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제8대 국회의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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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돈 | 정일형 | 김원만 | 양일동 | 홍영기 | |
성동 병 | 성북 을 | ||||
정운갑 | 송원영 | 유옥우 | 조윤형 | 서범석 | |
성북 병 | 마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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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폐지된 국회선거구 {{{#!wiki style="margin: -5px -10px; display: inline-table" | <tablebordercolor=#580009><tablebgcolor=#580009> | 종로구 종로구 일원 鐘路區 Jongno | }}} | |||
<colbgcolor=#580009><colcolor=#fff> 선거인 수 | 130,096명 (1971) | |||||
상위 행정구역 | 서울특별시 | |||||
관할 구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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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설년도 | 1963년 | |||||
이전 선거구 | 종로구 갑, 종로구 을[1] | |||||
폐지년도 | 1973년 | |||||
이후 선거구 | 종로구·중구(1973년) 종로구(1988년) | |||||
국회의원 | [[신민당(1967년)|]] | 권중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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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종로구의 민의원 선거구 시절의 내용을 담은 것으로 현재 선거구는 종로구(선거구)이다.2. 지역 특성
제헌국회부터 제8대 총선 때까지는 민주당 계열이 유리했다. 당시 종로구 일대가 4.19 혁명의 영향과 이승만,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로 윤보선, 장면, 박순천, 권중돈, 유진오, 김두한, 이윤영 등의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그러나 중선거구제가 실시된 이후에는 중구와 합쳐져 제9대 총선에서 장기영과 정일형, 오제도와 정일형의 아들 정대철 등이 각각 승리했지만, 민주공화당이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물론 당시는 군사정권의 관권선거가 판을 치던 시기라 지금과 직접 비교하기는 애매하지만 그래도 제10대 총선에서는 정대철이 1위를 거두는데, 이는 유신 체제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이후 11대, 12대 총선에서는 이종찬이 1위를 거두며 종로구는 한동안 보수 텃밭이 된다. 민주화가 되고 소선거구제가 실시된 13대 총선, 14대 총선에서도 이종찬이 승리를 거두는데, 이는 종로구에 소재한 정부청사와 청와대 등의 영향으로 보인다.
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특별시 제1선거구 종로구 일원[종로] | |||
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정당 | 득표율 | 비고 | |
1 | 최주열(崔柱烈) | 1,078 | 5위 |
[include(틀:자유당(1963년))] | 1.49% | 낙선 | |
3 | 박수형(朴秀衡) | 1,404 | 4위 |
[include(틀:자유민주당(1963년))] | 1.95% | 낙선 | |
4 | 원일(元一) | 878 | 6위 |
| 1.22% | 낙선 | |
7 | 박노일(朴魯一) | 766 | 7위 |
| 1.06% | 낙선 | |
8 | 신상초(申相楚) | 16,264 | 2위 |
[include(틀:민주당(1963년))] | 22.60% | 낙선 | |
9 | 전진한(錢鎭漢) | 36,123 | 1위 |
[include(틀:민정당)] | 50.20% | 당선 | |
11 | 이세열(李世悅) | 443 | 8위 |
[include(틀:추풍회)] | 0.61% | 낙선 | |
12 | 여운홍(呂運弘) | 14,998 | 3위 |
[include(틀:민주공화당)] | 20.84% | 낙선 | |
계 | 선거인 수 | 137,880 | 투표율 64.58% |
투표 수 | 77,012 | ||
무효표 수 | 5,058 |
제헌 총선 때부터 두 개의 선거구로 나누어진 종로구 선거구가 하나로 합쳐진 뒤 치러진 선거이다. 이승만 정부 시절 초대 사회부 장관을 지낸 민정당의 전진한 후보가 당선되었다.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직후 민족지도자 중 한 명으로 꼽힌 여운형의 동생인 여운홍 후보[3]를 공천했으나, 서울의 야당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참패했다.
4.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특별시 제1선거구 종로구 일원[종로] | |||
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정당 | 득표율 | 비고 | |
2 | 신정수(申正秀) | 556 | 4위 |
[include(틀:자유당(1963년))] | 0.69% | 낙선 | |
3 | 이동희(李東熙) | 413 | 5위 |
[include(틀:민중당(1967년))] | 0.51% | 낙선 | |
| | - | 사퇴 |
[include(틀:대중당)] | - | ||
6 | 유진오(兪鎭午) | 55,703 | 1위 |
[include(틀:신민당(1967년))] | 69.58% | 당선 | |
7 | 김성진(金晟鎭) | 20,922 | 2위 |
[include(틀:민주공화당)] | 26.17% | 낙선 | |
8 | 전진한(錢鎭漢) | 2,347 | 3위 |
[include(틀:한국독립당(1963년))] | 2.93% | 낙선 | |
계 | 선거인 수 | 147,059 | 투표율 73.98% |
투표 수 | 83,138 | ||
무효표 수 | 3,197 |
선거 벽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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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특별시 제1선거구 종로구 일원[종로] | |||
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정당 | 득표율 | 비고 | |
1 | 장기영(張基榮) | 36,404 | 2위 |
[[민주공화당|]] | 43.47% | 낙선 | |
2 | 권중돈(權仲敦) | 46,768 | 1위 |
[[신민당(1967년)|]] | 55.84% | 당선 | |
5 | 권주열(權柱烈) | 279 | 4위 |
[include(틀:민중당(1967년))] | 0.33% | 낙선 | |
6 | 신정수(申正秀) | 294 | 3위 |
[include(틀:통일사회당)] | 0.35% | 낙선 | |
계 | 선거인 수 | 130,096 | 투표율 78.34% |
투표 수 | 85,571 | ||
무효표 수 | 1,826 |
선거 벽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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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1번지 종로구답게, 공화당은 거물인 장기영 한국일보 회장 및 전 경제기획원 장관을 공천했다. 마침 한국일보 사옥도 종로구에 있었다. 하지만 야권 초강세 지역인 서울시의 민심을 극복하기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신민당 권중돈 전 의원이 승리했다.
[1] 1948~1963.[종로] 종로4가동, 가회동, 누상누하동, 신문로동, 옥인동, 평창동, 삼청동, 세종로(세종로, 내수동, 도염동, 당주동), 이화동, 효자동, 안국동, 낙원동, 종로3가동, 권농동, 백록동, 혜화동, 명륜2,4가동[3] 여운홍 후보도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나,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에는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 친일 강연을 하는 바람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종로] 종로4가동, 가회동, 누상누하동, 신문로동, 옥인동, 평창동, 삼청동, 세종로(세종로, 내수동, 도염동, 당주동), 이화동, 효자동, 안국동, 낙원동, 종로3가동, 권농동, 백록동, 혜화동, 명륜2,4가동[종로] 종로4가동, 가회동, 누상누하동, 신문로동, 옥인동, 평창동, 삼청동, 세종로(세종로, 내수동, 도염동, 당주동), 이화동, 효자동, 안국동, 낙원동, 종로3가동, 권농동, 백록동, 혜화동, 명륜2,4가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