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林
(1894년 5월 23일 ~ 1961년 4월 1일)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본관은 전주이다. 초명은 유화종(柳花宗), 또는 유화영(柳華永)이다. 호는 단주(旦洲)이다.2. 생애
3. 초년기
유림은 1894년 5월 23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임북면 계곡리(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계곡리)에서 부친 유이흠(柳頤欽)[4]과 모친 의성 김씨 김진과(金鎭科)의 딸 사이의 네 아들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5] 유림의 친가와 외가는 안동의 전통적인 양반 가문이자 지주로, 그는 5살 때부터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공부했으며 9살 때 사서삼경을 익혔다. 뒤이어 서당에서 수학한 뒤 경북 최초의 신식 중등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에 재학했다. 또한 13살 때인 1906년에 고성 이씨 이종복(李鍾復)의 딸과 혼인했다.유림은 협동학교에서 국어, 역사, 대수, 생물, 화학, 창가, 체조, 세계지리 등 17개 과목을 익혔다. 아울러 신민회 계열 인사인 이관직(李觀稙), 김기수(金基洙), 안상덕 등이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웠기 때문에, 그는 자연히 민족의식을 몸에 익힐 수 있었다. 그는 양반 가문에서 유학의 배경을 갖고 있었지만 협동학교를 수학하면서 현실문제에 대한 자각과 근대적 애국계몽 및 구국항쟁의 의지를 갖출 수 있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1910년 협동학교 수학 중 한일병합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군애국(忠君愛國)' 네 글자를 손가락에 베어 새기며 나라를 되찾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6]
그러던 1910년 7월 18일, 안동, 예천 영주 지역의 의병 15명이 협동학교에 난입하여 교감 김기수, 교사 안상덕, 서기 이종화(李鐘華) 등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애국계몽운동과 의병 운동이 충돌한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협동학교 관계자들과 학생들의 수학 의지는 꺾이지 않아 1911년 3월 30일 1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러나 1919년 3.1 운동에 협동학교 교사 및 학생들이 가담한 이후 일제의 압력으로 문을 닫아야 했다. 유림이 협동학교를 졸업한 시기가 언제인지는 기록이 미비해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대략 1911년 3월 30일 1회로 졸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4. 해외 망명
유림은 협동학교를 졸업한 뒤 1915년 대구에서 정진탁(鄭振鐸) 등과 함께 각지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부흥회(復興會)를 조직하고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다 대구경찰서에 구금되었다. 또한 1917년에는 김용하(金容河) 등과 함께 자강회(自强會)를 조직하여 여러 지역에서 항일운동에 참여할 청년들을 모집하다 다시 대구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을 통해 뜻을 함께하는 동지를 모은 그는 1918년 대규모의 암살, 파괴를 도모했다. 구체적인 암살 파괴 계획의 전모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925년 상하이에서 민중사를 조직하고 국내에 폭탄을 반입하려던 것과 유사한 것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919년 3.1 운동 발발했을 때, 유림은 독립선언 선포에 협력했고 협동학교 출신인 이운형(李運衡) 등과 함께 안동에서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이후 만주로 가서 이상룡, 김동삼 등과 협의해 독립군 양성 문제를 논의한 뒤 군정서 특파원의 자격으로 2차례에 걸쳐 국내에 잠입했다가 봉천에서 일제 경찰에 구금되었다고 한다. 한편 동아일보 1929년 11월 22일자 기사에 따르면, 유화영(유림)이 대정 8년(1919년) '제령 위반' 죄로 도주하여 중국으로 도주했다고 한다. 이는 유림이 3.1 운동에 관여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다. 또한 유원식의 <나의 아버지 유림>에 따르면, 유림은 3.1 운동 직후 가족을 이끌고 봉천성 요중현에 정착했다가 한꺼번에 땅을 전부 매각 처분하여 막대한 독립자금을 만든 후 어느 날 홀로 머나먼 길을 훌쩍 떠나버렸다고 한다. 이를 종합해 보면 유림은 3.1 운동에 참여한 후 만주 요녕성 유하현 삼원보에 위치한 서로군정서에 가서 비밀특파원의 임무를 띄고 2차례 국내에 입국한 후 가족들을 이끌고 만주의 봉천성 요중현으로 가서 정착했다가 봉천에서 구금된 것으로 보인다.
