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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0 17:29:38

광주학생항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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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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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고등보통학교
(現 광주제일고등학교)
광주농업학교
(現 광주자연과학고등학교)
(現 전남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전라남도공립사범학교
(現 광주교육대학교)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現 전남여자고등학교)


파일:show0102-0013.jpg
일제강점기1924년,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공립중학교의 야구 시합 과정에서 일본인 학생들에게 유리한 편파 판정으로 충돌이 일어나 학생들이 구속 되는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한 항의로 동맹 휴학 당시의 사진. 이 사건은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기 전이었다.

1. 개요2. 배경
2.1. 한국 학생들의 항일 조직 결성2.2. 한국 학생들의 수모와 동맹 휴학
3. 전개
3.1. 통학생들의 마찰과 희롱 사건3.2. 크게 번진 싸움3.3. 전국으로 번진 항일 운동
4. 사건 이후5.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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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광주학생항일운동(, Gwangju Student Independence Movement)은 1929년 11월 3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시작해 이듬해 3월까지 전국에서 벌어진 항일운동이다. 3.1 운동 이후 최대 규모이자 일제강점기 최후의 전국적 항일운동으로 평가 받는다.

2. 배경

2.1. 한국 학생들의 항일 조직 결성

1926년 11월 3일 최규창의 집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왕재일과 장재성은 항일학생 비밀결사 성진회를 조직했는데 같은 학교 재학생 김광용, 정우채, 국순엽, 임주홍, 안종익, 최용호, 김창주 등과 광주농업학교 재학생인 정동수, 정남균, 정종석, 김한필, 문승수, 박인생 등이 참여했다. 성진회는 왕재일과 장재성 등 주요 인물들이 졸업하고 회원 한 명이 형사와 인척 관계인 것으로 드러나[1] 자체 해산을 단행했다.

1929년 6월 유학을 마친 장재성은 성진회를 계승한 독서회 중앙본부를 결성했다. 같은 달 광주농업학교는 무등산에서, 전라남도공립사범학교는 일제 참배의례에 거부해 문을 닫은 수피아여학교 뒷산에서 독서회를 결성하고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도 장재성의 여동생 장매성의 주도로 소녀회를 조직했다.

2.2. 한국 학생들의 수모와 동맹 휴학

1924년 봄 광주고보 한 학생이 양화점 주인 시노하라(篠原)와의 언쟁이 도화선이 되었고, 1924년 6월 한국인들이 다니는 광주고등보통학교와 일본인들이 다니는 광주공립중학교[2]와의 야구 시합이 벌어질 때 일본인 심판인 안토는 대놓고 일본인 학생들에게 유리하게 편파적으로 진행했다. 이에 광주고보 학생들은 심판에게 항의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충돌이 일어나 학생들이 구속 되어 동맹 휴학에 들어갔고, 주모자들은 업무를 방해한 혐의로 구속 되었다가 그해 9월 모두 석방 되었고 학교에서는 주모자 4명 을 퇴학시켰다.

한편 다른 지역의 학교에서도 식민지 교육과 차별대우 등 여러가지 이유로 동맹휴학을 하게 되었다. 1927년 10월에는 휘문고등보통학교의 3학년 100여명이 동맹휴학에 참가했고 1927년 11월 11일에는 경성 제1고등보통학교의 2학년 200여명, 4학년 160여명 등이 동맹휴학을 했으며, 함흥, 대구, 평양, 동래, 진주 등 여러 지역에서 연쇄적으로 동맹휴학 사건이 발생했다.

한 해가 지나 광주고보에서도 1928년 6월 26일에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당시 동맹휴학에 대한 요구 조건으로등을 내걸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이번에도 학생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주모자 27명을 퇴학, 관련자 300여명을 무기정학시키는 것으로 응답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과 일본의 억압으로 한국인 학생의 불만과 민족 사상을 더욱 불태우게 했으며 아래 통학생들의 마찰과 희롱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전국적인 항일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3. 전개

3.1. 통학생들의 마찰과 희롱 사건

당시 광주중학생과 광주고등보통학교의 학생들 중 일부는 광주-목포행 열차를 이용했는데 앞서 말했듯이 사이가 좋지 않았던 두 학교였기 때문에 여러가지 충돌이 발생했다.

