기하고 신민당 전국구 1번으로 등록함으로써, 당내외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민주공화당에게 돈을 받았다는 등 모종의 거래를 맺었다는 의혹을 품은 신민당 청년당원 300여명이 진산의 자택에 몰려와 기물 파손과 멱살 잡기 등 큰 소란을 일으켰다. 이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대표직에서 자진사퇴한다. 이러한 혼란은 총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신민당 지원유세에 큰 차질을 주었는데 이걸 2차 진산 파동이라 한다. 이로 인해 비록 유진산은 본 선거에서 당선되었지만, 공화당 1석, 신민당 18석으로 신민당의 서울 전석 석권이 이 영등포갑 한 곳 때문에 좌절됐다. 참고로 이때 당선된 민주공화당 후보가 최초의 고시 3관왕이자 박정희의 처조카사위인 장덕진이라 의혹은 더욱 증폭되고, 2달 후 신민당 중앙상위에선 이 파동을 두고 김대중이 지나치게 사건을 확대한 게 화근이었다는 결론을 발표, 김대중이 유진산을 지나치게 비난한 것에 대해 국민과 당 그리고 당수에게 사과하게 함으로써 사건을 일단락 시켰다.
이것만으론도 부족했는지 이후 치러진 임시 전당대회에서도 독립유공자이자 육군 중장 출신의 김홍일을 진산계가 전적으로 지원해, 전 대선후보이자 반진산계의 선봉이었던 김대중을 2위로 누르고 당선시킨다.
△ 1972년 8월 25일 전당대회 조율을 위해 만난 유진산과 DJ |
1972년에 약속된 전당대회에서 계파간 반목이 일자, 9월 26일 시민회관에서 진산계만으로 전당대회를 강행, 대표로 선출됐다. 이에 어이상실한 김홍일과 김대중은 반진산연합을 구축, 김홍일 자택에서 단독 전당대회를 열고 김홍일을 대표로 선출했다. 이러한 신민당의 분열로 박정희는 10월 17일 어려움없이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이에 제8대 국회의원 자격이 정지되었다.
사후약방문으로 다시 힘을 뭉치기 위해 김홍일이 유진산을 상대로 한 소송을 취하했고, 진산도 1월 22일 대표직을 내려놔 혼란이 잠식되는 듯 했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9대 총선을 준비할 정무회의 인선에서 주류인 진산계가 김홍일 등 반 진산계의 핵심들을 탈락시켰으며, 이는 김홍일, 양일동 등이 1973년 신민당을 탈당하여 민주통일당을 창당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같은 해 2월 27일 치러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충청남도 대덕군·연기군·금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김제원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총선이 끝난 후, 중진 4명이 만나 유진산의 당수 사퇴 반려에 합의, 3월 11일 당수로 복귀한다.
△ 전당대회에서 총재로 뽑힌 후 |
그와 대적할 정적들은 통일당으로 빠졌고 그마저도 선거에서 참패했다. 김대중은 일본으로 외유, 김영삼, 이철승은 부총재,국회부의장 자리를 약속받고 범 진산계로 엮였기 때문에 사실상 라이벌이 없어지자, 강력한 당권을 부여받고 5월 7일 신민당 통합 전당대회에서 만장일치로 총재로 추대됐다. 동년 6월 21일엔 2차 박정희- 유진산 영수회담을 가졌다. 한편으론 동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 사건이 터져 늦게나마 정부인책을 주장했다.
<colbgcolor=#315288> 대한뉴스에 방영된 장례식 모습 |
1974년 신년에 대여투쟁을 강화하겠다고 밝혔지만, 1월부터 암으로 병원신세를 졌고, 아픈 몸으로 3월 다시 당직에 복귀했으나 머지않아 건강 악화로 재입원 후, 결국 제대로 당권을 장악한 지 1년도 채 안된 1974년 4월 28일 결장암(結腸癌)으로 한양대병원에서 사망했다. 같은 해 5월 2일 신민당장으로 장례가 치러졌고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68살 유진산의 급서로 신민당에서 '친'여당 기질의 중도통합론은 크게 흔들렸고, 이후 조기 실시된 전당대회에서 '반'여당 기질의 선명야당론을 들고 나온 46세의 김영삼이 총재로 당선됐다. 세대와 성향의 교체를 보인 신민당 전당대회는 앞으로 야당이 격변할 것을 시사한 것과 다름 없었고, 이로써 박정희 정권은 큰 위협을 받게 됐다.