봉천에서 구금된 유림은 곧 풀려났고, 1920년 말에 베이징에 가서 신채호, 남형우 등과 함게 독립운동가들의 결집과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중국인들에게 알리고자 노력했으며, 신채호, 김창숙, 김정묵(金正墨), 남형우 등이 순한문 잡지 <천고(天鼓)>를 발간하는 데 관여했다. 천고는 한국의 독립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을 고양하기 위해 한, 중 양국의 지식인들을 겨냥한 월간지였으며, 1921년 1월 천고출판사 명의로 베이징에서 제1호가 발간된 이래 제7권까지 발간되었다. 이후 1921년 상하이로 간 유림은 김규식, 여운형이 활약하고 있던 신한청년당에 가입했다. 1920~1921년 당시 중국의 사상적 지형은 이석증(李石曾) 등의 아나키즘. 주작인(周作人) 등의 인도주의, 리다자오, 천두슈 등의 마르크스주의, 후스 등의 실천학파 등 다양한 사상이 제각기 새로운 세상의 건설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내놓고 있었다. 그는 상하이에서 이렇듯 다양한 부류의 혁명가들과 교류하면서 혁명이론을 연마했다.
1922년 봄, 유림은 김두봉이 상하이에서 깁더조선말본을 발간할 때 관여했다. 깁더조선말본은 1916년 김두봉이 펴냈던 조선말본을 수정, 보완한 것으로, 한글 활자가 없어서 자음과 모음을 새로 만들고 활자를 주조하는 등 많은 노력을 한 끝에 발간되었다. 하지만 집필한 내용에 대한 반대 견해가 제기되었고 판매도 부진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평판이 좋았고, 김도붕은 1930년 동아일보로부터 한글 연구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공로자 표창을 받았다.
5. 아나키즘을 체택하다
유림은 1922년 9월 성도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가 성도에 간 시기는 이보다 전인 1921년 중반이었다. 중국의 아나키스트 문학가 파금(巴金)이 후에 회고한 바에 따르면, 1921년 중반 성도에서 <반월보(半月報)>에 3편의 글을 발표했고 그 중 하나는 에스페란토를 소개한 것인데, 얼마 후 그 잡지를 들고 고씨 성의 조선인이 찾아왔다고 한다. 그 조선인은 에스페란토어를 배운 사람이었고, 어떻게 하면 에스페란토를 보급시킬 수 있을 지를 상의하러 왔다고 한다. 파금은 그에게 에스페란토를 배웠지만 몇 번으로 끝나버리고 결국 보급 활동은 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유림이 중국에서 고상진(高尙眞), 고자성(高自性), 고삼현(高三賢) 등의 가명을 사용한 사실로 볼 때 이 '고씨 성의 조선인'은 유림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세간에서는 유림이 1922년경부터 유교를 버리고 아나키스트로 전향했다고 보지만, 여러 기록을 봤을 때 그가 아나키즘을 받아들인 시기는 이보다 훨씬 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상당수의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 운동의 일환으로 에스페란토 보급을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에스페란토를 보급함으로서 자신들의 사상이 널리 전파되기를 강력히 희망했다. 유림이 저명한 중국의 아나키스트 문학가를 찾아가 에스페란토 보급에 관심과 열정을 보인 걸 감안할 때 유림은 1921년 중반 무렵에 이미 아나키즘을 깊이 수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유림이 기존에 활동하던 상하이에서 멀리 떨어진 사천성 성도의 성도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한 것은 그가 아나키즘을 채택하고 이를 숙련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천성은 아나키즘이 유독 활발했고 프랑스 유학이 중국 내에서 가능한 가장 큰 창구였다.[7] 또한 성도고등사범학교는 국립사범학교로 사천성 정부로부터 학비를 지원받기 때문에 학비의 걱정을 덜 수 있었다. 그리고 1916년부터 조선인에게 문호가 개방되어서 조선인이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좋은 장소이기도 했다. 유림은 이곳에서 아나키즘 사상을 공부하는 한편 불어를 공부하며 프랑스로 유학가기를 희망했다.