1929년 6월 26일 광주중학교의 일본인 학생 곤도가 밖에서 한국인들이 를 잡아먹으려는 것을 보고 야만스럽다고 외쳤다. 평소 곤도는 자신의 아버지가 송정리 경찰서의 경부보라는 것을 믿고 거만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많은 한국인 학생들에게 미운털이 제대로 박혀 있었으며 이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광주고보 학생들이 곤도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하지만 곤도는 태연하게 할 말을 했다는 식으로 나왔고 분노한 한국인 학생들이 곤도를 때렸으나 곤도가 겁을 먹고 먼저 기차에서 내리는 바람에 일이 크게 번지지는 않았다.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호남선 통학열차 안에서 일어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본인 학교인 광주중학교 학생들의 충돌이 본격적인 항일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일본인 학교인 광주중학교 4학년 학생 후쿠다 슈조(福田修三)·스메요시 가쓰오(末吉克己)·다나카(田中) 등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3]박기옥이광춘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했고[4] 이를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가 달려와 항의했는데 후쿠다가 "뭐냐, 조센징 주제에"라며 적반하장으로 화를 냈다. 이 말을 듣고 격분한 박준채가 주먹을 날리면서 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은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중학교 학생들의 패싸움으로 확산되었다.[5] 그러자 나주 역전 파출소에서 일본인 경찰 모리다가 파견되었지만 모리다는 제지하면서도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을 편들고 조선인 학생들에게 따귀를 때리는 등 구타했다. 급히 나선 양측 학교 교사들 중에도 광주고보 교사들은 일단 싸움을 말리려 했으나 광주중학교 교사들은 싸움을 부추기는 지경이었다.[6]

당일 하교열차에서 박준채가 후쿠다에게 사과를 요구하자 후쿠다가 다짜고짜 박준채의 뺨을 치면서 화가난 박준채가 후쿠다와 다시 싸웠고 이에 학생들이 몰려들어 또다시 싸움이 벌어졌는데 승무원이 뜯어말리며 싸움을 말리자 당시 열차에 승차했던 광주일보의 일본인 기자가 신분을 밝히면서 조선 학생들의 일방적 잘못이라며 비난하고 열차에 있던 다른 승객들도[7] 조선 학생들을 비난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박준채와 친구들은 속으로 화를 삭이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3.2. 크게 번진 싸움

같은 해 11월 3일은 음력 10월 3일 개천절, 성진회 창설 3주년, 그리고 메이지 유신을 기념하는 명치절[8]이 겹치는 일요일이었다. 일본 제국학생들에게 등교할 것신사참배를 요구했다.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명치절 기념식에서 기미가요 제창과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10월 30일 사건을 편향되게 보도한 광주일보사[9]에 찾아가 편파 기사에 대한 정정을 요청했으나 신문사에서는 성의 있게 대응하지 않았고 화가 난 학생들은 신문사로 몰려와 윤전기에 모래를 끼얹어 파손시키며 분풀이했다.

그러던 중 광주신사[10]에 참배를 마치고 돌아가던 광주중학 학생 14명과 광주고보 학생 8명과의 패싸움이 또 벌어졌다가 일본 학생들이 한국 학생 최상현을 단도로 찌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몰려가 광주중학교 학생들을 충장로에서 두들겨 팼고 얻어맞은 광주중학교 학생들은 광주동부소방서 방면으로 도망쳤다.

이 일이 알려지자 산발적인 싸움이 아닌 학교간의 전면적인 패싸움이 벌어졌다. 광주중학교 학생 수백 명이 학교 유도교사의 인솔 하에 야구방망이죽창 따위를 들고 광주역으로 가 하교하려는 한국인 학생들을 공격했다.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도 가만있지 않고 몽둥이 등을 급히 들어 곧바로 달려갔고 한국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의 싸움으로 광주시내는 개판이 되었다. 양교 교사들과 경찰, 소방대원까지 동원되어 싸움을 말렸지만[11]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다. 한편 광주중학교의 교사가 광주고보의 교사 와타나베에게 학생들을 데리고 물러갈 것을 제안했고 이에 와타나베는 먼저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 물러나게 하는 것은 우리 학생들을 깔보는 태도니 양쪽이 물러나야 싸움이 끝난다고 응답했다. 광주중학교의 교사들이 이를 인정하며 학생들을 이끌고 물러나자 광주고보의 교사들도 학생들을 데리고 물러났다.