사후 그를 따랐던 진산계들은 견지동우회라는 계보를 신설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1985년에 양김의 도움을 받은 신한민주당의 총재 이민우와 1981년 5공화국의 관제야당(2중대)이었던 민주한국당의 총재 유치송이 있다[7]. 그러나 이민우와 유치송 역시 보스의 노선을 따라 중도통합론의 기질이 강했고, 결국 YS, DJ의 선명야당론에 밀려 13대 총선 이후 사실상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48 | 제헌 국회의원 선거 | 서울 마포[8]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0,497 (18.81%) | 낙선 (2위) | |
1950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 전북 금산[9] | 7,236 (21.43%) | |||
1954 | 제3대 국회의원 선거 | 15,596 (44.38%) | 당선 (1위) | 초선 | ||
1958 | 제4대 국회의원 선거 | 전북 금산[10] | | 23,026 (59.04%) | 재선 | |
1960 | 제5대 국회의원 선거 | 25,939 (66.07%) | 3선[11] | |||
1963 | 제6대 국회의원 선거 | 전국구 | [[민정당|]] | 1,870,976 (20.12%) | 당선 (3번) | 4선 |
1967 | 제7대 국회의원 선거 | 서울 영등포구 갑[12] | [[신민당(1967년)|]] | 66,227 (54.91%) | 당선 (1위) | 5선 |
1971 | 제8대 국회의원 선거 | 전국구 | 4,969,050 (44.38%) | 당선 (1번) | 6선[13] | |
1973 | 제9대 국회의원 선거 | 충남 대덕·연기·금산[14] | 54,670 (43.42%) | 당선 (1위) | 7선[15] |
역대 선거 벽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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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대 총선 (충남 3) | }}}}}}}}} |
4.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쌍엽농민회 | 1932 | 정계 입문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32 - 1945 | 탈당 |
[[백의사| 백의사 ]] | 1945 | 창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45 | 탈당 |
[[대한민주청년동맹| 대한민주청년동맹 ]] | 1945 - 1947 | 창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47 - 1948 | 정당 해산 |
[[백의사| 백의사 ]] | 1948 | 복당 |
| 1948 - 1949 | 합당[16]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49 - 1955 | 탈당 |
| 1955 - 1960 | 창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60 |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
[[신민당(1960년)|]] | 1960 - 1961 | 창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61 - 1963 | 5·16 군사정변로 인한 정당 해산 |
[[민정당|]] | 1963 - 1964 | 창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64 - 1965 | 제명 |
[[민중당(1965년)|]] | 1965 - 1967 | 입당 |
[[신민당(1967년)|]] | 1967 - 1969 | 합당[17]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69 | 자진 정당 해산 |
[[신민당(1967년)|]] | 1969 - 1974 | 정당 재등록 사망 |
5. 기타
- 민주공화당과 타협을 잘 했는데 이로 인하여 '사쿠라'라는 부정적인 별명으로 유명했다. 오죽하면 같은 당 내도 아니고 공화당의 이효상에게 "신민당 총재는 우리 사쿠라니까 따로 안 만나도 됨"이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였다. 급기야 10월 유신 선포 당시에는 야당 국회의원들의 자택에 감시 목적으로 경비 병력을 보냈는데 유진산의 집에는 아무도 오지 않자 유진산은 공화당에 전화를 걸어 "우리 집은 왜 경비가 없소? '나는 진짜 사쿠라요'라고 광고하는 게요?"라고 하소연하자 그제서야 병력이 파견될 정도였다.
- 야당의 최고 실력자로 오랫동안 군림했지만 사적으로는 매우 청빈했다.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독립운동과 정치 활동에 다 쏟아 붓고 죽을 때 집 1채만을 남겼는데 그마저도 은행에 저당잡혔다.