유림은 성도고등사범학교 예과 영어부서 학업을 수행했다. 그가 언제 졸업했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유림 본인이 직접 기술한 기록[8]에는 '단기 4258년(서기 1925년) 졸업'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9월에 입학하고 8월에 졸업하는 중국의 학제로 미뤄볼 때, 그는 1925년 8월경에 졸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졸업 후 준비하던 프랑스 유학을 그만두고 국민정부 교무원의 자격으로 남중국 교육 시찰을 했으며, 광둥으로 가서 김원봉 등과 함께 한인청년연맹을 조직하고 독립운동 간부 및 인재 양성에 주력했다.
1925년에는 상하이에서 민중사를 창설하여 독립정신과 자유사상을 계몽, 선전하며 활동하다 대구에서 방한상, 신재모 등이 진우연맹을 결성하자 이를 격려하는 편지를 보내고 국내로 폭탄을 반입하기 위해 비밀 공작을 추진했다. 진우연맹은 1925년 9월 아나키스트들이 대구에 모여 아나키즘을 연구할 목적으로 조직된 비밀결사였다. 일제 경찰은 1926년 7월 진우연맹 요인들을 체포한 뒤 이들이 아나키즘 이상사회 건설을 위해 군자금 모집 및 파괴 음모, 요인 암살을 위해 파괴단을 조직했으며, 이 목적을 위해 사용할 폭탄은 상하이에 있는 민중사의 '고백성'에게 위촉하여 사오도록 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이 고백성은 유림의 가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유림은 봉천으로 가서 중국 국민당원들과 협의하여 한,중 혁명세력의 합작에 노력했다. 이후 유림은 광둥으로 갔고 광동기계공인총동맹에서 활동했으며, 1925년 6월부터 1926년 10월까지 일어났던 광둥 노동자들의 홍콩과 광저우에서의 대규모 파업에 참가했고, 광동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에도 관여했다. 이후 우한으로 가서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모색했고, 1927년 1월 3일 노동자들이 한커우 영조계 회수 투쟁을 벌일 때 참여했다. 동아일보 1929년 11월 22일자 기사에 따르면, 유림은 생디칼리슴 운동의 맹장으로 활약했고 십만 공인을 지도했다고 한다. 이는 그가 아나키즘의 이론적 모색 및 고양을 위해 생디칼리슴과의 연계를 꾀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는 무정부 내지 강권폐지를 위한 아나키즘의 발전적 모색을 위한 수단으로서 노동조합을 중요시하고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꾀했다.
6. 무장항일단체 참여
유림은 한커우 사건 이후 1927년 초 베이징에 가서 베이징대학총장 차이위안페이, 량치차오 등 중국의 개혁 사상가들과 중국, 한국의 현실에 대한 방략을 논의했다. 또한 광둥, 상하이, 난징, 우한 등지에서 국민당 좌파, 아나키스트 원로 및 천두슈, 천중밍 등 혁명 세력과도 교류했다. 그러던 중 길림성에서 지청천 등과 함께 중국인 유격부대와 합작하여 독립군의 강화에 노력하다가 봉천에서 일본 경찰에 구금되어 며칠간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났다. 11월에는 길림성 화전에서 삼부통합과 유일독립당 문제로 베이징에서 온 조경한(趙擎韓)을 만나 독립운동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1928년에는 길림에서 김응섭(金應燮) 등과 함께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 중앙집행위원으로 피선되었다. 또한 서로군정서 시절부터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김동삼 등과 함께 정의부(正義府)에 참가하여 교육 시무를 담당했으며, 길림에서 여준, 이탁 등과 함께 재만한인교육회를 조직하고 교과서 편찬, 교육양성 사무를 담당했다.길림성 오상현에서는 한인 교민들의 권익을 위해 중국 관헌과 항쟁하다 중국 경찰에 구금되기도 했으며, 1929년에는 김동삼, 김좌진 등과 함께 재만독립운동세력의 규합에 노력했으며, 김좌진이 북만주에서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는 데 관여했다. 그러다가 길림으로 돌아온 후 영안현에서 중국 관헌의 한인 압박에 항쟁하다 또다시 중국 경찰에 구금되었다. 1929년 1월, 그는 길림에서 김종진과 만나 김좌진과의 연대 문제를 협의했고, 난징에서 온 이을규와 합세해 3월 하순에 중동선 해림역으로 향했다. 해림소학교에서 있었던 환영회 이후, 김좌진, 유림, 김종진, 이을규 등은 여러 날에 걸쳐 독립운동 전반에 걸친 문제와 현지 사정에 따른 당면 과제를 토론했다.