그렇게 싸움은 끝났으나 일요일 정오인데도 학교로 돌아온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일본에 대항하는 항일투쟁을 할 것을 논의했다.[12] 시내 각 학교 학생들도 투쟁에 동참할 뜻을 밝혔다.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농업고등학교, 전라남도공립사범학교 학생들은 괭이자루, 장작개비, 목검 등으로 무장하고 오후 2시부터 행진가를 부르며 시내로 진출했다. 시위대는 '조선독립만세',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 '일제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고 애국가와 응원가를 부르며 우선 광주중학교로 향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소방대, 재향군인을 동원해 광주중학교로 가는 동문다리를 틀어막자 시위대는 충장로로 방향을 틀었다.

전남도청에 이르자 전라남도공립사범학교 학생 100여 명을 비롯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와 수피아여자고등학교 학생들, 학생이 아닌 광주 시민까지 시위대에 합류했다. 3만여 명에 이른 시위대는 도립병원(현 전남대학교병원 위치) 광장에까지 진출했으나 경찰의 저지로 방향을 돌려 광주천변을 행진하다가 해산했다.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와 비상 연락과 부상자 입원 문제를 의논한 뒤 해산했다. 한편 광주시내의 일본인들은 시위대와의 충돌을 피해 가게 문을 닫고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 사태의 결과 일본 경찰에서는 소란을 피웠다는 이유로 한국 학생 75명을 체포했지만 일본 학생들은 10명 정도만 잡아가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11월 9일까지 임시 휴교 처분을 내렸다. 한편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은 이 일이 전국으로 번지지 않도록 학생운동을 철저히 탄압하라고 각지의 학교장들에게 지시했다.

3.3. 전국으로 번진 항일 운동

11월 10일 다시 등교하게 된 광주고보 학생들은 잡혀간 학생들의 자리를 보며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날 밤 학생들은 박석기의 집에 모여 학생들을 석방하게 하기 위한 시위를 하기로 결정하고 전단을 인쇄했다. 전단에는 학생들의 석방, 식민지 교육 폐지, 교내의 경찰관 침입 금지, 언론, 출판, 결사, 집회의 자유 보장 등을 요구하는 내용이 있었으며 11일에 시위를 하기로 했다. 그리고 전단을 학생들에게 돌리며 궐기를 호소하고 약간의 시간을 갖기 위해 광주 장날인 12일로 시위를 연기했다.

대망의 11월 12일 광주고보 학생들이 거리에 전단을 뿌리며 시위를 벌였다. 일전의 동료로 참여했던 광주농업학교에서도 전단을 보자 학교를 뛰쳐나와 시위에 참여했다. 전단은 전라남도공립사범학교와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도 뿌려졌으나 학교에서 철저하게 학생들을 통제하는 바람에 시위에 바로 참여하지는 못했다. 이렇게 독서회의 주도로 학생들과 수많은 광주 시민들이 대규모로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일본 경찰에서는 광주고보학생 300여 명, 광주농업학교 학생 100여 명을 체포하고 시위에 참여한 학생은 전부 무기정학, 학교는 무기 휴교를 시키며 문을 닫게 했으며 이 일을 신문에 싣지 못하게 언론을 탄압했다.

12월 3일 서울의 각 학교의 조선인 학생들에게는 광주 학생들의 시위운동에 대한 전말과 독립운동에의 동참을 호소하는 격문이 모두 뿌려졌다.

일본 경찰의 예비 검속으로 서울 지역의 조직 주동자들이 잡혀갔지만 드디어 12월 9일부터 서울 지역 학교들의 항일시위가 시작되었다. 12월 9일에는 경신학교 학생 300여 명, 보성고보 학생 400여 명, 중앙고보 700여 명, 휘문고보 학생 400여 명, 협성실업학교 학생 150여 명 12월 15일 원산상업학교·진주고보, 12월 16일에는 평양에서 광성고보•평양여고보·숭인학교•평양농업학교 등이 맹휴를 단행하면서 18일까지 3일동안 평양시내 중등하교 12개 가운데 9개 학교가 투쟁에 참가하였다. 17일에는 숭실중학·춘천고보평양고보, 18일에는 함흥농업학교, 19일에는 춘천고보 전교생이 만세시위를 전개한 뒤 맹휴를 단행하였고, 20일에는 동래고보 주동자 차일명 문재순 추학 등 학생들이 광주학생의 무조건 석방과 가해자의 벌을 요구하며 맹휴를 단행하였다.[13] 21일에는 함흥 제이고보,23일에는 함북 경성고보가 시위가 이 시위에 참가했다. 12월 9일 하루에만 시위 학생 1200여 명이 경찰에 체포되었고 이후 12월 13일까지 서울 지역에서만 학생 1만 2천여 명이 시위, 동맹휴학에 참여했고 그중 1400여 명이 체포되었다. 서울 지역에서만 45명이 구속되었고 이 가운데 35명이 최종적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신간회의 도움과 보도 탄압의 해제로 전국의 학생들이 이 일을 알게 되었고 항일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목포상업학교, 정명학교, 나주고등보통학교 등을 시작으로 이듬해인 1930년 3월까지 전국 320여 개교[14]에서 학생 5만 4천여 명이 참여해 1462명이 퇴학, 3천여 명이 퇴학 혹은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신간회에서는 가인 김병로, 긍인 허헌, 애산 이인[15] 등으로 구성된 조사단을 파견했다. 신간회의 도움은 이 사건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4. 사건 이후

