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 쿠니모토 사이보(國本宰模)[2] |
자 | 국현(國炫) |
호 | 능해(凌海)·소우(小宇) |
본관 | 고령 신씨[3]# |
출생 | 1885년 4월 26일 |
경상도 인동도호부 북삼면 율동 (현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읍 율리) | |
사망 | 1958년 6월 16일[4] (향년 73세) |
묘소 | 국립신암선열공원 제4묘역-36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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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신재모는 1885년 4월 26일 경상도 인동도호부 북삼면 율동(현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읍 율리)에서 아버지 신영록(申永祿, 1850 ~ 1908. 8. 9)과 어머니 인동 장씨(? ~ 1935. 2. 14)[5] 사이의 1남 1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경상북도 대구부로 이주하여 삼립정(현 중구 삼덕동), 달성정(현 중구 달성동) 등에 거주했다.그는 대구노동공제회 농민부 위원과 대구노동친목회 상무서기로 있으면서 1925년 9월 29일 대구부 신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에 있는 자신의 첩 이금이(李今伊)의 집에서 서동성·방한상(方漢相)·정명준(鄭命俊)·서학이·우해룡·하종진 등 7명과 함께 대구에서 무정부주의 단체인 진우연맹(眞友聯盟)을 조직하기로 하고 다음날인 30일 서성정(현 중구 서성로)의 대구노동회관 내에서 정식으로 진우연맹을 창립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대구노동친목회는 당시 회원이 1100여명에 달했는데, 진우연맹은 이를 세력권 하에 두고, 일본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색청년연맹(黑色靑年聯盟)과 반역아연맹(反逆亞聯盟)등과 연락하여 연계투쟁의 길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특히, 신재모는 진우연맹에서 방한상과 함께 이러한 대외교섭을 주도하였고 투옥된 박열에게 의연금을 송부하기도 하였다.
또한 1926년 4월 12~13일경 진우연맹원들은 신재모의 집에서 모임을 가지고, 항일운동의 구체적 방법으로서 향후 2년 내에 대구부 내의 도청·경찰서·우편국·법원을 비롯하여 관서·일본점포를 파괴하는 한편, 지사·경찰부장·관청 수뇌부를 암살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를 위하여 연맹 산하에 파괴단(破壞團)을 조직하고 중국 상하이에 있던 무정부주의자 유림을 통하여 폭탄을 입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을 추진하던 중 연맹원 안달득(安達得)이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그의 집이 가택수색을 당한 결과 진우연맹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926년 7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1927년 3월 7일 대구지검의 예심에서 대구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그해 7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형(미결 구류 100일 산입)을 선고받았다. 이에 곧 항소하였으나 1928년 5월 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심 판결이 적용되어[6] 옥고를 치렀다. 이때 1심 판결 이후 항소하여 2심을 받기 전까지 세 차례에 걸쳐 구류갱신이 이뤄졌다.1927.8.201927.11.211928.2.22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1958년 6월 16일 별세하였다.
사후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또한 그의 유해는 국립신암선열공원 제4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