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엔의 도안 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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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 | |
이름 | 니토베 이나조[1] 新渡戸稲造 (にとべ いなぞう) |
출생 | 1862년 9월 1일 |
에도 막부 이와테현 모리오카시 | |
사망 | 1933년 10월 15일 (향년 71세) |
캐나다 자치령 빅토리아 섬 | |
성별 | 남성 |
직업 | 사상가, 외교관, 교육인 |
가족 | 배우자 메리 엘킨튼 니토베 (1857 ~ 1938) 친자 니토베 토오마스 (요절) 양자 니토베 요시오 |
학력 | 삿포로농학교(현, 홋카이도대학) (학사) 존스 홉킨스 대학교 (명예학사) 할레 대학교 (농경제학 /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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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메이지 시대와 다이쇼 시대에 걸쳐 활동했던 사상가이자 농경제학자, 교육인, 외교관, 정치인이다.당시 그는 일본에서 가장 권위있는 국제주의자였고, 구 5000엔권 지폐의 인물 답게 오늘날까지도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2. 생애
니토베 이나조는 1862년에 이와테현 모리오카시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숙부한테 "도쿄에서 공부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아들여 상경하여, 공관의숙이라는 학교에 입학하게 된다.[2] 그러다가 13살에는 도쿄영어학교[3]에 입학하게 되고, 그 곳에서 사토 쇼스케[4]을 만나 서로 많이 교류하게 됐다고 한다. 그 후, 사토 소스케는 그 당시 일본에서 유일하게 학사학위를 받을 수 있던 고등교육기관인 삿포로농학교(현 홋카이도대학)에 1기생으로 입학하게 되고, 니토베 이나조는 그를 따라 2기생으로서 1877년 9월에 삿포로농학교에 입학하게 된다.삿포로농학교 졸업 후, 홋카이도에서 관료로 잠시 일하다가 1883년에 제국대학[5]에 진학한다. 하지만 당시 삿포로농학교에 비해 제국대학의 수준이 상당히 낮은 것에 실망하게 되어 1년도 안 돼서 자퇴하고, 1884년에 미국으로 자비 유학을 떠난다. 미국에서는 박사학위 취득을 목표로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 입학하여 퀘이커 교도로 개종한다. 이 무렵에 역시 퀘이커 교도로 후일 아내가 될 메리 패터슨 엘킨튼(Mary Patterson Elkinton)과 교제를 시작한다.
미국 유학 중에 그는 모교 삿포로농학교에서 독일에서 농업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조건으로 조교수 자리를 제안받는다. 이 제안을 받아들여 그는 존스 홉킨스 대학교를 자퇴하고 관비 장학금을 받아 1887년에 독일의 할레 대학교[6]로 유학, 1890년에 박사학위를 수여받는다. 독일에서 귀국할 때 미국에 들러 메리 엘킨튼과 결혼식을 올렸고,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서는 명예학사 학위를 수여받는다.
그 후, 삿포로농학교 교수에 취임하고, 몸 상태가 안 좋아져 퇴직하고 부시도를 썼다. 그 후, 대만총독부에서 기술직으로 임명되었다. 퇴직 뒤, 교토제국대학 교수를 거쳐 도쿄제국대학 겸임 제1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였고, 다쿠쇼쿠대학, 도쿄여자경제전문학교, 도쿄식민무역어학교 등 여러 학교의 교장으로 지냈다.
1920년에서 1926년까지는 국제연맹 사무차장으로 있었고, 1933년에 캐나다 빅토리아 섬에서 사망하였다.
3. 경력
국제연맹의 사무차장을 역임하였고, 삿포로농학교, 교토제국대학, 도쿄제국대학, 타쿠쇼쿠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다.와세다대학, UC 버클리, 스탠퍼드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 제네바 대학교,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 미네소타 대학교, 하버퍼드 칼리지, 브라운 대학교, 버지니아 대학교,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객원교수 및 명예교수를 지냈다.
도쿄여자대학의 설립자 겸 초대 학장이며, 삿포로에 엔유야간학교(遠友夜学校)를 설립하였고, 도쿄여자경제전문학교(東京女子経済専門学校) 초대 교장, 제일고등학교(第一高等学校)장, 도쿄식민무역어학교(東京植民貿易語学校)장, 다쿠쇼쿠대학 학감, 쓰다주쿠대학(津田塾大学)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4. 학문과 사상
- 제1고등학교[7]의 교장으로 지내며 항상 학생들의 엘리트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게 했다고 한다. 즉 학문을 배우는 것보다는 실행에 옮기는것을 중시하게 하는 등, 인격형성의 교육에 큰 영향을 끼쳤다.
- 그는 1880년대 중반 존스 홉킨스 대학교 대학원에서 허버트 백스터 애덤스(Herbert Baxter Adams)에게 국제정치학을 배우며 스스로 계몽된 사회라고 자부하던 나라들이 내세우던 "야만인을 문명화해야 한다"는 사명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일본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문명국 대열에 합류하도록 만들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1885년 삿포로에 사는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이를 밝혔다. 그는 "토마스 아놀드(Thomas Anold)가 영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도 '삿포로의 아놀드 박사'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포부를 전했다.
- 그는 일본의 식민정책연구를 통해서 당시 일본인들에게 식민지 정책과 제국에 관한 지식을 가르쳤다. 니토베 이나조가 일본에서 개척한 이 학문분야는, 일본이 시행하고자 하는 국제정책에 대해서 일반 국민들과 공직에 진출하려는 젊은 관료들이 꼭 공부해야 할 분야였다. 그의 연구를 통해서 일본에서 '보호국'이나 '병합'과 같이 일본 제국을 규정한 국제용어들이 학문적으로 설명되고 권위를 지니게 되었다.