5. 매체에서



[1] 노성태. 《광주의 기억을 걷다》. 살림터 p. 279.[2]광주고등학교[3] 당시 일본의 중등교육기관은 구제중학교였다. 중학교가 지금의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통합 과정에 해당했고 구제고등학교구제전문학교대학 예과에 상응하는 고등교육기관이었으므로 구별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때의 중등교육기관은 일본인 학교와 조선인 학교의 이름이 달라서 일본인 학교는 중학교/고등여학교, 조선인 학교는 고등보통학교/여자고등보통학교로 불렸다. 1930년대 후반에 전시 체제로 들어서면서 내선일체를 강조하여 모두 중학교/고등여학교로 통합되었지만 이때는 문화정치 시대였으므로 일본인 남학교는 중학교, 조선인 여학교는 여자고등보통학교로 불렸던 것이다. 그래서 학제 차이를 잘 모르는 교사들이 '중학생 주제에 여고생한테 까불었다' 식으로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하는데 실제로는 중학교 4학년 후쿠다가 여고보 3학년 박기옥, 이광춘보다 학년이 위였다. 일본인 중학생 꼬마들이 멋모르고 깝쳤단 소리는 90년대 최병용 화백의 한국현대사 만화에도 나올 정도로 꽤 유서깊은 드립이다.[4] 그러나 이는 1969년 신동아에서 박준채를 인터뷰했을 때 박준채가 증언한 내용이고 당시 박기옥과 함께 있었던 여학생 2명 중 이광춘의 증언과 당시 나주경찰서 순사 우치다의 기록에는 댕기머리 얘기가 없이 오로지 일본인 남학생이 조선인 여학생 3명 중 한 명을 밀었던 이야기만 있다.[5] 당시 기차 안의 한국인 학생은 30여 명 정도였지만 일본인 학생은 100여 명 남짓 했다.[6] 두 학교의 교사들은 모두 일본인이었다.[7] 모두 일본인뿐이었다.[8] 일본에서는 1947년에 문화의 날로 개칭되었다.[9] 현대의 광주-전남 지역의 지역신문인 광주일보와는 별개의 신문사다. 현대의 광주일보는 1952년에 창간한 전남일보가 시초고 광주일보라는 이름도 1980년부터 썼다.[10]광주공원에 위치. 1926년에 신사의 대문인 토리이(鳥居)가 세워졌다.[11] 소방대원들은 한국 학생들에게 물을 뿌리기까지 했다.[12] 이때 학생들이 다칠 것을 우려해 와타나베 교사가 말렸으나 결국 광주고보 학생들의 행진을 막을 수는 없었다.[13] 당시 동래경찰서 경부보를 지낸 친일반민족행위자 노덕술이 학생들을 체포하였으며, 체포된 학생들에게 고문을 자행하였다[14] 심지어 경성제국대학 예과도 참여했다.[15] 이 세 사람은 셋 다 호나 이름에 인 자가 들어가면서 조선인 인권 변호사로 활약하여 삼인이라고 불렸다. 이들 중 김병로는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이인은 초대 법무부장관이 되어 대한민국 사법계의 개국공신이 되었다.[16] 교수 재직 당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여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받았으나 굴하지 않고 투쟁했으며, 5.18 민주화운동 때도 조선대 시국양심선언에 관여했다고 한다. 여러모로 광주의 민중운동에서 꽤나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17] 광주일고 45회 졸업생이다.[18] 김철, 박미화, 최봉식 등이 출연했으며 정건조가 감독을 맡았다.