- 실제 성씨는 류 씨지만 두음법칙에 의거하여 유씨로 등록되어 있다. 사실 유진산이 정치인으로서 활동하던 50~70년대에는 한글 표기법(특히 인명 표기법)이 제대로 정해지지 않던 시기라 시기에 따라 류진산으로 적혀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6. 대중매체에서
- 1981년 MBC 드라마 <제1공화국>, 1989년 MBC 드라마 <제2공화국>, 1993년 MBC 드라마 <제3공화국>, 1998년 SBS 드라마 <삼김시대>에서는 배우 심양홍이 연기했다.
- 2004년 MBC 드라마 <영웅시대>에서는 배우 진봉진[18]이 연기했다. 짧은 출연이었지만 사카린 밀수 사건 이후 군부 정권에 비료 공장과 경영권 등 모든 것을 빼앗긴 이병철[19]이 분노해서 정치를 해야겠다고 할 때 은밀히 만나서 "기업과 정치는 다르다. 차라리 정치하는 사람들을 후원하면서 힘을 기르라"는 조언을 하면서 "경제가 9단이면 정치는 10단이다."라며 만류시킨다. 호의적으로 나오는 이미지라 작가 이환경이 유진산이라는 정치인을 좋게 보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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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동 갑 조한백 자격 상실 (1971.1.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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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욱 | 권오병 | ~~~~ | | 이동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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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탁 | 권일 | 김성두 | 신광순 | |||||
박태원 | 박철 | 전정구 | 장덕진 | |||||
이도선 | 김현숙 | 편정희 | 김옥자 | |||||
노진환 | ||||||||
신민당 24석 | ||||||||
유진산 | 김대중 | 홍익표 | 김홍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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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제9대 국회의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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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박병배 | 김종철 | 김제원 | 박찬 이병주 | |
부여·서천·보령 | 홍성·청양·예산 | 서산·당진 | ||
김종익 | 장영순 한건수 | 한영수 유제연 | ||
* 대덕·연기·금산 유진산 사망 (1974.4.28.) * 부여·서천·보령 김옥선 사퇴 (1975.10.13.) * 천안·아산·천원 황명수 사퇴 (1978.11.1.) | ||||
◀ 제8대 제10대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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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향인 진산 고을의 별호에서 따왔다.[2] 1914년 진산군이 금산군에 통합됐으며, 1962년까지는 금산군이 전라북도에 있었는데 1963년 5.16 군사정변에 가담한 실력자 길재호에 의해 충청남도에 편입되었다. 그의 집안은 금산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만석꾼집안이었는데 쌀 10,000석을 추수하기 위해 200만평의 농지가 필요했던걸 고려하면 그는 오늘날로 따지면 중견재벌의 자제였던 셈이다.[3] 이 시기의 청년운동은 백의사를 포함한 정치깡패 활동을 의미한다. 이 당시에는 좌우익 모두가 청년단체로 대표되는 정치깡패 집단을 동원해 서로에 대한 테러와 공격, 요인 암살 등을 일삼던 시기였다.[4] 윤보선 계로, 이 당시에 유진산을 왕사쿠라라고 비난했다.[5] 여성 최초 당수이자 여성 최초로 5선을 경신했다.[6] 같은 구파인 김영삼을 후보로 지명했지만, 이철승의 김대중 지지 등으로 최종 경선에선 김대중이 대선 후보으로 낙점됐다.[7] 이외에도 황명수, 박찬 등이 해당했다.[8] 제8선거구[9] 제7선거구[10] 제8선거구[11] 61.5.16: 5.16 군사정변으로 자격정지[12] 제13지역구. 영등포구 상도동, 본동, 흑석동, 노량진동, 봉천동, 사당동, 잠원동, 서초동, 양재동 일원[13] 72.10.17: 10월 유신으로 자격 정지[14] 제3선거구[15] 74.4.28: 임기 중 사망[16] 대동청년단, 서북청년회와 신설 합당[17] 신한당과 신설 합당[18]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신익희 역.[19] 작중 이름 국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