- 그는 "유럽권 국가처럼 식민지를 단순히 경제적 자원으로 취급하는 방식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고, "문명국으로서 식민지 주민의 이익을 중시하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믿었다. 즉 학교나 병원 등을 설립하여 식민지를 위해 선진 문물, 문명을 전파하고 근대화를 시키는 것으로 계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식민지 주민의 이익을 중시하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제창했고, 니토베 본인도 대만총독부에서 근무하며 타이완의 통치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으며, 일제의 조선에 대한 무단 통치도 해악을 끼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는 "식민지인들은 열등하므로 개화시켜야 한다"는, 문명 대 야만의 관념을 고수했다는 데에서 당시의 사회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8]
4.1. 부시도(武士道, 무사도)
니토베 이나조는 생전에 <수양(修養)>, <자경록(自警録)>, <요와타리노미치(世渡りの道)> 등 여러 책을 집필했으나,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로서는 <부시도(Bushido: The Soul of Japan)>가 있다.1900년에 집필되었으며, 서양인 친구에게 "서양에서는 종교 교육에 의해 도덕 교육이 이루어지는데, 일본은 어떤 방식으로 도덕 교육이 이루어지냐?"라는 질문에, 고민을 했다고 한다. 그 후, 귀국하여 니토베 이나조는 일본의 전통적인 사무라이의 정신이었던 부시도(武士道, 무사도)가 그에 상당하는 개념이라는 내용의 책을 집필했다.
영어로 집필된 <부시도>는 일본인이 쓴 최초의 전세계 베스트셀러 책이 되었으며, 후에 일본어로도 번역이 되었다. 즉 미국과 유럽에서 먼저 히트를 치고, 쿠로후네 사건 이후 서구에 대한 심각한 컴플렉스에 시달리던 일본의 지배계층이 역수입해서 국민도덕으로 만든 것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이 책을 읽고 큰 감명을 받고 극찬을 하면서 추신구라, 오륜서와 함께 본인의 애독서 목록에 올리고, 30권이나 사서 지인들에게 나누어줬다고 한다.
책 내용으로는, 예를 들어 여러 문화에 있어서의 꽃의 의미의 차이점을 설명하거나 19세기 말의 철학과 과학적 사고를 이용하면서, 일본인은 일본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어떻게 살아 났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섬나라의 자연이 무엇이고, 일본 특유의 사계절의 변화 등에서 영향을 받은 결과, 일본인의 정신적 토양이 무사의 생활 태도와 신조라는 모델 케이스에서 양성 된 과정을 독자에게 전하고 있다.
5. 관련 인물
- 니토베 이나조의 제자
6. 기타
* 1984년부터 2004년까지 5000엔권 지폐의 인물이었다.
- 그는 일본 내에서 매우 드문 퀘이커 교도였다. 그의 아내는 미국인인 메리 앨킨턴(Mary Elkinton, 1857 ~ 1938)이고, 역시 독실한 퀘이커 교도였다. 둘 사이에는 아들 토오마스(達益)가 있었으나 생후 8일 만에 요절했고, 후에 누나 카와노 키사(河野喜佐)의 3남 카와노 요시오(河野孝夫)를 자신의 아들로 입양했다.
- 니토베의 모교인 홋카이도대학에서는 그의 '국제적으로 진출하여 행동하고 배우는 진취적인 자세'를 본받자고 하는 니토베 칼리지, 니토베 스쿨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영어교육, 해외유학 장려, 장학금 수여 정도가 주된 내용이다.
- 그의 이름을 딴 학교법인도 있다. 대학교부터 유치원까지 다 갖추고 있다.
[1] 이름이나 성씨 개명이 드문 당대 일본 주요인물 중중간에, 개명 없이 평생 본명으로 활동한 몇 안 되는 인물이다.[2] 하지만 수업이 너무 따분하여 맨날 땡땡이를 치고 살았다고 한다.[3] 관립도쿄외국어학교(현 도쿄외국어대학)의 영어과가 분리되어 설립된 학교이고, 후에 관립 도쿄카이세이학교 예과(도쿄대학 예비문)에 통합된다. 그러므로 도쿄외국어대학 출신이란 것은 이 연혁을 잘못 이해해서 생긴 오해이다. 물론 곁가지로서 넓게 보면 도쿄외대와 한 뿌리긴 하다.[4] 후에 홋카이도제국대학 초대 총장이 된다.[5] 나중에 도쿄제국대학으로 개칭되고 1949년에 현재의 신제 도쿄대학으로 개편.[6] 현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7] 구 프로이센의 김나지움에 가까운 엘리트 양성 기관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현재의 대학교양과정과 같은 개념으로서, 당시 고등학교 졸업자는 대학에서 예과가 면제되고 바로 본과로 진입했다. 당시 일부 사립대학에서는 예과를 별도로 운영하면서 구제중학교 졸업자를 받아서 가르쳐 본과로 진입시키곤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조선인 유학생들은 (일본에서 구제고등학교를 나오지 않은 이상) 제국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립대학을 다녔다. 당시의 구제중학교는 5년제로서 현재의 중고등학교 통합 과정과 같은 레벨의 학교이다.[8] 사실 당시 기준으로 마르크스주의자 정도를 제외하면 이 사회진화론의 함정에서 벗어난 근대 지식인은 거의 없긴 했다. 한국의 애국계몽운동, 실력양성운동 등도 문명개화의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