이때 공산주의자들과의 사상적 대립 문제에 대하여 유림과 김좌진 사이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유림은 공산주의에 대항하려면 그 사상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무정부주의로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반면, 김좌진은 인간의 행복이 목적이고 우리 민족이 복되게 잘 살자는 것이 염원이므로 우리의 특수한 처지에 알맞은 이론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종진과 이을규가 두 사람의 견해 차를 조정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고, 유림은 얼마 후 길림으로 되돌아갔다. 유림은 김좌진이 아나키즘에 공감하지 않는 이상 그의 활동 근거지를 기반으로 하여 아나키즘과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삼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7. 체포, 그리고 재판
1929년 11월 평양에서 관서흑우회 주최의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가 개최될 예정이라는 소식을 접한 그는 이 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김영진(金永鎭)이란 가명을 사용하며 평양에 왔다. 그러나 평양 경찰서 고등계가 모여드는 아나키스트들을 검거하면서 대회가 열리지 못했고, 유림은 11월 7일에 평양 경찰서 순사들에게 체포된 뒤 자신이 대구인쇄직공이며 26살의 김영진이라고 위장해 석방되었지만 11월 11일 유림의 정체를 알아챈 대동경찰서 순사들에게 다시 체포되었다. 대동경찰서 형사들은 관서흑우회 회관을 수색해 이홍근을 체포하고 중요 서류를 압수한 뒤 유림과 이홍근과의 관련 여부를 알아내고자 했다. 유림은 자신이 아나키스트인 점은 시인했지만 그 외의 관련 사실을 부인했다. 이에 대동경찰서는 11월 20일 오전 10시 유림을 제외한 나머지 인사들을 석방시켰다.1929년 11월 22일, 동아일보는 유림이 체포된 사실을 보도했다. 이후 유림에 대한 기사는 여러 차례에 걸쳐 상세하게 게재되었다. 대동경찰서는 유림의 혐의를 밝히기 위해 29일간 취조했지만 끝내 별다른 증거를 찾아내지 못하자 1930년 2월 9일 새벽 3시 18분 봉천행 열차로 유림과 그의 부인, 아들을 봉청신시가 교립정 5번지 자택으로 추방했다. 그는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나는 듯했지만 여전히 일제 경찰의 감시에 시달렸다. 이에 유림은 자신과 함께 의성숙(義誠塾)을 세우며 함께 활동하던 남상옥(南相沃)을 국내로 보내 노동운동의 활성화를 꾀했다. 남상옥은 원산으로 들어온 뒤 김정희(金鼎熙), 노호범(盧好範) 등과 함께 원산청년회를 부활시키고 원산일반노동조합을 조직했다.
그러던 중 관제(官製)인 함남노동회가 부두하역을 독점하고 여러가지 명목으로 조선인 노동자들을 착취하자, 원산일본노동조합이 이에 대항하여 투쟁했다. 결국 쌍방이 출동하면서 사태가 심각해지자, 경찰이 원산청년회와 원산일반노동조합의 관련자 60여 명을 검거하여 4개월 동안 비밀리에 취조한 뒤 1931년 4월 김정희를 제외한 전원을 석방했다. 이후 경찰은 김정희를 취조하는 과정에서 그가 중심이 되었던 협동단이란 자치조직의 존재를 알아낸 뒤 1929년 11월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 당시에 조직한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의 전모를 밝혀내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검거 선풍이 일어났고, 결국 1931년 7월 간부 13명이 검거되면서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의 조직이 와해되었다. 유림 역시 1931년 10월 초 봉천 자택에서 체포되어 원산경찰서에 압송되었다.
