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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철 文永哲 | |
본명 | 문영철 or 문운경[1] |
출생 | 1915년[2] |
사망 | 1950년 9월 (?)[3] |
경상북도 영천군 (?)[4] | |
신체 | 188cm | 81kg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권투선수, 조직폭력배 |
가족 | 배우자, 아들 문수영 |
종교 | 개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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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5]일제강점기 시기의 인물로 김두한의 친구, 동료로 알려졌다.[6] 다만, '전우치전설' 이라는 블로거에 따르면 문영철의 본명은 문영철이 아니라 문운경이라는 이름이며[7],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국내와 상해 등지에서 권투선수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또한 장호근의 무풍지대에선 문용철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김두한의 직속 부하는 아니었고, 해방 후에 김두한과 같이 우익활동을 하며, 부인을 따라 기독교에도 귀의했다고 한다.
다만 김두한의 증언한 이야기는 다른데, 김두한은 자서전이나 노변야화에서 문영철과 김무옥을 자기 왼팔과 오른팔이라고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다. 김두한이 박씨 여인을 깡패로부터 구해 준 사건 이야기를 하면서 그 이후에 데이트를 할 때 박씨 여인이 여동생을 데리고 나오자, 김두한 측에서는 문영철을 데리고 가서 박씨 여인의 여동생을 상대하게 해 줬었다는 이야기도 했고, 일본인 야쿠자 패거리[8]를 상대로 한 유명한 장충공원 혈투에서도 자기 포함 "세명이 갔다" 혹은 "여섯명이 갔다"하고 말은 다르지만 문영철과 김무옥은 꼭 같이 끼어 있었다.
이로 봤을 때, 문영철이 진짜 김두한의 심복이었을 가능성도 있고, 혹은 저 위의 블로그에서 말한 얘기가 맞다면, 과장이나 자기 과시가 심한 김두한의 특성상 '당대에 유명한 문영철도 내 아래 있었다.' 란 말로 자기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썼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김두한과 우미관 패들이 죄다 학도병 이끌고 낙동강 전투에 참전했다가 문영철과 김무옥이 죽었다고 하는데, 그 역시 확인된 바는 전혀 없다.[9]
아들 한 명을 두었는데, 그의 아들 문수영은 목사로 있다고 한다. 그는 색소폰 연주를 하며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금도 노숙인들에게 빵과 우유를 나눠주며, 어려운 이웃을 보듬는 사랑의 목자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청와대선교tv, 대한민국선교tv, 경무대선교tv, 애국제일Tv, UN선교tv에 담임으로 있다.
2. 대중매체에서
2.1. 드라마 야인시대
자세한 내용은 문영철(야인시대) 문서 참고하십시오.[1] 두 이름중 하나는 닉네임이거나 혹은 아명 등 개명이전 이름으로 보인다.[2] 7월 25일생이라는 설이 있다.[3] 김두한의 증언으로는 김무옥과 함께 낙동강 전투에서 사망했다고 했지만 김무옥이 천수를 누렸고 김두한 정계입문인 1954년까지 살았다는 딸의 증언이 있는 것을 보면 문영철도 전사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4] 낙동강 전사설이 사실일 경우.[5] 밑에 파란색 동그라미로 표시된 인물이 문영철.[6] 그러나 김두한 부하 명단에 문영철이 없었다.[7] 매일신보나 동아일보 등을 검색해 보면 1930년대 후반에 활약했던 권투선수 중 문운경이라는 이름이 나오기는 한다.[8] 하야시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김두한의 자서전과 노변야화에서 야쿠자 두목의 이름과 신상이 서로 다르게 나오기 때문이다.[9] 한편 김무옥의 경우는 본인의 딸이 직접 아버지가 천수를 누렸다고 증언해서, 김두한이 정계에 입문할 당시까지는 살아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