유림을 비롯한 사건 관련자들은 원산검사국 송치 이후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 소속의 원산 와우리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들은 1931년 2월부터 원산법원지청 예심을 받고 2년만에 예심이 종결되었는데, 조서의 기록이 진술 내용과 틀려서 사건 관련자들이 서명을 거부했지만 일방적으로 종결되었다. 이후 1932년 12월 22일 유림, 최갑용, 이홍근, 조중복, 임중학, 김정희, 강창기, 안봉연 등이 치안유지법 위반의 혐의로 원산형무소에서 함흥지방법원으로 호송되었다. 이후 1933년 3월 17일 제1회 공판이 함흥지방법원 형사법정에서 개정되어 비공개로 진행되었고, 1933년 3월 24일에 판결이 내려졌다. 이때 유림은 최갑용, 조중복, 임중학과 함께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사건 관련자들은 복심법원에 항소했고, 1933년 5월 4일부터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이 진행되었지만 그해 5월 11일 원심 유지 판결이 내려졌다. 유림은 다시 상고했지만 7월 6일 판결에서 기각되었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대전교도소로 이감된 뒤 1937년 10월 8일 만기출소했다. 그는 옥고를 치르는 동안 전향 요구와 고문에 시달렸지만 끝까지 거부했다. 그와 함께 수감되었던 권오돈의 증언에 따르면, 한 번은 교회사(敎誨師)가 찾아와서 유림의 외아들 유원식이 폐병이 깊어져 절에서 요양 중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아들의 치료를 위해 가석방을 시켜줄 테니 독립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작성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유림은 다음과 같이 잘라 말했다고 한다.
("자식이 죽더라도 독립전선에서 죽는 것이니 아들 스스로 원하는 바일 것이고, 나는 나가면 반드시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이니 자식을 팔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이에 교회사가 당연히 그럴 것이니 독립운동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곳을 나가는 방편으로 말로만 안한다고 하라고 권했다. 그러자 유림이 대답했다.
("비록 임시방편이라 할 지라도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바른 말을 하고 죽을지언정 거짓말을 하고 나갈 수는 없다.")
8.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림은 출소 후 즉시 만주로 피신했고, 1938년에 변장한 채 남, 북만주를 순회하며 남아있는 독립운동세력의 재편성에 노력했다. 1940년에는 베이징, 천진 등지에 머무르며 중국인들과 한중항일연합군 조직에 노력했으며, 1941년에는 일본이 천진의 각국 조계를 점령하자 천진을 탈출하고 옌안에서 며칠간 머물며 마오쩌둥과 만나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는 이때 농촌 중심의 해방구를 통한 중국 특유의 혁명방법론에 많은 부분 공감을 표했지만, 아나키즘과 마르크시즘의 노선 차이는 분명히 했다고 한다. 이후 1942년에 국민정부 제3전구사령부에 체류하면서 한국독립군의 원조 문제를 토의했고, 그해 10월 충칭에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세했다.1942년 10월 20일, 유림은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에 피선되었고 10월 24일 당선증을 교부받았다. 이때 그는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의 대표 자격이었으며, 유림과 함께 의정원 의원으로 피선된 아나키스트 유자명은 '조선혁명자연맹'을 대표하여 참여했다. 유림은 1943년 2월 16일 외교위원회의 외교연구위원이 되었고, 같은해 4월 10일 조소앙, 신익희, 김성숙, 엄항섭 등 14명과 함께 선전위원이 되었다. 1943년 10월 14일, 유림은 제35차 회의에서 안훈(安勳), 박건웅 등 5명과 함께 '건국강령수개에 관한 안'을 제안했다. 이후 '대한민국 건국강령 수개의원'으로 최동오, 조소앙, 강홍주(姜弘周), 손두환(孫斗煥) 등과 함께 피선되어 활동했다. 건국강령수개위원회는 4차례에 걸쳐 회의를 가졌는데, 유림은 건국강령에 대하여 아무 제약 없이 근본적인 재정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43년 5월 10일, 유림은 '재중국자유한인대회'에 참석해 한국독립당 대표 홍진, 조선민족혁명당 대표 김충원(金忠元), 조선민족해방동맹 대표 김규광(金奎光), 한국애국부인회 대표 김순애, 한국청년회 대표 한지성(韓志成) 등과 함께 주석단으로 추대되었다. 이 대회에서는 전후 한국에 대한 처리 문제에 대해서 한국의 완전 자주독립, 외세 간섭 배격 등의 강연과 토론이 있었으며, '동맹국 영수에게 보내는 전문'을 '한국 각 혁명단체연합 재중국자유한인대회' 명의로 보내고 주석단에 한국독립당,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 한국애국부인회, 한국청년회를 병기했다. 전문의 개요는 "우리 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 "전후 한국의 국제 보호설은 우리 민족의 요구에 위배되며 동맹국의 대일 작전에도 해가 되므로 반대", "동맹국의 승리와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며 반일 대혁명을 적극 수행", "물자 원조와 임시정부의 국제적 합법 지위 인정 요구" 등의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